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그냥 머리 좀 긁힌 정도라면서요!"
"긁혔지, 깨진 전구에 깊게."
동민의 말에 현민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게 지금 좀 긁힌 정도의 몰골이라고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의 준석을 바라본다. 준석은 작은 머리통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마치 머리털 난 미라같다. 뒷통수 쪽에는 출혈로 인해 두텁게 거즈를 댄 탓에, 기이할 정도로 뒷머리만 커 보인다. 그런데 이런 몰골을 하고도 준석은 웃으면서 현민을 바라본다. 내가 딸기바나나 주스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딱 사가지고 왔대. 헤헤헤, 준석이 웃자 현민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그만 웃으라는 뜻으로 준석의 손에서 딸기바나나 쉐이크를 빼앗으니, 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현민을 바라본다.
"머리 다치더니 정신도 이상해 진거에요? 강도당했다면서요,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요."
"자기 분수 모른 사람의 최후인거지. 슬픈 상황이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어."
"네?"
"누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어. 앞으로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당하기를 바래야지."
준석은 허탈하게 말하며 현민의 손에 들려있는 딸기바나나를 다시 가져간다. 그리고는 빨대로 한 모금을 쪽 빨아마신다. 음, 오랜만에 마시니까 아주 상큼한데? 준석은 현민을 내려다보며 헤헤 웃는다. 이 꼴에 기가 막힌 현민은 진호와 경훈을 올려다본다. 이 상태로, 괜찮은 거에요? 라는 눈빛으로. 그러자 경훈은 어깨를 들썩였고,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둘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진호와 경훈만이 곁을 지키고 있었을 때, 준석이 눈을 뜨고나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거였다. 내 분수를 알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고. 동민과 현민이 병원에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는 준석을 타일러도 보고 화를 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준석은 뚝심 있게, 나 같은 게 무슨 사랑이냐며 고개나 저을 뿐이었다. 심각하네, 현민은 한숨을 내쉰다.
"혹시 모르지. 이런 차림으로 있으면, 환자복 페티쉬가 있는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니 물건이나 빨아줄지."
"아, 쫌!"
동민이 능글거리면서 말하자 현민은 동민의 배를 살짝 한 대 친다. 동민은 자신의 몸에 닿기 전에, 현민의 손목을 잡더니 그대로 팔을 누른다. 아아, 아파요! 낑낑대는 현민을 보며 동민은 킥킥 웃는다. 그러더니 현민의 옆에 앉아 준석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직도 핏기가 제대로 돌지않아 허옇긴 하지만, 낮에 봤을 때보다는 좋아보인다. 낮에는 죽을 병에 걸린 사람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목소리에 힘도 없었다. 지금은 빨대 빨아먹는 힘도 있고,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듯 하다.
"예상보다 빠르게 좋아지네."
"의사도 그 말 하더라고요."
"축하의 의미로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얘 방금 지네 엄마한테 홧김에 커밍아웃 하고 왔어."
"...........어이 고딩, 너 이 쪽에 발들인지 고작 1주일도 안 되지 않았나?"
동민의 말에 준석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딸기바나나를 협탁 옆에 내려놓고 현민을 빤히 바라본다. 그것도 오늘 오후에 있었던 따끈따끈한 빅 뉴스지. 동민의 덤덤한 말에, 진호와 경훈도 놀란다. 커밍아웃이란 상당히 고민을 한 후, 천천히 해 나가는 것인데. 그런데 게이 사회에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애가. 그것도 자기 가족한테? 경훈은 나지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진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민의 맞은편에 앉는다.
"야, 핏덩이."
"핏덩이라뇨."
"누가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커밍아웃을 하래. 커밍아웃이 남의 집 소꿉장난이야?"
"형도 엄마한테 커밍아웃했잖아요, 고등학생 때."
"내가 말했지, 우리 엄마는 보통 사람 아니라고. 난 어느 정도 커밍아웃에 확신이 들어서 한 거야."
".......나도 확신 있었어요."
"뭔 확신."
진호가 따지듯이 묻자, 현민은 고개를 팩 든다. 그리고는 진호를 가만히 노려본다. 현민은 항상 이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른들은 자신을 어리다는 이유로 뭐든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훈계를 하려고 든다. 나는 이제 그냥 어리기만 한 사람이 아닌데. 1년 반만 지나면 성인이 되는, 성인의 문 앞에 서 있는 존재라구. 그런데 아직도 이런 애기 취급이나 받아야 하다니. 홧김이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였고, 나도 나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단 말이지. 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생각으로 현민은 당당히 진호의 시선을 받는다.
