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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05
이 글은 9년 전 (2017/4/04) 게시물이에요







 미안하다 시간아 | 인스티즈


조병화,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걸어보던 일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가고

가을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미안하다 시간아 | 인스티즈


한용운, 사랑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미안하다 시간아 | 인스티즈


천외자, 안동역 대합실





삼십 여 년 전이었던가

안동발 청량리행 무궁화 기차표 한 장

선생님은 나를 서울로 보낸 후

기차표 한 장을 더 사셨다


그리곤, 가을 밖으로

나가선 안 돌아오셨다

나를 떠난 후 지상의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는 사람

내 가슴속이 지상의 마지막

역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내 가슴이여, 텅 빈 역()이여

수국을 피우고

배롱나무 꽃을 피워라

고향친구는 선생님께 가죽장갑을

선물해 드렸다고 했었는데

나도 배롱나무 붉은 낱장마다

따뜻한 입김을 얹어 털장갑 한 켤레 쯤

떠나는 이들을 위해 짤 때가 되었다


아니 늦었다

대합실 의자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난다


저 소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안동역에 나는 아쉬움이 많아

다시 돌아온 이 춥고

쓸쓸한 대합실에서 좀 더

기다리려고 한다


기차시간까지 얼마나 더 남았을까







 미안하다 시간아 | 인스티즈


이민하, 모자이크의 세계

 

 

 

지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순간에

총알은 관통한다

우리는 잠든 지 오래

별사탕 같은 나트륨램프가 촘촘히 박혀 있지만

아침과 저녁을 구분할 수 있는가

앞지르기는 금물입니다

멈춰서도 안 됩니다

아쉽게도 나는 충돌한 기억이 없어요

피를 흘리는 당신에게

혈흔의 끝자락이 비상구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예의는 여기까지

새들은 앞뒤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

입구와 출구를 구분할 수 있는가

차선을 바꾸어도 뒤통수만 보이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오렌지색 계절 속에서

나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는

허공을 작대기처럼 꽂고

열린 듯 닫힌 듯 빠져나갈 수 없는

뻥 뚫린 내 몸

피를 흘리는 당신

뒤통수의 끝자락이 산책로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예의는 거기까지







 미안하다 시간아 | 인스티즈


강상윤, 미안하다 시간아

 

 

 

줄지렁이들이

아스팔트 바닥 위에

시간처럼 말라죽어 있다

 

타원형, S자형, 기역자

니은자 모양으로

밤색 바탕에 핏빛이 선명하다

어떤 것은 짓이겨진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산소를 마시러 나왔다가

당하는 변이라 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흙 속에 물이 스며들어

숨을 쉬기가 어렵다 하는데

나는 지렁이들이

축축한 몸을 말리러

나온 줄로만 알았다

 

어둡고 축축한 땅 속을

기는 것이 지겨워져서

밝은 태양 아래 목숨을

거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렁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축축한 삶을 말리려던

생각을 접은 적이 있다

 

어차피 삶이란

어둡고 축축한 걸

밝고 보송보송하게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미안하다 시간아

숨쉬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있어라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죽는 것보다 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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