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중간 달리기 별자리 게임
별자리 게임
상황은 TOP7인 오현민, 김경훈, 김유현, 이종범, 장동민, 최연승, 하연주만 남아있고 메인 매치는 별자리게임. 메인매치가 시작되고 현민은 가장 믿고 있는 플레이어인 유현에게 5인 연합 전략을 알려줌. 그리고 유현은 연승에게 그 전략을 알려주고 그 5인 전략을 김유현, 이종범, 최연승, 하연주, 장동민 이렇게 5명이서 가기로함. 현민의 카드와 경훈의 카드만 겹친다는 걸 눈치 챈 현민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이야기 시작.
현민은 자신의 카드와 경훈의 카드가 두 번 연속으로 겹친 것을 보고 자신의 전략을 저쪽 연합에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자신이 짠 전략을 그대로 배껴 간 유현에게 화가 난 현민은 유현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곧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경훈은 두 번 연속으로 자신의 카드가 겹친 것에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간 현민이 걱정되어서 침실로 따라 들어갔다.
“현민이 눈치 챘어?”
“응, 눈치 챘어.”
침실에서는 현민이 소파에 털썩 앉아 손등으로 눈을 덮은 채 속으로는 자신을 배신한 유현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라 하지만 평소에 현민에게 잘해주고 일반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사적으로 제일 친한 유현이 자신을 배신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현민이었기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침실로 따라 들어온 경훈은 현민의 옆에 앉아서 ‘왜? 무슨 상황이야. 너 화났어? 왜 그래.’하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현민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차분히 경훈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지금 저쪽 5명이 카드 번호 5개 돌려가면서 저희가 점수 못 먹게 막고 있잖아요. 그럼 저흰 점수 못 먹고 자동으로 탈락후보 되는거예요. 그리고 그건 제가 유현이형한테 알려준 전략이구요. 아 진짜……. 이 게임 너무 감정소모가 심한 것 같아요.”
경훈은 자신이 탈락위기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된 것보다 현민의 눈꼬리에 걸친 눈물이 더 신경 쓰였다. 평소에 멘탈이 약한 현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훈은 현민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알고 있었다. 경훈은 이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기 위해 현민에게 장난을 걸었다.
“현민아, 그러고 보니 여기 침실이네?”
“아 진짜, 장난치지 마요.”
“침실에서 뭘 해볼까?”
“형 112에 신고 해버리기 전에 가만히 있어요.”
“우리 현민이, 형아가 기분 좋게 해줄까요?”
경훈은 소파에 앉아있던 현민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매고 옆에 있던 침대로 던졌다. 그리고 현민의 위에 올라탄 채로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간지럼을 잘 못 참는 현민은 숨이 넘어가도록 깔깔대며 하지말라 하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현민을 보자 신이 난 경훈은 더 격렬하게 간지럼을 태웠다. 그리고 그때 침실 문이 열렸다.
“현민아, 괜찮ㅇ......”
시간이 지나도 홀에 오지 않는 현민이 걱정된 유현은 현민을 찾아다녔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유현은 침대위에 두 사람이 엉킨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침대위에 누워서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현민과 그 위에 올라탄 경훈을 보고 유현은 한참동안 멍하니 둘을 쳐다보다가 소리를 질렀다.
“미..미친... 김경훈 미아!!!!!!”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침실로 모였고 침대위에 누워있는 둘을 보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진짜 쓰레김경훈이네…….’ 김경훈은 자신의 밑에 깔려있는 현민을 보고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쳐했는지 파악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오해라고 손을 휘저어가며 이 상황을 부정했지만 다들 현민을 보호하기에만 바빠 있었다. 그중에 제일 심각해 보이는 사람은 유현이었다. 유현은 현민의 위에 올라타 있던 경훈을 침대 밑으로 밀쳐내며 자신이 침대 위에 올라가 현민을 끌어안아 보호했다. 현민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현민아, 내가 저 조심하라 그랬지!”
“드디어 김경훈이 일냈네...”
“19금 방송 찍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찍어! 으른들 있는데서 시퍼렇게 어린 놈들이 말이야!”
‘아니... 여러분 그런 게 아니라…….’ 경훈의 눈썹이 팔자로 쳐지면서 특유의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람들은 그 표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현민은 욕먹고 있는 경훈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나서면 경훈만 더 욕먹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가만히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메인매치의 꼴찌인 현민과 현민이 지목한 종범은 데스매치인 십이장기를 하고 데스매치에서 패배한 종범이 탈락자가 되었다.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다 같이 회식장소로 이동했다. 회식할 장소에 도착한 현민은 평소처럼 경훈과 유현사이에 앉으려 했지만 주변에서 ‘경훈이 옆에 가면 너 또 잡아먹힌다.’라고 현민을 부추긴 나머지 현민은 결국 유현의 옆자리 즉, 경훈과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니, 제가 현민이를 잡아먹어요, 삶아먹어요? 저는 그냥 간지럽힌 거라니까요?
“누가 간지럼을 태우는데 침대위에 올라타서 하냐?”
“그건 방 구조상…….”
“됐고, 이제 현민이는 내가 데려다 줘야겠다.”
“아, 동민이형!”
현민은 경훈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래요 동민이형! 저도 저 변태아저씨랑은 못가겠네요’하고 같이 경훈을 놀렸다. 그렇게 회식은 김경훈 놀리기로 마무리되고 사정상 바로 스케줄이 잡혀있는 동민은 현민을 데려다주지 못하고 갔다. 결국 평소와 같이 경훈의 차에 탄 현민은 계속해서 경훈을 놀려댔다.
“아 정말 변태아저씨랑 차타기 싫었는데.”
“진짜 간지럼만 태우려던 거라니깐?”
“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ㅇ……. 어? 유현이 형한테 전화 왔다.”
유현은 전화를 받자마자 변태아저씨가 잡아먹지 않았냐고 걱정하며 농담을 던졌고 현민은 거기에 아직까진 잘 살아있다며 재치 있게 받아쳤다. 현민은 유현과 통화하면서 경훈에게 눈치를 줬고 심지어 전화를 끊기 전에는 ‘유현이형 사랑해요!’하고 애교까지 부렸다. 점점 경훈의 표정이 굳는 것을 눈치 챈 현민은 경훈의 기분을 풀어보고자 장난을 걸었다.
“왜 이렇게 표정이 굳었어요! 형한테도 사랑한다고 해줄까요?
“,,,,,,”
“왜 갑자기 정색이에요.. 또 저 덮치시려고?”
옆에서 현민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경훈은 정색하고 앞만 보면서 운전했다. 현민도 더 이상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니라 생각해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보려던 찰나 갑자기 경훈이 차를 틀어 근처에 있는 골목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현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현민.”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인 경훈을 보고 당황한 현민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경훈의 손이 현민의 어깨로 향하고 몸은 현민에게 서서히 기울었다. 현민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이 형이 술이 덜 깼나? 진짜 나 덮치려는 건가? 아이씨, 엄마아빠, 보고 싶어요…….’ 현민은 진짜 자신이 김경훈의 밥이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발버둥 쳐봤자 자신이 다시 제압될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려 될 대로 되라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현민은 눈을 떴고 경훈의 손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잡고 있었다.
“안전벨트 매라고.”
자신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 경훈을 보자 현민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지…….’ 경훈은 그런 현민의 반응을 보며 왜 사람들이 귀여운 사람을 보면 괴롭히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현민의 집에 가는 동안 현민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몇 분 후 경훈의 차는 현민의 집에 도착하고 현민은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역시 현민이는 놀려먹기 좋다니깐?”
“아 진짜!”
경훈은 차에 내려서 현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참고 현민에게 집에 잘 들어가라 하였다. 차 창문을 닫고 경훈이 차에 시동을 걸려 할 때 현민이 밖에서 차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경훈은 창문을 내리고 할 말이 더 있냐는 표정으로 현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현민은 얼굴이 빨개진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경훈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
중간 달리기
[콩장오] 중간달리기 01
그거 알아요?
모처럼만의 회식이었다. 매일 야근을 달고 사는데다 저녁은 금방 먹을 수 있는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라 고기를 향한 젓가락질이 분주히 이어졌다.아직 채 익지 않은 삼겹살로 향하는 경훈의 젓가락을 집게로 탁 소리 나게 쳐내며 현민이 말했다.
뭘?
중간 달리기라는 보드게임 있는 거.
언제나 이런 말을 받아주는 건 동민이었다. 현민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며 어설프게 고기를 뒤집었다. 보다 못한 동민이 집게를 빼앗아 능숙한 손길로 고기를 에 올리기 시작했다. 지글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확 올랐다.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현민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신기하죠, 형. 중간달리기라니. 보통 달리기는 1등 아니면 꼴등이 있잖아요. 중간달리기는 1등이나 꼴등이 중요하지 않아요. 중간으로 들어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게 뭐냐?
무조건 중간으로 들어오는 게 이기는 거에요. 그 게임은. 내 생각에 형은 그 게임 진짜 못할 것 같아.
아니 그럼 달리기가 처음 아니면 끝이지 무슨 중간이야.
그것 봐요.
현민이가 그런 거 잘할 것 같애.
가만히 듣고 있던 경훈이 끼어들며 말했다.
여기저기 간 봐가면서 중간을 계속 유지하는 거지.
상상만 해도 웃긴지 현민은 피식 웃었다.
맞아요. 난 자신 있어요.
난 중간 그런 거 없어. 무조건 처음 아니면 끝이야.
동민은 다 익은 고기를 뒤집어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집게를 탁 소리 나게 내려 놨다. 선전포고라도 하듯 엄숙한 그 말에 현민과 경훈은 본능적으로 장2병 타임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중간이 없는 남자.
