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질녘에
당신이 그립습니다
잠자리 들 때
당신이 또 그립습니다
- 그리움 / 김용택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 근황 / 최승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류시화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 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 그대, 거침없는 사랑 / 김용택

너는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다
한때는 니가 있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걸 나는 볼 수 있었지
이제는 니가 없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나는 볼 수가 없다
내 삶보다 더 많이 널 사랑한 적은 없지만
너보다 더 많이 삶을 사랑한 적도 없다
아아,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을 심을 줄 아는 너
수시로 내 삶을 흔드는
설렁줄 같은 너는, 너는
- 너의 의미 / 최옥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별다른 이유 없이 헤어지고 나니 왜 지구는 자전 따위를 해서 밤이라는 걸 만들어내
나를 뜬눈으로 누워 있게 만드는지 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 달로 간 코미디언 中 / 김연수

오늘
가을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 간절했습니다
- 늘 보고싶어요 / 김용택

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
당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당신 위해
흰 눈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 길이 없어 中 / 최승자

사랑에 빠지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전에 없이 더 또렷해진다는 건 바로 그때 알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어떤 아름다움도 그리운 단 하나의 얼굴에는 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밤은 노래한다 中 / 김연수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 뿌리에게 / 나희덕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 빗장 / 김용택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할 말을 잊었다
잘 지내라는 작별에 우는
이 감상적인 저녁을 지나면
별들의 별자리를 털고 일어날 시간
옷소매에서 지워지지 않는 과거가 해마다 새로워진다
나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지치며 최선을 다한다
상처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우리는 항생제처럼 상처를 남발했어요
우리는 서로 밤마다 멀어졌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견디는 법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 이따금
바람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등을 후빈다
색깔 없는 구름들이 우리를 지키고
마른 잎사귀들이 우리를 덮고 우리는 흙이 되고
우리는 서로를 가두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가 되고
우리는 우리는 목 놓아 운다
- 혀 끝을 맴도는 변명 / 김선재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 김연수

인스티즈앱
나 인사팀에서 일하는데 신입 그냥 자르고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