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군>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38세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1600년 사망
시대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고지 1년 (1555년) ?
사망게이초 5년 10월 1일(1600년 11월 6일)
세례명아우구스티노
묘소기후 현 다루이 정의 젠도지(禅幢寺)
오사카 부 사카이 시 미나미 부 사카이 공원 묘지 내의 공양탑
관위종5위하, 타쿠미노카미. 셋쓰 국수
주군우키타 나오이에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씨족고니시 씨
부모아버지: 고니시 류사
어머니: 와크사(세례명:막달리아)
형제고니시 죠세이,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카게, 고니시 토노모노스케
자녀아들: 이름 미상
딸: 고니시 마리아
앙녀: 줄리아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行長こにし ゆきなが,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 는 일본상인(商人) 출신의 무장(武將) 겸 정치가(政治家)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자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그의 종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이며[1],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를 비롯한 그의 휘하 책사를 포함하여 병사들의 다수 역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
[편집] 생애[편집] 군에서의 출세
본래 사카이(堺)출신의 약재 무역상(藥材 貿易商)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아들로 그 자신도 상인이었다. 본명은 고니시 야구로(彌九郎)였으며 1559년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가 하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때에도 히데요시와 교섭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규슈 정벌과 히고 고쿠진 잇키에서 전공을 세워, 히고 태수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남부우토, 야시로, 마시키 3군 20만석을 받았고, 우토(宇土) 성을 새로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히고국 우토(宇土)성
성을 쌓을 때 동원한 아마쿠사 제도의 다섯 고쿠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토벌해 아마쿠사 4만 석도 고니시의 영지가 되었다.
한편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같은 시기에 히고 북부 25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후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편집]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독실한 기독교인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로마 가톨릭 교회신도였다. 그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한편 고니시의 영지와 인접한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서는 열렬한 니치렌 종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달아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주면서, 종교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편집]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다이묘들인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와 승려 겐소(玄蘇)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 듯이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
견원지간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하여 국경인 등의 반란 덕분에 임해군등을 생포하며, 커다란 야전을 치루지 않은 것에 비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서울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기요마사는 보급을 무시한채 함경도로 계속 진격하여 정문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고, 여진족에게 완패 당한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보급 문제와 명나라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등 가토 기요마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유키나가의 걱정대로 명나라의 개입과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문제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쫓겨났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이시다 미쓰나리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이를 두고 '고니시가 조선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고도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애용하던 무기는 거대한 검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있으면 적병들이 공포에 질려 감히 나서질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 정유재란남원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공략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제 2군 사령관으로 다시 참전. 유키나가가 제 1진으로 참전했던 임진년과는 달리, 앙숙인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군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군이 보내준 정보라 믿지 않아 공격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다시 거부했다.[2]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았고, 보다못한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태형을 가해 원균을 출전시켰다.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대패하였다.
남원성 내부 간략도
이후 5만 8천 군사를 이끌고 순천으로 해서 남원에 진입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그해 8월중순 남원성에 포위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해안가로 내려간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복남에게 구명을 요청하였다. 이복남과 산성별장 신호, 접반사 정기원이 행군부기하자 그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남원성 남문으로 잠입한 이복남군과 성 주민 1만이 힘을 합쳐 그를 대적하였으나 패전하고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그는 남원성에서 사살당한 백성들의 코와 귀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낸다.
남원성을 쓰러트렸으나 고니시 군은 전주전투에서 꺾이게 된다.
1598년 음력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였다. 전라도 순천 왜성에 갇혀 버린 그는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하였고, 퇴로를 열기 위한 노량 해전에서 원군으로 온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함께 참패했으나, 본국으로 후퇴하는 것은 성공했다.
[편집] 세키가하라 전투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문치파와 무단파 사이의 대립에서는 문치파의 거두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교로 인해 문치파에 가담.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유키나가의 라이벌이자 무단파의 수장격인 가토 기요마사는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600년 10월,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내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타도를 위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에 호응해 서군의 주요 다이묘로서 참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야전에 강한 이에야스를 의식하여 농성하는 쪽을 제안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간토의 대 다이묘인 이에야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야전에서 크게 승리해야 한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나 이시다 미쓰나리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동군이 진을 갖추기 전에 야습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도 한다.[3]
세키가하라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고니시 군은 오다 유라쿠, 후루타 시게카츠군을 맞아 격전을 치루지만, 서군측 장수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고작 몇시간 만에 서군의 패배로 끝났고, 여기서 패한 고니시는 자결을 금지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할복을 거부하여, 1600년 교토 로쿠죠(六條)의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와 함께 참수되었다.
처형된 이후 그의 가문은 완전히 멸문되었으며, 자신이 소유하던 영토도 가토 기요마사가 가로챘다.
고니시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로마 가톨릭 교회 때문라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식하면서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탄압이 실시되었다.
[편집] 줄리아 오타아고니시는 조선에서 고아 소녀를 데려와 양녀로 삼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입교시켜 세례명을 '줄리아'라 하였다. 그의 사후 줄리아는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며, 그녀 역시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으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편집] 가족관계- 고니시 마리아 - 딸
- 소 요시토시 - 사위
- 줄리아 - 딸(조선인 양녀)
<1군 부대장>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25세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동군 변절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출생에이로쿠 11년(1568년)
사망게이초 20년 1월 3일(1615년 1월 31일)
별명초명 : 아키카게
별명 : 히코시치(통칭), 하요시토시
세례명 : 다리오
계명崇虎石翁万松院
묘소쓰시마 시 이즈하라 정 반쇼인
관위종사위하 시종, 쓰시마노카미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번쓰시마 후추 번주
씨족소 씨(宗氏)
부모아버지 : 소 마사모리
어머니 : 다테이시 다카히로의 딸·류안인
형제소 시게나오
소 요시즈미
소 시게쿠니
소 요시토시
아내정실 : 마리아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이혼)
계실 : 이토쿠인 (가와무라 씨 또는 아비루 씨)
측실 : 요후쿠인 (다테이시 모리하루의 딸)
자녀소 요시나리
딸 (스기무라 도모쓰구의 아내)
딸 (야나가와 시게오키의 아내)
딸 (소 나리치카의 아내)
딸 (후루카와 시게노리의 아내)
딸 (우치노 스케나리의 아내)
소 요시토시(일본어: 宗義智そう よしとし 종의지[*]1568년 ~ 1615년 1월 31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소(宗) 가문의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이기도 하다.
[편집] 생애[편집] 가독상속
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1]으로서 태어난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尚)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하지만, 소 시게나오는 일찍 죽었고, 이를 대신하여 차남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양도 했지만, 소 요시즈미도 마저 일찍 죽어 덴쇼 7년(1579년) 음력 1월 4남 소 요시토시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 요시토시는 소 가문 제20대 당주가 되었다.[2]
덴쇼 15년(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가독을 소 요시시게에게 당주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동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쓰시마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등은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덴쇼 16년(1588년)에 소 요시시게가 사망 등의 악조건도 있어 교섭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더불어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덴쇼 18년(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 수행무관 황진(黃進)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이라고 받아들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 조선 사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을 보내도록 거짓 요청을 했기 때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복사업의 선도역을 승낙할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게 전해야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3]는 거짓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편집] 임진왜란조선과의 교섭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덴쇼 20년(1592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대에 속해 일본군의 최선봉으로서 싸웠다.
제 1군의 편성장수 이름병력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7,000명
소 요시토시(宗義智)
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1,000명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
700명
총계18,700명
덴쇼 20년(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를 한 후,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고,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하여 평안도로 나아갔다. 또,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의 근처까지 도달하였으며,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하였다.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 해, 명군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의 조선군이 평양을 공략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1만명의 조선군을 가세해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로 퇴각하였다. 이에 이여송은 "퇴로를 주겠으니 성을 양도하라"라고 통보하였고,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하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피행이 되었다.
한성을 목표로 해 진격하는 명군에 대해, 일본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한 후, 조명연합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벽제관 전투였다. 명군에서는 이 패전으로 위축되었고, 일본군도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교섭을 한 후, 부산 주변까지 철퇴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심유경(沈惟敬)과 평화교섭을 하였지만, 쌍방은 서로 요구하는 조건과는 달라, 국서의 내용을 쌍방의 형편에 맞게 개찬하는 등 평화교섭 성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명나라측 강화 담당자인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교섭은 결렬되었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참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하였고, 4일째에 성을 함락했다. 다음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했다. 그 후, 겨울을 앞에 두고 후퇴한후 남해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의 귀국명령이 하달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 5제장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寺沢正成) 등과 함께 순천에 갇힌 일본군을 구원하러 출진하였고,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등 5명의 왜장은 이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을 거쳐 귀국하였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전쟁은 끝이 났다.
[편집] 세키가하라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해 후시미 성 공격에 참진하였고,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전투는 가신을 대신 출진시켰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하였고, 서군의 다이묘 대부분은 영지가 몰수 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서군 소속 다이묘들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조리돌림까지 추가되어 가장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소 요시토시의 장인어른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평소 임진왜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소 요시토시 자신의 행동과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죄가 사면되어 영지가 보전되었고,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이 시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4]했다.
