사방신(四方神) - 현무뎐
: 19
作. 하늘고래
* * *
"이론은 여기까지야. 누누이 말했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 모든 게 그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어."
"응, 명심할게요."
"3주 만에 이론을 다 끝낼 수 있다니. 이젠 놀람을 넘어서 네 머리가 무서워지는군."
"하하, 좋은 스승을 둬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입에 발린 말 듣자고 한 말 아니야. 잡소리는 됐으니, 따라와."
"응? 어디를..?"
"시험해봐야 할 것 아냐. 나도 이론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걸 해서도 네가 금지된 인(印)을 맺으면, 내가 중간에 막아야하니까. 등불을 들고서 개인 집무실을 나서는 지민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나선 여주는 은은한 등불에 보이는 지민의 뒷모습에 일렁이는 제 감정을 잠재우려 애를 썼다. 희망고문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매일 밤 현무관을 찾아오면 주술을 알려주겠다던 지민의 달콤하고도 위험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미련한 외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여주였다.
싸늘하고도 냉랭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낮과는 달리, 밤이 되어 현무(玄武)관 집무실에 둘만 있을 때는 그 냉랭함을 한층 누그러뜨리는 지민에 여주는 매일 아침이 되면 어서 밤이 되기를 고대했다. 유독 낮에 자신을 날카롭게 몰아세우며 아프게 하는 날이면, 상처받은 자신을 달래듯 '조금'은 다정해지는 지민에 길들어져버려 제 연정을 더욱 놓지 못하게 된 여주였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지민이 여주에게 주는 그 작은 다정함이 너무 달콤해서.
커다란 연정이 울부짖는 목마름을 겨우 달랠 수 있을 만큼의 다정함이었지만, 마약 같은 지독한 중독성을 가진 그 달콤함에 빠져버린 여주는 제 마음이 난도질 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3주라는 짧고도 긴 시간동안, 이미 자신은 그 실 날 같은 달콤함에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옭매여버린 중독자가 되어버렸기에.
"주술은 간단한 거로 하지. 모습을 바꾸는 주술, 기억나?"
"아, 응. 해볼게요."
"시작해. 봉인의 서부터."
"....."
"집중해. 네가 쓰는 봉인의 서는 일반적인 게 아니니까. 네가 가진 생명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봉하는 거라, 흐트러지는 순간 부작용이 생겨."
"아."
"됐어. 서가 적혀진 면이 손바닥에 닿게 하도록 감싸고, 이제 주술의 인(印)을 그려봐."
"....."
집중하기 위해 한층 더 차분해진 분위기를 띄우는 여주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응시한 지민은 끝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봉인의 서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인(印)을 다 맺지도 못했는데. 봉인의 서가 간신히 버틸 정도로 금지된 인(印)을 맺는 본능이 저렇게 강하단 말인가. 종이의 끝이 붉게 물들어가다 못해, 바스라지기 시작하자 인(印)을 맺는 방향을 트는 여주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은 지민이었다. 크게 몸을 떨고서, 당혹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보는 여주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본 지민은 혀를 낮게 찼다.
"포기해."
"...두 번째 방법이 아직 남았잖아요. 그것도 해보고 안 되면-,"
"그건 최후의 방법이지.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만큼 꼭 주술을 써야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이정도면 미련한 거야."
"당신한테 내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이대로 그만두면, 3주 동안 당신이 내게 내어중 소중한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내 마음이 덜 무거울 것 같아서 그래요."
"...."
"두 번째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방법은 나중에 정말, 제가 정말 주술을 필요하게 될 때만 쓸게요."
"말 한번 쉽게 하는 군. 저주술이 우스워?"
"아니, 그럴리가요. 내가 가진 생명의 힘이 그 저주술과 상극이니까, 큰 탈은 없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 그래요."
".....하."
"괜찮아요.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절대 당신을 탓하지 않을게. 이번에는 순전히 내 오기로 하는 거니까."
"...더럽게 고집만 세서."
