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ndrew Garfield
진한 눈화장을 닦아낸 티슈엔
알록달록한 섀도우가 묻어나왔고
내 본래의 눈이 드러났다.
빨갛게 칠한 입술을 지워내면
혈색 없는 입술이 드러났다.
거울에 비친 테이블엔
티슈에 닦인 섀도우처럼
알록달록한 꽃다발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 오늘도 역시 주인공님 꽃다발만 가득하네.
부럽다 부러워. "
나와 비슷한 분장을 한 동료가
옆자리에 앉으며 분장을 지웠다.
그러게. 대충 동의의 의사를 비치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나보다 더 화려한 분장을 한.
옆에서 화장을 지우는 동료가 말한
주인공님이 들어왔다.
대기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는
쌓여있는 꽃다발들을
하나하나 감상하기 시작하는 주인공님.
화장을 지우던 동료도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그 옆에서 구경했다.
난 관심 없는 척하며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관찰했다.
혹시 저 안에 내 꽃다발도 있지 않을까.
매번 공연이 끝날 때마다 기대해보지만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하긴.
수많은 앙상블 중 하나인
기억에도 남지 않을 나에게
누가 비싼 꽃다발을 주겠는가.
나 같아도 선물을 한다면
화려한 주인공에게 꽃다발을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를 위한 꽃다발이 있다면
주인공의 뒤에서
더 열심히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주인공이 되는 게 더 좋겠지만.
때론 인적이 없는 공연장 구석에서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몰래 주인공 역의 노래와 연기를 해보기도 한다.
망상에 빠져있는 사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화장을 반만 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꽃다발을 구경하던 동료가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곧 웃음을 참으며 나에게
꽃다발 하나를 건네주었다.
" 자기한테 온 꽃다발이야! "
난 그에 농담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도 이런 장난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라는 동료의 말에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새빨간 포인세티아였다.
꽃 사이에 꽂혀있던 하얀 카드를 꺼내보니
정말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뒷면엔 메세지도 적혀있었다.
' 나의 주인공에게 축복과 행복만 가득 하기를. '
그 뒤로 작품이 끝나고
다음 작품으로 바뀌어도
공연이 끝나면 꼭 나를 위한 꽃다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꽃의 종류는 달라졌지만
이 꽃을 보내는 사람은
분명 같은 사람일 것이다.
누가 나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그걸 알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
여느 때처럼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로 돌아왔지만
오늘은 나에게 온 꽃다발이 없었다.
꽃다발이 받기 시작한 뒤로
처음으로 오지 않은 것이었다.
내일은 공연이 없으니
한잔하자는 동료의 권유를 거절하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빈손으로 공연장을 빠져나오는데
저 멀리 한 남자가 보였다.
처음엔 신경 쓰지 않고
그 옆을 지나가려고 했으나
그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순간 겁을 먹었다.
요새 안 좋은 뉴스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꽃다발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팬지 꽃다발이었다.
" 오늘은 직접 주고 싶었어요. "
늘 꽃다발을 선물하던 그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
그는 뮤지컬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기회가 생겨
그 당시 내가 공연하던 공연을 보러왔었는데
우연히 연습하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내가 연습하던 건
평소에 내가 몰래 하던
주인공의 연기와 노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엔 주인공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었고
나는 앙상블 중에 하나란 걸 알고 놀랐단다.
" 그래서 그런지 당신에게만 시선이 갔어요.
그러다 나도 모르게 팬이 되었나봐요. "
처음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을 피하느라 바빴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에게 꽃다발을 보내왔고
가끔은 직접 전해주기도 했으며
그 덕에 가끔은 편한 친구처럼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내 1호 팬이자
어느새 버팀목까지 되어 주었다.
-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꽤 대사도 있었고
짧지만 혼자 하는 노래도 있었다.
첫 공연 하는 날에 꼭 오라며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오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첫 공연 날이 되었고
난 열심히 연습했던 것처럼
실수 없이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커튼콜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와
쌓여있는 꽃다발을 뒤져보았지만
나에게 온 꽃다발은 없었다.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로
처음 그와 만났던 곳에 가보니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작은 카틀레야 꽃다발이었다.