[편집] 말년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를 수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요시토시는, 게이초 14년(1609년)에 조선과의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회복하였다.
이 공적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인정받아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권리를 인정받았다.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임종하였다.
후계는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이었다.
[편집] 인물- 소 요시토시의 초명인 아키카게(昭景)는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 아키(昭)라는 한자를 받은 것이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히데요시의 예전 성이었던 하시바(羽柴)라는 성과 이름의 요시(吉)라는 한자를 받아 하요시토시(羽柴吉智)로 개명하였다.
- 조선과의 전쟁을 회피하려고 한 이유는, 무역에서 얻는 이해관계 외에도 쓰시마 섬이 전쟁의 중간기착지가 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 요시토시의 성격이 아니라 해도, 쓰시마의 번주의 입장이었다면 어느 누구라 해도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 덧붙여 에도 시대에 조선과의 조약으로 소 가문의 쓰시마 번은 번영하였지만, 조선과의 교섭을 서둘러 처리하였기 때문에,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에 와서 국서위조가 발각되어 소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야나가와 잇켄)
-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다리오이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을 군종 사제 자격으로 방문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장본인인 탓에 이에 밉보여서 소 요시토시의 이혼을 거론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 묘사하고 있다. 신빙성에 대해서는 소 요시토시와 항상 생사고락을 함께한 세스페데스쪽의 주장이 임진왜란의 피해만으로 인물을 판단한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관점에서보다 높다.
만력 28년에는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풍신수뢰(일본어: 豊臣秀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끼고서 싸워 서해도(西海島)의 대명휘원(大明輝元=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5]을 내치고, 휘원이 친근하게 신임하는 장관 소서행장(일본어: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석전삼성(일본어: 石田三成 이시다 미쓰나리[*]) 등 8∼9명을 모두 살해하여 죽이고 나라 안을 평정하여 제도(諸島)를 호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갑비수(甲斐守: 구로다 나가마사)·가등청정(일본어: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등이 바야흐로 친근하게 신임을 받으며 용사하는데, 종의지(일본어: 宗義智 소 요시토시[*]) 는소서행장의 사위인 이유로써 자기 아내를 내쫓고 덕천가강에게 가서 붙었고, 평조신[6]은 소서행장의 모주(謀主)였었으므로 어떤 일을 기회로 납총(納寵)하려 하여 가강과 청정 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갖은 말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종의지와 평조신은 곧 왜적들 중에서도 매우 교활한 자들로서, 거주하고 있는 곳이 우리의 지경과 밀접하게 가깝습니다. 강화 요청을 핑계삼아 자주 사람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 간곡한 정성을 다하기도 하고 멋대로 공갈 협박을 하기도 하며, 몰래 쾌속선을 내보내 사람을 약탈하기도 하고 그들 섬의 왜인들로 하여금 투항해서 굶주리고 있음을 고하게도 하여, 변태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더욱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탐색이 갈수록 급박해지고 말을 바꾸어 가면서 계책을 더욱 깊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꺼리면서 은밀히 물어보는 것은 매양 중국 장수들이 어느 땅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과 중국군이 과연 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방수(防戌)하느냐는 것이니, 이런 때에 천조(명나라)에서 힘을 내어 구제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스스로 도모하여 큰 실패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
— 선조 163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9일(갑오) 7번째 기사
- 쓰시마 섬
- 쓰시마노쿠니
- 쓰시마 후추 번
- 한일관계사
- 조선통신사
제1대 쓰시마 후추 번 번주 (소 가문)
1588년 ~ 1615년
후 임
소 요시나리
- <제2군>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31세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 참여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일본어: 加藤清正かとうきよまさ, 1562년 7월 25일~1611년 8월 2일)는 일본의 장수(무장)이자 정치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외가 쪽으로 6촌의 친척 조카가 된다. 다른 6명의 무사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賤ケ岳)의 일곱 자루 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카무라(中村) 출생으로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축성술이 뛰어나고 호랑이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을 맡은 장수였으며 일본으로 패퇴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가신이 되어 구마모토(熊本)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편집] 생애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게 되는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 중 한 명으로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3,000석의 영지가 주어지게 된다.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었으며 이후 규슈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히고 국(일본어: 肥後国ひごのくに 히고노쿠니[*])은 사이카이도에 설치된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구마모토 현에 해당한다.
![]()
구마모토 성 (일본어: 熊本城, くまもとじょう)은 일본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나고야 성, 오사카 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이다. 성 주변에 은행나무가 있어 긴난 성 (銀杏城: 은행 성)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가 애용했던 무기는 가타가마야리(片鎌槍,가지극)이며, 일생 동안 자신의 상징으로 길다란 모양의 특이한 투구를 애용했는데, 장신인 몸을 더 돋보이기 위해서라고도, 혹은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커 보이기 위해 모자를 애용했다고도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 2군 장수로서 휘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등을 이끌고, 제 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는 조선의 동북쪽 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는 점령지인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 가토 라고 불렀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고, 조선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해져, 남쪽으로 후퇴하여 서생포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93년에는 서생포왜성을 완성하고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제 1군사령관으로 다시 150여척의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도록 명령받았다. 정유재란시에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였다.[1] 그는 울산에 지구전을 펼칠 수 있는 성을 쌓고 울산성 전투에서 농성을 벌였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량과 물 부족으로 병사의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문치파 측과는 계속 대립하여 내분을 빚었다. 1598년이 되자 서생포왜성이 명나라의 마귀(사람)제독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일본으로 후퇴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택을 습격하였으나 살해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 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그의 가신으로 여생을 보냈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 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도요토미 가에 충성을 다하면서도 도쿠가와의 권력 앞에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 애쓴 이중적인 입장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가문을 중재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인하여 평소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계획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움을 사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편집] 구마모토와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후 그는 구마모토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일본 3명성으로 유명한 성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구마모토 성을 1607년 축조하였는데,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성 안에 우물을 120개가 넘게 만들고 다다미 역시 식용이 가능한 고구마 줄기를 재료로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 등을 장려하여 현재의 구마모토 시의 기초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 3명성은 가토 기요마사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에 의해 축성된 성중에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을 말한다. 그리고, 나고야 성 천수대 밑에는 기요마사의 돌이라고 불리는 큰 돌이 있다.
[편집] 쾌지나 칭칭나네북한의 통일신보는 대표적 경상도 민요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의 유래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2]
임진왜란 당시 패퇴하는 왜적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한 말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서도 진주지방에서 가등청정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의 수록본이 있다.[3]
[편집] 가문가토(加藤) 가문은 고구려 유민이 정착한 고마군(高麗郡) 출신이라고 한다.
고마군에서는 약광의 후손 고마(高麗), 고마이(高麗井) 라는 성이 있어 일설에는 고구려 왕족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 <제3군>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25세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
구로다 나가마사(일본어: 黒田長政くろだ ながまさ, 1568년 12월 21일 ~ 1623년 8월 4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의 무장이다.
[편집] 생애
1568년 12월 21일 하리마 국 히메지 성에서 태어났다.
하리마 국(일본어: 播磨国はりまのくに 하리마노쿠니[*])은 산요도에 설치된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효고 현 남서부에 해당한다. 반슈(播州ばんしゅう)라고도 한다.
히메지 성(일본어: 姫路城ひめじじょう 히메지조[*])은 효고 현 히메지 시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 성벽이 불에 타지 않기 위해 백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하쿠로 성(白鷺城: 백로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를 시라사기 성으로 잘못 읽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근세 성곽이다. 성 전체는 세계유산이며 국가 사적이다. 천수를 포함하여 여러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아버지는 구로다 요시타카이며, 어머니는 하리마 국 시카타 성의 영주 구시바시분고노카미 고레사다(櫛橋豊後守伊定)의 딸이다.[1]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 중에서 단지 히메지 성만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하리마 국 동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정적인 아키(安芸)의 모리 데루모토가 자리잡고 있었다.[1]
아키 국(일본어: 安芸国あきのくに 아키노쿠니[*])은 일본 산요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히로시마 현 서부에 해당한다. 게이슈(芸州げいしゅう)라고도 한다. (아와 국(安房国)과의 중복을 피하려고 두 번째 글자를 사용한다)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의 대리인으로서 노부나가에게 신종하였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1577년 10세의 구로다 나가마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1]
인질이 된 구로다 나가마사는 기노시타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맡겨져
오미 국 나가하마에서 성장하였다.[1][2]
나가하마 시(일본어: 長浜市)는 시가 현 북동부에 위치하는 시이다
580년 아버지 요시타카가 셋쓰 국의 아라키 무라시게의 꾀임에 넘어갔다가 내통죄로 몰려 감금당하자, 노부나가는 요시타카를 죽일 것을 명령하지만[2] 살해를 맡았던 다케나카 시게하루는 노부나가를 속이고 구로다 나가마사를 자신의 영지인 미노 국 내에 숨겨주었다.[2]
미노 국(일본어: 美濃国みのくに 미노노쿠니[*])는 일본 도산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영토는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대체로 현재의 기후 현 남부에 해당한다. 노슈(濃州のうしゅう)라고도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582년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처음으로 전투에 출진하였는데, 공을 세워 가와치 국에서 첫 영지를 받았다.
