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에 없던 비는 오전 내내 쏟아지다 약속시간이 다 돼서야 그치기 시작했다. 동민은 하여간 기상청은 믿을게 못된다며 중얼거리며 옷장을 열었다. 가볍게 입고 와요. 아까 주고받던 메시지가 머릿속에 맴돈다. 가볍게 가 어떤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답지 않게 꽤 고민하다가 아무 무늬 없는 티셔츠에 가디건을 꺼내 입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볍겠지. 그 생각을 하자 한숨이 폭 나왔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런 상황. 잘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16살이나 차이나는 어린이한테 휘둘리고 있다. 빗방울이 아직도 조금 맺혀있는 창문을 본 동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꺼내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볼 건데도 보고 싶다. 아마 이렇게 휘둘리는 건 제가 더 좋아해서 그러는 거겠지. 인정해야 하는데도 이상하게 자존심을 부리고 싶었다. 오전 내내 쏟아지던 비 때문인지 날이 제법 쌀쌀했다. 겉옷을 입고 나온 건 좋은 선택인 듯했다.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를 서성이려니 익숙한 뒤통수가 보인다. 이름을 부르려다 귀찮아져 가까이 다가갔다. 어깨를 툭 건드리니 화들짝 놀라며 쳐다본다. 뭘 그렇게 놀라냐고 귀신이라도 봤냐고 하니 웬일로 약속시간을 딱 맞춰 나왔냐 물었다. 아씨 이게.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부터 나왔다. 현민은 웃는 동민을 쳐다보다 손을 살짝 잡았다 놓는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카페까지 와서 아이스티를 마셔요? 현민은 괜히 툴툴 거렸다. 너는 핫초코 마시면서. 속으로 말을 삼키고 현민의 입을 툭툭 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 웃어 보인다. 진동벨이 울리기 전까지는 말없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현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동민도 제 얘기하는 걸 좋아했지만 이 어린놈이 신나서 떠드는 걸 막으면서까지 할 얘기는 없었다. 그저 집중이 잘 안 될 뿐이었다. 현민이 얘기하는 동안 카페 안을 둘러보고 저녁 메뉴를 생각하고 적절하게 헤어질 시간을 생각해봤지만 얘기는 끝이 없다. “그래서 경훈이 형이..” “경훈이 얘기랑 준석이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어?” 기분이 나빠서 한 말은 아니었다. 쿡 찔러본 건데 정말 여태 그 둘 얘기만 한 모양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주 봤는데 뭐 더 새로운 말이 있을까. 잠깐 멈칫하는 제스처나 표정이 웃겼다. 오늘 서울에서 만난 것도 현민이 그전 날 경훈네 집에서 잔 덕이었다. 동민은 얘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져 아무 표정도 말도 없이 현민을 빤히 쳐다봤다. “형 지금 질투해요?” 실소가 터졌다. 김경훈이랑 친하게 지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살 더 먹었다고 그러는 건지. 동민은 일단 경훈을 탓하기로 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동민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현민은 대답이 없자 머쓱한 듯 볼을 긁는다. “형이 질투하면 좋겠는데 아닌가 보네요, 음.. 형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음..” 혼자 중얼거리듯 얘기한 현민은 뜬금없이 동민의 손을 잡았다. 카페는 넓었고 둘을 포함해 겨우 세 테이블 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생도 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동민은 그 사람들의 시선이 다 저희에게 오는 기분이 들었다. 뭐 하는 거냐고 말꼬리를 늘리며 잡힌 손을 빼내자 현민은 엉덩이를 살짝 들고 상체를 쭉 뺐다. 급작스레 가까워진 얼굴에 동민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음 형 보니까 키스하고 싶은데 키스해도 돼요?” “… 안돼 멍청아” “아, 역시 너무 오글거렸나” 현민은 아쉽다는 듯 손뼉을 친다. “어, 엄청.오글충 새끼야” “근데 좀 성공인 것 같은 게 형 방금 좀 뜸 들였어요. 맞죠? 그죠?” 아니거든, 너 앉을 때까지 기다려준 거야. 현민이 자세를 고치며 바로 앉는 동안 동민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나 마나 귀가 새빨개졌을 텐데 언질도 없는 현민이 좀 짜증 났다. 다시 한숨이 났다. 자존심 부리는 게 더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카페 밖을 보자 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차 안에 우산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기에 더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집에 가냐?” “네, 이따가 형이랑 저녁 먹고 가죠. 왜요? 데려다주시게요?” “어 내일 데려다줄게” 동민은 비가 내리는 밖을 쳐다보며 말했지만 현민은 요 근래 본 모습 중에 제일 밝게 웃고 있다. * 예전에쌌던똥을던지고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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