제 의사를 굽히지 않는 단호한 여주에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쉰 지민은 여태껏 붙잡고 있는 여주의 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금지된 인(印)을 본능적으로 쓰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 생명의 흐름을 뒤트는 저주의 인(印)을 주술 사용자에게 새겨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일시적으로 생명의 흐름을 뒤틀어 본래 가진 성질과 능력을 잠재울 수 있어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었지만, '저주'를 사용하는 방식이었기에 위험도가 높아 사용하기를 지양하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주술에 있어서는 그 어떤 이보다도 자신이 있었지만, 제 손으로 여주에게 저주의 인(印)을 새겨주기가 싫은 지민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주에 대한 걱정이 이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주가 성공하게 되어 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있었다. 3주 동안 밤마다 여주를 만날 때면, 오롯이 자신에게 쏟아내는 그 헌신적인 연정이 주는 우월감이 꽤나 기분 좋았기 때문에. 자신이 조그만한 온정을 전해주는 날이면, 그 온정에 빠져들어 저를 더 위해주는 여주에 지민은 일부러 일말의 여지를 조금씩 그녀에게 흘려주었다.
저주술을 쓰는 최후의 방법이 성공하지 않기를 내심 빌며, 여주의 손을 놓고서 품에서 꺼낸 작은 단도로 손가락을 베어낸 지민이었다. ...현무!! 예상치 못한 지민의 행동에 놀라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은 여주는 이내 곧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는 온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손을..! 어서 손 줘요. 치료해야죠!
"두 번째 방법 해보고 싶다며. 치료는 나중에 해."
"설마, 인(印)을 새기려고 그런 거예요? 먹으로 해도 되는 걸 왜!!"
"먹보다는 내 피로 그린 인(印)이 저주를 제어하기 더 쉬우니까. 크게 다친 거 아니니 호들갑 떨지마."
"....."
"손."
"...미안해요. 끝나고 꼭, 치료해줄게."
"됐어."
자신의 손등 위를 간지럽히는 손가락을 따라, 붉은 피로 그려지는 인(印)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던 여주는 저주의 인(印)이 새겨짐과 동시에 흘러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과 함께 느껴지는 메스꺼움에 입안의 살을 콱, 깨물었다. 생명의 흐름을 뒤트는 저주라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있을 거야. 나도 이 저주를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빠르게 끝내. 조금은 걱정이 담긴 지민의 목소리에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인 여주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인(印)을 맺어가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르게 맺은 인(印)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을 채우기에는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너무 커서, 인(印)에 재빨리 힘을 불어넣은 여주였다. 자신이 가진 생명의 힘과 지민이 주는 저주의 힘이 뒤엉키는 거대한 폭풍 속에,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던 여주는 자신의 손을 잡아당겨 빠르게 저주의 인(印)을 지우는 지민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안정적인 호흡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저주의 인을 지우자마자 다른 인도 풀리는 군. 성공은 했다만, 네 상태를 보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으니 주술 쓰는 건 포기ㅎ-...!"
"..됐다. 얼마나 깊게 메었으면 피가 계속 나는 거예요."
"...치유는 됐다고 했을 텐데. 지금 네 몸 상태나 신경 쓰지?"
"나는 괜찮아요. 일시적인 저주술이라 그런지 견딜만해. "
"미련하긴."
"...그리고, 당신 말대로 앞으로 주술은 쓰지 않을게요. 포기 할게."
"...."
"당-,.. 아니, 누군가를 상처 주면서까지 배우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쯧."
"미안해요, 내 오기 때문에 상처까지 내게 해서."
저주가 주었던 고통의 후유증으로 인해 식은땀까지 맺혀있으면서도, 자신의 작은 상처에 온 신경을 쏟는 여주에게서 느껴지는 미련하고도 절절한 감정에 괜히 양심이 쿡쿡, 쑤셔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린 지민이었다. 치료가 끝났음에도 자신의 손을 놓지 못하는 여주의 행동을 모른 척하며, 둘 사이에 내려앉은 오묘한 분위기를 감상하던 지민은 이내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등장하는 태형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천계에서의 마지막날이니 일찍 자겠다며 현무가(家) 본가로 돌아갔던 태형의 등장에 놀란것도 있었지만, 저와 여주사이에 내려앉은 오묘한 분위기를 깨뜨려 태형이 불청객으로 느껴져 표정을 더욱 굳힌 지민이었다.