"엄마가 이걸 받아들여줄거란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구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말한 거에요. 있는 그대로, 난 이대로 살아갈 거니까. 난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 성향에 대해서 변태적이라고 말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어요."
"..........허."
"....뭐, 물론 충동적으로 한 건 맞지만."
현민의 말에 진호는 당찬 놈일세, 라며 혼잣말을 했다. 동민은 마치 100점 맞은 제자를 보듯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현민의 뒷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경훈은 현민의 말에 박수를 쳤다. 그런데 박수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준석은 순간 머리가 찡했다. 아, 어지러워. 높게 쌓아놓은 베개 위로 준석이 쓰러지듯 눕자, 경훈은 큰 소리로 박수치던 것을 그만두고 준석을 바라보았다. 어, 좀 크게 쳤나? 미안.
"알면 그만 쳐. 머리 울려. 어쨌든 고딩, 너의 스탠스는 그랬단 말이지. 뭐, 충분히 이해는 가네."
"그래도 무서워서, 집에서 도망 나왔어요. 분명 엄마는 아빠한테 말했을 거에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현민은 부모님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동민은 현민의 뒷통수에 얹어놓은 손을 내리더니, 현민의 통통한 볼을 검지손가락으로 쿡 하고 찌른다. 현민의 볼살은 부드럽게 쏙 하고 들어갔다.
"당연하지, 너 외동이라며.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놓은 외동아들이 게이라? 지금 너네 집에서는 어머니, 아버지가 진지하게 회의를 하고 계실걸."
".........두 분 다 절 혼낸 적도 없는 분들이라, 더 걱정이에요."
"그래도 설마 누구처럼 하나뿐인 아들 머리를 깨부수려고 하실까."
아 좀, 준석이 형 앞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현민이 동민을 째려본다. 그러나 동민은 그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일 뿐이다. 준석은 현민의 말에 상관없어, 라며 손을 살짝 내젓는다.
"너도 뒷통수가 찢어지면 여기 와. 의사가 아주 잘생겼더라구."
"형도, 그렇게 다치고 돈까지 잃어놓고 농담이 나와요!"
"난 진지한데? 너의 뒷통수가 당할 사고에 대한 보장을 해 주는거야."
준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얘기한다. 아니, 머리 다치더니 이 사람은 장동민씨를 닮아가는 건가? 자기가 다쳤는데 이런 농담이 치고 싶어? 현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 현민의 뒤로 동민은 웃겨 쓰러지기 직전이다. 눈물을 흘리며, 배를 움켜잡고 숨넘어갈듯이 웃어제끼고 있다. 형, 그만 웃어요! 경훈이 화를 내자, 동민은 아예 침대에 얼굴을 처박고 웃기 시작했다.
현민은 현관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면, 대체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밤새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어떤 방향으로 대화가 진행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괜찮을까, 현민은 초인종을 누를 준비 따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동민이 손을 뻗더니, 그대로 초인종을 눌러버린다. 벨이 울리는 소리에, 현민은 깜짝 놀라 동민을 돌아본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가만히 서 있으면 문이 스스로 열어준대? 이미 문은 열렸어, 어린이. 얼마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지, 나가보자고."
용기를 북돋아주려는듯, 동민은 현민의 손을 살짝 잡아준다. 그런데 괜찮은 척하던 동민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다. 당당한 척 하더니, 형도 나만큼이나 긴장이 되나 보다. 현민은 동민의 땀에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그런데 문이 철컥, 하는 소리가 나더니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문 틈 사이로 굳은 윤선의 얼굴이 나왔다. 윤선은 현민을 보더니, 옆에 서 있는 동민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현민이 혼자 올 것으로 예상했나보다.
"누구......시죠?"
"오현민 학생 하숙비 청구할 사람입니다."
"아, 형. 쫌."
"큭큭. 어머니께서 현민이와 이야기나누실 때 서로 오해가 있을까봐 찾아 온 게이 친구입니다. 실례지만,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윤선은 황당한 표정이다. 당연하지, 누군들 안 그러겠어. 어제는 아들의 커밍아웃, 오늘은 아들의 게이 친구. 일반인이 겪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들이 이틀 연속으로 몰아치니 황당하겠지. 동민은 그녀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미 시작해버린 일이니, 빠르게 매듭을 짓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동민은 문을 잡았다. 윤선은 잠시 망설이더니, 문을 활짝 열어 동민과 현민이 들어올 수 있게 한다. 아, 감사합니다. 동민은 그렇게 집 안으로 들어선다.
