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은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 때문이었다.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 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난 네가 누군지 몰랐어
너는 햇살이었고, 바람이었고, 즐거운 충동이었지
너는 가루같은 물방울이었고, 춤이었고, 맑고 높은 웃음소리
항상 내게 최초의 아침이었어
- 검고 푸른 날들 / 황강록

나의 하루는 아침에 눈뜨기 전에 가장 멋진 하루
이 책은 펼치기 전에 가장 읽고 싶었던 책
이 음식은 먹어보기 전에 가장 맛있는 음식
저 산은 정상에 오르기 전에 가장 신비로운 산
그 나라는 도착하지 않았을 때 가장 가고 싶던 나라
당신은 내가 만나지 않았을 때 가장 두근거렸던 사람
사랑은 몰랐을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관념
녹말과자 같은 눈을 껌벅거리며 나는 산다 하염없이
- 나의 폐허 / 김나영

그냥 당신을 질투함으로써 좋아하기로 한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눈부심이 나를 그렇게 가난하게 한다.
사랑하면서도 이토록 가난한 것은 당신이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무섭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시간은 체온 같았다
오른손과 왼손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놓았다
가장 잘한 일과
가장 후회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 체온 / 장승리

그렇게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국화꽃 떨어지듯 하나 둘 사라져갔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시자면 가을 내내 술을 마셔도 모자랄 일이겠지만,
뭇꽃이 무수히 피어나도 떨어진 그 꽃 하나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날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어나면 알게 될 일이다.
가을에는 술을 입안에 털고 나면 늘 깊은 숨을 내쉬게 된다.
그 뜨거운 숨결이 이내 서늘한 공기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그동한 허공 속으로 흩어진 내 숨결들.
그처럼 내 삶의 곳곳에 있는 죽음들.
가끔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 청춘의 문장들 中 / 김연수

당신도 나를 사랑했음 좋겠다.
당신이 나에게 기댔으면.
내가 당신을 얼마 전부터가 아닌 십 년 전부터 사랑했으면.
넘어져도 당신 앞이었음 좋겠다.
당신이 나에게,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달라고 졸랐으면 좋겠다.
그래도 꼭 성공하라는 말은 안 했음 좋겠다.
당신이 좋다, 라고 하루에 스무 번씩 혼잣말하기.
당신이 좋아하는 고래를 보러 다시 함께 제주도에 가기.
서로를 떠났다 돌아오기.
나, 당신을 잊어도 당신을 사랑했음 좋겠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줄
까맣게 몰랐다
- 눈이 멀었다 / 이정하

혈육과 친구를 잃은 슬픔도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의 일부이다.
그들이 그들의 죽음을 온전히 죽게 하고 그들의 울음을 온전히 울 수 있게 하라.
우리에게는 그들의 슬픔을 '관람'할 권리가 없다.
- 느낌의 공동체 中 / 신형철

노란색 포스트잇에 '밥 꼭 챙겨 먹어요'라든가 '내일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라고 써서 냉장고에 붙였던 글자들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제 그만 할래요'라고 바꾸고 잠적해버린들 그것이 그만둘 수 있는, 버릴 수 있는 마음이던가.
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나랑 같이 있을 때 나를 좋아한다고 많이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어.
나도 같이 있을 때는 소중하게 여길 테니까.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니까 말이야.
- 리허설 中 / 무라카미 류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연꽃만 칭찬하지만
연꽃을 피울 만큼
내가 더럽지 않다는 걸
왜 몰라
내가 연꽃이 사는
집이라는 걸
왜 몰라
- 왜 몰라 / 이장근

나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눈이 내리고 있어.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울고 있는 내게 나도 놀란다. 사랑은 조용히 끝이 나고 있다.
- 샐러드 기념일 中 / 다와라 마치

당신이 왔다간 내 마음에
나 혼자 앉아 나는 가끔 울고 있다
당신이 새겨 놓은 흔적을 보면
얼마나 외롭게 내게 머물다 갔을까
나는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당신은 아파서 눈물이 났을 것이다
- 꽃은 미쳐야 핀다 / 이근대

미안, 그 사람의 얘기를 오래 끌어 미안.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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