중간 없는 남자, 장동민.
아이씨 시끄러워봐. 다들 고기나 먹어.
저쪽 구석에서 고기를 굽던 진호가 이쪽을 보고 말했다. 세 사람은 묘한 시선교환을 끝낸 뒤 고기를 먹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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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 1팀, 2팀이 마약사범들을 잡기 위한 특수반을 만들기 위해 합쳐진다는 소식은 한동안 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세간의 화두는 단연코 특수반의 팀장자리에 오를 인물에 대해서였다. 1팀 팀장 동민과 2팀 팀장 진호 둘 다 팀장으로써 손색이 없는 유능한 인재 아니 형사였기 때문이다. 수사방식은 서로 달라도 그 둘은 친한 형동생 사이이자 친구로 지금까지 자칭 선의의 경쟁을 하며 잘 달려 왔었다. 쟁쟁한 둘을 놓고 누구를 팀장 자리에 앉혀야 할지 위선에서도 의견은 분분했고 결국 특수반은 조성 되었으되 팀장은 정확히 정리되기 전 까지 무기한 보류라는 통보가 날아왔다.
거의 진호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에 가까웠지만 실적을 놓고 1팀과2팀은 서에서 공공연한 라이벌 관계였다. 임시로 차려진 특수반 자리 역시 따로 만든 2개의 팀장 자리를 중심으로 팀원들을 거의 분리시켜 놓다시피 앉혀 사실상 특수반이라는 큰 팀 내에 1팀과 2팀이 우겨들어간 모양새였다.
어찌 되었든 한 팀 아래에 같은 목적으로 모인 만큼 다같이 고급음식 삼겹살까지 먹으러 갔지만 양 팀 모두 어색해 서로 묘하게 눈치만 봤다.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의외로 진호였다. 회식이 끝난 뒤 동민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진호는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잘해보자 형.
동민은 그러자며 진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새 부서에서 함께 하는 만큼 보다 여러 말을 할 거라 예상했던 동민은 의외로 조용했다. 진호가 이 침묵의 의미에 대해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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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들어와요. 검은색 벤츠.
어두운 폐공장 앞에 동민은 서 있었다. 현민을 비롯한 진호, 경훈은 동민을 백업하기 위해 골목길 안 쪽에 주차된 차 안에 탄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연신 CCTV화면이 띄워진 노트북을 들여다보느냐 정신이 없던 현민이 손바닥만한 화면에 찍혀 있는 동민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형, 안전장치 하고 가죠?
말없이 고개를 흔든 동민이 슬쩍 고개를 돌려 CCTV 화면을 보고 웃어 보인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인지 현민은 불안한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눈길로 동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전의 세부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참관객의 형태로 내내 옆에 앉아있어야 했던 진호는 동민의 그 미소를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을 적중 해 동민은 기어코 지시사항을 서로 주고 받아야 하는 초소형 마이크를 떼 바닥에 버렸다.
저거 지금!
놀라며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진호와 달리 현민은 도리어 침착했다.
지금부터는 동민이형한테 믿고 맡기는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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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장, 오랜만이야.
배달하는 놈 둘만 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의 출현에 동민은 당황했다. 벤츠에 크라이슬러 2대. 얼추 적게 잡아도 8명이었다. 뚱뚱한 나이트클럽 사장 옆에서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동민은 빠져나갈 구멍부터 찾았다. 들어온 철문은 굳게 닫혀있고 창문도 높아 쉽지 않은 탈출이 될 지도 몰랐다. 그거 그냥 차고 올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약간 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행인건 천장이 높고 파이프가 드러나 있어 매달려 싸운다면 해볼 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달고 온 그 친구는 누구야?
아 동민이? 새로 들어 온 앤데 일 잘해. 싸움도 잘하고 술이랑 물을 어찌나 기가 막히게 섞는지 기술자야 기술자. 특히 약 종류는 또 어찌나 그렇게 잘 아는지 강력반 형사라고 해도 믿겠다니까!
하사장이 뉴페이스 데려오니까 혹시나 했지. 요즘 짭새들 분위기 장난 없다던데. 왠 미친개들을 풀어 놨는지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더라고. 개중 어떤 미친 새끼는 무게로 마약 용량이 달라진걸 눈치 챈다는데...
그런 소리 말고 우리 빨리 거래나 합시다. 서로 비지니스 하는 사장끼리 왜 그래?
클럽 사장은 양 손을 비비며 검은색 서류가방이 놓여진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어깨들이 서류 가방을 열자 잘 포장된 헤로인이 보였다.
헤로인 2kg. 일단 샘플이라 생각하고 이걸로 거래 합시다.
헤로인이 든 비닐봉지를 풀어 봄 사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동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돈 가방을 들고 사장 옆에 서 있던 동민은 가만히 검은색 서류 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왜 그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잠시.
탁소리나게 마약이 든 서류 가방을 닫은 동민은 한 손으로 가방을 쥐고 흔들어 보더니 말했다.
이거 안에 철심 넣었네.
뭐 이새끼야?
덩치가 산만한 어깨가 먼저 위협적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동민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돈이 들어있는 등산가방 앞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비닐에 싸인 마약뭉치를 찢어 뒤집었다. 마약이 다 쏟아지고 땡그랑 소리와 함께 작은 철심조각들이 뭉치 안에서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2kg 무게 맞추려고 아랫줄에만 깔았겠지. 위에는 진짜 꽉 채웠을 거고. 근데 철심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 무게가 달라.
저..저 새끼 뭐야?
클럽 사장은 이제 얼이 빠진 표정으로 동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어깨들은 주춤거리면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나? 무게로 마약 용량 달라진 거 눈치 까는 미친새끼다.
대답과 동시에 동민은 돈이 든 가방을 어깨들 중 가장 말이 많았던 놈에게 던졌다.
돈 받으셨고, 거래 한 거지? 자진해서 수갑차고 나 따라갈래 아니면 맞고 갈래?
소리를 지르며 덩치 큰 어깨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고 동민은 헤로인이 들어있던 서류가방을 휘둘러 덩치의 얼굴을 가격했다. 테이블 위를 단숨에 뛰어 올라 돈가방을 쥐고 있던 놈의 턱을 발로 가격한 동민은 가방을 내 던지고 양 손으로 천장에 튀어나와있는 파이프에 힘껏 매달렸다.
죽어라 달려드는 놈들을 발로 차 쓰러트리며 동민은 기세 좋게 어깨들을 넘어 안전히 바닥에 착지했다. 여전히 쪽수는 상대가 더 많았지만 해볼만한 싸움이었다. 파이프를 들고 달려오는 놈을 몸을 숙여 피하며 동민은 상대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눈 앞에 상대에 집중하느냐 뒤를 보지 못했던 동민에게 어깨 중 한 명이 달려들었고 때 마침 지원 온 현민이 발로 차 놈을 떼어냈다.
아슬아슬 했네요.
현민아!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동민은 뭐가 좋은지 만면에 미소를 띄고 현민을 보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들어온 게 신의 한 수였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제압을 도우며 그 꼴을 보고 있던 진호는 볼수록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거나 알아 보려는 노력은커녕 내내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던 현민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먼저 창고에 들어 가 보자고 제안을 했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경훈을 포함한 세 사람은 우연히 적절한 때를 때려 맞춘 것일 뿐이었다. 모든 게 주먹구구식이었다. 되는대로 작전을 진행하는 동민도 그런 동민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내버려두는 현민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쇠파이프를 든 어깨들 중 한 명이 현민을 향해 튀어 오르듯 덤벼들었고 동민은 한 팔로 현민을 밀어 내 자기 등 뒤로 보내는 동시에 어깨를 마주 봤다. 진호는 급하게 근처에 있던 파이프를 집어 던져 동민을 구해냈다. 동민은 진호를 향해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넸지만 진호는 그런 동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현민을 감싸면서 동민은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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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업 팀의 활약으로 상황은 쉽게 종료되었다. 바닥에 꿇어앉힌 어깨들을 사이 좋게 차에 밀어 넣던 동민의 눈길이 어깨들이 타고 온 차에 머물렀다.다가가 위에 덧댄 헐거운 차량 번호판을 발로 차 떼어 낸 동민은 인천이라고 찍혀있는 원래 번호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까 사장이라고 하셨나? 그럼 명함도 있으시겠네?
동민은 얻어 맞아 뺨이 부풀어오른 어깨의 옷 안주머니를 다. 예상대로 비지니스용으로 따로 만든 회사 명함이 있었다.
현민아. 여기 적힌 이름으로 인천에 들어 온 컨테이너 있나 알아봐봐. 최근에 들어 왔을 거야.
군말 없이 명함을 받아 든 현민은 차로 돌아 가 노트북을 두드렸다. 자신에겐 아무런 설명 없이 진행되는 상황에 진호는 기가 차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민이 이쪽을 향해 외쳤다.
있어요. 딱 한 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어 보인 동민이 말했다.
오랜만에 우리 인천이나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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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왜가는 거야?
장난감 검수하러.
동민은 보조석에 앉아 팔자 좋게 늘어져 하품을 하며 진호의 물음에 대답했다. 기어코 운전을 하고 가겠다는 걸 현민이 말리고 또 말려 간신히 저기 앉은 거였다. 나이 들어서 시력이랑 반응속도 떨어진 어르신이 운전하는 차를 타다 야밤에 객사하기 싫다는 게 현민이의 이유였다. 경훈이는 뒷 좌석에서 코까지 골아가며 자고 있었다. 벌써 새벽 3시 30분이었다. 인천에 도착하면 4시. 지금 이대로라면 날이 밝아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잠복근무를 위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자리를 비우지 못했던 적도 많았던 터라 집에 늦게 들어가는 것 정도는 진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동민의 태도였다. 진호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이쪽을 힐끔 이던 동민이 마지 못해 말했다.