가와치 국(일본어: 河内国, かわちのくに)는 기나이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오사카 부 동부에 해당한다. 설치 초기에는 오사카 부의 남동부(이즈미 국 영역)도 포함했다. 가슈(河州かしゅう)라고도 한다.
다음 해에는 시즈가타케 전투, 1584년에는 네고로·사이카의 난 등에서 승리하여 영지가 2천석 증가하였고, 1587년에 있었던 규슈 공격에서는 아버지 요시타카와 함께 분고·휴가 방면을 공격하였다.[2] 그 공으로 요시타카 부자는 부젠 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2]
부젠 국(일본어: 豊前国ぶぜんのくに 부젠노쿠니[*])은 사이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후쿠오카 현 동부를 중심으로, 오이타 현의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
7세기 말, 도요 국(豊国)을 분할하여 분고 국(豊後国)과 함께 설치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2], 지금의 기장군 일대에 일본식 성을 축조하였다.[3][4] 임진왜란 이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쓰의 딸과 이혼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요시히메를 정실로 맞아들였다.[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였고, 그 공으로 치쿠젠 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지쿠젠 국(일본어: 筑前国ちくぜんのくに 지쿠젠노쿠니[*])은 일본 사이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후쿠오카 현 서부에 해당한다. 쓰쿠시 국을 분할하여, 지쿠고 국과 함께 7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 등 도요토미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있다가[5]
오사카 전투에서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혐의를 받아 에도에 억류되었다.[5]
결국 나가마사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여러 아들들을 에도에 인질로 보내야만 했다.[5]
그 후에는 막부의 다양한 관리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였는데, 혼다 마사노부, 혼다 마사즈미,안도 나오쓰구, 도이 도시카쓰, 도도 다카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5][6]
1623년 8월 4일 56세의 나이로 숨졌다.
[편집] 일화- 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한 이후 다이묘들은 휴가를 얻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구로다 나가마사와 가토 요시아키는 에도에 계속 머물렀다. 나가마사는 도이 도시카쓰와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에도에서 여러 노력을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안도 시게노부의 불신을 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이를 빗대어 "이번에는 꼬리가 보이는군" 하며 빈정대었다.[6]
- 1619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히로시마 성을 무단으로 수축했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금이야말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이므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6]
- 고미 후미히코 씀,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 (2003년), 이손사,
- 구로다 씨
구로다 요시타카
제1대 구로다가 후쿠오카 번 번주
1589년 - 1623년
후 임
구로다 다다유키
- <제4군>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참여=> 탄원으로 목숨연명
모리 가쓰노부(일본어: 毛利勝信 모리 가쓰노부[*] ? ~ 1611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의 무장 겸 다이묘이다. 요시나리(吉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성은 모리(森)라고 한다. 오와리 국 출신이며 아들은 모리 가쓰나가(毛利勝永)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참 가신으로 호로 7인방 중 한 명이었다.
규슈 정벌과 히고 호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부젠 국 고쿠라 6만 석을 받았다.
부젠 국(일본어: 豊前国ぶぜんのくに 부젠노쿠니[*])은 사이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후쿠오카 현 동부를 중심으로, 오이타 현의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때 2천의 군을 이끌고 일본군 제4군 지휘관으로 휘하장수에 시마즈 요시히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츠키 타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시마즈 도요히사 등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온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규슈 남부세력과 함께 강원도로 진군하였다. 또, 조선 남부에 주둔 중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명과의 강화 교섭 중 임랑포성을 쌓아 조선 남부에 주둔하였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아들 가쓰나가를 따라 출진하였고,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전주회의후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군했고, 이후 정읍회의에 참석한 좌군의 여러 장수의 건의에 따라모리 가쓰노부는 부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부산으로 귀환하던 중 가쓰노부는 사천 선진리왜성을 축성하였고, 성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가쓰노부 자신은 부산에 진을 폈다.
연말부터 전투가 시작된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고, 이후 서생포왜성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세해 후시미 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후 영지가 몰수되고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몰리지만,
옛부터 사이가 좋았던 야마우치 가쓰토요의 탄원에 의해 가쓰토요의 도사 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제4군 부대장>
시마즈 요시히로 58세,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이에야스 화의 거절
1602년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에 양도하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島津義弘しまづよしひろ, 1535년 ~ 1619년)는 센고쿠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대대로 사쓰마 국의 슈고 다이묘 가문 출신이며,
사쓰마 번 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의 아버지이다.
사쓰마 국(일본어: 薩摩国さつまのくに 사쓰마노쿠니[*])는 사이카이도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가고시마 현 서부에 해당한다. 삿슈(薩州さっしゅう)라고도 한다.
전라북도 남원성에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陶工) 80명을 강제로 납치해 끌고 갔다.
[편집] 생애1597년 정유재란 당시 1천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元均)의 조선함대를 격파하였고, 이듬해 (1598년) 사천 선진리성에서 7천명의 병사로 약4만명 이상의 조·명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사천 전투)
같은 해 12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출하기 위해서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으나,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함대와의 야간 해전에서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퇴로 확보라는 목적 달성에는 성공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작 1천 5백명의 병력만 이끌고 오자 명색이 다이묘인데 데리고 온 병력이 1만명도 안된다며 마구 꾸짖고 미워했다.
그래도 전투 의지가 있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기습작전을 건의하였으나 병력이 1천 5백명밖에 안되는 주제에 말이 많다는 답변을 들으며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무시를 당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연달아 배신하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군은 이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해 철수하였으나 참전했던 1,500명의 병사 중 300여명만이 살아남는 피해를 입었으며, 전진철수 중에도 계속 동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명 중 80여명만 살아남아 사쓰마로 도주했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화해를 도모하지만 도쿠가와 측에서 화해를 거부하자 군비를 증강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규슈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주축으로 한 토벌군을 사쓰마로 보내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장기전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1602년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에 양도하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받을 수 있었다.
1619년 음력 7월 21일 요시히로는 오스미 가지키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85세였다.
오스미 국(일본어: 大隅国おおすみのくに 오스미노쿠니[*])는 사이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가고시마 현 동부와 아마미 제도에 해당한다. 구슈(隅州ぐうしゅう)라고도 불린다.
조선왕조실록에 시마즈 요시히로을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Shimazu Yoshihiro을 발음을 대입해서 한문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 <제5군>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32세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 =>히로시마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년~1624년)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휘하 장수로 있으면서 용맹을 떨쳤다.
[편집] 생애오와리 출신으로
오와리 국(일본어: 尾張国, おわりのくに 오와리노쿠니[*], 미장국)은 일본 도카이도 서부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아이치 현 서부에 해당한다. 첫 글자의 음독을 따 비슈(尾州, びしゅう)라고도 불렸다.
아명은 이치미쓰로 1578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로 들어가 용맹을 떨쳤다.
1592년에 임진왜란에서 일본군 제5진으로 참전하여 그 공을 오와리국의 영주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무단파의 대표적 인물이며, 문치파인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다. 그리하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599년 윤 3월 중립을 지키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자 가토 기요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함께 이시다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나이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권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오판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가담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으며, 결과적으로 도요토미를 쇠망의 길로 몰아가는 어리석은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히로시마의 영주로 임명되었고,
히로시마의 영주 후쿠시마 마사노리
상공업을 육성하여 히로시마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였으나,
1619년 금령을 어겨 시나노의 가와나카 섬의 소영주로 쫓겨나 병사했다.
- <제6군>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0세 참전 후 1597년 사망
양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에서 동군으로 변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출생덴분 2년(1533년)
사망게이초2년 6월 12일(1597년 7월 26일)
별명아명 : 도쿠주마루(徳寿丸)
통칭 : 마타시로(又四郎)
계명黄梅院泰雲紹閑
묘소히로시마 현 미하라 시의 東盧山 베이산지 절(米山寺)
교토 시 기타 구의 류호잔 산 다이토쿠지 절의 탑두사원인 오바이인
씨족모리 씨(毛利氏) → 고바야카와 씨
부모아버지 : 모리 모토나리
어머니 : 묘큐(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양아버지 : 고바야카와 오키카게
형제모리 다카모토
고류쓰보네(시시도 다카이에 부인)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니노미야 나리토키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이즈하 모토토모
아마노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아내問田の大方(고바야카와 마사히라의 딸)
자녀고바야카와 히데카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일본어: 小早川隆景こばやかわ たかかげ)는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다이묘이다.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3남으로 모리 료센(毛利両川)의 한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도쿠주마루(徳寿丸)이며 통칭은 마타시로(又四郎)다.
- 모리 다카모토・깃카와 모토하루는 동복형제이다.
- 둘째 형 깃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리가의 발전에 기여한 명장이다 주로 산요 지방을 담당했으며 수군 지휘관으로 공헌했다.