더해,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황급히 제 손을 뿌리친 여주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지민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아갔다.
"좋은! 밤입니다, 청룡님. 어, 현무 너도."
"...염라대제께서는 이곳에 어쩐 일로."
"그러는 청룡님은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기는 어쩐 일이랍니까? 그것도 현무랑 둘이서어-?"
"김태형. 쓸데없는 추측하지 마."
"쩝. 추측은 무슨, 너는 반려도 있는 몸인데. 나는 농담 한 번도 못하나?"
"...."
"아, 낭자. 오해하지 말아요. 이번엔 진짜 순수한 농이었으니까. 제가 저 놈에게 자주 치는 장난이에요. 워냑 냉한 놈이라. 주변에 듣는 이도 없었고, 오해도 전혀!! 안 했습니다!"
"...굳이 그리 변명하실 필요까지야.. 괜찮습니다."
"지난 일 이후로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다시 만나니 너무 아쉽네요. 제가 내일이면 명계로 돌아가야해서."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거 시간이 한참 모자라네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네! 혹시 여기서 볼일 끝나고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으십니까?! 밤이 늦었으니 길게는 안 할게요! 자신은 뒷전으로 한 채, 물 흐르듯이 여주와의 대화를 이끄는 태형을 빤히 바라보던 지민은 솟아오르는 불쾌감에 짜증이 일어 목을 좌우로 느릿하게 꺾어댔다. 신이 난 듯 아이같이 두 눈을 반짝이며 여주와 대화를 나누는 태형도, 그런 태형의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해주는 여주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한쪽 눈썹을 까딱이던 지민은 이내 곧 마주친 시선에 짜증스러움을 가득 담아 보냈다. 김태형하고 말하지 마. 네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나인데, 왜 나를 신경쓰지 않아?
...일단 자리를 옮기죠. 현무도 쉬어야 하니까요. 미안해요, 계속 붙잡고 있어서. 피곤할 텐데, 자리 피해줄게요. 자신의 짜증스런 시선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서 태형과 함께 자리를 피한 여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불쾌감을 더욱 키워간 지민이었다. 신경을 심히 거스르는 불쾌감을 가진 지금 상태로 본가에 돌아간다면 곧바로 잠에 들 수 없을 것 같아 개인 집무실로 향한 지민은 고요한 적막이 가라앉은 내부를 시선으로 훑었다.
...그 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혹여 여주가 태형에게 마음을 돌릴까 불안해진 지민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다, 이내 자신이 태형을 상대로 '질투' 따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어차피 김여주는, 조금만 잘해줘도 나에게 돌아와 나를 위할텐데. 이기적인 자신을 합리화하며, 책상위에 가지런이 놓인 *열외명부를 펼친 지민은 시야에 들어온 두 글자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열외명부 : 정상적으로 생명의 주기를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비정상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여 단명하는 생명의 이름이 적힌 명부.
"...항아, 항아의 이름이 왜."
생년월일과 탄생 시까지 온전히 일치하는 반려의 이름에,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 지민이었다. 거대한 쇳덩이로 머리를 크게 맞은 것처럼, 반려의 죽음을 알리는 명부를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지민은 떨리는 손으로 장을 넘겼다. '멸(滅).' 추락사, 과로사와 같은 단순한 사인(死因)이 아닌, 단 한글자만 적혀진 종이를 떨리는 시선으로 반복해서 훑은 지민은 온 몸을 감싼 불안함에 축축하게 젖은 제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멸(滅). 혼의 수명이 다했을 경우 나타나는 죽음의 글자. 영생을 기약하며 맞이한 자신의 반려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혼조차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지민이었다. 근래에 만났던 항아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크기를 부풀어가는 불안함을 애써 가라앉혀가던 지민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본가의 서고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무가(家) 본가의 서고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수많은 금서(禁書)들. 세계와 생명을 창조한 주신(主神)의 힘을 쓸 수 있는 금기된 주술 중에, 혼의 수명을 영생으로 만드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치며 급하게 본가로 걸음을 옮긴 지민이었다.
