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이전 시대에는 삐삐가 있었다 정식 명칭 ‘무선호출국용 선택호출 수신장치’, 영어로는 Pager이지만 호출이 오면 삐삐거리는 소리로 알려준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Beeper로, 일본에서는 포켓벨로, 우리나라에서는 삐삐로 불리던 이 기기는 자그마한 액정 숫자판에 10여 자리 내외의 숫자만 표시되어 전화 통화를 희망하는 상대방의 전화번호가 전달되었다 국내 보급 당시에는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널리 사용되던 초창기 개인용 무선 이동통신기기인 삐삐는 단순히 연락을 원하는 전화번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만의 약속된 재미있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거나 귀하던 시절
지금은 이동통신을 사용하는 성인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으며, 피처폰까지 포함한다면 초등학교 이전의 소아 이외에는 거의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지금처럼 누구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휴대전화 보급 초창기에는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상당히 비쌌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이전 시대에는 휴대용 호출기, 일명 ‘삐삐’가 유행했는데, 휴대전화 보급 초창기까지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휴대전화의 구입을 부담스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해 한동안 공존해왔다 삐삐와 휴대전화의 차이점이라면 음성 대신 숫자만 보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그보다는 휴대전화가 양방향 통신인 것과는 달리 삐삐는 단 방향 통신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하려면 전화를 걸듯이 삐삐 번호를 누르고 연락받을 수 있는 전화번호를 입력해주어야 했고,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선 호출기를 통해 전달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해야만 했다 즉, ‘나 지금 이 번호로 전화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연락해’라고 알려주는 기기인 것이다
tvN '응답하라 1997'의 한 장면
그렇기 때문에 호출한 사람이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전화가 없는 환경에서는 호출을 할 수도, 호출을 하더라도 연락을 받을 수도 없었고, 상대방이 내 삐삐로 전화번호를 보내준 것을 확인했더라도 주변에 전화가 없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무선 호출기로 내가 연락받을 전화번호를 호출기에 전송하는 것을 ‘삐삐친다’고 표현했는데, 삐삐를 치기 위해서는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집이나 회사 등에서 하거나 외출했을 때에는 카페 등에서 그 매장의 전화번호를 보내곤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카페 등에 앉아 있으면 카운터에서 큰 소리로 “xxxx번으로 호출하신 분~?”이라며 삐삐 친 사람을 찾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집이나 사무실 밖에 있을 때 호출이 오면 삐삐의 작은 액정창에 뜬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아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절에는 공중전화 카드나 동전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tvN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길에서 삐삐를 받으면 공중전화로 달려가야 했다
편의를 위해 생겨난 ‘삐삐 암호’
이렇게 삐삐가 오면 호출한 사람과 통화를 하기 위해 호출 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바로 앞에 전화가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공중전화에 사람들이 몰려서 길에 줄을 선 상황이라면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부모님 몰래 연애를 하고 있을 때나 부모님이 잠든 시간에는 집에서라도 전화를 걸어서 통화하기 힘들기도 했다 삐삐에 문자를 보낼 수만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삐삐에는 10여 개의 제한된 숫자만을 보내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생겨난 것이 삐삐용 약어, 일명 삐삐 암호이다 삐삐 암호는 숫자를 이용해 간단하게 용건을 전달하는 것으로, 비슷한 발음을 문자 대신 숫자로 나타낸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급한 용무로 빨리 연락해달라고 할 때에는 연락받을 전화번호 뒤에 ‘8282’를 붙여서 ‘빨리빨리’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삐삐 암호는 다음과 같다
8282 – 빨리빨리
8255 – 빨리오오
2255 – 이리오오
