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도현,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나태주,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나태주, 개양귀비
생각은 언제나 빠르고
각성은 언제나 느려
그렇게 하루나 이틀
가슴에 핏물이 고여
흔들리는 마음 자주
너에게 들키고
너에게로 향하는 눈빛 자주
사람들한테도 들킨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 두 갈래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두 길 다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동안 나그네로 서서
한쪽 깊이 굽어 꺾여 내려한 곳으로
눈이 닿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똑같이 아름다운 쪽 길을 택했습니다
이 길은 풀이 더 우거지고 발자취도 적어
누군가 더 걸어가야 할 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길을 걷는다면
다른 쪽 길과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요
그 날 아침 두 갈래 길에는 똑같이
밟은 흔적이 없는 낙엽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쪽 길을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법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안도현, 찬밥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저녁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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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실시간 고윤정 김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