집 안은 매우 넓었다. 이게 몇 평인가, 적어도 60평형인 것 같은데. 동민은 속으로 감탄한다. 현민의 평소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집 넓이 한번 어마무시하네. 내 촉은 틀리지 않았구나, 싶어진 동민은 신발을 벗고 한 발짝 들어선다. 모델하우스라도 들어온 양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그런데 갑자기 현민과 자신의 사이로 무엇인가 빠르게 날아왔다. 그 물건은 신발장에 맞고 땡그렁, 소리를 내더니 현민의 발치에 떨어졌다. 현민은 그 물건을 잠시 얼어붙은 듯 가만히 바라만보았다. 동민은 곧 그것이 재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물건이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근원지를 찾아나섰다. 곧 윤선이 어디론가 달려가자, 동민은 던진 사람이 현민의 아버지인 저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보, 침착하게 말한다고 말 했었잖아요!!
"게이 친구라고? 뻔뻔하게 데려와서 인사라도 시킬 셈이었어!!!"
"여보!!!!!!!"
정현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얼굴이 어찌나 벌개졌는지, 동민은 정현의 얼굴에 실핏줄이 다 터졌을거라고 생각한다. 정현은 한 대 칠 기세로 부들거리며 팔을 들고 있었다. 윤선은 그런 정현의 팔을 붙잡고 그를 필사적으로 말린다. 어린이, 생각보다 너희 어머니가 널 많이 사랑하시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 동민은 현민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현민은 아빠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언제나 정현은 현민에게 인자한 아빠였으며, 현민이 무슨 말을 하건 우리 아들이 옳아! 라며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내가 이걸 맞았으면 크게 다칠수도 있었는데, 이런 건 신경이 안 쓰인단 건가? 현민은 정현을 가만히 바라본다.
"내가 너 변태놈들이랑 지내라고 지금껏 애지중지 키운 줄 알아!!"
"여보, 진정하고 현민이랑 진지하게 얘기를 좀 해봐요!"
"얘기? 저딴 쓰레기 같은 그림이나 그려놓고 남자 좋다고 소리지르고 나가면, 내가 오 그렇구나 할 줄 알았나보지?"
정현이 집안 한가운데 놓인 어떤 물체를 가리키며 화를 낸다. 현민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놓인 것을 바라보았다. 현민이 그것을 자신의 크로키북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찌나 갈기갈기 찢어놓았던지, 현민은 심지어 저것이 종이를 찢은 것이 아니라 가루를 쌓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너, 이제부터 외출 금지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바로 데리러갈테니, 집 학교 집 학교 이렇게만 살아."
"................"
"핸드폰도 끊고, 이제 그림도 그리지 마. 저딴 걸 그릴바에야, 그림을 못 그리게 해야지."
"........저 대학, 미대 쪽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저딴 걸 그리면 미대에서 어서오십시오 라고 해 준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그 입 닫아."
여보!! 정현의 말에 윤선이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른다. 동민은 그저 입을 삐죽 내민다. 중년의 배 나온 아저씨가 받아들이기엔, 게이란 상당히 무서운 존재인가보다. 뭐 그렇겠지, 이 바닥이 다 그런 걸.
"그리고 오늘은 학교 가지 마라.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야지, 돌은 소리를 하고 있으면 공부가 어떻게 되겠니."
"........저 안 돌았는데요. 그래서 그런 곳 갈 필요 없어요."
"뭐?"
"동성애자가 왜 잘못된거고, 왜 고쳐야 하는 건데요? 나는 이렇게 태어났어요! 이렇게 낳은건 아빠라고요!"
"거기서 한 마디 더 하면, 입을 찢어버릴테니 그렇게 알아라. 어디서 못된 걸 배워와서 사춘기를 이상하게 보내려고 들어!! 오냐오냐 해 줬더니, 내가 우스워 보여!!!"
정현이 낮은 목소리로 협박조의 말투를 내뱉자, 현민은 입을 다문다.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에 기가 눌려버린다. 현민은 지금껏 아빠에게 대든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면 항상 호응해주며 옳은 길을 제시해주는 아빠였기에, 지금껏 아빠의 말을 고분고분들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강하게 부딪히니, 제대로 된 반박을 못 하겠다. 어떡하지, 현민은 입술을 가만히 깨문다. 현민이 입을 다물자, 정현은 흥분을 간신히 누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현민을 보며 이야기한다.