- 도요토미 정권하에서는 고다이로의 한사람을 맡았다.
- 친자식은 없었고 양자로써 이복동생인 모리 히데카네(모토나리의 9남)와, 기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의 5남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양자인 하히데토시(羽柴秀俊;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를 맞아들였다.
- 관례를 올리기 전에 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이름엔는 모리 가문의 돌림자인 「元」가 들어있지 않으며,
-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서 따온 돌림자인 '타카' 「隆」와 고바야카와가 돌림자인 '카게'「景」로 이름을 지었다.
- 깃카와가에 들어간 친형・모토하루와는 대조적으로 평생 한 번도 「모리 다카카게」란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다.
[편집] 생애[편집] 고바야카와 가문 상속
덴분 2년(1533년) 모리 모토나리와 묘쿄 부인의 3남으로 태어났다.
덴분 13년(1543년)에 다케하라(竹原) 고바야카와가의 당주・고바야카와 오키카게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가 되었다.
모리 모토나리의 조카(모리 오키모토의 딸)가 고바야카와 오키카게의 아내였던 인연도 있어 다카카게가 양자로 들어가는 과정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다케하라(竹原) 고바야카와가의 당주가 되었다.
덴분16년(1547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빈고 간나베 성을 공략할 때 종군해 첫 출진[初陣]을 치렀다.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간나베 성의 지성인 류오산 요새를 고바야카와 군 단독으로 떨어뜨리는 공적을 세워 오우치 요시타카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고바야카와 씨의 본가・누다(沼田) 고바아캬와가의 당주・고바야카와 시게히라는 어린데다가 병약했기 때문에, 오우치 요시타카는 아마고 씨의 침공이 시작되면 막을 수 없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덴분 19년(1550년) 오우치 요시타카는 모리 모토나리와 협력해 고바야카와 시게히라를 아마고와 내통한다는 죄를 씌워 구금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은거・출가하도록 몰아붙이는 한편 다사카 요시아키 등 누다 고바야카와가의 중신들을 정리했다.
그 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고바야카와 시게히라의 누나를 아내로 맞아 사실상 누다 고바야카와 씨를 지배하에 두고 그 가독을 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누다・다케하라 양쪽 고바야카와 가문을 합체・통일한 모양으로 고바야카와가의 당주가 되었다.
[편집]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 시대이 사건 이후 고바야카와가는 모리 문중에 포함되어 모리 직할의 정예 수군으로 활약하게 된다.
모리가 일약 시대의 무대로 뛰어오른 계기가 된 고지원년(1555년)의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고바야카와 수군은 스에 하루카타(陶晴賢)가 이끄는 오우치 수군을 격파하고 해상을 봉쇄해 모리군의 승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노미 무네카쓰를 통해 무라카미 수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책략에도 공적을 올렸다고 한다.
고지3년(1557年)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가 은거하면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형 깃카와 모토하루와함께 “모리 료센”이라 하여 모리 가문의 중추가 된다.
겐키2년(1571년)에 아버지 모리 모토나리가 사망하고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가독을 잇자 형 깃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리 데루모토의 보좌역을 맡는다.
다만 형 깃카와 모토하루가 군사면을 담당한 반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수군의 정보수집력을 활용해 주로 정무・외교면을 담당했다고 한다.
[편집]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덴쇼3년(1575년)에 들어서자 동쪽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세력이 모리의 영지에 육박한다. 이에 형 깃카와 모토하루가 산인 지방을 담당하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산요 지방의 군사를 담당해 오다측과 싸운다.
덴쇼 3년(1575년)에 미무라 모토치카가 오다측과 내통해 배반하자 그 토벌을 맡는다.
더불어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노부나가와 손잡고 침공해 오자 수군을 이끌고 오토모 군과 싸운다.
그러나 오다가의 쥬고쿠방면군 사령관 하히데요시(羽柴秀吉)의 지휘 아래서 오다 군의 침공은 점점 격렬해졌다.
덴쇼 10年(1582년)에는 시미즈 무네하루가 지키는 빗추 다카마쓰 성이 포위당해,
빗추 국(일본어: 備中国びっちゅうのくに 빗추노쿠니[*])은 산요도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오카야마 현 서부에 해당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데루모토・모토하루와 함께 모리 가문 주력 3만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3만의 오다 군과 병력이 팽팽한 상태였는데, 5월에 다케다가를 멸망시킨 노부나가의 본군이 쥬고쿠 지방을 향해 출병을 준비하는 것을 알게 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모리가 오다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를 통해 하히데요시와의 평화교섭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그해 6월 혼노지 사건이 발생해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토벌을 위해 기나이에 병사를 돌려야만 했다. 히데요시를 추격해야만 한다는 깃카와 모토하루・모토나가 부자에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맹세를 쓴 종이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추격하는것은 불의한 일이며, 노부나가의 죽음에 편승하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고 주장해, 모리 군이 하군을 추격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외에 히데요시가 기나이에 향할 때 다카마쓰 성을 둘어싸고 있던 제방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양군 사이에 수렁이 생기는 바람에 추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카마쓰 성의 혼마루
덴쇼10년(1582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거성을 니타카야마 성에서 미하라 성으로 옮긴다.
[편집] 도요토미 정권덴쇼11年(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 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이 전투에서 하히데요시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격파하자 모리 씨는 그 때까지의 관망 노선을 버리고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이때 양자인 모리 모토후사(고바야카와 히데카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낸다.
이후에는 히데요시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덴쇼13년(1585년)의 시코쿠 정벌 때는 이요의 고노 미치나오를 격파하는 등 공적을 세워 전후 히데요시에게 이요노쿠니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이요 국(일본어: 伊予国いよのくに 이요노쿠니[*])은 일본 난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에히메 현(일본어: 愛媛県えひめけん)에 해당하며 요슈(予州よしゅう)라고도 한다.
덴쇼 14년(1586년)부터의 규슈 정벌에도 참가하여 전후 히데요시로부터
지쿠젠・지쿠고・히젠1군 총 37만 1300석을 하사받았다.
![]()
![]()
![]()
하지만 규슈 정벌에서 형 깃카와 모토하루와 그의 적장자 깃카와 모토나가가 차례로 죽는 바람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혼자 모리 데루모토를 보좌하게 된다.
덴쇼 16년(1588년)에는 히데요시에게 하성(羽柴姓)을 받는다.
덴쇼 18년(1590년)엔 오다와라 정벌에도 종군한다.
덴쇼 20년(1592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노구를 이끌고 2년째에 출진하여 1592년 이치 전투에서 1만여 명의 병력을 가지고도 권율(權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에게 패퇴하기도 했으나
분로쿠 2년(1593년)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함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임진왜란 종료 후에는 귀국하여 히데요시로부터 고다이로의 지위에 임명된다.
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지쿠젠(筑前, 현 후쿠오카 현 서쪽) 지역 33만 석
지쿠젠 국(일본어: 筑前国ちくぜんのくに 지쿠젠노쿠니[*])은 일본 사이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후쿠오카 현 서부에 해당한다. 쓰쿠시 국을 분할하여, 지쿠고 국과 함께 7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분로쿠 4년(1595년)에 양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 칩거하였으며,
게이초 2년(1597년) 6월 12일에 65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편집] 인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고바야카와 씨(小早川氏)와 모토하루의 깃카와 씨(吉川氏) 두 가문이 본가인 모리 가문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가문을 "모리의 두 강(川)"이라고 칭했다(모리 료센). 하지만 다카카게가 죽은 후엔 후계자가 없었고 가문 내의 대립을 막아줄 중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체제는 붕괴되고 세키가하라 전투를 전후해 가문의 분열・부전패・감봉 등이 이어졌다.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당시는 기노시타 히데토시)는 친자식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양육되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남에 따라 히데아키의 처우를 고민하게 된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모리 씨의 양자로 내보내려 획책한다.
- 다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본가의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온 양자가 잇는 것에 저항한다. 이에 다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책략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동생・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모리 히데모토를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인다.
- 그리고 자신이 친자식이 없는 점을 들어 히데요시에게 히데아키를 양자로 달라 간원하고 승낙받는다. 히데요시도 다카카게의 본심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리 가문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 감동하여 히데아키의 입사에 의해 고바야카와 가 적장자에서 물러나게 된 고바야카와 히데카네를 독립시켜 다이묘로 발탁한다.
- 다카카게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반과 그의 요절로 인해 고바야카와 가문은 게이초 7년(1602년)에 단절되어 버리지만(다만 고바야카와란 이름은 히데카네의 아들 요시히사가 잇는다), 다카카게의 심모원려 덕분에 모리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모리 모토나리 사후 아직 당주로서의 자각이 부족했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다카카게는 가신의 눈이 없는 곳에서 군신 관계가 아닌 숙부와 조카의 관계로 강경하게 간하는 것도 불사했다고 한다. 위대한 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부탁받은 후계자를 가신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숙부로서도 보호자로서도 엄하게 길렀다고 한다.