야 너는 형사가 그렇게 감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
처음부터 나한테 뭐 말해준 거 있어?
야 너는.. 휴. 그럼 일단 오늘은 나 믿고 따라오기나 해.
진호는 몇 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을 눌러 참았다. 운전하고 있던 현민은 아까부터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금 동민에게 따져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게 뻔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공은 공 사는 사였다. 사건 해결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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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은 기어코 인천 한 컨테이너 안에서 조직들이 장난감 안에 몰래 숨겨 밀수입한 마약을 대량으로 찾아 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인천까지 차를 돌려 온 보람이 있었다며 진호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서로 돌아와 잡아 들인 놈들을 모두 유치장에 집어 넣은 동민은 내일 안 나와도 좋으니 실컷 쉬라며 해산명령을 내렸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남아서 자리 정리를 하려던 동민의 팔을 진호가 잡아 끌었다. 나가려던 현민이 멈칫하며 이쪽을 돌아봤지만 동민은 고갯짓을 해 현민을 보냈다. 동민은 순순히 진호에게 잡혀 옥상까지 동행했다. 동민을 먼저 들여 보내고 철문을 쾅 소리 나게 닫은 진호는 뒤를 돌아 동민을 노려봤다.
원래 이런 식으로 일 처리해?
왜 그러는데.
나한테 형이 진행 중이던 사건파일 내던지고 한마디 설명도 없이 지금껏 나 끌고 다닌 거잖아. 처음엔 분명 2명만 있을 거라며. 들어가보니까 8명은 되어 보이던데? 그게 함정이어서 형 잘못 되었으면 어쩔 뻔했어? 작전 중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모르진 않겠지? 형이 어떤 식으로 작전을 짜고 진행하는지는 알겠는데 서로 공유가 돼야지. 난 적어도 팀원 목숨 가지고 그렇게 무모한 베팅은 안 해.
그래서 내가 책임지고 들어간 거잖아.
책임? 형이 잘못되면 그 책임은 그럼 누가 지는데? 착각하지마 형. 나 여기2팀 팀장으로써 와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텐 말을 해야지.
동민은 한숨을 내 쉬었다. 대답 없이 동민은 한참이나 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호는 동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눈빛으로 마주봤다. 이윽고 고개를 떨어트린 동민이 말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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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이요? 오래 된 사이죠.
서에서 멀지 않은 공원 벤치에 쪼그려 앉아 경훈이 말했다. 자리에서 졸고 있는 경훈에게 깨울 겸 커피라도 사주겠다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진호는 자판기 커피나 마시라고 면박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눌러 참았다. 근처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사다 쥐어주며 동민과 현민에 대해 물으니 경훈은 줄줄 물어보지 않은 정보까지 다 말했다.
처음에 오현민 들어왔을 때 건방진 막내 들어왔다고 말들 많았죠. 그런 오현민 잡은 게 동민이 형인 거고. 경찰대 엘리트코스 밟고 들어와서 맨날 본청 간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애였는데 동민이 형이랑 한번 파트너로 뛰고 나더니 그 다음부터는 자석처럼 둘이 붙어 다녔죠. 사람도 잘 못 믿고 작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독재자처럼 구는 동민이 형이 유일하게 오픈 하고 가는 애가 현민이였어요. 그만큼 똑똑해서 말 길을 알아 들은 건지 뭐 둘이 잘 맞았던 거죠.
그렇게 미결 건까지 척척 해결하던 둘이 결국 결정적으로 위기를 맞게 된 적이 있었어요. 뭐 너무 나대서였겠지만. 그 지역 조폭들한테 다 찍혀서 저 둘 죽이겠다고 그 새끼들이 연합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가뜩이나 둘만 붙어 다녀서 서에서도 별로 좋은 시선으로는 안 봤고. 오현민 장동민이 얼마나 나댔으면 그랬겠어요. 둘 다 죽으라고 짠 판이긴 했지만 거기 장동민이 걸려들었으면 조폭들도 더 좋았을 거야. 여튼 그 둘이 함정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현민이가 그때 칼침 맞았거든. 여기에.
경훈은 진호의 심장 옆을 손으로 꾹 눌렀다.
빗맞았으면 그대로 안녕이었지. 그때 동민이형이 날뛰는걸 형이 봤어야 했는데. 자기가 죽는 꼴이 있더라도 현민이 그렇게 만든 놈 조져놓겠다고 도끼눈을 뜨고 그러는데. 오죽하면 저러다가 사고 칠까 봐 간부들이 감시하라고 날 장동민한테 붙일 정도니까 말 다 했지. 여튼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지더라고. 그날 부로 동민이형은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으면서 그 둘 그렇게 만든 놈들, 그리고 그러라고 지시한 새끼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어요. 한 놈, 한 놈.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지.쓰러질 것 같으면 그 형은 옆에 있는 24시간 병원으로 걸어 가서 수액을 맞았어. 지독한 인간. 현민이가 퇴원했을 때는 벌써 어느 정도 사건이 마무리 된 후였지. 아 참. 현민이는 심하게 다치진 않았어요. 깊이 찔리긴 했는데 빗맞아서 목숨엔 지장이 없었거든. 수술도 잘 되었고.
마지막으로 그 둘 조지라고 최초로 발언했던 조폭 두 놈이 딱 남았는데 동민이 형이 자기 목숨 걸고 그 본진에 쳐들어가려는 걸 현민이가 막았지.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에요. 한 동안 동민이 형이 현민이를 백업조로 돌리긴 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러는 것 같지도 않고.
그게 다야? 뭐 이상한 건 없었어?
이상한 거? 그런 건 없는데. 이 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 않나. 아 참. 우리가 다 같이 현민이 병문안 간 적 있었는데 동민이 형은 먼저 와 있었으면서 병실에 못 들어가고 있더라고.
진호는 그제야 동민의 눈에서 읽어 낸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진호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어두운 병원 복도 끝에 서서 동민이 어떤 심정으로 현민이 입원 해 있는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을 지를. 동민은 분명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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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동민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가치관부터 시작해서 라이프스타일, 작전을 짜는 것까지 모두. 책상만 봐도 두 사람의 성격은 확실히 차이가 났다. 그렇게 안 생겨서 동민은 사건파일을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꼴을 못 봤다. 반면 진호는 아무렇게나 사건과 관련된 서류를 책상에 늘어놓은 것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카오스 속에서 의외의 법칙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게 본인의 주장이었다. 동민은 진호의 책상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책상 좀 치워. 하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진호는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며 무엇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동민의 책상을 힐끔거렸다. 책상에 딸린 첫 번째 서랍에는 두통약과 위장약 그리고 현민이가 채워놓는 비타민이 있었다. 동민은 약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호는 동민이 두통약을 깨먹을 때마다 어쩐지 짜증이 났다. 형사라는 직업이 그렇듯 밤낮없이 달리는 게 일상이었다. 버티려면 알아서 자기 건강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했다. 동민은 개중에서도 자기 몸을 한계치까지 밀어 넣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날도 먼저 애들을 돌려 보낸 동민은 늦게까지 서에 남아 있었다. 진호 역시 동민을 따라 집에 가지 않고 있었다. 탕비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오던 진호는 얼마 전 잡아넣은 조폭 중 한 명과 복도 끝에 서 있는 동민을 목격했다. 취조중인 용의자를 바깥으로 꺼내는 이유는 몇 개 되지도 않았지만 진호는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동민이 볼일을 다 볼 때까지 부러 복도 끝에 숨어 기다리던 진호는 자리로 돌아가는 동민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담배 한 대 안 필래?
바깥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간간히 근처를 지나가는 택시들이 내는 소리만 들려올 뿐 주변은 조용했다. 동민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담배를 들이마시며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을 눈으로 쫓았다.
전화 쓰게 해줬나 보네?
응
담배를 물고 진호가 이쪽을 노려봤다. 동민은 깜박이는 가로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오늘 지 새끼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날이래. 산부인과 맞는지 내가 전화 돌려봤어.
범죄자한테 너무 친절한 거 아니야? 명색이 형산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
그런 마음으로 형사질 하고 있는 거였어?
아니.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지.
동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비벼 껐다. 고개를 돌려 동민은 진호를 마주봤다. 깜깜한 어둠 속이었지만 진호는 느낄 수 있었다.그 정도로 깊은 시선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럼 우리의 정의로운 홍형사님은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는지, 죄질에 상관 없이 모든 범죄자는 철퇴를 때려야 한다는 쪽이겠네.
죄지은 놈들 잡는 게 우리 일 아니었어? 판단은 판사가 하는 거지. 죄지은 놈들이랑 타협은 없어.
이거 무섭네. 만약 죄 짓게 되더라도 너한테는 자수하러 안 갈란다.
형이라면 나한테 애당초 오질 않지. 현민이한테 가겠지.
동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진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호는 대답을 다그치고 싶었다. 왜 가만히 있냐고. 동민이 죄를 짓고 현민을 찾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겠지. 만일의 가정일 뿐인데도 꼼짝 못하는 동민이 진호는 우스웠다. 복잡해 보이지만 동민은 의외로 단순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약점이 뻔한 사람이었으니까.
진호는 한 걸음 동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민은 다가와 진호의 앞에 섰다. 불 켜진 로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때문에 진호는 좀 더 확실히 동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동민이 굳어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진호는 놀라고 말았다. 동민은 웃고 있었다.
그 마약 건 말인데. 왜 헤로인 2kg에 철심을 넣었을까. 컨테이너에 그렇게 많은 마약을 숨겨 들어와 놓고서.
