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인 줄 알면서 만났다재앙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믿었다재앙보다 더 크고 미련한 것헤어지면서사이좋게 나눠 가졌다사이좋게 목록을 늘려나갔다잿더미를 깔고 앉아살아보자고살아보자고더 크고 미련한 것을 - 사랑 / 김언자두가 열렸다자두나무니까자두와 자두나무 사이에는 가느다란 꼭지가 있다 가장 연약하게 처음부터 가는 금을 그어놓고 두 개의 세계는 분리를 기다린다이것이 최고의 완성이라는 듯이난 말이지정신적인 사랑 , 이런 말 안 믿어다행이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카페 루이제에서 자두나무가 있는 정원까지 오는 동안 혼자 흐릿하게 떨리는 게 순수한 사랑이라고나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시시각각 자두가 붉어지고 멀어지고노을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다최고의 선은 각자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그러나 가끔 이상하게 멈춘 채 돌아보게 된다자두나무는 자두를 열심히 사랑하여 익히고 떨어뜨리고 나는 사랑을 붉히고 보내야 한다사람이니까그리고 망설일줄 아는 능력이 있다- 다소 이상한 사랑 / 김이듬가위로 오래된 애인의 눈을 오린다우리는 몇 장인지불 꺼진 눈마다 멍이 들어 밤을 앓는다비가 내려 아스팔트 바닥에 난 점을 헤아리는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많은 줄 몰라서, 낮에도박쥐처럼 헐떡거리며서로의 주머니를 더듬다가 눈이 젖고구름에서 빈 캔 구겨지는 소리가 날 때목이 말라 골목으로 나서면몸에 오래 고여 있는 것들이 굳어간다예를 들면, 펜이다점점 어두워지는 문장을 쓰다 수명이 다하고키스는 길고너는 내 몸에 낙서를 한다 내 얼굴,비를 맞다가 문득구름에 취해 희미해지고 담뱃불에 취해환해지는 게골목을 떠도는 사람들의 얼굴이라고너는 내 골목을 다 외웠는지- 별거 / 김준현아름다운하늘 밑너도야 왔다 가는구나쓸쓸한 세상 세월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그날, 우리 왜인사도 없이지나쳤던가, 하고- 그 사람에게 / 신동엽그리울 땐눈을 감으면별이 되어떠난 사람이 온다서로 목숨이었던 때의빛으로가슴을 부빈다- 연가 / 김초해세상에! 네 몸 속에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헤집고 갈 수가 없구나누가 가르쳐주었니?눈송이처럼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남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낙인 찍는 법을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갓 세상에 태어난 어린 새들이모두 이곳으로 몰려와 털갈이라도 하고 갔니?어린 시절 뜬금없이 재발하던 결핵이라도 도졌니?몸 속이 너무 자욱해내 발등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이 세상 시간 밖으로 쫓겨난 건 아니니?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그 별이 터져서 네 몸 속에서 쏟아지고 있는가 봐이제로부터 이 별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야모든 삶의 밑바닥에는 끔찍하게 무겁고, 끔찍하게힘들고, 끔찍하게 뜨거운 것 있잖아?그 뭉쳐진 것이 터지는 날세상에! 눈보라처럼 흐느끼는 바이러스 같은 것!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 자욱한 사랑 / 김혜순거리에 비가 내리듯내 마음에 눈물 내린다가슴 속에 젖어드는이 설레임은 무엇일까땅에도 지붕에도 내리는빗소리의 부드러움이여답답한 마음에아, 비가 내리는 노랫소리여울적한 이 마음에이유도 없이 눈물 내린다웬일인가 원한도 없는데이 이유없는 크나큰 슬픔은 무엇인가이건 이유를 알 수 없는가장 괴로운 고통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는데내 마음 한없이 괴로워라- 내 마음에 눈물 흐른다 / 폴 베를렌느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 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만들어 님과 내가 얼어 죽을 망정 정 나눈 오늘 밤 더디 새시라 더디 새시라 뒤척 뒤척 외로운 침상에 어찌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열어보니 복사꽃 피었도다 복사꽃은 시름 없이 봄바람 비웃네 봄바람 비웃네 넋이라도 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넋이라도 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 그리더니 우기시던 이 누구입니까 누구입니까 오리야 오리야 어린 비오리야 여울일랑 어디 두고못에 자러 오느냐 못이 얼면 여울도 좋거니 여울도 좋거니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약 든 가슴을 맞추옵시다 맞추옵시다 아! 님이여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고 지냅시다- 만전춘별사추억 하나쯤은꼬깃꼬깃 접어서마음속 깊이 넣어둘 걸 그랬다살다가 문득 생각이 나면꾹꾹 눌러 참고 있던 것들을살짝 다시 꺼내보고 풀어보고 싶다목매달고 애원했던 것들도세월이 지나가면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끊어지고 이어지고이어지고 끊어지는인연인가 보다잊어보려고말끔히 지워버렸는데왜 다시 이어놓고 싶을까그리움 탓에 서먹서먹하고앙상해져 버린 마음다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추억 하나쯤은 / 용헤원사랑해라고 고백하기에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이보다 더 화끈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너무 좋아 뒤로 자빠지라는 얘기였는데그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면서 그 흔한 줄행랑에 바쁘셨다내 탓이냐 네 탓이냐 서로 손가락질하는 