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 속을 걸었네
물고기와 조개 껍데기
하늘거리는 해초가 훤히 보이는
맑은 물 속을 걸었네
복사뼈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무릎으로
배로
가슴으로
이마가 수면에 닿았을 때
물 속에서 나는
가장 완전한 숨을 내쉬었네
-지상의 희미한 호흡들아
부디 탁한 몸 씻으러
물 속으로 행보하라
완전한 호흡과 자유를
찾으러 오라
순수의 시대에 꿈꿨던
너의 무결한 넋 하나
이제 무의식에서 꺼내어
물고기와
조개 껍데기
해초가 보이는
맑은 물 속을 걸어라
너의 원초의 숨을 찾아라
너의 숨을
내쉬어라

핏줄
택배 상자를 열었던
그 칼로
문득 손목께를 괴롭히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이 쓸모없는
하잘것 없는 몸뚱이
더럽혀진 육체
유린당한 손목
곧게 그어
그사이로
불쾌한 온기로 덮힌
핏줄 하나 당겨내어
툭-끊고 무심하게 끊고
거기서 나오는 뜨신 액체는
양동이에 받아
숨 잃은 육체 곁에
사이좋게 두고 싶다.
내 어린 혈육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양동이에 담긴
식은 피
에 쏟아넣고
비워넣고
살아있는 척
나의 할 일을 다해주고
돌아와
도로 그를 게워내고
다시 사망하고 싶다.

枕上의 다짐
빛이 아닌 어둠,
향기 아닌 먼지 가득한 바람만이
내게 어울린다 해도
한 때 나의 복사뼈에 머물렀던
날카론 그의 손 끝이
괴사해가는 심장을 한 꺼풀 더 벗겨낸대도
목구멍 깊이 자꾸만 뜨거워지는
그 어떤 날에도 나는
울지 않겠다.
우울함의 촛불을 켠 이 밤
눈물이 흘러
귀가 척척-하고
베게가 습해도
나는
울지 않겠다
끅끅대며 입을 틀어막고
때낀 이불을 부여쥐며
편안하게 잠들겠다
물기어린 귓바퀴
베갯잇으로 눌러닦으며.

뒷 뜰 소녀에게
소녀,
팬지꽃 닮은 소녀야
너 그 속눈썹 사이에 앉어
네 유리 눈에 비치는 세상
나도 그 세상 한 번
보고싶어라
팬지꽃 닮은 소녀,
소녀야
그러다가 너
엷은 숨소리로 잠이 들면
꽃잎 닮은 눈꺼풀
그 눈꺼풀에 누워
나도 같은 숨소리로
잠들고 싶어라

배부름
헛배가 부르다.
헛배가.
너 그 작은 조동이로
쌀밥 한 숟갈 들어가는 모습에
엊저녁부터 물만 마신 내가
배불러온다는게
참,
신기한 일 아니냐
하니
소녀가
박꽃처럼 웃는다

天送異花 (하늘이 기이한 꽃을 보내온다)
역병이 돌고 문란했던 조정이 무너지고 나자, 세상에, 꽃씨가 내려 온 나라를 적시는 것이 아니냐. 꽃씨에 아지매는 처녀 적 웃음으로 물들고 옛 벼슬아치들은 제 분에 못 이겨 괴성을 지른다. 허나 꽃씨는 누구도 비웃지도, 달래주지도 아니하고 계속해서 떨어지고는 제 스스로 싹을 틔우는데-이는 무엇의 씨앗인가. 도래할 희망의 씨앗인가, 반복될 몰락의 씨앗인가.
어느 날 고 작은 씨앗 씹어 삼키고 그 자리에서 만 그대로인 식물이 되어버린 떠돌이 개를 보고는 결국은, 잠깐 다홍빛 미소로 물들었던 아지매의 얼굴에도 허연 잿가루가 뿌려지는구나. 그리고 벼슬아치 네들은 하나 둘 목을 메더니, 목을 매단 밧줄에서도 고 싹이 터버리는 것이 심상찮다.
급기야 붉은 달이 떠오른 오늘, 밤이다.

아(我)
생채기가 났다
이유도 모르고.
작은 생채기에도
잔뜩 겁먹어
갈 곳 잃은 오리새끼마냥
울어댔다
아, 그 때의 나는
무녀리
내가 낳은 무녀리였다.

墓가에서
흰 빛 아이 하나
무덤가에 쪼그려 울고 있을 때
노부부 영혼 다가가
누룽지 사탕 하나 건네며 괜찮다, 괜찮다 하니
누가 그들을 힐난할 것인가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