아까웠던 거겠지. 말단이 몰래 팔아 넘기려고 했거나.
컨테이너 가득 마약을 들여 왔는데 그거 조금이 아깝다고 철심을 넣어? 여기서 장사 한 두 번 할 것도 아닌데.
말단이 빼돌려서 파는 거면 가능하지. 지네 보스한테 들키면 안되니까.
말단이 그러는걸 윗선에서 몰랐을까?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 있지.
관심이 없다라.. 컨테이너 가득 마약을 들여 와 놓고 정작 마약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그럴 수 있다고 봐.
마약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나 방법이라는 거네.
그렇지.
만약 마약을 밀수입하는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게 어떤 거래를 위한 보증금이었다면? 마약을 밀수입 하려는 게 아니라 아얘 만들 기술자를 데려오는 게 원래 목적이었다면 어떨 것 같아?
지금 질문하는 거야 아니면 사실을 놓고 날 시험하는 거야? 가능성에 대해 묻는 거라면 그럴 수 있어. 아까 그 새끼가 그래?
응.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레 인천에 가 보면 알겠지.
진호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다 알면서 동민은 진호가 얼마나 사실에 근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재보기 위해 저런 질문을 던진 거였다. 작전 공유를 원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대등하게 대해주길 바란거였지 실력검증을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동민은 늘 저런 식이었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는 식. 중심에 자기를 놓고 상대를 시험하는 게 일상인 인간이었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는 동민을 붙들어 돌려세우며 진호가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형. 이번에 실패하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는 안 있어. 그땐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손톱이 부드러운 살을 파고 들 만큼 아프게 잡는데도 동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는 현민이랑 와. 11시까지. 난 따로 갈 거니까. 장소는 현민이가 알 거야.
왜 따로 가는데?
팀장급이 두 명이니까 고급 인력은 분산해서 덮쳐야지.
[콩장오] 중간달리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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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가 서에 왔을 때 현민은 벌써 운전석에 앉아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장비까지 다 차에 챙긴 것을 보면 동민이 유독 아끼는 것도 이해는 갔다.
내려.
네?
내가 운전할 거야.
운전석에 앉은 현민을 거의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하며 진호는 운전대를 차지했다. 인천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현민의 간단한 작전 브리핑이 이어졌다. 심기가 불편했다는 걸 동민이 언질이라도 준 것일까. 현민의 브리핑은 전에 없이 친절하고 세세했다. 둘이 향하는 곳은 인천의 한 폐건물이라고 했다. 숨을 곳도 많고, 중국 쪽 범죄 조직들과 만나는 만큼 들어갈 때부터 인력을 분산해서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브리핑을 들으면서도 진호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다. 동민이 정말 이렇게 순순히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이 도리어 꺼림칙했다.
접선한다는 거 11시 맞아?
네. 제가 직접 그쪽 연락책한테서 정보를 받은 거라 확실해요.
니가 받았다고?
진호는 말 없이 속도를 높여 차를 거칠게 몰기 시작했다. 운전에만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머릿속에서는 현민이 말해 준 작전 내용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어쩌면 위험한 작전이 될 지도 모른다는 그 말. 진호는 이를 악물었다. 옆에서 진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현민이 뭐라 말을 걸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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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10시였다. 간 밤에 비가 와 축축히 젖은 땅 위로 햇살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좋은 날씨였다. 현민은 지금쯤 진호와 이 곳으로 오고 있을 터였다. 만일에 대비해 2중 스파이를 심은 작전은 돌이켜봐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말단이 배신할 것을 윗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싸그리 깜빵에 들어가 있는 만큼 더 조심히 움직였을 것이다.하지만 중요한 거래 날짜는 마음대로 옮길 수 없어 끽해야 시간이겠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잠자고 있는 마약은 누구에게나 유혹적인 미끼였다.하필이면 그 장소를 알고 있는 유일한 놈들이 유치장에 있는 것도. 바깥에 있는 놈들은 그거라도 먹겠다고 달려들었고, 안에 있는 놈들은 이 정보를 적절하게 팔아 넘길 줄 알았다. 설마 여기까진 몰랐겠지. 그 마약은 있어도 없는 거여야 했으니까. 형량을 1년이라도 깎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놈 보다는 지새끼 얼굴을 그나마 떳떳하게 보고 싶어하는 놈에게 건 것도 아마 정답일거라고 동민은 확신했다. 무모하게 진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백업조가 오기 전에 적당히 지리를 익혀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뜻대로만 되라는 법은 없었다. 동민이 제대로 숨기도 전에 놈들이 거래를 하기 위해 장소를 덮쳐왔고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이것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번 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았다. 쪽수는 비슷했지만 실력적인 측면에서 급이 달랐기 때문이다. 전력으로 덤벼도 5명을 잡을까말까. 심지어 상대는 총을 들고 있었다.이번에는 제발 장비 챙겨서 나가라는 현민의 말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했다.
동민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돌아가면 밥이라도 사던가 해야지.평소에는 무딘 현민의 촉은 이럴 때만 기가 막히게 발동했다. 혹시나 해서 챙긴 거라 백업용 탄창은 차에 두고 내려 몇 발 쏠 수도 없었지만 상대의 총알을 떨어트리는 목적으로는 쓸만했다. 동민은 기둥 뒤에 숨어 저쪽에서 먼저 총알을 허비하길 기다렸다. 예상대로 사격이 이어졌다. 총을 들고 있는 놈들은 두 명뿐이었다. 동민은 기둥 뒤에 바짝 붙어 상대 쪽을 힐끔거렸다. 잠시의 텀을 두고 동민은 총을 든 놈 중 한 명의 어깨를 쐈다. 비명소리와 함께 다른 놈이 총알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대응사격을 미끼로 던지자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저쪽은 총을 쏴 댔다. 상대가 탄창을 갈아 끼는 틈을 타 동민은 기둥 밖으로 완전히 나와 총을 든 놈의 어깨와 팔을 중심으로 무자비하게 총을 갈겼다.
화력 담당 두 명이 쓰러지자 폐건물 여기저기 널려있는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조폭들이 달겨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창 밖으로 뛰어 내리고 싶었지만 높이가 제법 돼서 그럴 수도 없었다. 동민은 미로 같은 건물 구조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최대한 침착하게 장애물이 많은 곳으로 놈들을 유인했다.널려있는 드럼통을 방패 삼아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동민은 상대가 안쪽 깊숙이 들어 올 때를 기다려 단숨에 처단했다. 어지러운 구조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갈 수록 쪽수가 많은 쪽이 불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놈들도 만만치 않아서 칼을 들고 죽어 라고 덤벼드는 놈들도 몇 있었다. 팔 안쪽을 깊숙이 찔렸을 때는 정말 헉 소리가 나왔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다치는 건 다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백업조가 올 때 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눈 앞에 달겨드는 놈들을 쳐내기도 급급해 결국 뒤가 비는 일이 생겼고 동민이 뒤에서 칼을 들고 덤벼드는 놈을 처리하는 동안 앞에서는 쇠파이프가 날아왔다. 어쩔 수 없이 팔을 들어 쳐내야 했지만 곧 극심한 고통이 이어졌다.
야 이 들아. 여덟 명이 한 명 조지는데 뭐 이렇게 시간이 걸려!
하여튼 장동민은 저게 문제야. 사람을 안 믿는거.
대답은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저쪽 끝에서 경훈이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너 이새꺄 안뛰어!? 형이 쳐 맞고 있는데 지금!
형은 좀 더 맞아야 돼. 내가 장동민 저거 이상한 짓 벌일 줄 알았다니까. 내가 이상한 거 눈치 까고 안 따라왔으면 어떻게 될 뻔 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훈은 드럼통을 뛰어넘어 들어오더니 능숙하게 싸움을 속행했다. 동민이 경훈을 특히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싸울 때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사하게 싸운다는 점이었다. 경훈은 주변 사물들을 이용하는데 특히 뛰어났다. 쇠파이프 든 놈을 벽돌로 내리쳐 쓰러트린 뒤에 경훈은 손을 털었다. 아파서 한쪽 팔을 붙잡고 있는 동민을 위 아래로 훑어 본 경훈이 말했다.
형 팔이 아주 걸레짝이 됐네.
너 말 그 따위로 할래?
그때, 진호와 현민이 이 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얼마나 뛰었는지 둘 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진호의 눈이 빠르게 현장을 훑었다. 진호의 시선이 잠시 동민의 팔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곧 말 없이 남은 놈들을 제압하는 것을 도왔다. 경훈의 백업으로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 된 뒤라 진압은 예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못내 동민의 팔이 신경 쓰였는지 연신 힐끔대던 현민은 동민에게 다가와 눈물까지 글썽이며 물었다.
형 정말 괜찮은 거에요?
응. 아 걱정할 거 없다니까.
동민이 괜찮다고 재차 말하는데도 현민의 시선은 동민의 팔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찌나 근심걱정이 어려있던지 현민은 시종일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현장에서 잡은 놈들을 모조리 차에 밀어 넣은 뒤 진호는 동민을 경훈이 따로 타고 온 차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우린 저차 타야지.
병원부터 가.
뭐라 대꾸하려던 동민은 진호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진호는 동민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가 다 끝날 때까지 옆에서 지켰다. 병원 문을 나설 때까지 얌전하던 진호는 서로 돌아오는 길에 기어코 분통을 터트렸다.
이게 형 방식이야? 이따위로 일하는 게? 막말로 경훈이 아니었으면 어쩔뻔했어?
잘 끝났잖아. 나도 무모하게 들어 갈 생각은 없었어. 그 새끼들이 생각보다 빨리 온 거지.