[ ..제가 지민님의 곁을 떠나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 주세요. ]
....죽게 하지 않을 거다. 떠나게 하지도 않아. 내 반려가, 그리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 물론.., 지금도 행복하지만 우리가 같은 존재였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
그렇게 해줄게, 금기를 범해서라도, 너와 내가 들 함께할 수 있도록.
[ ....사...., 랑, 해요. ]
너도 나를 사랑하듯, 나도 너를 사랑하니까. 과정이 어찌되었든, 끝은 너와 내가 행복하면 되는 거야.
* * *
"뭔 놈의 축제를 5일씩이나 하냐.. 깔끔하게 하루 딱! 하고 끝내버리지. 진짜 이건 사람이 못할 짓이야."
"석진이 너는 신(神)이잖아. 무려 주작(朱雀)이면서."
"거 좀 산통 깨지 말고 맞장구 좀 쳐줘라. 어엉?!"
"4일 내내 맞장구 쳐줬으면 꽤 해줬다 생각했는데.. 더 필요해? 그렇다면 해줄게."
"또, 또 너 또 그 표정 나왔다. 야!! 내가 너 그렇게 나 철없는 애 보듯이 보지 말랬지!! 너의 그 눈빛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자괴감들고 찝찝한지 아냐?!"
"...어우, 김석진 쟤는 왜 오전부터 노발대발이야."
"아, 윤기 왔구나. 별 거 아냐. 주작이 홍화전(紅花展) 마지막 날이라고 힘들어서 떼쓰는 거지 뭐."
"쯧쯧, 저게 어떻게 주작이 됐나 몰라."
"네이노옴-, 민윤기 네 놈의 혀를 뽑아버리겠다!"
어으디 감히 대 주작님 김석진이한테 혀를 차!? 아, 왜 이래! 안 떨어져?! 평소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하게 집무실 내부를 돌아다니는 윤기와 석진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여주는 테이블 위를 어지럽힌 족자들을 하나씩 정리해갔다. ..폐회식이 끝나면 밀린 답신이나 보내야겠다. 준비기간과 홍화전 기간 동안 바빠서 읽지 못했던, 잔뜩 쌓여있는 태형의 서신을 떠올리며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여주였다. 태형이 명계로 돌아가기 전날, 짧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바람 빠진 웃음을 내지은 여주는 보기 좋게 말려진 족자들을 하나씩 쌓아갔다.
'시간도 없고, 낭자를 길게 붙잡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제가 낭자한테 관심이 좀 많이 생겼어요. 아주, 매우, 엄청 많이.;
'.....'
'음, 그 표정을 보아하니 낭자는 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으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그런 것까지 사과를 하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첫 만남이 썩 좋지 않아서 저를 싫어하실까 걱정됐거든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무 생각이 없는 게 낫잖아요?'
'....아,.'
'그날 이후 말고는 만난 적이 없으니 제가 어떤 놈인지도 모르실테니, 저랑 서신 좀 주고 받읍시다.'
'네?'
'나도 낭자에 대한 관심이 그저 흥미인지, 아니면 진짜 연모인지 확신이 안서거든요. 우리가 만난 시간이 워낙 짧아야 말이지. 서로서로 알아가는 겸, 서신 좀 주고받아 보자고요.'
'.....'
'알아가면서 생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연모가 아니라면 좋은 벗으로라도 남을 수 있잖아요? 애매모호한 감정으로 상처도 안 줄 수 있고.'
'......'
'아, 물론 나는 내 감정이 연모라는 게 확신이 서면 낭자한테 계속 들이댈 겁니다. 그 점은 미리 양해할게요.'
어때요, 염라대제를 벗 아니면 연인으로 두는 거 엄청 끌리지 않아요? 이거 내가 몇 수나 접고 낭자한테 제안하는 건데. 솔직히 낭자가 손해보는 거 하나도 없잖아요. 대담하고도 적극적인 태형의 태도에 말려들어 얼떨결에 승낙했던 일이, 계절이 바뀌면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여주는 시선을 돌려 공석으로 비워져 있는 지민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홍화전 내내 보이지도 않고, 요즘 들어 얼굴을 보기 힘드네.
