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좇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쫓아오는 사람이 잇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오셔요 / 한용운우리는 즐겁게 길을 잃고숲인지 호수인지도 모르고 미끄러지지깊어지지 않은 수면을 보며흔적 없는 세계에 살고 싶은 바람처럼다정할 수 없어서지지 않는 태양처럼 만발하지미끄러져 와서나는 역사가 없어요여긴 날마다가설무대어제는 오늘에 닿지 못해요새들이 두고 간 빈집에서 만났으면 해요그러자고나는 또 미끄러지고좀 전으로부터 미끄러져왔으니앞으로 미끄러질어떤 장소에도 없는 우리가춤을 추기로 해요끝내 미끄러지자고손을 잡고 울어요어깨 위의 물방울이 미끄러질 때물방울이 기억하는 한 세계가자꾸 미안한 얼굴로 말 걸어올 때우리의 오늘이 다시 시작되죠내일이 없어 즐거운 방향들- 미끄러지는 세계 / 이승희길을 걷다가문득그대 향기 스칩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꽃도그대도 없습니다 혼자웃습니다- 향기 / 김용택하루 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 졌다너를 까맣게 잊고도 꽃은 피고이렇게 날이 저물었구나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난다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나다가꽃을 올려다본다. 무심한 몸에 핀 흰 꽃,사람들이 꽃을 두고 먼저 간다꽃이 피는데, 하루가 저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네가 잊혀진다는 게 하도 이상하여내 기억 속에 네가 희미해진다는 게 이렇게 신기하여,노을 아래서 꽃가지를 잡고 놀란다꽃을 한번 보고 내 손을 들어 본다젖은 옷은 마르고 꽃은 피는데아무 감동 없이 남이 된 강물을 내려다본다수양버들 나뭇가지들은 강물의 한 치 위에 머문다수양버들 가지가 강물을 만지지 않고도 푸른 이유를 알았다살 떨리는 이별의 순간이희미하구나, 내가 밉다 네가 다 빠져나간내 마른 손이 밉다, 무덤덤한 내 손을 들여다보다가네가 머문 자리를 만져본다,잔물결도 일지 않는구나, 젖은 옷은 마르고미련이 없을 때너를 완전히 잊을 때,꽃이 무심하다는 것이이상하지 않다. 사랑은한낱 죽은 공간, 네 품속을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자유다네 모습이 지진 없이 그대로 보인다실은, 얼마나 가난한가. 젖었다가 마른 짚 검불처럼 날릴네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꽃이 때로 너를 본다는 걸 아느냐보아라! 나를너를 까맣게 잊고도 이렇게 하루가 직접적인 현실이 되었다젖은 옷은 마르고, 나는 좋다너 섰던 자리에 꼭 살구나무가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냐이 의미가, 이 현실이 한밤의 강을 건너온 자의 뒷모습이다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 고통과 통과가 자유 위의 무심이다젖은 옷은 마르고, 이별이 이리 의미 없이 묵을 줄 몰랐다꿈속으로 건너가서 직시한 저 건너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 꽃은 피고젖은 옷은 마른다- 젖은 옷은 마르고 / 김용택풀밭 위에서 식사를 했다바구니를 열고샌드위치를 먹었다바구니는 금방 비었다풀밭 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기타를 떨어뜨렸다풀들이 이리저리 쓸려기타를 찾을 수 없었다기타 없이 노래를 계속했다풀들이 자라노래를 덮었다풀들이 자라노래 위를 떠도는입술을 덮었다- 소풍 / 이수명겨울엔 귀에서 물이 흘러요헤어지면서 나는늘 그런 인기척을 가져요나는 안개를 마시며지나가는 열차한없이 길고 지루한 행간이 터널을 지나면수염이 좀 많아 질까요소문처럼여러 철자들을 방문하고너는 다정한 머리털을 가졌지당신은 눈을 감고울 수도 있고당신은 눈을 뜨고도사랑을 한대요그런 인기척으로어떤 문장을 하나 지었나요?네가 술 한잔 사라!오늘은 노동절이니오렌지처럼 오늘은네 옆구리에 꼭 붙어 있을게해어지면서 다정해지는 습관처럼늘 발이 차가운 당신처럼자백을 사랑해- 자백을 사랑해 / 김경주이 곳에서 나는 남아돈다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빛이 남아돌 듯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여기저기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벽 대신 벽,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바닥대신 바닥,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가뭇없이 물 위에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마흔 일곱,오후 네 시, 내가 아무런 주문도 하지 않았으나오늘 내게로 배달 된 이 시간을남아돈다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잉야의 시간 / 나희덕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내 가슴에 잠겨차마 숨 못 