- 후년 데루모토가 「정치는 전부 오바이인도노(黄梅院殿, 다카카게)에게 맡겼다」로 할 정도로,데루모토에게 있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였다.
-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 때 하군 추격을 주장했던 모토하루의 의견을 누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고마워하여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히데요시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대한 신임은 대단히 두터웠다.
- 히데요시는 도자마이며 게다가 바이신(陪臣, 가신의 가신)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이례적이라 할 만한 정도의 은상을 주었다. 다이코켄치(太閤検地)도 모리 씨의 영지에서만 면제해줬으며, 더하여 고다이로(五大老)에 모리 씨를 2명이나 넣었다(다카카게, 데루모토).
- 미야베 게이준은 「다카카게가 있는 한 모리의 정치는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 에도 시대의 사가는 다카카게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진 행적이 깊고, 사랑과 화합을 한결같이 한 인장(仁将)」이라고 칭찬했다.
-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에서는 「위험한 싸움엔 항상 신중히 계략을 갖고 적을 굴하게 하는 수단을 썼다」고 평가하는 등, 아버지와 닮은 지장이었다.]
- 구로다 조스이와는 사이가 좋았던 듯하다. 조스이에 대해 「당신은 상당히 머리가 좋고 매사를 즉단즉결해 버리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도 많을 것이다. 나는 당신정도로 수완가가 아니라서 충분히 시간을 들인 다음에야 판단을 하기 때문에 뒤에 후회하는 일이 적다.」고 지적했다.
- 또 조스이는 다카카게의 부고를 접하고 「이것으로 일본의 현인은 없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두 사람을 「나 이외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구로다 조스이나 고바야카와의 다카카게」라고 평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해뜨는 나라는 서쪽을 다카카게에게, 동쪽을 이에야스에게 맡기면 태평할 것이다」라고까지 평을 받았다.
- 히데요시는 「이 세상의 정치가 가능한 것은 나오에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다만 천하를 얻기엔 나오에는 지혜가 부족하고, 고바야카와는 용기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 임종을 앞두었을 때 같은 병상에 누워있던 동생 호이다 모토키요와 「어느 쪽이 먼저 떠날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 조카인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하시바와의 맹약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안태를 이룰 수 있다」며 자신의 자랑 하나를 들려줬다는 기술이 깃카와가 문서에 남아있다.
- 정실(시게히라의 누나)와 다카카게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더도 측실을 두지 않았다.
- 소년 시절 형 모토하루와 눈싸움을 할 때 처음에는 패배했다. 하지만 다음 싸움에서 부하 3명으로 적 5명과 싸워 불리함을 가장하고 서서히 퇴각해 적을 충분히 끌어들인 후, 남은 2명으로 측면에서 공격해 승리를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 중요한 용건이 있어 급하게 글을 쓸 필요가 있을 때는 서기에게 「급한 용무다. 마음을 충분히 침착하게 하고 쓰도록 하라.」고 말했다 한다.
- 후베야마 전투
- 산시쿄쿤죠(三子教訓状)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연기한 인물
- NHK대하드라마「히데요시」야마자키 가이도
- NHK대하드라마「모리 모토나리」福田樹央→메구미 도시아키
- 영화「올빼미의 성」家辺隆雄
- 테레비아사히 화요시대극(テレビ朝日火曜時代劇)「다이코키~천하를 얻은 남자 히데요시」治田敦
고바야카와 오키카게
다케하라 고바야카와가 당주
1544년 ~ 1595년
후 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전 임
고바야카와 시게히라
누다 고바야카와가 당주
1550년 ~ 1595년
후 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모리 가문
- <제7군>
7군 사령관 모리 데루모토 40세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총대장=> 영지 축소
모리 데루모토(일본어: 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 1553년 2월 4일 ~ 1625년 6월 2일)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는 고다이로중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되었다.
에도 시대 조슈 번 초대 번주이기도 하다.

덴분 22년 (1553년) 음력 1월 22일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적장자 모리 다카모토의 장남으로 아키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고마루이다.
아키 국(安芸国 )현재의 히로시마 현 서부. 게이슈(芸州げいしゅう)
에이로쿠 6년 (1563년) 아버지 모리 다카모토가 급사했기때문에 11세에 가독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어렸기 때문에 조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실권을 장악했다.
에이로쿠 8년 (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로부터 글자 한자를 받아 데루모토(毛利輝元)로 개명하였다. 같은 해 갓산 도다 성 전투에서 처음 전투를 치른다.
겐나 2년 (1571년) 조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죽자 모리 료센[1]체제를 중심으로 중신의 보좌(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받아 친정을 개시하였다. 덴쇼 2년 (1574년) 우마노카미에 임관되었다.
[편집] 오다 가문과의 싸움그 후, 데루모토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에 올라 각지에 세력을 신장하였다.
조부 모토나리 때부터 적대세력이였던 아마고 가문과 오토모 가문과 전쟁을 벌였고 이들을 제압하여규슈와 주고쿠 지방에 세력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덴쇼 4년 (1576년) 음력 2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축출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였고 더욱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승려가 거병하자 혼간지 편에서 병량과 탄약을 원조하여 오다 가문과 대립하였다.
당시 오다 가문은 에치고의 강적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리 가문은 오다 가문보다 병력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였고 음력 7월 제1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오다 수군을 격파 대승을 하게 되었다.
또, 덴쇼 6년 (1578년) 음력 7월에는 고즈키 성 전투에서 하히데요시(羽柴秀吉)와 아마고 가문의 연합군과의 결전을 맞이 했지만 하히데요시는 미키 성의 벳쇼 나가하루의 반란에 따라 미키 성으로 군대를 돌렸다.
고즈키 성에 홀로 남은 아마고 가문은 분전하지만 모리 가문에 패배하였다.
이로써 아마고 가문의 잔당을 뿌리뽑았으며 오다 가문에 대해서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음력 3월 우에스기 겐신이 죽었고 더욱이 음력 11월에 일어난 제2차 기즈키가와구치 전투에서 철갑선[2]을 전장에 투입한 오다 군에게 패배하였고 모리 수군은 섬멸되었다. 이후 전황은 모리 가문에 불리하게 되어갔다.
덴쇼 7년 (1579년)에는 모리 가문에 종속되어 있던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고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였다.
비젠 국(備前国びぜんのくに ),
현재의 오카야마 현 동남부에 가가와 현 소즈 군과 나오시마 제도, 효고 현 아코 시의 일부를 더한 지역에 해당한다
덴쇼 8년 (1580년) 음력 1월에는 오다 군의 주고쿠 공략군 지휘관 하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가 미키 성을 함락하였고 벳쇼 나가하루는 자결하였다. (미키 전투)
다음해인 덴쇼 9년 (1581년) 이나바 돗토리 성도 포위 공격에 따른 병량고갈로 항복하게 되었고 모리 가문의 장수 깃카와 쓰네이에는 자결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데루모토는 숙부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들과 함께 출진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서쪽으로 공격해 왔으며 산인에서도 난조 모토쓰구가 공격해오는 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분고(豊後国 ),현재의 오이타 현에서 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에 해당한다. 7세기 말, 도요 국(豊国)을 분할하여 부젠 국(豊前国)과 함께 설치되었다.
덴쇼 10년 (1582년) 음력 4월 하히데요시는 모리 가문의 충신 시미즈 무네하루가 농성하는 빗추 다카마쓰 성을 공격한다.
빗추 국(일본어: 備中国びっちゅうのくに 빗추노쿠니[*])은 산요도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오카야마 현 서부에 해당한다.
공방전중 음력 6월 2일 교토 혼노지에서 오다 가문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에 의해오다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하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모리 가문과 화친을 모색한다.
이로써 전황의 불리함을 느끼고 있던 데루모토와 화친하게 되었다.
결과 빗추 다카마쓰 성은 개성되었고,
화친의 조건으로 모리 가문의 충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할복하였다.
[편집] 도요토미 정권오다 노부나가 사후, 중앙에서 하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패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자, 양측으로부터 아군이 될것을 요구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덴쇼 11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를 앞두고 히데요시 쪽에 승전을 비는 선물을 보냈다. 단,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을 뿐, 가쓰이에 쪽에도 승전을 비는 선물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시즈가타케 전투후, 패권이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자신의 숙부인 모리 히데카네와 사촌인 깃카와 히로이에를 인질로 보냈고, 신하의 예를 표했다.
그 후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덴쇼 13년 (1585년) 시코쿠 정벌, 덴쇼 14년 (1586년) 규슈 정벌에도 선봉으로 출진하였고, 무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로부터 주고쿠 6국 고쿠다카 120만 5천 석의 소령을 안도받았다.
덴쇼 17년 (1589년) 당시 교통의 요충지였던 오타 강 삼각주에 히데요시의 주라쿠 다이를 본따 히로시마 성을 축성한다.
히로시마 성의 천수와 해자
덴쇼 19년 (1591년) 오랜기간 모리 가문의 거성이였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을 버리고,
아직도 공사중인 히로시마 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분로쿠 원년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때에는 자신의 주력부대를 파견했다. 이런 공적으로 게이초 2년 (1597년) 히데요시로부터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함께 고다이로에 임명되었다.