"다시 말한다. 오늘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가자. 그리고 지금까지의 반항에 대한 벌로 외출은 당분간 금지다. 너의 그 생각을 완벽하게 뜯어고쳐줘야, 우리 아들이 올바른 사람으로 클 것 아니니. 앞으로 그런 생각 말고 아빠엄마랑........."
"그것 참 대단하네요. 18년 동안 살았던 아들내미를 개조하시겠다 이거네요."
정현의 말을 가만히 듣던 동민이 나섰다. 동민이 입을 열자, 현민은 눈을 크게 뜨고 동민을 가만히 바라본다. 정현은 처음 보는 동성애자 남자가 자신을 비꼬자, 다시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낀다. 옆에서 윤선이 대롱대롱 매달리듯 말리지 않았다면, 정현은 동민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날려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민은 얼굴이 시뻘개져 부들부들 떠는 정현을 바라보며 조소를 날린다.
"집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산다? 아예 애를 이중인격으로 키우시지 그러세요."
"어디서 변태놈이 들어와서 남의 집 일에 참견을 해!!!!!!!!!안 꺼져!!!!!!!!!!!!!!"
"그럼요, 이 집에서 게이라는 변태들은 모조리 꺼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 집에서 옳은 일이죠."
동민은 끄덕이며 현관으로 나선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신발을 신기 시작한다. 현민은 그런 동민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형, 이대로 가버리면 난 어떡해요? 현민의 마음속 소리가 들렸는지, 동민은 몸을 홱 돌려 현민을 바라본다.
"자, 선택의 기로다, 어린이."
"네?"
"이 집에서 개조인간이 되던지, 아니면 게이가 되어 이 집 밖에서 살던지."
선택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주어지지 않아. 라며 동민은 문을 열고 홱 나가버린다. 쌩 하니 나가버리는 동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현민은 자신의 부모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자신의 아빠와, 제발 나가지 말라는 듯한 엄마의 얼굴. 현민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한다.
"오현민. 너 나가면, 절대 아빠랑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아라."
"현민아, 제발.........엄마 한 번 봐줄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현민의 마음속 소리는 확고해졌다. 그제서야 현민은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이 말과 함께 현민은 그대로 신발을 꿰어신고 자신도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정현의 고함소리와 윤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현민은 못 들은 척 동민이 열어놓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동민이 닫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곧 하강하기 시작한다. 동민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선 현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더니 현민의 귀를 닦아내듯 손으로 천천히 어루만져준다. 마치 지금까지 들은 얘기는 잊어버리라는 듯이.
"이준석이, 바를 안 간다고?"
진호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바꿔 대었다. 이제껏 경훈이 자신에게 했던 전화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매일같이 게이바에 출석 도장을 찍는 놈이, 그런 놈이 이젠 그런 곳엔 평생 안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단다. 말도 안 돼, 퇴원하면 바에서 퇴원축하파티를 성대하게 열려고 계획했는데! 진호가 분개하자, 경훈도 같이 분개하기 시작한다.
- 내 말이!!!!!! 근데 죽어도 안 가겠대. 또 그 꼴 당하면 어쩌냐고.
"이해는 가지만, 앞으로 죽을때까지 안 가겠다는 말은 무슨 소리야."
-어차피 그런 데 가봤자 다른 사람 눈테러랍신다.
"아.........진짜, 그 놈 꼭 잡아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패고 싶네. 그 강도놈 하나 때문에 애가 완전히........"
진호는 머리가 아파져 창고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는다. 강도 하나 때문에, 안 그래도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에 패대기친 애가, 이제는 아예 땅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다. 이 분노를 강도놈을 찾아 풀고싶은데, 경찰의 말로는 잡을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낮다고 한다. 주변에 CCTV도 없고, 둘이 같이 탔었던 택시 번호도 모르고. 증명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경우에, 상황을 증명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카드 사용한 곳에 찍힌 CCTV도, 그 놈이 하도 얼굴을 꽁꽁 싸매서 신원조회가 불가능 하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일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뭐, 피해자 분이 동성애자분시라면서요. 그 분이 남자 꼬셔서 이렇게 되었으니 뭐, 쌍방과실 아닙니까?'
