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우리는 미친듯이
어설프게, 부끄럼도 없이
고민에 빠져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보코프의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폐선처럼 흔들려도 너를 좋아한다
피묻은 가운을 걸친 채
작업장에서 돌아와 너는 나를 원한다
날아가버린 새들을 부르면서
저녁 창가에서
그래, 서로에게 흘러가는 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인 듯이 미친듯이
서로의 몸 속에 긴 굴을 파는 거다
밖은 언제나 싸늘한 수술실이다
세월의 침대 위에서
너와 나는 무용한 메스였고
세상의 불길한 짐인지도 모른다
너를 거절한 희망이 내 목을 조른다
세상은 우리를 초대 안했는지도 모른다
괴롭지만 내일 또한 밖을 향해 기어가기 위하여
나의 억압 너의 제복을 찢고
저 차가운 노을 끄고
너는 온 몸 밀고 달린다
눈물의 엠뷸런스가 달린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밀실로
너와 내가 죽어
처참히 살아나는
쓸쓸한 묘혈 속을 달린다
- 신현림 '함몰하는 저녁에'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 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다
가끔 슬픔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센다
비가 세는 모든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일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인간의 운명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 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네게도 고뇌가 있는가
차 몰고 가다가 느닷없이
강변도로 철책을 들이받고 난폭하게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 하고 싶지는 않은지
잠깐동안의 소란
잠깐동안의 파문
잠깐동안의 어리둥절
몰려들던 사람들 돌아가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죽음과도 같은 고요
고요 속에서 생각하느니
자립 능력 없는 어린 자식들 누가 거둘까
돈 꿔줬던 고마운 사람들 채무는 누가 갚을까
아직도 내 어딘가에 고뇌가 있느냐고 물었던 친구여
누군들 아픔없이 산 자가
어디 있으랴
네 질문은
심심한 날의 스쳐지나가는 우문이었다
한순간의 뜻없는 하품과
한순간의 자기혐오와
반복되는 나날의 피로한 일상들을
뿌리깊은 회의를
물어뜯고 놔주지 않는다
한 마리 괴로운 배암은.
- 장석주 '노래가 채 되지 못한 노래 2'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 나희덕 '기억의 자리'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나는 난폭한 어둠을 알아
ㅡ 어둠이 때때로 나를 밟고 가나보다
불을 켜 보면 나도 모르게 멍이 들어 있다
흩어진 거울
조각조각마다 나를 노려보는
어둠의 충혈된 눈동자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싫어
어둠은 온종일 내 머릿속에서 노래를 불러대지
이를 악물고 귀를 막아도 새어나오는 노래
잊혀진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저 멀리서 녹슨 철문이 끼익끼익 열렸다 닫혔다 하네
잠들지 못한 밤의 도시에선
끊임없이 하수구로 물이 콸콸 흘러가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지나가는 행인과
바람에 펄럭이다 찌익 찢어지는 현수막
ㅡ 지금 인간의 형태로 덩어리진 어둠이 나의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번뜩이는 이빨 드러낸 어둠을 보고 있어
온몸의 털을 하나하나 곤두세우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미소 짓는,
저 어둠의 이름
- 예현연 '불면증'
style>/style> 유년
태양이 뜨겁게 깜빡이고 있어
작은 코리, 너의 귓속엔 아직도 작은 침대들이 사는지
침대 위에서 너의 정오는 때때로 졸기도 하는지
아직도 항아리에 내 이야기들을 모아놓는지
너는 내 속눈썹 그늘에서 노래를 불렀지
타박타박
내가 술렁일 때마다 작은 귀를 활짝 열던
우리는 길을 잃었어 작은 코리
하지만 나의 샘물은 너고
너의 풀은 나야*
장마
비가 자주 내려 이십육일 동안 멈추지 않았단다 비들은 소란스럽게
엉키며 저희들끼리 떨어지다 육감적으로 부딪혀 죽지 사물에, 누군가
의 머리칼에, 눈꺼풀에, 입속에, 코끝에, 발가락 사이에, 오금에, 손톱에,
나무들의 흔들리는 웃음에
비들은 떨어지는 것 외엔 생각하지 않고 그게 그들을 아름답게 하지
끝을 투명하게 맺고, 시작을 죽음으로 여는 비들의 독특한 행동 양식을
우리는 무어라고 불러야 하지?
면회
길쭉한 월요일, 혹은 상심한 일요일이었나?
그치지 않는 비
어느 한 방에서 누군가 꼼짝없이 갇혀 있다면,
죄도 짓지 않았는데,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펄펄 날아 몸을 배반한다고
갇혀 있다면?
그치지 않는 비
한 번의 만남은 한 번의 마침표로 한 달간의 시간에 매듭을 짓고
나머지 침묵의 날들은 개켜진 빨래처럼 숨죽여 있다
일어나서 재채기라도 해볼래?
작은 코리, 지구는 귀뚜라미처럼 늙었단다
낙화
이것은 순수한 체념
조용한 리듬
아무런 의심도 없이 떨어지는 꽃들의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싶다
느릿느릿
하품을 하며 지나가는 봄
작은 메아리들
어느 날 우리 집에 들어온 늙은 개 - 아버지,
내 얼굴은 어디서도 팔지 않는 한 장의 도화지
이곳에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해요
내 눈과 입과 코를 잘못 그렸잖아요 기회는 한 번뿐인데
그렇게 눈을 감고 나를 그리면 어떻게 해
이제 사과 - 배 - 딸기 - 같은 건 내 얼굴에 올 수 없어요
그런데 엄마? 엄마는 왜 자꾸만 미끄러져요?