형. 나 속일 생각 하지마. 이중으로 스파이 심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형은 현민이가 받아주는 정보 대조해 보면서 더 맞을 거 같은걸 선택한 거잖아! 도대체 그 판단이랑 선택을 왜 형 혼자 하는데? 내가 팀원 목숨 가지고 베팅하는거 싫다 그랬지?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정말 들어 갈 생각 없었어. 니 말대로 불확실한 정보로 팀원들 목숨 베팅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야. 확인 해 보려고.
진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웃기는 소리하지마.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이 다음도 다음도 또 형 혼자 책임지면서 희생하려고? 그럼 팀이 왜 필요한데. 그리고 나는 도대체 뭔데? 형이 잘못 되면 애들은 어떨 것 같아. 한번이라도 애들 심정 생각 해 본적 있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호가 홱 고개를 돌려 동민을 노려봤다. 뭐라 반격이라도 할 줄 알았던 동민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도리어 진호가 당황했다. 동민은 정말 말 없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처음으로 동민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진호는 할말을 잃었다. 동민은 정말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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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아 온 진호는 동민이 전화를 쓰게 해 줬다는 그 조폭이 있는 취조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진호는 철제 테이블을 발로 차 상대를 의자에 앉은 채로 쓰러트렸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진호는 발로 사정없이 넘어진 상대를 짓밟았다.
니가 10시라고 알려줬어?
홍진호. 너 지금 뭐하냐?
뒤늦게 쫓아온 동민이 문가에 서서 말했다. 조용히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동민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따라 들어온 경훈이 달려와 진호를 상대에게서 떨어트렸다.
누가 우리한테 11시라고 잘못 알려줘서 형이 그렇게 된 거 아니야. 그새끼 그냥 넘어갈 거야?
홍진호.
내 말이 틀려?
그만해.
시선이 맞부딪치고 동민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가 침착하니 되려 화를 낸 쪽이 무안해졌다. 진호도 알고 있었다. 이게 보여주기 식 분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받아주는 사람이 저렇게 담담한데 더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힘이 빠져 진호는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민은 진호가 방을 나가는 내내 눈으로 진호를 쫓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현민의 곁을 비껴 지나가며 진호는 나지막히 말했다.
정보 전달하는 거, 담당 너 아니었어? 근데 이게 뭐냐.
죄송합니다.
당황한 현민의 몸이 순간 굳으며 움츠러들었다.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동민을 쏘아본 진호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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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좀 풀렸냐?
동민이었다. 진호는 옥상에 올라가 한참 동안이나 도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호가 돌아보지 않자 동민이 옆으로 다가왔다. 희미하게 나는 병원냄새에 진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화는 빨리 가라앉아서 진호는 꽤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말이 있는 것인지 동민이 운을 떼었지만 진호가 먼저 선수를 쳤다.
형, 우리 내기할래?
멈칫하며 동민이 이쪽을 본다.
누가 먼저 특수반 팀장 달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동민의 표정은 읽기가 어려웠다. 말 없이 동민은 한동안 진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둡고 깊은 눈. 이럴 때만 아니면 진호는 정말 예쁜 눈이라고 생각 했다. 그 눈빛이 죽어있는 때는 거의 없었으니까. 바라본다고 해답이 나오는 게 아닌데도 동민은 진호의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이런 도발을 동민이 거절 할 리가 없었다. 누가 들어도 유혹적인 제안이었으니까. 한참 끝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민은 전력을 다해 이 게임에 임할 것이다. 진호 역시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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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웬일로 우리 진호가 형한테 다 연락을 하고.
고기를 구워 진호의 앞 접시에 담아주며 상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가식인걸 알면서도 상민이 너스레를 떠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진호는 대답 대신 술을 들이켰다.
빈속에 술 먹으면 체해요 체해. 고기도 좀 먹으면서 마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민은 진호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약삭빠르게 진호의 얼굴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맨날 동민과 붙어 다니다 전혀 다른 상민을 보니 어쩐지 답답함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우리 진호가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내가 무슨 고민 있을 때만 형 만나? 나는 됐고. 형은 어떻게 지내.
나야 뭐. 그냥 그저 그렇게 지내지.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진호야. 형 이제 그런 거 손 털었다. 너 만나고 얼마나 내가 깨끗해졌는데.
퍽이나. 내 눈앞에서 하지만 마. 그건 그렇고. 형 사업하나 새로 벌일 생각 없어?
사업? 무슨 사업.
약파는 거.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상민은 팔짱을 낀 채 한 발 물러났다. 그렇게 수다스럽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진호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먹었다. 눈을 들어 보지 않아도 상민이 얼마나 많은 것을 계산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이런 말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진호를 상민은 속으로 대단한 놈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 뻔했다.
역시 우리 진호야. 이런 말을 그냥 막 그렇게.... 약 파는 건 내 전문이 아닌데.
원래 형 전문이지. 도박은 사이드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판을 깔아준다면? 요새 우리 구역에 마약공장 차리려는 놈들 있다는 소리는 들어서 알고 있지? 그거 형이 먹어. 관계된 놈들 지금 밑에서부터 깜빵에 들어가 있으니까. 내가 중국 쪽 커넥션 다시 뚫어줄게.
내가 그거 먹으면 원래 공장 차리려던 놈들이 가만 있을 것 같니?
그건 동민이형이 처리 해 줄 거야.
장동민이 청소하고 가면 나더러 살림 차리라는 거지?
응. 형이 거기 중재자 역할로 들어가. 형은 나랑 커넥션 있잖아. 원래 있는 놈들이랑은 딜을 봐야지. 대신 공장은 우리 관할 밖에다가 차리고.
그럼 동민이가 가만히 있을까? 어떻게 된 거야. 요새 둘이 붙어다니는거 아니었어?
어차피 이대로는 아무도 이득 못 봐. 여기서 더 일 벌이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수 물러주겠다는 거네. 이야 진호가 수를 다 물러주고...
수를 물러주는 게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나는 이 판을 깨버리려고 하는 거야.
분배는 어떻게 해줘?
난 그딴 더러운 돈 안 받아. 대신 그럴리 없겠지만 실수하면 알아서 해.
진호는 술잔을 손으로 막아 상민이 따라주는 술을 거절하며 말을 마쳤다.계산하느냐고 바쁜 건지 상민은 술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위험했다. 이 이상 마신다면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 해버릴지도 몰랐다. 가만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상민에게 진호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 딜을 걸기 전에 놈들한테 동민이형을 팔아.
그래도 되는 거야?
응. 싸움 붙이려면 어쩔 수 없어.
판을 깬다라...
동민의 이름이 거론되고 나서부터 상민은 눈에 띄게 진호의 안색을 살폈다. 의중을 떠보려는 것이다. 동민과 다르게 상민은 앉아있는 자리에서 쓸데없는 것까지 말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상민은 진호에게 정말 그게 전부냐고 은연중에 묻고 있었다. 애매한 판엔 들어가기 싫다는 거겠지. 오래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짠 판도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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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진호는 동민을 생각했다. 내일부터 동민은 쫓기게 될 것이다.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건 동민이었으니까. 눈치 빠른 상민이라면 벌써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단순히 특수반 팀장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호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동민이 무엇 때문에 집요하게 수사를 파고 드는지 진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마약공장을 차릴 정도면 뒤를 봐주는 세력이 분명히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틀림 없이 전국구겠지. 아무리 특수반을 새로 만든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인 간부들이 제대로 된 수사지원을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그런 거야말로 본청 가서 해결 봐야 할 일이었다. 하다 막혀 아래에서 짤라 정리를 한다고 해도 사실 완전히 무모한 일은 아니었다. 리스크가 따를 뿐이지.
진호는 동민이 짜주는 판에 순순히 끌려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도리어 이런 일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했다. 동민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간 놈들도 죽자 살자 덤벼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 급이라면 알게 모르게 경찰 내부에서 뒷돈을 받는 사람들도 넘쳐 날 것이다. 간부들이 순순히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도록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런 일은 특수반이 안정적으로 돌아간 다음 본격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웃기는 건 동민도 분명 이 사실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동민은 혼자 일 처리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 틀리면 자기가 독단으로 책임을 뒤집어 쓰기 위해서. 그게 동민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진호는 그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려서 보게 할 수 없으면 억지로라도 판을 부수면 그만이었다. 정석대로 상대해서는 동민을 이길 수 없었다. 그 판을 쥐고 움직이는 주인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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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진호는 여태까지 진척 된 수사상황을 바탕으로 마약 밀매 건을 종결 지을 판을 짜기 시작했다. 동민이 시작하고 수사의 대부분을 담당 한 사건이었지만 두 사람은 현재 같은 팀 소속이었다. 진호가 동민을 제외하고 사건을 마무리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 될게 없었다. 단지 동민이 진호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될 뿐이었다. 벌써부터 동민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진호는 궁금했다. 자신이 시작한 수사를 독단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소식을 그것도 통보로 들을 때 동민은 뭐라고 할까.
진호는 간부들에게 보고를 넣어 사건을 종결 지을 팀을 꾸릴 수 있도록 허락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모든 일은 진호가 원하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팀원으로 진호는 현민과 경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굳이 현민의 이름을 적어 넣은 것은 현민이 일을 잘 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동민을 흔들기 위해서였다. 현민은 이런 데서 이상할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똑똑한 놈이라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계산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현민아. 너 본청 가야지.
네..
동민이 형 저대로 내버려 둘 꺼야?