진호는 이렇게 말하며 낄낄대고, 지네들끼리 쑥덕거리는 경찰들 앞에서 망연자실했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이란 강도짓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은, 그런건가. 진호는 붕대를 싸매고 체념한 듯이 웃고 있는 준석의 모습을 떠올린다. 강도도 잡아주지 못하고, 600만원이라는 금액적 피해마저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진호는 기분이 좋지 않다. 미안해, 준석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핸드폰 너머로 비슷한 한숨이 들려오는 것을 보아, 경훈도 지금 자신의 마음과 비슷한가 보다.
"일단, 오늘 퇴근하면 바로 병원으로 갈께. 나랑 바톤터치해."
- 뭔 바톤터치, 빨리 와. 병원에서 기다릴께.
".........응? 너 바 안가?"
- 혼자 가면 무슨 재미야. 이준석 다 낫거든 같이 가자.
"김경훈, 요즘 좀 다시보인다?"
- 반하지는 마라. 나 키 작은 남자 안 좋아해. 장동민에서 김경훈으로 짝사랑 타겟 바꾸지 말라구.
아오, 이게 진짜. 진호가 짜증을 내자 경훈은 킥킥 웃어댄다. 이제 이준석 저녁 먹여야겠다. 끊을게, 빨리 와라. 경훈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진호는 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젓고는, 몸을 일으킨다. 재고 처리는 다 끝났고, 이제 매장 한 바퀴 돌아나 볼까. 잠시 기지개를 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매장으로 나선다. 진호가 매장을 돌기 시작하자, 각종 코너에 있는 점원들이 진호에게 인사를 건넨다. 홍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진호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매장을 돌아다니며 모든 점원들에게 인사를 한다. 누가 보면 임금이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줄 알겠다. 그렇게 매장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누군가 진호의 팔을 살짝 잡아온다. 누군지 보려고 몸을 돌린 진호의 눈에,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도 못한 인물이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진호씨."
요환이다. 왜 병원에 안 가고, 이 의사가 여기에 있지? 진호는 의아해져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항상 긴 흰 가운을 입던 요환은, 오늘은 어두운 청색 남방을 입고 있다. 얼굴이 밝은 톤이어서 그런지, 어두운 색도 잘 어울린다. 요환은 반가운 표정으로 진호를 빤히 바라본다.
"여기서 근무한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저도 의사선생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뭐, 제가, 혼자 살아서요. 장 좀 볼까하고...."
"댁이 이 백화점 근처이신가보네요."
진호의 말에 요환은 뭐, 그렇죠. 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뭐, 그런가. 진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 지금 일하는 중이거든요. 나중에 병원에서 뵙죠. 그럼 이만. 몸을 돌려 저쪽으로 가 버리려는 진호를 보며, 요환은 당황한다. 어, 안 되는데. 이대로 보내버리면 기껏 온 이유가 없어져 버리는데!
"아, 저 진호씨."
"네?"
"저녁, 언제 한가하세요? 저랑 같이 저녁드시죠."
"저녁이요?"
진호는 의아해져 요환의 말을 되묻는다. 무슨.... 진호가 당황해하자, 요환은 쑥쓰러운 듯이 웃는다. 그러더니 진호의 눈을 마주보지 않고 진호의 왼쪽 다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한다.
"저, 지금 데이트하자고 하는 건데."
요환의 말에 진호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요환을 바라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리액션의 전부였다.
현민은 오늘 하루종일 정신이 없었다.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모든 부모님의 연락을 끊어버리고, 학교에서는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 있었던 일로 인해 저녁때까지 현민에게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학교로 엄마아빠가 찾아오거나 전화를 했을거라는 현민과의 예상과는 다르게, 학교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정문의 말은, 오늘은 현민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정문은 좀비처럼 늘어져있는 현민의 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빨리 커밍아웃을 했어..."
"..........하아........"
"집은, 어떡하려고. 안 들어갈거야?"
"일단 며칠은 동민이 형네서 잘거야."
"울고불고 난리를 하더만, 결국 그 아저씨랑 잘 되어가나보네."
"지, 진짜? 그래보여?"
참 나, 지금까지 우울해서 늘어져있더니. 그 아저씨 얘기만 나오면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입이 귀에 걸려있다. 무나, 진짜 그래보여? 정문의 말 한마디에 기대를 하고 좋아하는 현민이 오늘따라 너무나 한심해 보인다. 머리를 교과서로 한 대 툭 치는데, 저녁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학교 안에서 요란하게 울린다. 복도 밖에서 공룡 떼가 지나가는 듯한 엄청난 질주소리가 들린다. 쯧쯧, 저러다 학교 무너지지. 정문은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얼른 석식 먹으러 가야지. 그런데 현민은 빠르게 가방을 싸기 시작한다.