505 – S.O.S
5782 – 호출빨리
175 - 일찍와
이렇게 숫자를 이용해 간단한 용건을 전달하던 삐삐 암호는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안부 인사나 마음을 전하고 상황을 알려주는 등의 용도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용도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다름 아닌 연인 사이의 사랑 고백인데, 대표적인 사랑 고백 삐삐 암호인 486은 처음 보면 참으로 난해한 숫자다 하지만 알고 보면 숫자 486은 ‘사랑해’ 각 글자의 획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비슷한 발음이 아니라 서로 간에 미리 약속된 형태의 삐삐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전하거나 상태를 알려주는 삐삐 암호는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
486 – 사랑해
1010235 – 열렬히 사모
0242 – 연인사이
1004 – 천사
0404 – 영원히 사랑해
0124 – 영원히 사랑해
952 – 굿모닝
981 – 굿바이
7942 – 친구사이
0909 – 취소(빵꾸빵꾸)
2626 – 출발(이륙이륙)
7676 – 도착(착륙착륙)
이렇게 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삐삐 암호는 이제 숫자의 조합으로 글자나 모양을 만들어내는 단계까지 진화한다 예를 들자면 ‘17317071’의 경우 삐삐의 숫자판을 뒤집어보면 ‘I LOVE U’와 흡사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사랑고백용 삐삐 암호로 사용되었으며, ‘38317’의 경우 뒤집어보면 독일어의 사랑을 뜻하는 ‘LIEBE’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많은 삐삐 암호가 통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삐삐 암호 이외에 친구나 연인 사이에 임의로 만들어서 사용하던 암호까지 포함하면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삐삐 암호가 사용되었다 삐삐가 대중적인 이동통신 장비로 자리 잡은 시기에는 이러한 삐삐 암호가 아주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으며, 광고에까지 사용되기도 했다
9090 – GO GO
07590 – 당구장 가자 (공치러 GO)
092590 – 볼링장 가자 (공굴리러 GO)
10288 – 열이 펄펄
9413 – 겨우 살았다 (구사일생)
1472 – 잘 되고 있다 (일사천리)
5875 – 오빠 싫어
7179 – 친한 친구
100 – 돌아와 (Back)
1414 – 밥먹자 (식사식사)
기술의 발달과 함께 추억 속으로
이처럼 숫자의 조합으로 호출번호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건까지 전달하던 삐삐 암호는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문자 삐삐가 출시되면서 주춤했다 하지만 문자 삐삐는 호출하려는 사람이 전화를 통해 보내고자 하는 문자를 이야기하면 교환원이 직접 듣고 이를 문자로 입력해 전송해주는,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복잡하고 번거로우면서도 어이없어 보이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반 삐삐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 했다.
문자를 받을 수 있는 삐삐도 출시되었지만 사용은 불편했다
삐삐의 발전 과정에서 또 하나의 서비스가 있었는데, 바로 음성사서함 서비스이다 지금의 휴대전화 음성 사서함과 비슷한데, 발신자가 삐삐를 칠 때 단순히 번호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남겨서 호출 받은 수신자는 자신의 음성 사서함에 전화를 걸어 발신자가 남긴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하지만 이 역시 호출을 받으면 공중전화를 찾아가서 줄을 서야 했던 것은 동일했다
삐삐 음성사서함도 생겨났다
삐삐의 단짝, 시티폰은 PCS의 출현으로 단종하게 된다
이후 저렴한 비용의 휴대전화인 시티폰이 출시되었지만 전화를 수신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발신만 할 수 있고 주로 공중전화에 설치된 전용 중계기 근처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으로 한동안 공존하던 삐삐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뒤로도 한동안 볼 수 있었던 곳은 바로 병원이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생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장비가 많아서 한때 휴대전화의 사용을 금지했었기 때문에 비상 상황에서 의료진을 빠르게 호출하기 위한 용도로 삐삐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의료기기와 휴대전화의 발전으로 과도기적인 시기가 지나고 이제는 의료진들도 병원에서 자유롭게 휴대전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는 더 이상 삐삐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삐삐는 휴대전화에 밀려나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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