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편
그리스 근현대사 1편 - 그리스인은 유럽인일까?
그리스 근현대사 2편 - 그리스 독립전쟁 그리고 서구 열강의 개입
그리스 근현대사 3편 - 신생국가의 근대화 역경
그리스 근현대사 4편 - 발칸 전쟁과 국가분열의 시대
그리스 근현대사 5편 - 대살육 속의 영웅들, 아타튀르크와 베니젤로스
그리스 근현대사 6편 - 반공과 반파시즘의 사이의 대결, 그리고 선택
그리스 근현대사 7편 - 군부독재 그리고 민족주의의 허망함
독재 유산의 과감한 청산과 경제 환경의 변화
그리스 군사정권은 1973년 오일쇼크로 그리스 경제의 고속 성장도 막을 내리고,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거셌지만 강력한 철권통치로 권력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채 무모하게 키프로스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선례를 자초했다. 그리스군에 의한 키프로스 쿠데타는 결국 터키군의 대대적 키프로스 침공으로 이어지고 이 사태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했던 그리스 군사정권은 내부의 반란으로 스스로 붕괴되었다.
기존 강경파를 내부 쿠데타로 무너뜨린 군장성들은 보수파 정치인으로 그나마 명망이 있었던 망명 중인 카라만리스 전 총리에게 민정이양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스로 귀국한 카라만리스가 총리가 되면서 그리스 군부독재는 1974년 7월 24일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쿠데타 이후 실로 7년 3개월만에 민주주의가 복원된 것이다. 카라만리스는 1974년 11월 치뤄진 선거에서 자신이 창당한 신민주당(ND)을 이끌고 승리했다. 군부가 선택한 인물이었지만 카라만리스는 억눌렸던 그리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적극 수용해나갔다. 당시 그리스는 키프로스 사태로 인해 민족주의가 매우 고양되어 있었고 군부독재도 끝난 다음이라 민족주의 열풍에서 민주화 요구까지 겉잡을수 없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라만리스 총리는 총선 후 한달만에 그리스 정치체제에서 늘 고민이 되었던 군주제 유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쿠데타 직전 1대 파판드레우 총리와 당시 국왕 콘스탄틴 2세의 갈등이 결국 쿠데타의 단초가 되었고 국왕은 반쿠데타를 꾀하다가 해외로 망명을 떠난 상황이었다. 12월 8일의 국민투표에서는 7대3으로 공화정이 채택되었고 현재까지 그리스는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쫓겨난 그리스 왕가는 아직도 국외에서 언젠가 올지 모를 복귀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그리스 왕가는 영국 왕실과도 혈연 관계가 있는데 찰스 왕태자와 다이애나비 결혼식에 그리스 전 국왕이 그리스의 국왕으로 소개되어 초청되자 화가난 그리스 정부는 정상급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군주제 종식 이후에도 그리스의 정국은 분출되는 민주화 요구가 거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특히 1974년 11월 17일의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 학생시위대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학생운동세력의 처벌요구가 거세졌다. 카라만리스 총리는 군부의 반발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군사정권 시 벌어진 인권침해에 대해 수사를 하도록 하여 그 책임자들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1975년 일련의 재판을 통해 11월 17일 학살의 책임자 3명에 대해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물론 나중에 이들은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군정종식 18개월만에 과거사를 정리한 놀라운 재판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민주화 과정은 정말 모범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행이 안정적이었으며 과거사 정리도 나름 단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 군부독재의 종식 시점은 내전 후 지속되던 그리스 경제의 고속성장이 오일쇼크로 한계를 보이던 시점이기도 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듯이 1970년대 중반까지 그리스 경제는 높은 경제성장률, 낮은 인플레이션, 낮은 실업률을 보이며 번영을 구가하였다. 1950~1973년까지 GDP의 연평균 성장률은 7%로 같은 기간 중에는 일본 다음의 고속성장을 보였다.
* 그리스 경제기적의 시기
물론 그리스 경제성장이 전적으로 군사정권의 경제정책 덕분(솔직히 그리스 정부 중 군사정권이든 민간정부든 인상적 경제정책을 표방한 경우는 거의 없다.)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전후 마샬플랜에 힙입어 재건에 성공한 유럽 선진국들의 호황이라는 외부적 요인 속에 군사독재 체제 속에 임금상승이 억제되며 수출 경쟁력이 높아진 것이 주요인이다. 하여간 군사독재 시기를 전후로 1960~1980년까지 20년 동안 그리스 국민 1인당 생산도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했다.