아무리 노력해도 붙지를 않아
자꾸만 흘러내리는
스르륵 유산되는
도망가는 빛, 빛
JJ
너는 견고한 요새였지
외로운 등으로 사랑을 고백하곤
(얄미운 새벽을 타고 도망갔지)
나는 네가 버린 파란 상상이야
때때로 네가 절벽에 매달려 절망한다고 생각해
올라갈 수도 떨어질 수도 없어
매달린 채 고뇌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모래시계 안에서 떨어지고 있어 모래와 함께!)
멀리서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이별이라는 아침
우리는 밤에 돋아난 햇살
밤이 앓는 몸유병이야
천천히,
곡선으로 잊혀지겠지
붉은 체념
다리가 생겼어
목소리가 사라졌어
사랑을 영영 잃었으니
평생 손끝으로 말해야 해
물거품이나 될 걸 그랬지
- 박연준 '캐러맬의 말'
style>/style>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얼마나 참았나
내 영원히 잊었네
공포와 고통도 하늘 높이 날아가버렸고
위험한 갈증이
내 혈관 어둡게 하네.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내맡겨진 망각에
더러운 파리떼
기운차게 웅웅거리는데
향(香)과 가라지를
키우고 꽃피우는
들판처럼
오라, 오라
황홀한 시간이여.
나는 사막, 불타는 과수원, 시들은 상점, 미지근한 음료를 사랑했다. 나는 냄새나는 거리를 기어다녔고, 눈을 감은 채, 불의 신(神), 태양에 몸을 바쳤다.
《장군이여, 황폐한 성벽에 낡은 대포가 남아 있으면, 마른 흙더미로 우리를 포격하라. 대단한 가게의 거울에! 살롱에! 온 마을이 먼지를 뒤집어쓰게 하라. 배수구를 산화시켜라. 규방을 타는 듯한 홍옥 화약으로 가득 채우라……》
오! 주막 공동변소에 취하는, 날벌레여! 서양지치 식물을 그리워하며 한 가닥 광선에 녹는 날벌레여!
- 아르튀르 랭보 '가장 높은 탑의 노래'
style>/style> 결국 모든 것은 시차(時差)로 귀결된다
그래서 시대와 생사가 다른 별들이
악착같이 함께 빛나고 있다
마음을 열거나 닫으면서 불어난 시차를
선반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어느 날 과부하로 무너진다
그 추락을 틈타 못을 뽑고 뛰어내린
거울 앞에서 서면
제 모습에 등을 돌리는 내면의 산산조각
조금씩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보내야만 비로소 그리움으로 남는 시간
그 속을 꼬불꼬불 살면
쭈글쭈글 시차만 가득 남는다
그 주름 다리미로 밀고 평평하게 길을 걸으면
시간의 승차감이 우아해질까
시차가 독감처럼 유행하는 공항에는
더 큰 시차를 넘어보려는 포옹과 눈물
그 공한을 볼모로 잡고 있는 도시에 들어서면
처음 이방인들에게만 지각되는
군락을 이룬 시간의 종양들, 그 속에 숙주보다 비대해진
연대를 가늠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는
수십 년을 함께 살고도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 돌아서는
사람들의 자폐증과 닮아 있다
일초씩 잘게 썰어 지겹도록 다져 놓고는
어느 순간 한 구좌씩 쑥숙,
벽돌처럼 뽑아가 버리면
텅 빈 기억력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딘다
- 윤석호 '시간의 내부'
버려야 할 것을 왜 걸어놨냐고
지금은 구멍난 팬티가 널린 육시
몸은 하루에 십만 개의 세포가 죽는다
저 팬티는 삼 년동안 낡은 육체
실밥이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허리둘레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지우는 동안
어떤 헤어짐은 끝내 남아 성장해버린 팬티
너는 말했지
빨래는 햇빛에 닳아버린 몸
침대 속에서 서로의 늘어난 부분을 감싸안는다고
사과를 서툴게 깎듯 군데군데 옷을 떨어뜨리고
도시의 불빛 배어 누렇게 멍든 살을 씻어내면
가장 편한 육체이고 싶은 너의 습관
팬티는 너보다 크게 늘어났다가
숨 조이지 않을 만큼 줄어드는 탄력을 배운 것
그러니 구멍도 무늬가 된다
이만큼이나 편한 팬티는 없다
입었다 벗고 다시 입고 벗었으므로
두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한몸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색 바랜 팬티를 입으며 웃는 너
너의 늑골이 빨랫대를 닮았다는 생각
-최현우 '빨랫대를 보고 말했지'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꿔어 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정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 황병승 '메리제인, 요코하마와 커밍아웃'style>/style>
styl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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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style> 평소에 좋아하던 시 중에 피폐한 시만 올려봤어ㅋㅋ내가 좋아하는 시 대부분이 우울한거긴 하지만..
조금 난해하더라도 좋은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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