주술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이후부터, 정기회의 때를 제외하고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지민에 괜한 걱정이 일어 입술을 꾹, 깨문 여주였다. 못해도 삼일에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춰줬었는데. 최근 마지막 정기회의 때 보았던 지민의 얼굴이 꽤 상해보였던 것이 떠오른 여주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가 안 좋아보였는데.. 그이에게 한소리 듣더라도 치유를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점점 크기를 부풀려가는 걱정에 현무관을 한 번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마친 여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 가게?"
"아, 응. 못다한 할 일이 생각나서."
"아까는 일 다 끝내고 왔다며?"
"그런줄 알았는데.., 요새 바쁘다보니 나도 깜빡하나보다."
"네가 그럴 때도 다 있네. 폐회식 전까지는 꼭 와. 아, 근데 현무 이놈은 살아있긴 한 건가? 요즘에도 그렇고, 홍화전 내내 얼굴을 안 비추네."
"그러게 말이다. 무려 나랑 김여주가 준비한 홍화전인데. 엉?! 이러다 개화(開花)도 안 오는 거 아냐?"
"현무가 그럴 리 없잖아."
"...어,어."
"...허."
"...바빠서 그런 가봐. 정기회의 때는 잘 왔잖아. .....아, 일단 나 다녀올게."
빠르게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여주의 뒷모습을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윤기와 석진은 이내 곧 서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쟤 언제까지 저러게 놔둘 건데. 윤기야, 누누이 말했지만 내가 너보다 더 먼저 알아챘다?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어. 쟤 고집 센 거 알잖아. 들어먹지를 않아요. 땅이 꺼저라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석진의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본 윤기는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필 박지민일 게 뭐야. 제 아무리 여주가 가장 친한 벗이라 하여도, 반려가 있는 사람을 뺏어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여주가 얼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속으로 빌어줄 수밖에 없는 윤기였다.
빠르게 현무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지민을 옹호하자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던 윤기와 석진의 얼굴을 떠올린 여주는 혹여 자신의 연정을 윤기에게 들켰을까 하는 노파심에 주먹을 세게 쥐었다. 평소에 잘 숨겨왔으면서, 왜 그런 거야. 제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현무관에 도착한 여주는 조금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고리를 잡아 두드렸다.
익숙하게 들려오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현무관 안으로 몸을 들였던 여주는, 지민이 이틀 동안 휴가를 냈다는 보좌관의 말에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오늘이 홍화전 폐회식인데, 휴가라니. 정말 몸이 어디 안 좋은 것인가..? 한층 더 깊어지는 걱정에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여주는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선의 끝에 보이는, 한 여인의 손을 잡고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지민의 모습에 발에 못 박힌 듯, 걸음을 더 이상 뗄 수가 없게 된 여주였다.
그토록 바랐지만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득 담긴 다정스러운 시선으로 곁의 여인을 바라보는 지민에 여주는 가슴이 커다란 칼로 난도질 되는 것처럼 욱신거림을 느꼈다. 저, 사람이구나. 당신의 하나뿐인, 그토록 내가 원했던, 당신의 반려가. 잠깐이라도 바랐던 따스한 시선의 주인이 지민의 반려인 것을 깨닫자 욱신거림을 넘어선 쓰라림이 지독히도 아려와서, 소메에 가려진 두 손을 움켜쥔 여주였다.
"길 한복판에 서서 뭐해?"
"...아, 석진이구나.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넋 놓고 길 한가운데 서 있으면 다친다. 볼일은 다 보고 온 거야?"
"...응."
"빨리 끝났네. 어, 저거 현무 아냐? 야!! 홍화전 내내 머리카락 한 올 안 비치더니 마지막 날에 나타나?!"
"....!"
"아, ...오랜만이네."
"......"
"그래, 오랜만이다 이 한량 같은 놈아! ...뭐야, 옆에 계신 분은? 설마, 너..!"
"..내 사람. 반려야."
