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다 가기 전, 이 꽃이 다 흩기 전
그린 님 오실까구 뜨는 해 지기 전에
밤샌 달지는 양지 어제와 그리 같이붙일 길 없는 맘세 그린 님 언제 뵐련
우는 새 다음 소린 늘 함께 듣사오면
- 그리워 / 김소월

연필인지 수첩인지 혹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써둔 쪽지인지, 그런걸 찾으려고 했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뒤죽박죽된 나의 추억들이
무작위로, 갑자기,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방 안 가득 흘러넘치는 추억 속에 방치되었다.
- 밀리언 달러 초콜릿 中 / 황경신

네가 고아원으로 떠나던 날의 그 이슬비를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 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지
- 도로시를 위하여 中 / 기형도

맘에 없는 그런 말들로 우린
서로 돌아갈 그 길도 모른 채 난
아직 녹슨 맘이여, 거기 남아 있다면
그대를 되돌려 주겠니
- 헤어진 사이 中 / 참새와 솜사탕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이름을 영영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았으나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단절이 달려왔다
우리는 서로 손을 놓아버렸다
고향이 없어졌다
나에게 막볕 내리꽂히는 대낮이 말했다
가라고
- 이름에 대하여 中 / 고은

당신을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미열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조금 웃었습니다.
내가 앓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하루 / 천양희

A, U, G의 아름다운 생김새
달의 속눈썹이 긴 줄 처음 알았지
너는 죽은 이름을 부른다
하얗게 얼어 쓰러진 철탑 꼭대기에
여름 반바지 입고 앉아
모든 절정은 왼쪽이거나 오른쪽 끝
검푸른 촛불의 흔들리는 발자국으로 가는.
너는 틀린 철자로 받아쓴다
고요한 철망 아래
연필 깎는 소리 들린다 얼음 발톱 깎는 소리
아니 눈 내리는 소리일지도
지금은 5월
너는 쓴다 검은 비닐봉지 날아오르고
빨간 꽃잎 찢어지는 소리
창백하게 잠든 얼굴 위로 촛농 떨어지는 소리
첫 올가미에 부드러운 목이 매달리는 소리
너는 쓴다
언제나 5월, 이라고
-5월의 첫 시집 / 진은영

하루 종일 울리던 심장의 고동 소리 그치고
공기 속에 무성하던 네가 내 마음을 떠날 무렵
그 근처의 어느 고요한 시간을 골라
나는 네게 이별을 약속한다
변하지 않은 사랑을 약속할 때처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때처럼
나는 슬프고 애절하여
불안한 눈으로 떨어지는 사랑을 응시한다
나를 까맣게 잊어줘
나를 모조리 기억해줘
마음에 얼룩진 낙서들이 의미 없이 흩어지고
조금 더 길어진 하루는 내 앞에 끝이 없다
- 밀리언 달러 초콜릿 中 / 황경신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 사랑의 시차 / 최영미

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 유리창을 닦으며 / 문정희

사랑하는 그대
이제 우리 다시 만나면
소중한 말은 하지 말고
그저 먼 허공이나 바라보다
헤어지기로 할까
귀신도 하나 울고 가는
저녁 어스름
마른 풀잎위로
가을비가 내린다
- 가을비 / 이외수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마음 여기 홀로 술 한잔을 마신다
이 나라 어두움도 모두 마신다
한마리 벌레처럼 잠을 자면서
어느 봄날 은혜의 날개를 달고
한마리 나비되는 꿈을 꾸면서
이 밤을 돌아앉아 촛불을 켠다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마음 여기 홀로 술을 마신다
- 풀꽃 술잔 나비 / 이외수

문득 행복하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기울고 있어서가 아니라
넌 지금 어떤지 궁금할 때.
많이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을 살았는지,
어땠는지 궁금할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보다
누구를 사랑해서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
낫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불가능한 사랑이어서,
하면 안 되는 사랑일수록
그 사랑은 무서운 불꽃으로 연명하게 돼 있지 않은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이유들을 아느냐고 묻고 싶다.
묻게 싶은 게 많아서 당신이겠다.
나를 지나간
내가 지나간 세상 모든 것들에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겠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넓은 바다에 도장 찍고
밝은 달에게 도장 찍고
내 마음에도 도장 찍었지만
바람같은 그대에게 도장 찍지 못했네
마음에 점만 찍고
도장 찍지 못했네
나는 바다에게 부끄러워
나는 달에게 부끄러워
점 점 점 부끄러워
나는 어두워졌네
- 마음에 점 찍기 / 천양희

지금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다면
당신 앞에서 우는 일.
그래도 우리는 이 생에서 한 번은 만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버릇처럼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그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끝내 배웅도 하지 않으려는가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 열차를 탔다 中 / 이정하
알징어들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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