동민에 대해 말을 꺼내자 현민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아직 애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호는 현민이 동민에게 가지는 불안의 종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동민이 저렇게 시야에서 벗어 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현민은 불안을 느낄 것이다. 현민은 기본적으로 동민의 세계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의 핵심이기도 했다. 진호는 손 쉽게 그 불안의 틈을 파고들 수 있었다. 현민의 욕망과 그 불안에서 출발 한 동민의 세계에서 독립하려는 마음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충분히 이 둘을 찢어놓을 수 있었다. 그 둘은 절대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할 테니까.
현민을 설득시키는 것은 역시 쉬웠다. 똑똑한 놈이라 그런지 자신의 위치와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파악이 빠른 애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동민은 진호의 독단에 불같이 화를 냈다.
넌 그걸 상의도 없이 처리하냐?
형이 했던 것처럼 나도 공유하지 않은 것일 뿐이야. 이대로 내가 형이 실적 다 가져가는 동안 그냥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넌 진짜... 내가 정말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냐?
잠깐이었지만 동민은 눈에 띄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가만히 깨물고 눈을 둘 데가 없어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 때려 치고 달려가 달래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진호는 끝까지 냉정을 유지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형은 형 대로 따로 가. 누구 말이 맞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진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동민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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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홍진호 딴 맘 품을 줄 알았다니까.
자판기 옆에 쪼그려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민의 옆에 경훈이 촉새처럼 달라붙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을라치면 경훈은 어떻게 알고 어디서 귀신같이 나타나 동민의 옆을 졸졸 따라왔다. 나이차이가 꽤 되는데도 친구대하듯 저렇게 편히 자신을 대하는 경훈을 보고 있으면 동민은 괜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넌 또 왜 나왔어.
형이 여기서 혼자 청승 떨고 있으니까 나왔지. 눈뜨고도 당하는 게 형이잖아.
야이씨 너 조용히 안 해? 내가 쓰라는 보고서는 다 썼어?
아 맞다.
아 맞다? 너 진짜 혼난다 김경훈.
동민은 경훈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경훈이 하도 잘 잊어버려 보고서 쓰는 일을 까먹을 때 마다 한대씩 맞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밖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현민이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왔다.
진호형이 이렇게 팀을 짜 버려서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요.
동민은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윗선에서 압박이 들어와 수사가 막힐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부에서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 끊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호가 사건을 종결 짓는다는데 결제가 이렇게 빨리 진행된 것을 보면 간부들도 동민보다 진호의 주장을 더 믿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진실이든 그렇지 않든. 싸움을 걸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본부 내에 뒷돈을 먹는 간부들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 했지만 그게 이렇게 빨리 앞길을 막을 줄은 동민도 몰랐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와서 동민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동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민이 떠난 빈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현민이 경훈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형. 당분간 동민이 형을 따로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진호형이 진행하는 수사상황 형한테 알려줄 테니까 그 정보를 동민이형한테 줘요.
[콩장오] 중간달리기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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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였을까. 동민은 자신을 둘러 싼 상황이 변한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한, 두 번은 우연이라고 집어 넘겨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은 아주 대놓고였다. 집에 갈 때, 밥을 먹을 때, 사람들을 만날 때도 붙은 자석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예전 일이 떠올랐다. 막 팀에 들어온 현민은 어렸고 쉽게 사람을 믿었었다. 동민은 언제나 그런 현민이 언제 크게 배신을 당하고 상처 입을지 몰라 불안했다. 두 사람을 향한 덫은 생각보다 빨리 왔고, 고립의 시간은 길었다. 그때는 둘이어서 지금처럼 외롭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찍히는 건 혼자로 충분했다. 지금은 차라리 현민이가 진호에게 가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
동민은 점점 서에서 밤을 새는 일이 많아졌다. 준석이나 경훈을 이 일에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이건 오직 동민 혼자만의 일이었다. 진호만이 집에 가지 않는 동민에게 오늘도 밤을 새는 거냐며 지나가듯 한마디 할 뿐이었다.동민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동민이 막무가내로 수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위험할 정도로 신변까지 팔아대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놓고 강력계 형사를 표적으로 둘 정도면 위협이거나 아니면 내부에서 누군가 동민을 팔았다는 얘기였다. 모든 것이 추측과 정황뿐인 상황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직접 그 덫에 걸려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동민은 현민을 통해서 진호의 수사 진행상황을 받아 볼 수 있었다.진호는 인천 컨테이너 박스 마약건과 중국 커넥션을 이용 해 마약 제조가 가능한 인력을 빼돌린 것을 통으로 묶어 타협 볼 수 있는 지점에서 끊어 수사를 빨리 종결하려 했다. 점 조직이 아니라 전국구로 움직인다면 분명 관할이라는 것이 있을 거고, 동민이 원하는 것은 지금 수사하고 있는 관할을 담당하는 거대조직의 끄나풀을 잡아 내는 거였다. 지금까지 잡아들인 놈들은 쉽게 가지치기할 수 있도록 이용한 토박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위협이든 사주든 동민을 따라다니는 놈들 역시 그 끄나풀이 시켜서 한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어렵게 현민을 통해 끄나풀들이 버려진 폐창고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알게 된 동민은 미행하는 놈들을 따돌리고 폐창고를 급습하기로 했다. 덫이라면 적어도 출처는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상황을 뒤집을 좋은 기회였다.
폐 창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동민은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도 없는 빈 창고에는 어둠을 밝히는 백열등만 홀로 외롭게 켜져 있었다.깜빡 하고 불이 꺼지자마자 동민은 숨을 들이켰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손길을 몸을 틀어 가까스로 피하자 이번엔 옆구리 안쪽이 시큰거려왔다. 꽤 깊숙이 찔린 것인지 무지막지한 통증이 덮쳐왔다. 몸을 날려 벽 쪽으로 다가붙으며 동민은 필사적으로 옆을 더듬어 불을 켰다. 상대는 조선족으로 보이는 놈들 둘이었다. 둘 다 칼을 들고 있었다. 파봐야 민증도 없는 놈들 일거라 이런 일을 사주하기엔 제격이었겠지.
불을 켜는 동안 먼저 달려든 놈이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 한번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동민은 눈 앞이 캄캄해지며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동민은 벽에 기대 색색 숨만 몰아쉬는것이 고작이었다. 거대한 핀으로 몸 한 가운데를 관통 해 찌른 것처럼 동민은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칼자루를 쥔 손을 쳐낸 동민은 칼을 뽑아 주저 앉으며 앞에 서 있는 놈의 발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악 소리를 내며 놈이 펄쩍펄쩍 뛰는 동안 동민은 또 다른 놈의 다리를 발로 차 부러뜨렸다.
독기가 오른 것인지 발등을 찍힌 놈이 씩씩거리면서 다가 와 발길질을 날렸다. 앞으로 기어가면서 동민은 악착같이 버텨냈다. 두 놈이 가세해 때려대는 것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동민은 몸을 돌렸다. 날아오는 칼을 손으로 쳐서 막으며 동민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들고 두 놈 중 한 놈의 다리에 찔러 넣었다. 그렇게 한 놈을 처리하고 나자 다른 놈이 득달같이 동민에게 달려들었다. 올라탄 놈에게 동민은 지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두 번 얻어맞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는지 놈은 단숨에 목을 노리고 칼을 찌르려 들었다. 손을 들어 막자 어찌나 세게 찌른 것인지 칼날이 손등을 뚫고 나왔다. 아파할 틈도 없이 동민은 재빨리 다른 손으로 놈의 목을 잡았지만 놈이 더 빨랐다. 놈은 칼에 찔린 동민의 손과 팔을 그대로 두 번 꺾어 부러뜨려버렸다.
놈이 손에 꽂힌 칼을 비틀자 저절로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놈은 하얗게 질린 동민의 얼굴을 보고 웃더니 그대로 칼자루를 쥔 채 동민의 심장 부근으로 천천히 이동시켰다.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손을 관통한 칼이 비틀리며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 가해져 동민은 눈물까지 났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칼이 심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힘은 놈이 훨씬 더 월등했고, 그대로 손을 꿰뚫은 칼이 심장을 관통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총성소리가 들리더니 칼자루를 쥐고 있던 놈이 피가 쏟아지는 목을 손으로 부여 잡으며 앞으로 푹 쓰러졌다. 진호와 현민이었다.동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멀쩡한 손으로 손에 박힌 칼을 빼내고 동민은 아얘 대자로 뻗어버렸다. 진호가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현민이 동민에게 달려왔다. 이런 처참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동민의 옆에 꿇어 앉은 현민의 시선이 옆구리의 상처로 향하는가 싶더니 멈칫했다. 현민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동민을 보고 그대로 굳은 듯 얼어붙어버렸다. 눈가가 빨개지기 시작하더니 현민은 기어코 울기 시작했다.
형. 왜....
민아. 난 괜찮아.
동민은 멀쩡한 손으로 최대한 다정히 현민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현민의 양 뺨 위로 눈물은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손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동민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 보다 현민이 이러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다.
왜... 왜.. 여길 혼자 왔어요 내가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동민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현민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현민은 그런 동민의 손을 감싸며 눈물이 그냥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뒀다. 동민은 지난번과 똑같은 일을 겪게 할 수 없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말이 소리가 돼서 나오질 않았다.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
상황을 수습한 진호가 다가와 동민의 상처를 누르며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현민도 지혈을 도왔다. 상처를 찍어 누를 때 마다 동민은 죽는 소리를 냈다.
여긴 왜 들어왔어? 백업하나 없이.