"야자 안 해?"
"안 한 지 1주일이 넘어가는데 갑자기 웬."
"혹시나, 해서. 너랑 먹던 석식이 그리워진다."
"치, 무니 넌 친구 많으면서. 엄살은. 나 간다."
현민은 정문에게 손을 흔들고는 교실을 뛰쳐나간다. 오늘 학교가 끝나면, 동민이 데리러 오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형 밖에서 많이 기다리겠다! 동민을 볼 생각에 현민은 신이 난다. 가족과 싸웠다는 슬픈 일보다, 동민을 본다는 사실이 기쁜 현민이다. 역시 사랑의 힘이란, 크고 큰 것인가 보다. 현민은 신이 나 계단을 3칸씩 뛰어내려간다.
아, 내 담배! 내놔라, 니 돈으로 니가 사! 친구의 말에 창엽은 정강이를 걷어 찬다. 좀 한 대 빌려주면 죽기라도 하냐.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 목 안이 탁 트이는 것 같다. 하아, 점심시간 이후로 한 대도 못 피웠다고. 체육한테 들키면 귀찮아지니까. 창엽이 킥킥 웃으며 잇새로 담배연기를 내뿜자, 패거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저녁시간에 많이 피우고 가자고. 그런데 쭈그려앉아 있던 패거리중 한 명이 주차장 쪽을 내려다본다. 뭐야, 학교 주차장에 웬 처음 보는 새끈한 차가 있네?
"야, 저 차 봐."
"어디? ...오오 - 겁나 비싸 보이는데? 저런 차 가진 선생이 있던가?"
"기술 아냐? 그 할아범 얼굴이랑 안 맞게 옷 하나는 비싸 보이던데."
"그 늙은이가 왜 저런 걸 끌고 다니냐....... 야, 운전하는 사람 못 보던 사람인데?"
패거리들의 대화에 창엽도 관심이 생긴듯, 차로 시선을 옮긴다. 운전석에는 웬 못생긴 남자 하나가 멋지게 머리를 왁스로 세워올렸다. 얼굴이랑 머리랑 전혀 어울리지가 않네, 차도 안 어울리고. 창엽의 말에 패거리들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 때, 어디서 힘찬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학교 애 하나가 주차장 쪽으로 달음박질쳐 내려온다.
"야, 저거 오현민이다."
"오현민? 그게 누군데?"
"왜, 저번에 최창엽 너가 이쁘다고 한 애 있잖아. 최정문. 걔 남자친구."
"둘이 사귀는 것 같지는 않던데."
아, 최정문이랑 붙어다니는 그 놈인가. 한 대 패고 싶었는데. 창엽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현민을 아니꼽게 내려다본다. 현민은 신이 난 듯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내려왔다. 그러더니 못생긴 남자가 탄 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둘이 조카랑 삼촌인가, 싶어 창엽이 계속 차 안을 바라본다. 그런데 현민과 못생긴 남자가 앉자마자 진하게 키스를 하는 게 아닌가. 창엽은 그 광경에 놀라 담배를 떨어뜨린다.
"야, 씨, 이발..... 저거 지금...."
"........미,친.....저거.....게이야?"
대박이다. 라며 패거리는 경악을 감추지 못한다. 창엽은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핸드폰을 꺼낸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켜고, 두 사람을 화면에 담는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현민이 남자와 키스하는 사진이 찍힌다. 야, 최창엽, 뭐하는 거야? 패거리 중 한 명이 창엽을 바라본다. 그러자 창엽은 킥, 하고 조소를 날린다.
"게이새끼가, 진짜 있구나. 한 번 엿돼보라고. 큭큭."
창엽은 웃으며 계속해서 차를 바라본다. 남자는 현민에게서 입을 떼더니, 차에 시동을 건다. 그러더니 차는 빠르게 학교 밖으로 빠져나간다. 창엽은 좋은 협박거리가 하나 생겼네, 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진다. 야, 쟤 페이스북은 하냐? 아니면 카스? 창엽은 웃으며 여러 앱을 누른다. 그리고 발로 담배를 밟더니 강하게 문지른다. 담배는 창엽의 발길질에 짓이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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