"뭐?! 너, 인간을 천계에 데려온 거야 지금?! 너 미쳤어?! 인간?!!?!"
김석진. 아이가 놀랐잖아. 동물 보듯이 보는 눈깔 집어치우지. 뒤에 숨어버린 여인을 감싸며 싸늘하게 자신과 석진을 바라보는 지민에 커다란 응어리가 가슴 속에 내려앉아 숨통을 막아버려, 여주는 움켜쥐었던 주먹을 힘없이 풀어내었다. 지민의 손과 허리부근 옷자락을 꾹 움켜쥔 항아의 손을 잠시 바라본 여주는 울컥, 피를 토해낼 것 같은 자신의 난도질 당한 마음을 숨기며,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지민에게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평소와 같이, 자신이 늘 다른 사람에게 보였던 그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볼 의도가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야, 쟤가 유난 떠는 거 가지고 뭘 사과까지 해. 그리고 동물 보듯이 한 게 아니라 놀라서 본거거든? 인간이 천계에 왔잖아!"
"우리야 그렇지 않다지만, 불쾌했을 수도 있잖아."
"허, 참."
"....."
"사과할게요. ...아, 그리고. 홍화전 마지막 날이니만큼, 오늘 하루는 두 분이서 예쁘게 보내줘요. 알죠? 반려자와 함께 홍화전 마지막 날을 보내면, 후생에서도 다시 이어진다는 전설."
"....알아."
"거.그 말은 주작인 내가 들어도 낯간지러운데 잘도 말한다, 너."
"좋은.., 일이잖아. 행복한 인연을 후생에 또 맺게 해준다는 게. ...먼저 가볼게요. 청화(靑花) 준비 때문에. 나중에 회의 때 봐요."
"야! 같이 가!! 나도 같이 해야 하거든?!"
"....."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서, 빠르게 사라지는 여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지민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항아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석진의 호통에 조금은 겁을 먹은 듯, 불안해하는 항아를 달래고서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긴 지민은 자꾸만 맴도는 여주의 평온한 모습에 입안의 살을 씹어댔다. 평온하고도 고요한 여주의 모습이, 자신이 더 이상 그 헌신적인 연정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항아가 곁에 있음에도, 다른 이에게 여주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괜히 항아와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한 지민이었다.
* * *
혼의 수명. 영생. 주신(主神)이 가진 창조의 힘. 금지된 주술과 인(印). 머릿속에 떠다니는 짧은 단어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두 눈을 감은 지민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주변에 하나 둘씩 물방울을 띄우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당 하나씩, 여러 개의 물방울을 띄워가며 여태껏 읽어왔던 금서들의 내용을 차례대로 머릿속에 펼친 지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의 끝이 보일 듯 말 듯 한 느낌에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금서들을 아직 다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주술이 나오지 않아 속이 답답해진 지민이었다. ..항아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어서 찾아야 할 텐데. 몇 권 남지 않은 금서들을 떠올리며 스쳐지나가는 금지된 주술들을 곱씹던 지민은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놀라, 주변의 물방울을 목소리의 주인에게 쏘아보냈다.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서 황급히 눈을 떠 바라본 곳에는, 물에 빠진 생쥐마냥 잔뜩 젖어 몸을 떨고 있는 여주가 서 있어서, 미안한 마음에 표정을 굳힌 지민이었다.
"...아무리 저를 미워해도 그렇지, 이 물벼락은 좀 많이 차갑네요."
"...실수야. 네가 거기서 나올 줄 내가 알았겠어?"
"농담이야. 괜찮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 떨고 있는 네 몸이나 어떻게 하던가."
"...아."
청룡(靑龍)관으로 돌아가서 닦아. 출입 금지령 내릴 테니까 쓸데없이 현무(玄武)관에 오지도 말고. 떨떠름한 것을 떨쳐내는 것처럼,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냉한 표정을 짓는 지민에 몸과 함께 마음 한 구석이 아린 여주였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릿하면서도 묵직한 통증에 두 손을 꾹 움켜쥔 여주는 자꾸만 쳐지는 입 꼬리를 힘겹게 올리며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삼켜내었다.