* 1인당 생산 추이
군사독재는 끝났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경제 호황시절도 함께 끝이 났다. 민정이양 이후 그리스 경제상황은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2차 오일쇼크가 오는 1979년까지 갑자기 크게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접어들어서는 저성장, 고실업, 높은 인플레이션에 빠졌다.
두번째 파판드레우 총리의 등장: PASOK과 신민주당(ND) 양당 체제의 도래
1969년 미소간 데탕트 시대가 열리면서 냉전체제가 약화되자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그리스와 터키는 키프로스 이외에도 에게해에서 계속 분쟁을 겪게 된다. 이제 반공의 시대가 저물면서 합법화된 공산당도 민족주의 열풍에 가세하여 반외세 투쟁을 벌였다. 특히 그리스 인들은 미국이 쿠데타를 뒤에서 조종했고 키프로스 사태에서 터키편을 들었다며 반미시위에 적극 나섰다.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반미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고 급기야 1974년 8월 19일 키프로스 주재 미국 대사가 총에 맞아 피살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아버지 1대 파판드레우가 1968년 군부독재 치하에서 가택 연금 중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2대 파판드레우)는 군부독재가 끝나자 망명생활을 접고 그리스에 귀국하여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 PASOK(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하였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한쪽에서는 아버지의 정치적 자산을 기반으로 다른 쪽에서는 변화된 시대상황에 편승하여 짧은 시간만에 그리스 정계에서 주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2대 파판드레우는 2차대전 직전 그리스를 떠나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며 미국 여성과 결혼하고 시민권을 획득한 다음에는 2차대전에 해군대위로 참전하는 등 철저히 미국인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전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경제학 교수로 강의를 하는 등 경력으로만 보면 2대 파판드레우는 미국식 시장자본주의 시스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1960년 그리스에 귀국하여 아버지인 1대 파판드레우의 정당에 합류하면서 군부 개혁을 강력히 주장하며 군부의 기피인물이 되었고 쿠데타 중에는 스웨덴과 캐나다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군부독재는 그를 점점 급진적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PASOK 창당시 2대 파판드레우는 반미를 부르짖는 신마르크스주의 정치가로 변모되어 있었다. 2대 파판드레우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보고 자본주의에 굴복했다고 비난하였으며 당시 크게 힘을 얻고 있었던 제3세계 해방운동에 편승하여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민족해방을 주장했다. 또한 자신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2대 파판드레우는 반미주의 열풍 속에서 신생정당 PASOK을 이끌고 참여한 1974년 11월 선거에서 14%의 지지율을 얻으며 그리스 정치계의 태풍의 눈이 되었다. 대중적 지지도가 확고했던 보수주의자 카라만리스 총리가 신민주당을 이끌며 버텼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 국내 정치가 아닌 그리스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이었다. 카라만리스 총리는 터키와의 에게해 갈등을 겪으면서 보다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앞당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정대로라면 그리스는 1984년 정회원의 자격을 얻는 것이었지만 카라만리스 총리는 유럽이 그리스의 군부독재 정권을 묵인하고 지원한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지렛대로 삼아 1981년 정회원 자격을 획득하였다.
카라만리스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유럽내 그리스 입지를 굳건히 하는데 더 몰두했으며 이를 위해 총리를 그만두고 정당정치를 벗어난 대통령직에 올랐다. 가장 대중성 있는 정치인을 잃은 신민주당(ND)은 이제 반터키/반서방 민족주의를 등에 없은 2대 파판드레우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1977년 총선에서 PASOK은 25%를 얻으며 더욱 성장하였고, 신민주당의 카라만리스 총리가 대통령이 되며 현실 정치를 떠난 1981년 선거에서는 48%를 득표하며 집권하였다. 이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아버지에 이어 2대에 걸친 총리가 되었다.
PASOK은 1981년 이래 6번의 선거에서 승리하면 명실상부한 그리스의 최대 정당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2009년 그의 아들 요르고스 파판드레우가 총리에 오르면서 파판드레우 일가는 그리스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3대 총리 가문이 되었습니다.