게이초 3년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임종을 맞이할 즈음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편집] 세키가하라 전투게이초 5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대립하였고, 드디어 무력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음력 6월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토벌을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켜 아이즈 지방으로 출진하자, 다음달 7월 이시다 미쓰나리도 군사를 일으켜 이에야스와 맞섰다.
이때 미쓰나리는 친구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의 진언에 따라 자신이 총대장에 오르지 않고, 이에야스와 필적할만한 실력을 가진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모리 가문의 외교 승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설득된 모리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대장 자리를 받아들였다.
모리 데루모토는 음력 7월 17일 오사카 성 니시노마루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음력 9월 15일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 친히 군을 이끌고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친지인 모리 히데모토와 깃카와 히로이에를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전후 서군은 패배하였고,
음력 9월 24일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와 모리 히데모토의 주전론을 거부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전쟁을 할 뜻이 없음을 전했다. 그리고, 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였다.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간에 전투에서 서군의 패배를 예상한 깃카와 히로이에는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를 통해 본령의 안도와, 가문의 존속을 교섭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깃카와 가문의 군대가 모리 가문의 군대를 저지하는 결과가 되었고, 모리 가문의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후, 그 약속을 파기하고 모리 데루모토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의 영지중 일부인 스오, 나가토 2개국 고쿠다카 29만 8천 석을 깃카와 가문에 주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깃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모리 가문의 존속과 히로이에 자신에게 돌아갈 영지를 모리 가문에 주는 선에 끝냈다.
이로써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즉 종가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편집] 에도 시대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 음력 10월, 모리 데루모토는 출가해 게안 소즈이라 불렀으며 가독은 적자인 모리 히데나리에게 양도하였다. 하지만 가문의 실권은 데루모토에게 있었다.
게이초 8년 (1603년) 모리 데루모토는 에도로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고,
다음해인 게이초 9년 (1604년) 나가토 국에 하기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나가토 국(일본어: 長門国ながとのくに)은 산요도에 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야마구치 현 서부에 해당한다. 조슈(長州ちょうしゅう)라고 불리기도 한다.
![]()
![]()
게이초 19년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은밀히 중신 나이토 모토모리를 오사카 성에 보내 도요토미 가문을 지원하는 한편, 이에야스의 동군에도 참전하였다. 하지만, 모리 가문은 이 전투에서 소극적인 움직임만 보였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은 화의를 맺었고, 군을 철수 시켰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은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절에 기신한 종의 명문을 문제 삼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성을 공격하였다.
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모리 히데모토의 부대가 본대보다 선봉에서 도요토미 군을 상대했었다. 이를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상찬(賞贊)했다.
이 오사카 전투의 군역과 에도 성 건축에 참여, 에도에 번저를 짓는 등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빚어진 가문의 분열을 막고자 애를 썼다.
겐나 9년 (1623년) 모리 히데나리에게 정식으로 가독을 양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간에이 2년 (1625년) 음력 4월 27일 하기의 시혼마쓰 저택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73세였다.이때 가신 나가이 모토후사가 순사하였다.
[편집] 인물- 할아버지, 아버지, 형이 모두 술로 인해 일찍 죽은 모리 모토나리는 주량이 많은 젊은 데루모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데루모토의 부인을 통해 쓴소리를 했다.
- 기량과 패기가 없고, 성격도 우유부단한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며 시대극 등에서도 대부분 평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 "기밀을 곧잘 누설한다" 등 조부 모토나리의 불평이 적힌 문서가 남아 있고, 교육을 담당했던 작은 아버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 엄히 예의범절을 가르쳤다고 한다.
- 반면,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갔던 강항(姜沆)은 간양록(看羊錄)에 “(모리 데루모토는) 조심성이 많고 느긋하여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하다.”라고 기술하였다.
- 덴쇼 17년 (1589년) 가신 스기 모토노부를 살해하고 그의 부인을 취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주고쿠 지방의 태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두 작은 아버지가 있었던 덕택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두 사람 모두 죽고 없어 데루모토를 보좌할만한 인물이 없던 것이 불운이라 하겠다.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고, 시코쿠, 규슈에도 군사를 움직였으나, 본인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세키가하라에서 가신단은 분열되어 모리가문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영지가 대폭 삭감당하고 말았다.
- 나가토로 이봉된후, 조슈 번의 지배체제 강화를 명목으로 가신단을 정리 숙청하였다. 혈연 관계인 구마가이 모토나오 일족과 요시미 히로나가를 숙청하고,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마스다 모토나가를 발탁하였다.
- 내정에 힘써 황무지 , 특산품을 장려하여 조슈 번의 토대를 닦았다. 번의 정치는 대부분 모리 히데모토와 마스다 모토나가에게 위임하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 모리 히데모토의 조후 번은 조슈 번의 지번(支藩)이 된 것에 반해 깃카와 히로이에의 이와쿠니 번은 지번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깃카와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후 소홀하게 대접받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 조치는 양자로 맞이했다 폐적시킨 모리 히데모토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는 그다지 없다.
- 데루모토 자신은 히데모토를 모리 료센 체제에서 다카카게를 대신하는 위치로 보았고, 깃카와 히로이에의 장남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집안 단속에 힘썼다.
- 나가이 모토후사의 순사에 관계해서는, 모토후사가 잠시 동안 가신단에서 축출되었을 때, 모리 데루모토는 은밀히 자금을 지원하였고, 다시금 가신단에 복귀하였을 때, 이전과 같은 대우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현재에도 우둔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노 미치요시 사건[3] 으로 볼 때, 세키가하라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한 의중으로 보인다. 당시 가신에게 명하여 규슈의 여러 성의 지도를 작성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다.
모리 데루모토는 숙청과 암살을 많이 한 인물이다.
- 구마가이 모토나오 - 로마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아마노 모토노부 - 역시 가톨릭 신앙을 문제삼아 살해하였다.
- 스기 모토노부 - 그의 부인을 취하기 위해 살해하였다.
- 요시미 히로나가 -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토벌하였다.
- 나이토 모토요시 -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장남.
- 아와야 모토토요 - 사노 미치요시 사건에 연좌되어 자결하였다. 나이토 모토모리의 차남.
- 우가이 모토타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가신이였지만, 숙부가 죽은 후, 살해하였다.
- 아버지 : 모리 다카모토//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어머니 : 오자키노 쓰보네 (나이토 오키모리의 딸로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
- 정실 : 미나미노 가타 (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 측실 :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 장남 : 모리 히데나리
- 장녀 : 다케 히메 (깃카와 히로마사의 처)
- 차남 : 모리 나리타카
- 양자
- 모리 히데모토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준손의 정실
- 깃카와 히로마사의 정실
- 세키가하라 전투
- 히로시마 성
- 하기 성
- 조슈 번
- 고다이로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다카모토
아키 모리가 역대 당주
1563년 ~ 1623년
후 임
모리 히데나리
전 임
없음
제1대 조슈 번 번주
1563년 ~ 1623년
후 임
모리 히데나리
- 센고쿠 무장
- 도자마 다이묘
- 센고쿠 다이묘
- 임진왜란 관련자
- 모리 가문
- <제8군>
8군 사령관 겸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21세
=> 행주대첩에서 패배
=>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 참가 후 유폐됨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오카야마 성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겐키 3년(1572년)
사망메이레키 원년(1655년)
개명하치로(八郎), 이에우지(家氏), 히데이에(秀家), 규후쿠(久福)
별명하히데이에(羽柴秀家), 도요토미 히데이에(豊臣秀家), 비젠사이쇼(備前宰相)
시호규후쿠(休復)
관위종3위 지쥬(侍從), 산기(參議), 사콘에이곤쥬죠(左近衛權中將), 곤쥬나곤(權中納言)
주군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아내마에다 고우(豪姬)
자녀히데다카(秀高), 히데쓰구(秀繼) 등
우키타 히데이에 또는 우기다 히데이에(일본어: 宇喜多秀家, 1572년 ~ 1655년 12월 17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 석의 다이묘이다.
③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기비(吉備=빈고,빗추,비젠, 오카야마 현) 지역의 동쪽으로 57만 석
빈고
빗추
비젠
1572년에 오카야마 성에서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81년에 나오이에가 병으로 죽자, 당시 우키타 씨가 종속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의 뜻에 의해 이듬해인 1582년에 영지를 보장받고 가독(家督)을 물려받게 된다.
가독을 물려받은 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주고쿠 원정을 맡고 있던 하히데요시의 군에 편입되어빗츄다카마쓰 성 공략을 돕게 된다. 다만 아직 소년이었던 탓에 숙부인 우키타 타다이에(宇喜多忠家)가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했다.
노부나가 사후에도 도요토미의 총애를 받아 유시(猶子)의 연을 맺고, 1586년에는 히데요시의 양녀 고우히메(豪姫,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를 정실로 맡는다.