알면서도 진호는 동민에게 물었다. 동민의 신변을 팔아 넘긴 것도, 상대가 덫을 놔 동민을 잡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 것은 진호였다.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동민이 진호를 가만히 노려봤다. 예상대로 동민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덫을 놓은 놈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걸려든 거였다. 경훈이나 준석이는 부를 수 없었겠지. 동민의 성격 상 죽을길인줄 알면서도 남을 끌어들이지는 못했을 거니까. 처음부터 진호는 동민을 내버려 뒀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구해 줄 생각이었다. 현민이 수사진행 상황을 몰래 동민에게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애저녁에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용해 동민이 끄나풀을 잡으러 기어 들어와 이 덫에 걸려들도록 설계한 거였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현민은 사건을 종결하길 기대하며 진호를 따라왔다가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칼을 맞은 동민을 보게 되었으니 꽤나 충격이 컸을 것이다.
죽일 듯 진호를 노려보던 시선이 이번엔 현민을 본다. 죽어도 동민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진호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노라고는. 지금 그 말을 하는 순간 현민 역시 진호의 표적이 되리라는 것을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진호는 동민을 희생타로 삼아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동민을 죽이려고 사주한 놈들을 넘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전국구로 노는 조직은 손을 털거나 청소된 이 지역을 다른 놈들에게 넘겨 줄 가능성이 컸다. 그걸 컨트롤하는건 진호가 되겠지. 영리한 방법이었다. 윗선에 모나게 비치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실적을 내 다음 수를 노리는. 확실히 전략가다운 처세술이었다.
적어도 현민은 일이 마무리 되기 전 까지는 일의 전말에 대해 몰라야 했다.모르는 게 더 안전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진호는 동민이 현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또 독단으로 들어갔다가 이 꼴이 난 거지. 그래도 적어도 죽이진 않았잖아?
죽이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동민은 진호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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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동민을 데리고 가는 내내 현민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처를 입었는데도 동민은 끝끝내 현민에게 기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자며 진호가 폐창고로 데려 왔을 때만 해도 현민은 창고 안에 마약 건을 주도한 놈들이 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폐창고에 불이 꺼졌다 켜지는 것도 진호가 안으로 들어가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도 모두 이상했지만 현민은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전혀 상관이 없는 동민이형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이곳에 올리 없는 사람인데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동민을 목격했을 때 현민은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수술실에서 동민이 나올 때까지 현민은 두 손을 그러쥐고 간절히 동민이 무사하길 빌었다. 분명 사건을 마무리 할 결정적인 놈들이 있어야 할 곳에 왜 동민을 잡기 위한 함정이 있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진호는 놈들이 동민의 과격 수사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얘 죽여버리기 위한 판을 짠거라고 했지만 쉽사리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끝내 폐창고에 현민이 동행하는 것을 거절한 동민 역시 이해되지 않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동민이 입원 해 있는 동안 진호는 현민에게 사건을 빨리 종결 짓자고 했다.마약밀매와 제조 혐의로 때려 넣기엔 부족하다고 하자 진호는 냉정한 얼굴로 경찰 살인교사 죄를 추가하라고 했다. 보고서가 윗선에 올라가면 진호는 자기가 직접 현민을 본청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수고했다는 진호의 말을 들으면서 현민은 어쩐지 동민의 목숨 값으로 사건을 종결 짓는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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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한 동민이 서로 돌아 왔을 때 그 환영의 열기란 참으로 대단했다. 너도나도 동민의 무사함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아니 뭔 구경들 났어? 죽다 살아온 것도 아닌데 왜들이래?
말은 태연하게 하면서도 동민은 이 열기가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일일이 인사를 다 받아 준 동민이 걸음을 멈춘 곳은 진호의 자리 앞이었다.
웬일이야. 형이 내 자리를 다 오고.
내 목숨 구해 준 사람한테 나도 인사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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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동민은 대답 없이 하늘만 보고 있었다. 한 참을 그러고 있더니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바라본다. 진호는 동민이 퇴원을 하면 화를 내거나 어떻게 해서든 복수를 할거라고 예상했지 이런 식으로 마주 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되려 동민은 어딘가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호는 오늘따라 동민이 창백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응. 난 결정했거든.
수사 이대로 종결하는 걸로?
아니. 더 좋은 거.
그게 뭔데?
동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늦여름 바람은 어느새 선선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동민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진호는 동민의 손 위에 감긴 하얀 붕대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 모습도, 정신을 피곤하게 하는 약 냄새도 모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진호는 가만히 동민의 아픈 손 위를 더듬었다. 인상을 찡그렸지만 동민은 손을 빼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호는 천천히 동민의 손을 살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내가 니 밑으로 들어갈게. 니가 걸었던 내기, 내가 졌어.
고개를 들면 그 깊고 검은 눈이 진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명치에 칼을 찔러 넣은 것처럼 진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듣는 것인데도 진호는 가슴 한 켠의 찜찜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도리어 태연했다. 눈으로는 기민하게 진호를 살피고 있으면서도 입술은 웃고 있었다. 가만히 웃으며 동민은 조용히 덧붙였다.
대신에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현민이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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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사건은 속전 속결로 종결되었다. 사건을 마무리하는데 막판 스퍼트를 올린데다 동료 형사를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 진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특수팀 팀장 자리에 오른 날 진호는 동민을 껴 안으며 두 사람의 오래 된 라이벌 관계가 끝이 났음을 알렸다. 동민은 기꺼이 친애하는 동료를 위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포기했다. 현민은 진호를 도와 사건을 훌륭히 서포트한 댓가로 먼저 본청에 보내졌다. 진호가 라인을 잘 타둔 덕분에 특수팀 전원이 본청으로 들어간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렇게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동민은 끝끝내 현민이 짐을 싸는 마지막 날 까지도 잘 가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현민은 그게 못내 서운했다. 그것 말고도 동민에게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자신과 한마디 상의 없이 진호에게 특수팀 팀장 자리를 내 준 것이며, 그 날 폐창고에 동행하겠다는 현민을 한사코 밀어낸 것까지.서운하다면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이 많았다. 기분 탓인 동민은 퇴원한 이후로 먼저 현민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현민도 애써 동민을 찾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얼굴도 제대로 못 본채 떠나겠다 싶어 현민은 동민을 따로 불러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동민은 순순히 현민을 따라 나왔다. 공원길을 따라 걸으며 현민은 동민의 눈치를 살폈다. 동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었다. 둘이 수다를 떨며 자주 걸었던 공원길인데도 오늘은 어쩐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특수팀 팀장 진호형이 되었네요.
그래.
형은 왜..
처음부터 내가 갈 자리가 아니었나 보지.
동민은 미련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보여도 동민은 충분히 현민의 말에 진심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때때로 마주치는 눈빛만 봐도 현민은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대답들이 더 현민을 괴롭게 했다. 이대로 가다간 원하는 대답은 하나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현민은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 때 폐창고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형 그거 왜 거절한 거에요?
넌 그때 진호 밑에 있었잖아. 내가 섣불리 같이 가자고 할 처지가 아니었지.
이것 때문인가 싶어 현민은 걸음을 멈췄다. 현민이 진호에게 간 것을 동민이 서운해하거나 오해하고 있다면 이것보다 문제될 일도 없었다.
저는 형을 구하려고 그런 거에요.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눈물이 차 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동민이 그저 야속했다. 동민은 현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다정함에 더 눈물이 났다.
알아.
현민은 오래 전 그날을 떠올렸다. 퇴원해 서로 돌아 왔을 때 동민은 그 둘을 덫에 걸리게 한 놈들을 이미 거의 다 잡아들인 후였다. 경훈의 말에 의하면 동민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고 했다. 동민은 최후의 두 명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자기를 희생 해 불구덩이에 스스로를 던져 넣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현민의 앞에서 말을 했었다. 동민은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덫에 걸린 것도, 현민이 칼을 맞은 것도 모두 본인 잘못이었다. 현민의 작전을 따르지 않은 것은 실책이었다고 해도 동민이 하자는 대로 수긍한 것은 현민의 선택이었다. 동민은 그 현민의 선택까지도 책임을 지려 했다. 가끔 현민은 동민이 자신도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진호를 택한 것도 어떻게 보면 현민의 선택이었다. 동민이 장비를 챙기지 않고 서를 나설 때 마다 현민은 불안했다. 동민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현민도 어쩔 수 없이 흔들렸다. 동민이 극단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현민은 같이 흔들려야 했다.동민의 곁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동민을 볼 때마다 생기는 이 감정의 충돌이 무엇인지는 현민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확인 받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동민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하지만 현민이 아는 한 동민은 그런 것을 절대 말로 확인시켜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동민은 항상 지금처럼 태연하게 현민의 곁을 지켰다. 진호의 밑에 있어도 현민은 동민이 부른다면 얼마든지 동민의 곁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도 동민은 현민에게 결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그 차 안에서 끝끝내 현민에게 기대지 않았던 것처럼. 그럴 때 마다 현민은 진호가 지나가듯 한 말을 떠올렸다.동민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말을. 아니 현민이 보기엔 전혀 달랐다. 현민은 동민이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끊임없이 했던 말들을 기억했다.아무도 믿지 말라고.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이라고. 그때마다 현민은 그 동안 수도 없이 봐야 했던 동민의 등을 떠올렸다. 동민은 혼자 서 있어서 너무나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때 그랬죠 형. 중간 달리기라는 게임이 있는 거 아냐고.때로는 앞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중간을 달려야 할 때도 있는 거에요. 뒤에서 따라 달리는 사람이 지치지 않도록...
참아보려고 해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현민은 떨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형이 그때 그랬죠.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아무도 믿지 말라고.
현민은 팔을 들어 눈물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그럼 저는요. 형... 저를 믿기는 해요?
