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뼏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덜어주었다김사인, 풍경의 깊이바람 불고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백년이나 이백년쯤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낯익은 냄새가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되리라 생각한다조태일, 노을저 노을 좀 봐저 노을 좀 봐사람들은 누구나해질녘이면 노을 하나씩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서성거린다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흔들거린다저 노을 좀 봐저 노을 좀 봐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그래도 이승이 그리워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나이것 좀 봐이것 좀 봐내 가슴 서편 쪽에도불이 붙었다황지우, 뼈아픈 후회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젊은 시절,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알을 넣어 주는 바람이떠돌다 지나갈 뿐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이규리, 결혼식하얀 드레스 자락이 조마조마 먼지를 끌고 간다구두 안에 웅크린 발등도 조마조마 꼼지락거리겠다신부, 먼데서 온 신부먼지보다 더 작게 웃을락 말락소름 돋은 팔이 가늘고 착잡하다하얗게 펼쳐 놓은 길, 꿈길슬쩍 당기면 헝클어질 광목 깔개가문득 실크로드 같다천 년 전 사막을 횡단하던 대상들, 오늘 정장으로 모여삼삼오오 술렁이는데저 행진 끝이 나면인연은 무엇을 흥정할 것인가일생이 서로 건네고 받아야 할 교역이라는 듯지금, 꽉 끼는 구두 참으며 간다물빛 아래 보송보송한 먼지. 축가 날리는 속으로인조 속눈썹 깜빡이며 어린 낙타는 간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