어린 나이임에도 히데요시의 신임이 지극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등과 함께 고다이로에도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대장으로 참전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권율에 맞서 싸워 대패하였다. 더군다나 우키타 히데이에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도망쳐서 겨우 살아남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양자인만큼,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위하여 서군에 속하였으며,전투초기 후쿠시마 마사노리등을 격파하며,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서군 내부의 배신으로 급속히 전세가 기울면서 패배하였고,
패배 후 달아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에 숨는다. 그러나 시마즈 씨가 우키타 히데이에를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인 다다쓰네에 의해 1603년에 이에야스에게 넘겨진다.
이후 다다쓰네와, 처남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탄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구노산토죠구에 유폐되었다가1606년에 하치조 섬으로 유배된다.
하치죠 섬에서는 처가인 마에다 씨 등의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 출신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풍랑으로 인해 하치죠 섬에 잠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조 섬의 대관(代官)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등,
궁핍하게 살았다는 설도 있다.
1655년 11월 20일에 83세로 죽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관련한 통설로는 미쓰나리가 나오에 가네쓰구와 밀약을 맺고 거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우키타 히데이에가 미쓰나리에 앞서 이에야스 타도를 기치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설이 있다.
- 음력 7월 1일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정식을 가졌던 점
- 미쓰나리와 친밀했던 쓰가루 다메노부나 사다케 요시노부등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점
-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문서가 전해지고 있는 점
- 미쓰나리의 친우인 요시쓰구 역시 미쓰나리의 계획을 모른채 도쿠가와를 도우러 가는 도중 서군에 편입되었다는 점
- 세키가하라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함께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믿을 수 없다며 창을 잡았다는 설등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인물됨
- <제9군>
9군 사령관 도요토미 히데가쓰
- <해군 1>
도도 다카토라 37세 =>에도시대 : 이세 국 쓰 번주
도도 다카토라
도도 다카토라 (일본어: 藤堂高虎とうどう たかとら 토도 타카토라[*], 1556년 2월 16일 ~ 1630년 11월 9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고지 2년(1556년) 2월 16일(음력 1월 6일), 오미 이누카미 군 도도무라(현재 시가 현 이누카미 군 고라 정)의 토호 도도 도라타카의 아들로 태어난다
오미 이누카미 군 도도무라(현재 시가 현 이누카미 군 고라 정)
몇 번이고 주군을 바꾼 센고쿠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무사란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발언했다고 한다.
축성술이 뛰어나 우와지마 성, 이마바리 성, 사사야마 성, 쓰 성, 이가 우에노 성, 제제 성 등을 축성했다. 다카토라의 축성은 석벽을 높게 쌓는 것과 해자의 설계에 특징이 있다.
같은 축성의 명수 가토 기요마사는 석벽의 휨을 중시한다는 것에서 대비된다.
[편집] 생애[편집] 오미에서
고지 2년(1556년) 2월 16일(음력 1월 6일), 오미 이누카미 군 도도무라(현재 시가 현 이누카미 군 고라 정)의 토호 도도 도라타카의 아들로 태어난다. 도도 씨는 선조 대대로 영주였지만,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 서서히 몰락했고, 다카토라가 태어날 즈음에는 일개 농민에 불과했다.
아명은 요요시? 혹은 도모요시? 이다.
처음 오미의 센고쿠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 되었고,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해 무공을 세워 나가마사를 기쁘게 하였다.
덴쇼 원년(1573년) 아자이 씨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문되자, 아자이 가의 옛 가신인 아쓰지 사다유키를 거쳐 이소노 가즈마사를 섬겼다.
[편집] 오다, 하시바의 가신으로뒤이어 오미를 벗어나 노부나가의 조카인 오다 노부즈미를 모신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해 덴쇼 4년(1576년) 하히데나가를 섬겨, 3000석의 작은 영토를 받는다.
히데나가의 수하에서 주고쿠 정벌, 시즈가타케 전투등에 종군한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발군의 기량을 뽐내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2000석이 가증되었다.
후에 히데요시로부터 5000석을 더 받아 합계 1만 석의 다이묘로 승진했다.
덴쇼 13년(1585년) 기이 사이카 공격에 종군하고, 이 즈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이카토의 수장으로 있는 스즈키 시게오키를 모략으로 자결로 몰고간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에도 종군해, 1만 석이 가증되어 좀 전 것의 배인 2만 석이 되었고, 이 즈음 히데요시의 천거로 정오위하, 사도노카미에 위계되었다.
덴쇼 19년(1591년) 히데나가가 죽자, 그의 양자 하히데쓰구를 주군으로 모신다.
히데쓰구의 대리로 다음 해 임진왜란때 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수군 9000여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게 여러 차례 패전하였다.
일본 수군의 첫 패배였던 옥포 해전 당시 지휘관이기도 했다.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가 처형당하자 고야 산으로 출가한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해 환속한다.
5만 석을 가증받아 이요 사카지마(현재 우와지마 시) 7만 석 다이묘로 승진했다.
이요 국(일본어: 伊予国いよのくに 이요노쿠니[*])은 일본 난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에히메 현(일본어: 愛媛県えひめけん)에 해당하며 요슈(予州よしゅう)라고도 한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니혼마루라는 군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게이초 2년(1597년)부터 정유재란때 수군을 이끌고 참가한다. 조선 수군의 장수 원균이 이끄는 수군을 칠천량에서 섬멸한다(칠천량 해전). 그리고 귀국 후 1만 석이 가증되어 8만 석의 다이묘가 된다. 그리고 거성이었던 사카지마 마루토키 성을 대규모로 개축한다.
완성후 우와지마 성으로 개명한다.
우와지마 성 (宇和島城, うわじまじょう) 은 에히메 현 우와지마 시 마루노우치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국가 지정 사적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지마 성(鶴島城), 마루베시 성(丸串城)이다. 에도 시대에는 우와지마 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자 다카토라는 다음 번 패자(覇者)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걸 판단하고 재빨리 이에야스에게로 접근한다. 그리고 도요토미 씨의 가신단이 무단파와 문치파로 분열하자, 다카토라는 무단파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으로 붙는다.
게이초 5년(1600년)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이에야스가 거병하자,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병력을 이끌고 종군한다. 아이즈 정벌로 인해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오사카가 비게 되자 이 틈을 타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이 거병하였다.
다카토라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해 오다 히데노부가 지키고 있는 기후 성공격에 참전하고, 9월 15일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가해 오타니 요시쓰구의 부대와 겨뤘지만 그 부대에 걸려 꼼짝못했다.
또,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케타다, 구쓰키 모토쓰나, 아카자 나오야스 등을 조력으로 서군을 배신하게 만든 공으로, 전후에 이에야스로부터 이요 이마바리 20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편집] 에도 시대그 후 다카토라는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이 되었다. 에도 성 개축 등에도 힘썼기 때문에 게이초 13년(1608년) 이카 일국 및 이세 8개 군 22만 석에 가증 이동된다.
이세 국 쓰 번주가 되었다.
이세 국(일본어: 伊勢国いせのくに 이세노쿠니[*])은 도카이도에 설치된 일본의 옛 구니이다. 지금의 미에 현 중앙의 대부분에 해당한다. 세이슈(勢州せいしゅう)라고도 한다.
이에야스는 다카토라의 능력과 충의를 높게 평가해서, 도자마 다이묘임에 불구하고 대우는 후다이 다이묘로 중용한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진에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한다. 다음 해 오사카 여름진에서도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고, 스스로 가와치 방면의 선봉으로 지원해, 야오에서 도요토미 측 조소카베 모리치카 부대와 전투를 벌인다(야오 전투). 이 전투에서 조소카베 군의 맹공으로 도도 군은 조소카베 군에 고전했고, 무장 도도 요시카쓰와 도도 다카노리를 비롯 6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승리해 그 공적으로 전후 32만 석이 가증되어 동년 윤6월 종사위하로 위계되었다.
이에야스 임종 직전에 침상 곁에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에야스 사후 히데타다를 섬겼고, 겐나 6년(1620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마사코가 조정으로 입궁할 때 스스로 지원해 선도역을 맡았다. 궁궐에 들어가, 마사코의 궁내 입궁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마사코 님이 입궁하지 못한다면 책임을 지고 어소(御所)에서 할복하겠다.」라고 말하며 강력히 밀어붙였다고 한다.
[편집] 말년만년에는 눈병을 앓아 실명했으며, 간에 7년(1630년) 10월 5일에 죽었다. 향년 75세였다.
후에 아들 도도 다카쓰구가 대를 이었다.
[편집] 인물- 6척 2치(약 190cm)의 키를 자랑하는 거한이었다고도 한다.