동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달래듯 현민을 끌어안는 것이 전부였다. 그 따뜻한 손길을 현민은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 동민의 어깨에 기대 현민은 그 동안의 서러움을 토해내듯 울 수 밖에 없었다. 동민은 끝내 현민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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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청으로 처음으로 출근하며 현민은 이전 직장에서 있던 기억들은 모두 묻어두기로 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본청 로비에 발을 들이자 마자 동민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떠올랐지만 애써 떨쳐냈다. 고개를 돌리면 지금이라도 동민이 뛰어나와 그때처럼 야이 멍청아. 경찰대 나오면 뭐하냐?눈치가 없는데. 하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자리를 안내 해준 현민의 상사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라고 했다. 이제 이 사람에게서 정석대로의 경찰을 배우면 그만이었다. 현민의 서류를 뒤적이던 형사가 말했다.
돌아오기 전에 맡았던 사건이 미결이네. 이러면 점수 깎일 텐데.
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마지막으로 마약밀매건 종결 내서 절 본청으로 보낸 거 아니었나요?
응 그 마약 밀매건 말인데. 그거 미결이야.
현민이 못 믿겠다는 눈치를 보이자 형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확실히 서류에는 미결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결제자 홍팀장님 아니었나요?
형사가 봉투를 뒤적여 또 다른 서류를 꺼내 확인하더니 대답했다.
홍팀장인지는 모르겠는데. 니 전에 있던데 상사. 강력 1팀 팀장.
순간 현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짚이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형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현민에게 택배상자를 안겼다.
아 그리고 너 택배 왔다. 니 자리 여기니까. 알아서 잘 정리하고.
형사님. 저 그 서류 좀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그래 확인해봤자 똑같겠지만 여기 두고 갈 테니 보고 싶으면 봐.
현민은 서류로 뻗었던 손을 거두고 택배부터 뜯기로 결심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가슴 한 켠이 아파 올 정도였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현민은 아무렇게나 택배상자를 잡아 뜯었다. 상자 안에는 노란 서류봉투가 들어 있었다. 봉투에 손을 넣으니 두툼한 보고서가 먼저 집혔다.
보고서는 마약밀매건과 국내 마약 제조 핫라인을 구축하려는 조직에 대한 디테일한 수사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대로 본청에 내민다면 당장이라도 특수팀을 꾸려주겠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만큼 세세한 보고서였다. 아직 완성이 덜 된 것인지 보고서는 중간중간 손 글씨로 빼곡히 주석이 달려 있었다. 작성 한 사람의 이름이 없어도 현민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체를 가진 사람은 현민의 주변에 딱 한 명뿐이었다.
혹시나 해서 봉투에 손을 집어 넣으니 종이 뭉치가 잡혔다. 본청 마크가 뚜렷하게 찍혀있는 식권 묶음이었다. 식권은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모아 고무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현민의 곁을 지나가던 형사가 식권을 보더니 반응했다.
어 본청에서 그 식권 구하기 엄청 힘든 건데. 신입이 그걸 다 갖고 있네. 신입은 3개월 지나야 식권 발행이 될 텐데. 누군지는 몰라도 지난번 있던데 상사가 엄청 아꼈나봐.
현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 때문에 식권에 찍힌 본청 마크가 푸르게 번져 올랐다. 현민은 손가락 끝으로 번져 오르는 글씨를 문질렀다. 떨리는 손으로 확인 한 서류의 끝에는 동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청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형사들이 뭐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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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은 동민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경찰대 엘리트 출신이라고 바람이란 바람은 다 들었던 현민을 동민은 보자마자 멍청한 놈이라고 면박을 줬었다. 본청 가고 싶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는 현민에게 형사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의 오묘한 조화를 이해해야 비로소 형사라고 한 것도 동민이었다.
하지만 구내 식당 밥은 정말 맛 없단 말이에요. 본청은 그렇게 밥이 끝내주게 잘나온다는데.
야. 본청 밥도 별거 없어. 똑같은 밥이구먼 뭘. 형사가 밥 따져가며 일할래?
형. 가오가 안 살잖아요. 본청은 식권에도 본청마크가 찍혀있다고 했다 구요.
얘는 경찰대에서 무슨 물이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애들도 못 믿는데 본청가면 니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애? 거긴 식권도 3개월이 지나야 나오는데야.
그 뒤로 동민은 현민이 본청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본청 구내식당 밥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논리로 응수했다. 동민과 붙어 다니느냐고 더 이상 본청 이야기를 하지 않게 돼서 현민도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현민이 잊고 있던 일을 동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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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이 났다. 이제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동민과 진호는 생각보다 잘 맞는 파트너였다. 동민도 이제 진호의 아래에서 서로 합의 하에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잠시 긴장을 풀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뛰어들어와 동민에게 안겼다. 기습인가 싶어 경계하던 진호는 맥이 탁 풀렸다. 현민이었다.
그때까지도 현민은 울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동민을 꽉 껴안은 현민은 동민에게 매달렸다. 동민은 반은 감동하고 반은 웃음보가 터져나갈 것 같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껴 안고 있던 현민이 팔을 풀어내며 동민에게 말했다.
식권 돌려주러 왔어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현민아.
형은 정말 바보에요. 형은 머리만 좋았지 중간 달리기 같은 건 평생 못할 인간이야.
울면서 현민은 동민에게 따지듯 소리쳤다. 동민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토닥토닥 동민이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손길에 현민은 아얘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식권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동민은 현민이 한 모든 말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동민은 평생 이렇게밖에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지 말라고 잡는 대신 본청 밥이 얼마나 맛이 없는지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그때서야 현민은 알 수 있었다. 동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민이 진호 밑에서 일을 한 것도, 그리고 그게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수십 장의 보고서로 가르쳐 준 것이다. 현민이 그 자료를 바탕으로 본청에서 수사 본부를 꾸린다고 해도 동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식권과 같이 묶여있는 그 자료를 보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동민은 항상 앞 만보며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 전력을 다하는 숨막히는 달리기에 곁엔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다. 함께 달리려면 동민이 하는 만큼 전력을 다해 달려야 했다. 한때 현민은 동민이 곁에서 달리는 사람이 뒤 쳐질 때 결코 쉬어 가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동민은 중간을 달려 뒤따라오는 사람을 배려 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에 동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따라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현민은 넘어질 때 자신을 잡아 준 동민의 손길들을 기억했다. 그 기억에 의지해 동민은 스스로 일어나 자신을 따라 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 중간을 달리던 현민이 지쳐 쓰러질 때면 동민은 잡아 일으켜 주는 대신 지금처럼 현민을 기다릴 것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따뜻한 손을 내민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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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을 보고 있자니 진호는 한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렇게 동민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현민이 본청 보내달라고?
진호에게 항복을 선언하며 동민은 현민의 거취를 조건으로 내 걸었다.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 동민이 마지막까지 부르는 이름이 현민이 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현민은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본청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 현민이 다시 돌아오면 받아 달라고.
진호는 인상을 썼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 건가 싶었다. 동민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가만히 미소 짓기만 했다. 퇴원 후 동민은 전과 달리 어딘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환영 인사를 받으며 많은 후배들이 건넨 말이기도 했지만 진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동민은 여전히 예전의 동민이었다. 돌이켜 생각 해 보면 모든 퍼즐조각들이 맞아 떨어졌다. 동민은 진호가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민을 받아 달라는 딜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현민의 말처럼 동민은 정말 중간달리기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행복해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진호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만 넘어가 주는 거야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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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담배 냄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상민은 처음에 여름감기에 오래 시달린 나머지 헛것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 가면 갈 수록 상대의 얼굴은 점점 더 또렷이 다가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동민은 테이블에 앉아 능숙한 손놀림으로 쌓아 올린 칩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동민의 옆자리에는 현민이 앉아 있었다.
웬일이야. 동민이가 여기까지 행차를 다 하고.
응. 현민이한테 베팅하는 법 좀 가르치려고.
근데 어쩌지. 우리 이제 문 닫을 시간인데.
나 벌써 돈 걸었는데. 이 바닥에서 돈 걸은 손님은 판이 끝날 때까지 내 쫓지 않는 게 매너 아니었어?
말을 하면서도 동민은 현민이 한 무더기 칩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받아 칩을 판 위로 던지며 동민은 고개를 돌려 상민에게 속삭였다.
게다가 이번 판 내가 패가 아주 좋거든.
연신 초조한 듯 입술만 깨물고 있던 현민이 칩을 전부 다 판 위로 밀어 넘어트리며 말했다.
올 인이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동민은 나머지 칩을 전부 다 걸었다. 동민은 웃으며 현민에게 말했다.
까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제가 스트레이트 플래쉬일 수도 있죠.
그럴 리는 없어. 내가 그거거든.
동민은 깔려있던 카드를 뒤집어 숫자를 내 보였다. 현민의 카드는 투페어였다.
너 투페어로 나한테 덤빈 거야?
제 블러핑이 성공 할 수도 있죠!
까분다 또.
여긴 왜 온 거야.
상민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사뭇 진지한 그 태도에 동민 역시 더 이상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지 않았다. 상민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쓸데없이 재보거나 동민을 관찰하려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진호가 직접 보냈나?
아니, 아무 문제 없어.
동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칩을 쓸어 담았다. 상민은 동민이 칩을 모조리 쓸어 담아 환전소로 향하는 것을 지켜봤다. 칩과 돈을 교환한 동민은 마지막으로 상민을 보며 말했다.
그냥, 형 얼굴이나 보러 온 거야. 진호랑은 먼저 인사 했는데 나랑은 안 했잖아.
밖으로 나가는 동민에게 현민이 재빨리 따라 붙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두 사람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상민은 한숨을 내 쉬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것이 무언의 경고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일이 힘들어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열어 진호에게 전화를 걸며 상민은 생각했다.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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