" 눈부시게 빛나고 멋져서
당신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 >
2. Froy Gutierrez
집 근처의 꽤 큰 서점.
이 동네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서점이었다.
새로 나온 신작들이
그 서점에 진열되었다.
그리고 그 신작들 사이엔
내 이름이 적힌 책도 있었다.
이번 책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작가지.
책이 대박을 치지 못하고 묻혀버리니
그냥 글 쓰는 백수에 불과했다.
몇 번의 좌절이 계속되자
결국 작가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만약 이번 작품마저 잘 되지 못한다면
다른 일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잘 팔리든 말든 신경 쓰지 말자.
라고 했으면서
가만히 앉아
몇 권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기엔
내 조바심은 그리 인내심이 깊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엔
내 생업이 달린 일이란 말이다.
그게 내가 지금 이 서점에서
내 책을 감시하고 있는 이유이다.
몇 시간째 손님들이 책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렇게 내 마지막 작품이
아무도 모르게 묻히는구나.
내가 쓴 책을 꺼내 펼쳐보았다.
이미 수천 번은 읽었을 책의 첫머리가 보였다.
글을 넘기기 직전에
몇 번이나 고쳤던 문장도 보였다.
분명 새 책이지만
내 손때가 묻어있었다.
" 그 작가 책 좋아요. "
나에게 한 소리인가?
옆을 돌아보니
이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 같았다.
" 그 책은 아직 못 읽어봤지만
분명 좋은 책일 거에요. "
당연하겠지만 이 사람은
내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모른 채
내 책을 칭찬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이 마지막 책이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도
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설렜다.
" 제가 이 작가를 잘 아는데
이 책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했어요. "
내가 작가거든요. 하고 무덤덤한 척 말하자
그는 꽤 당황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아닌 척하며 지나칠 수 있었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그 책을 내가 썼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었다.
인기 없는 작가가
처음 만난 팬이었기 때문일까.
물론 입 밖으로 내뱉고는 곧 후회했지만.
얼어붙은 그의 옆을 지나쳐서
가려는데
그가 다시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 난 당신의 책을 읽을 때마다 설레요.
그러니 이게 마지막 책이 아니길 바랄게요. "
-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다시 글을 쓸 수 없었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거 말고는 다른 일은 안 해봤는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눈앞이 캄캄했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 할 겸
밖으로 나왔지만
깊은 물 속에 있는 빠진 것처럼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그때 그 서점 앞이었다.
서점엔 그사이 새로 나온 신작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내 책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지 않았다.
내 자식이 남들에게 외면받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부모가 못난 탓이야.
쌓여있는 내 죽은 책들에게
애도를 표하는데
그가 또다시 나타났다.
" 그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가님 오실 줄 알면 책을 가져올 걸 그랬네요. "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난 진심이 아닌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내 책들이 좋은 곳에 잘 버려지기를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금 내가
좋은 곳으로 가라며 애도한
책을 한 권 들더니 나에게 건넸다.
다른 한 손엔 펜도 들려있었다.
누가 봐도 싸인을 해달란 느낌이었다.
" 집에 이미 있지만
또 한 권 사야겠네요. "
-
그 눈빛은 이미 다 접은 내 마음을
다시 펼쳐버렸고
난 다시 책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다.
신기하게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니
물속에 있었던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은
사라진 듯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그 눈동자를 보기 위해
그를 몇 번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를 보면 힘이 나는 느낌이었다.
지금 쓰는 이 글 속에서
주인공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그의 눈동자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
책이 발간되고
엄청난 대박은 아니었지만
내 책이 입소문을 타고서
꽤 괜찮은 판매량을 보였다.
글을 쓰고 나서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다른 일은 알아보지 않아도 되겠다며
안도했다.
다시 그 서점을 찾아갔을 때,
내 책은 꽤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고
손님들이 내 책을 집어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 책이 잘 팔리는지를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서점을 찾아온 목적이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르자
그는 역시나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덕분에 또 책을 쓰게 됐네요. "
고맙다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이제 자기만 아는 작가가 아니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 하지만, 당신이 언젠가 빛을 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