* 1981년 그리스 총선 결과: PASOK과 신민주당(ND)의 양당구도와 3당이 된 공산당
한편 파판드레우 3대의 총리역임은 카라만리스 총리와 그의 조카로 신민주당 당수가 된 카라만리스 대표와 함께 몇몇 소수 인물 중심의 허약한 그리스 민주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에 걸친 파판드레우 총리들: 1대 파판드레우(1944, 1963, 1964~1965 총리), 2대 파판드레우(1981~1989, 1993~1996년 총리), 3대 파판드레우(2009~2011년 총리)
화끈한 과거사 정리와 반미노선의 심화: 공산 반군에서 레지스탕스로의 복권과 연금 혜택
2대 파판드레우 총리는 집권 전 주장했던 급진적 주장을 다소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여전히 반서방 기조를 내세웠다. PASOK의 주장들을 보면 제3세계 해방, 그리스의 국부를 외세에 팔아먹은 특권세력으로 올리가키 설정, 나토 탈퇴, 미군 기지 철수 등이었다. 특히 터키와의 분쟁에서 어정쩡한 위치였던 NATO에 대해서는 터키와의 국경선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파판드레우 총리는 나토 훈련에 불참을 명령하기도 했다. 터키와의 대결에서는 초강경 입장을 늘 유지하였는데 급기야 1984년에는 그리스의 안보위협은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이 아니라 나토 동맹국인 터키에서 온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파판드레우는 아예 나토 탈퇴를 국민투표에 부치려고 하였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한편 파판드레우는 비핵화를 명분으로 나토의 퍼싱 미사일 배치 요구를 거부했고, 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을 공산당이 탄압하자 유럽이 경제재재를 시행했지만 그리스는 여기에 불참하고 오히려 1984년 서방 지도자로는 최초로 파판드레우 총리는 폴란드를 방문하여 야루젤스키 서기장과 회담을 하기도 했다. 파판드레우의 반서방주의는 때로는 유럽공동체의 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1983년 하반기 그리스가 EEC의 순회 의장국을 맡게 되었을 때,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이 발생했으나 파판드레우는 유럽차원의 대소련 비난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물론 사회주의 정당 답게 PASOK은 여러가지 급진적 제도 변화를 모색하였다. 정교회가 주관하는 전근대적 결혼식을 교회에서 분리하도록 하였고 이혼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지참금 악습(다우리)을 폐지시켰으며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2차대전에서 활동한 그리스 공산당 계열의 EAM/ELAS에 속한 사람들을 공산반군이 아닌 레지스탕스로 재정의하고 당사자들과 그 자손들에 대해 연금을 지급하고 공공부문 일자리 임용의 특권을 부여하는 등 파격적 과거사 정리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동유럽 등으로 탈출했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귀국했다. 하지만 2대 파판드레우의 획기적 조치는 그 수혜 대상이 무려 40만명에 이르게 되면서 연금재정에 부담을 주게 된다.
한편 파판드레우의 반서방 정책은 1986년과 1987년 터키와 벌인 일련의 에게해 분쟁(그리스 근현대사 7편 참조)에서 더 극단적으로 나타났는데 파판드레우는 터키편을 든다는 명분으로 자국내 미군기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중단하고 바르샤바 조약 국가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파판드레우의 정책으로 인해 미국은 그리스와 점점 거리를 두었는데 특히, 그리스에서 빈발하는 극좌테러에 미국인들이 잇따라 희생되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변화된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급진화되는 젊은이들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자 그동안 억눌렸던 여러 욕구들이 한꺼번에 분출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68혁명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리스 학생운동세력은 1974년 11월 17일 아테네 폴리테크닉 대학의 학살을 계기로 점점 투쟁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맹휴업, 학교점거시위, 고속도로 차단 시위 등이 빈발하였다. 예일대 역사학 교수 Kalyvas는 2010년 이후 벌어진 그리스 반긴축 시위의 뿌리를 1970년대 후반의 학생시위로 보고 있다.