"...저번에, 당신 몸이 안 좋아보여서. 많이 피곤해 보이길래요."
"...."
"치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왔어요. ..또, 그냥 몸을 놔둘까봐."
"피곤하면 알아서 자겠지.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야? 그럴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네 몸 관리나 해."
"..나한테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는 건 처음이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덜덜 떠는 거, 거슬리니까."
나 진짜 괜찮아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서, 눈에 띄게 몸을 떨고 있음에도 미련하게 웃어 보이는 여주의 모습에 심기가 거슬린 지민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 멍청이가, 자기 몸이 무슨 상태인지도 모르고. 아직 자신을 향한 연정이 여주에게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 미련한 연정 때문에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여주의 행동에 걱정이 들어 울컥, 화를 드러낸 지민이었다.
"미련한 짓 좀 그만하지."
"...네?"
"학습 능력 떨어져? 내가 널 마음에 품을 일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역대 청룡 중 명석하다는 명성이 부끄럽지도 않아?"
"....."
"미련한거야, 멍청한거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뭐?"
"나를 마음속에 품어 달라 한 적도, 내가 가진 연정도 내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는데. ..미안해요, 숨긴다고 했는데 티가 났나봐. 주변에서 많이 괴롭혔죠..? 미안해."
"....."
"당신이 반려가 있는 것도 뻔히 아는 내가, 무얼 얻겠다고 그런 말을 하겠어. 나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돌든, 당신은 그냥 늘 그랬듯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너 지금."
"일부러 모진 말을 해서 정 떨어지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도 마음 쓰이잖아."
"....하."
"그저 당신에게 나는 사방신(四方神) 동료이자 친우인 것처럼. 나도 그 자릴 지킬테니까."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오늘 내 말은 잊어버려줘요. ...내 마음도 같이. 한동안 여기는 못 오겠다. 다음 회의 때 봐요.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고서, 인사를 끝으로 사라져버린 여주의 뒷모습을 짜증스런 시선으로 바라본 지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입술을 꾹 깨물며 두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곱게 말하면 좋았을 것을. 평소 자신이 여주를 대했던 언행이 고스란히 묻어져 나와 걱정어린 마음을 올곧게 전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지민은 서고를 향해 신경질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흐르면 또 알아서 찾아오겠지.
자꾸만 드는 여주에 대한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얼마 남지 않은 금서를 찬찬히 읽어가기 시작한 지민이었다. 해가 지고, 달빛과 등불의 빛에 의지할 때까지 금서를 읽던 지민은, 마지막 권에서 발견한 주술에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사방신(四方神) 가문에서 행해지는 혼약식의 시초. '영생의 반려자'를 만들기 위해 혼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금기된 주술. 주술에 필요한 다섯가지. 혼을 맺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연정', 아흔 여덟 개의 인간의 영혼과 반려자가 될 사람의 영혼, 시전자의 피로 맺어진 인(印). 그리고 탄생의 꽃.
"...탄생의 꽃."
오로지 청룡만이 피워낼 수 있는, 청룡의 혼으로 피워낸 꽃. 서적에 적혀있는 글자들을 반복해서 읽어내린 지민은 낮에 자신이 여주에게 했던 모진 언행들을 후회하며 낮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항아의 혼을 영생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인 탄생의 꽃. 현재 그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기에, 여주가 필요해진 지민이었다.
"...일단 김여주부터 달래러 가야겠군."
이전보다 조금 더 잘해주면, 다시 돌아오겠지. 너는 내 온정이 필요하다면, 나는 네가 피운 꽃이 필요하니까. 네가 그토록 나를 연모한다면, 나의 행복을 위해 꽃을 피워주어라. 그동안 김여주 네가 내게 보였던 헌신적이고도 미련한 연정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그런 미련한 사랑 말이야. 그러니 그 꽃을 피워 내가 행복하게 해줘, 김여주 너의 그 연정으로.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여주의 연정을 이용하려는 지민의 이기심을 거름삼아 자라난 불행의 씨앗은 어느새 꽃을 피우기 위한 봉우리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대, 현무의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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