기쁨이 있었다지만우리 사랑에 시비를 가릴 수 없는 건 결국 시 때문이다줘도 못 먹은 건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시, 시, 비, 비 / 김민정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속인 것 때문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그대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행위는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감정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약속을 하는 자는 자신의 힘에 겨운 것을 약속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을 때, 그것은 겉으로의 영속을 약속한 것 뿐이다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섣불리 ‘영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비록 그때는 진심 어린 말일지라도 그 상대가 상처를 받기엔 너무 쉬운 일이니- 약속 / 프리드리히 니체어떤 날은 네가 무섭도록 보고팠다그러나 가장 절실할 때 널 찾지 않기로 했다그 숱한 그리움으로 여러 날을 앓고물빛 투명한 심상으로 너를 떠올릴 때도못내 널 찾지 않기로 했다어느 외진 바다 기슭에서수없이 파도에 씻겨 닳아진 차돌처럼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 그대로끊어질 듯한 기다림의 목울대 그대로혼자서 살아가는 날의 그 공허한 행복감쨍쨍 맑은 어느 날 높고 외딴 봉우리에흰 한숨처럼 감기는 구름인 듯사랑이여, 그때 홀연 내게 오려나- 기다림 / 김선태방에서 독재했다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이름하고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은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여름에도 연애를 해야한다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잠을 끌어당긴다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 박준십 년 전 꿈에 본파란 돌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난 죽어 있었는데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아, 죽어서 좋았는데환했는데 솜털처럼가벼웠는데투명한 물결 아래희고 둥근조약돌들 보았지해맑아라,하나, 둘, 셋거기 있었네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그 돌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그때 알았네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그때 처음 아팠네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난 눈을 떴고,깊은 밤이었고,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놓친 적도 있을까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그 푸른 그림자였을까십 년 전 꿈에 본파란 돌그 빛나는 내로돌아가 들여다보면아직 거기눈동자처럼 고요할까- 파란 돌 / 한강새소리가 높다당신이 그리운 오후,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잊는 것도 사랑일까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몇 짐이나 될까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안쓰럽다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저녁이 온다울어야겠다- 반음계 / 고영민추워나는 당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내 왼손은 당신의오른쪽 옆구리 속으로 쑥 들어가내 손은 잔인하구나당신의 옆구리는 두부 같구나손은 뜨듯한 것들 속으로 들어가당신의 옆구리는 어둡구나적막하구나한 번도 다다른 적 없는 자리에손이 닿아나는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인데당신의 몸 안을 잡고 있었을 뿐인데손에 살이 달라붙어 조금 울어또 조금 울어내 손은 당신의 깊은주머니가 되는구나일단 당신의 방향으로 와봤거든입 모양을 만들 틈도 없이당신의 가장 안쪽을 찌르고 있는칼끝이 되는구나- 두부 같아요, 당신 / 이원밤이 내린다 보이는 것 다 지우고들리는 것 다 막아서 저마다 홀로 되어 쓸쓸한밤이 내린다애인이여아직도 잠 못드는 애인이여 이 두려운 어둠 모두 휘저어블랙커피 마시는 나눠 마시고 오늘밤 나와 함께 죽을래- 사신 / 임영조사랑해라, 시간이 없다사랑을 자꾸 벽에다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그리고 얼굴에 문대라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보상이 없으며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는 것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 밖에 없는 것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없는 것그 후로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우주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그러다 어쩌면, 세상을 껴안다가 문득 그를 껴안고당신 자신을 껴안는 착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그 기분에 울컥해지기도 할 것이다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많은 걸 쏟아놓을 것이다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끌림 中 / 이병률확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