쉬겠네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강물 소리,돌려주겠네- 서울의 겨울 12 / 한강내가 손을 내밀면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내가 볼을 내밀면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깊어가는 가을과 함께자꾸자꾸 자라나다람쥐 꼬리 만큼은 자라나내 목에 와서 감기면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창살에 햇살이 / 김남주닭이 울어 해는 뜬다당신의 어깨 너머 해가 뜬다 우리 맨 처음 입맞출 때의 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떨림으로 당신의 어깨 너머 첫닭이 운다 해가 떠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다 닭이 울어서 해는 뜨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처음 눈 뜬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울었기 때문에 세계가 눈을 뜬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하고 나하고는 이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더도 덜도 말고 냉수 한 사발 마시자 저 먼 동해 수평선이 아니라 일출봉이 아니라 냉수 사발 속에 뜨는 해를 보자 첫닭이 우는 소리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우리가 세상의 끝으로 울음소리 한번 내질러보자 - 신년시 / 안도현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시간은 체온 같았다 오른손과 왼손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놓았다 가장 잘한 일과 가장 후회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체온 / 장승리마음속에 한 여자가 있네비가 와도 떠내려가지 않는 여자가끔은 마음속에졸졸대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리네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버린세월침묵이 두려워지나간 유행가를 불렀네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변하지 않는 건 슬픔밖에 없네오랜 세월기다리고 있는 건 슬픔밖에 없네마음속에 한 여자가 살고 있네바람이 세차도 날려가지 않는 여자그 여자의 마음속에나는 없네- 따라부르지 않는 노래 / 김재진나는 너에게 좋은 추억따위로남고 싶지 않았다나는 너에게 경험이 되어주고자나를 통째로 내던져주었던게아니란 말이다너는 나를 무어라 생각했는가창밖에 빗줄기가 처량히 떨어질 때네 생각이 났다오들오들 떨며너의 우산을, 너의 품을 기다렸던내 생각이 났다하얀 김이 폴폴 날 정도로 나에게 내달렸던너는 어디에 있는가사랑에 겨워 한껏 웃음지었던나는 어디에 있는가- 새벽이 가져다주는 처량함 / 류선우나의 연인은 말한다 우리가 아침에도 만나고 낮에도 만난다면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너는 조금씩 모르게 될거야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말한다우리가 늦은 밤에도 만나고 새벽에도 만나고 공원에서 들판에서도 만난다면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결국 영원히 모르게 될 것이고밤과 낮 공원과 들판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겠지어째서 어째서 사랑은 그런 것일까 나의 연인은 소리친다입 닥쳐 개 어째서라니 네가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수록너는 더 미친 듯이 사랑에 목말라 해야 하고이곳에 없는 나를 찾아 밤새도록 공원을 숲 속을 헤매게 될 거다우리가 아침에도 낮에도 공원에서 들판에서도 만난다면사랑은 역시 그래야 하는 걸까 나의 연인은 돌아선다어째서 나를 개년이라고 부르는 네가 누구인지너에게 개년이라고 불리는 내가 누구인지또 우리가 무엇인지 너의 말처럼 영원히 모를 수도어쩌면 조금 알게 될 수도 있을 거다 모르는 거니까우리들 언젠가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지갑을 훔쳐 과자와 홍차를 사먹은 적이 있어이 사실을 아빠가 알게 된다면 우리를 개집에 넣고혹독하게 매질을 할 수도 있겠지하지만 이 밤의 나는 너의 사랑을 받는 개년이다 어쨌든 말이다우리가 누구인지, 아니 네가 누구인지나의 첫번째 사랑이 어떻게 달아나고 마는지 똑똑히 알게 될 때까지는- 러브인개년 / 황병승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아름다운 노래약속을 품에 안고꿈 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빛의 소음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환몽의 정거장에 선유령이 된다- 낱말 / 박상순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