그리스 현대 정치사에서 젊은 세대의 급진화와 폭력의 악순환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시대 상황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변변한 산업이 없던 상황에서 상당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주변부로 전락해야 했던 그리스 경제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오일쇼크의 충격 속에 저성장, 높은 인플레이션, 고실업의 악순환에 그리스가 빠져들면서 가장 취약했던 청년계층이 고통을 먼저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 1980년대의 그리스 경제 상황
특히 그리스는 대기업과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일자리가 자영업과 공공부문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는 위기 이전에도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했다. OECD 통계가 공표되기 시작한 1999년 그리스 15-24세 경제참여활동 비율은 27.2%에 불과해 덴마크의 65.5%나 핀란드의 40%에 비해 10%p 이상 낮았다. 이런 낮은 비율 마저 2000년대들어서는 더 떨어졌으며 금융위기 이후에는 10% 초반대에 머물렀다. 덕분에 청년층 실업률은 금융위기 국면에서 60% 수준으로 폭등하며 일자리와 희망을 잃은 이들을 거리의 전사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PIGS와 기타국가의 15-24 경제활동참여율 추이: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낮은 경제활동 비율과 영국과 독일의 높은 비율이 대조적임
그리스에서 그나마 좋은 일자리들은 공무원과 공기업 자리인데 정치적 연줄이 아니면 이런 자리는 꿈을 꿀 수 없었던 대부분의 청년들에게 밖에서는 이미 화석화되어 가고 있던 사상들이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트로츠키주의 그리고 전투적 아나키즘같은 급진주의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시켜주는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 최근 반긴축 시위대들이 남긴 낙서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극심한 당내 노선 투쟁을 겪으면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정통 공산당 세력과 소비에트 모델과 결별하며 반제국주의에서 반글로벌화/반신자유주의와 급진적 환경운동까지 새로운 이슈들을 담아내려 했던 유로코뮤니스트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치프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리자 핵심 간부들은 공산당 청년조직을 거쳐 이런 유로코뮤니스트 토양에서 성장했다.
한편, 정처없는 젊은이들이 선택한 거리의 전사들은 좌파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2차대전 직전 쿠데타로 집권하여 그리스 파시즘의 시대를 연 메타삭스 장군을 추종하는 황금새벽당은 메타삭스도 공개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던 인종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그리스에 몰려들고 있는 수만명의 난민들을 위협하며 세를 과시하고 있다.
* 황금새벽당의 모습: 그리스 정교를 보호하는 임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검은 셔츠를 유니폼으로 입고 있다.
* 금융위기 속에 느슨해진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자경단을 구성한 황금새벽당의 행동대원들 모습
* 황금새벽당의 행동대원들에 의해 린치를 당한 수단 출신 난민 등의 흉터: 이 난민은 결국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들만의 혁명을 꿈꿨던 '17N'의 활동과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한편 군사독재 말기부터 일부 급진세력은 폭력노선에 의지하는 혁명주의적 노선을 따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돌이켜 보면 이러한 좌익폭력세력의 등장은 비단 그리스뿐만 아니라 독일(적군파), 이탈리아(붉은 여단) 등 서유럽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지만 그리스는 몇가지 다른 특징을 보였다. 그리스의 좌익 무장조직들이 자행한 테러들은 그 강도면에서 붉은 여단이나 적군파에 비해서는 약했을지 모르지만 30년이나 된 지속기간은 이들과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리스에는 250개 정도의 극좌테러조직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면서 무력에 의한 자본주의 국가의 전복을 꾀했다. 1975년 4월에는 인민저항(ELA)이라는 단체가 그리스내 미군 소유 차량 8대에 화 공격을 하며 본격적인 좌익테러 시대가 시작했음을 알렸다. 그리스 좌익테러단체 중 가장 유명한 단체는 '17 November(17N)'으로 이들은 1974년 11월 17일의 아테네 학생시위가 학살로 진압된 날을 조직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7N이 유명한 것은 다른 유럽의 극좌테러조직이 걸어온 경로와 달리 처음부터 고강도의 테러를 자행했으며 1975년에서 2002년까지 무려 27년간 활동이 지속되면서도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거의 꼬리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7N은 다른 극좌테러조직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했지만 여기에 더해 민족주의적 정서와 반제국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다.
* 17N의 상징
17N의 최초 활동은 1975년 12월 아테네 CIA 지부장인 Richard Welch를 암살한 것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하고 있었지만 1974년 키프로스 사태 전후로 그리스내 반미 분위기는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17N은 그후 2002년까지 무려 23명의 인사들을 암살했다. 이들이 룸펜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살해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 외교관들(미국, 영국, 터키 등), 정치인, 경찰, 언론인, 기업가들이었다. 특히, 미국인들이 17N의 타겟이 되면서 미국 정부는 그리스 정부(2대 파판드레우 정부)가 이들의 테러를 사실상 방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워낙 17N의 테러가 오리무중이다 보니 그리스 국내외 정보기관 배후설 등 여러 음모론도 꽃을 피웠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는 물론 2000년까지도 이들의 혁명(?)활동은 계속되었다. 17N의 마지막 희생자는 2000년 6월 아테네의 교통정체 중 자신의 차안에서 총에 맞아 살해된 영국 무관 Saunders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 정부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안전하게 치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커졌는데, 영국 수사인력의 지원을 받아가며 17N을 뒤쫓았지만 결국 잡는데는 실패했다.
이들이 꼬리를 잡힌 것은 한 조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다. 2002년 6월 17N은 피레우스 항구의 한 해운회사를 폭파시키기로 계획한다. 그런데 한 조직원이 폭탄을 설치하다가 폭탄이 터지면서 중상을 입고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다. 경찰은 2채의 안전가옥을 급습해 다수의 무기를 압수하였고 이어진 수사에서 양봉업자로 위장한 코우포디나스를 붙잡았다. 특히, 그룹의 리더인 당시 58세의 소르본느 출신인 알렉산드로스 지오토폴로스를 에게해 섬에서 터키로 달아나기 직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거의 30년 동안 활동해온 이 단체는 평범해 보이는 형제와 사촌들이 중심이었으며 주로 은행강도와 위장 사업체 등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해왔다. 2003년 이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19명 중 핵심인물인 지오토폴로스는 21년형을 코우포디나스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핵심 활동가였던 크리스토둘로스 자이로스는 2014년 1월 임시석방 되었다가 교도소로 복귀하지 않고 새로운 무장투쟁을 위해 잠적하면서 아직 이들의 활동이 끝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직접 살해된 사람만 23명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 기준으로 교도소에 남아있던 17N 대원은 19명 중 5명에 불과해서 피해자 가족들과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다.
* 2014년 1월 임시석방 후 다시 잠적한 자이로스가 독일의 그리스 식민화에 맞서 반역자들을 죽음으로 응징하겠다는 계획을 동영상으로 발표하고 있는 모습
화가난 그리스 젊은이들
그리스의 민주주의 역사는 서방세계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리를 잡지 못했다. 7년간의 군사독재 이후 되찾은 민주주의 체제도 그리스 역사상 가장 자유로왔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폭력과 극단적 급진주의가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도 청년세대의 급진화는 1970년대의 일반적 트렌드라고 할 수 있지만, 1980년대 들어 이들 국가에서 급진주의가 전반적으로 퇴조한 것과 달리 그리스에서는 더욱 힘을 키워갔다.
오히려 그리스에서는 긴축정책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더욱 치솟고 있다. 반긴축 시위대의 격렬한 시위가 1970년대 이래 그리스 젊은이들의 분노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2010년 5월 아테네 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은행시설에 대한 폭력적 공격은 또 다른 버전의 17N 활동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청년 시위대들은 당시 은행에 대한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서 영업중이던 Marfin 은행 지점에 화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방화로 3명의 은행 직원이 불에 타 죽었는데 이 중 특히 1명은 임산부였다. 지금까지도 방화범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고 다만, 시위로 위험이 커졌음에도 자사 직원의 철수를 허락하지 않은 3명의 은행간부들은 처벌을 받았다.
* 2010년 5월 Marfin 은행 지점 방화 사건
그리스 사회에서 청년들의 급진화는 2015년 7월 5일 구제금융에 대한 그리스 국민투표의 유권자 특성별 득표율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18~24세 그룹과 학생 그룹의 반대표는 85%를 넘는다.
* 2015년 7월 5일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투표의 유권자 특성별(연령대, 교육수준 등) 득표율
그리스 젊은이들의 급진화에는 최근 금융위기 상황에서 60%를 넘나드는 극단적인 청년실업률과 함께 민주화 시대 이래로 저성장 속에 경제적 소외가 지속적으로 이들의 사회불만을 키웠을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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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편지 받지 말라고 금지령 떨어진 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