- 다카토라는 몇 번이나 주군을 바꿔, '변절자' 혹은 '권력의 앞잡이'라는 소리가 많아서, 역사 소설등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이기는 하지만, 에도 시대에 유교의 가르침을 받은 무사가 나타나기 이전 일본에서는 가신은 자신의 일한 만큼 은상을 받고, 장래성이 있는 주군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상당한 이해타산을 는 '왜무사'의 형태).(다카토라도 당시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이지만, 다이묘로 출세와 도자마다이묘로 있서면서도 이에야스의 눈에 띄어 중용한 것을 싫어하는 도쿠가와 후다이 가신과의 불화가 배경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소 요시토시의 경우도 자신의 세력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시한 이혼 한 번이 그렇게나 변절자 취급을 받던 관점과 같은 기준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도도 다카도라가 변절자 취급을 당한 것일 수 있다.
- 무용뿐만 아니라, 쓰 번의 번정에 기반을 쌓았고 내정수완 및 문학과 다도에도 뛰어난 문화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 『항상 죽기를 각오하면 마음의 동요가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 고단[1], 로쿄쿠[2]의 「도도 다카토라, 출세의 떡」에서는 아쓰지씨 슬하에서 떠나 낭인생활을 하는 젊은 시절 다카토라가 미카와 국 요시다주쿠(현재 아이치 현 도요하시 시)까지 가서, 요시다야 라는 떡집에서 미카와 떡을 무전취식했다. 주인 요시다야 히코베에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말하고 노잣돈까지 받았다고 한다. 때마침 요시다야의 부인이 오미로 외출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다이묘로 출세한 다카토라가 산킨고다이[3] 할 때 들러 떡값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어느날, 2사람의 가신(여색을 좋아하는 가신과 노름을 좋아하는 가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그것을 다카토라가 중재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다카토라는 여색을 좋아하는 가신을 추방하고노름을 좋아하는 가신은 아직 전망이 있다고 생각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노름은 계산이 빨라야 되기 때문인 것 같다.
- 다카토라는 소위 실력주의자다. 어디까지나 혈연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와 관계없이 그는 자기 실력만으로 살아 남아왔다. 오다 노부즈미를 모시고 있을 때 큰 공적을 올렸지만, 노부즈미는 다카토라를 싫어해서 가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카토라는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낭인이 되었다가 후에 하히데나가를 모셨다고 전해진다.
-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씨의 은공을 받은 다이묘로 있으면서, 재빨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한 것에 여러 다이묘가 힐난했다. 확연히 충의로 중시하는 무사의 풍토에서는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다카토라가 말하기를 「자기 입장이 명확하지 않는 자야 말로, 만일의 경우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라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카토라는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섬길 시에는 충실한 가신이었고, 시코쿠 정벌 때에는 히데나가를 따라 많은 공을 세웠다.
- 이에야스는 오사카 진에서 공을 올린 다카토라를 은상하고,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손을 빌리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쿠가와가의 가신 대부분은 주군을 여러차례 바꾼 다카토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 같다.오사카 여름 진에서 다카토라는 선봉으로 나서 그 충성심을 보였다. 이에 이에야스는 그것을 인정하고 다카토라에 대한 신뢰가 깊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야스 임종 시, 도자마 다이묘로써는 유일하게 다카토라만이 침상 곁에 있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 단, 막부 말기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의 열세를 깨닫자, 곧바로 관군을 배신해, 막부측에 포격을 가한 것은 도도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막부군에서는 「역시 번조의 가르침이군」 이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 본령 쓰 번 외에 막부의 명에 의해 여식의 결혼으로 사돈 관계로 있는 아이즈 번의 가모씨와 다카마쓰 번의 이코마씨,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 사후, 구마모토 번의 정무까지 맡아 가신단의 대립을 조정하고, 160여만 석을 통치했다. 하지만 다카토라의 존재 하나만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다카토라 사후, 전부 가이에키[4]되었다고 한다.
없음
제1대 이마바리 번 번주
1600년 ~ 1608년
후 임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전 임
도미타 노부타카
제1대 쓰 번 번주
1608년 ~ 1630년
후 임
도도 다카쓰구
<해군 2>
와키사카 야스하루 39세 =>이요 국 초대 오즈 번주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야스하루 또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わきざか やすはる;협판안치, 1554년 - 1626년 9월 26일)는 일본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겸 다이묘로,
아와지 국 스모토 번의 번주였으며,
아와지 국(淡路国あわじのくに 아와지노쿠니[*])은 난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구니이다. 현재의 효고 현 아와지 섬과 누시마 섬에 해당한다. 단슈(淡州たんしゅう)라고도 한다.
이요 국 오즈 번의 초대 번주이다.
이요 국(일본어: 伊予国いよのくに 이요노쿠니[*])은 일본 난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에히메 현(일본어: 愛媛県えひめけん)에 해당하며 요슈(予州よしゅう)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하였다.
[편집] 생애
덴분 23년(1554년)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으로 오미 국 아사이 군 와키자카 장원에서 태어났다.어머니는 다쓰케 가게하루의 동생이다. 이설로 어머니의 사촌 다쓰케 마고사에몬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오미 북부의 센고쿠 다이묘 아자이 나가마사를 주군으로 모시다가, 덴쇼 원년(1573년) 아자이 가문이 다이묘로서 멸문되자,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여력장수가 되어 단바 구로이 성 공략 등에서 활약한다. 단바 평정에 있어서 단바의 적귀로 명성을 떨친 아카이 나오마사에게 무용에 대한 상찬을 받았다.
또, 그로부터 담비의 가죽으로 된 창집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단, 진위에 관해서는 불명확하며, 당시 야스하루의 신분과 활약한 내용이 부합하지 않아 후대의 창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와키자카 가문의 우마지루시는 담비의 가죽이다.
그후, 아케치 가문에서 출타하여 스스로 기노시타 도키치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의 가신이 된다.
히데요시를 따라 하리마 국 미키 성, 간키 성 공략 등에서 무공을 세워, 덴쇼 4년(1576년) 150석을 봉록으로 받았다. 덴쇼 6년(1578년) 미키 성을 공략할 때, 히데요시로부터 백륜위 문장이 놓인 붉은 호로를 받았고, 이후 이 문장은 와키자카 가문의 문장이 된다. 덴쇼 10년(1582년) 아카시 군 30석을 가증 받는다. 단, 아카시 군 30석에 관해서는 히데요시의 서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고, 와키자카 가보(脇坂家譜)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덴쇼 11년(1583년) 하세력(도요토미 히데요시)과 시바타 세력(시바타 가쓰이에)간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활약했으며, 이 활약으로 시즈가타케의 7자루창[1]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전공으로 야마시로 국의 영지 3000석을 얻는다.
야마시로 국(일본어: 山城国やましろのくに 야마시로노쿠니[*])은 기나이에 설치되었던 일본의 옛 구니이다. 현재의 교토 부 남부에 해당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조슈(城州じょうしゅう)라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또는 산슈(山州さんしゅう), 요슈(雍州ようしゅう)라고도 한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야스하루는 시바타 가쓰마사를 전사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세 국, 이가 국 방면에서 다키가와 가쓰토시의 이가 우에노 성 등을 공략했고, 덴쇼 13년(1585년) 음력 5월 셋쓰 국 노세 군 1만 석을 받아 다이묘의 신분에 오른다.
음력 8월에는 야마토 다카토리 2만 석,
음력 10월에는 규슈의 전장에서 실책으로 문책된 센고쿠 히데히사를 대신하여 아와지 국 스모토 3만 석을 배령받는다.
아와지 국(淡路国あわじのくに 아와지노쿠니[*])은 난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구니이다. 현재의 효고 현 아와지 섬과 누시마 섬에 해당한다. 단슈(淡州たんしゅう)라고도 한다.
그후 가토 요시아키와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수군을 이끌었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등에 참전한다. 규슈 정벌에 있어서는 분고 우스키 성의 오토모 소린 앞으로 군량미를 수송했다.또,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구로다 요시타카 군에 편입되어 활약하였고, 사쓰마 히라사 성 공략에 있어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공격해 함락한다.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이즈 시모다 성을 공략했다.
임진왜란에서는 해상수운 및 수군관련 업무를 맡았지만, 후에 육전에 참가한다. 분로쿠 원년(1592년) 음력 6월 용인을 수비하던 중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 공격을 받지만,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패주시킨다.(용인 전투)
음력 7월 조선 수군의 활동을 저지하기위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수군에 편성되지만, 전공을 탐하여 단독으로 출진하였고,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히데요시의 전술전환명령에 따라 수륙방어작전을 펴 조선 수군의 활동을 위축시킨다.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5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참가한다.
정유재란에 있어서도 게이초 2년(1597년) 음력 7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역습해 섬멸한다. 또, 가토 기요마사의 구원 및 남원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전주회의 후, 수군에 재편되어 조선 남해안을 경비했다. 이런 공적으로 3천 석이 가증되어 아와지 국 스모토 3만 3천의 다이묘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가 대립하자, 야스하루는 도쿠가와 관저에 출타했다. 아이즈 정벌에 있으서는 차남 와키자카 야스모토에 병력을 주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가담하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방해로 철회한다.
이 시기, 야스하루는 옛 친구인 야마오카 가게토모를 통해 그간의 사정을 이에야스에 고해, 양해를 얻는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려 하지만, 야스하루가 오사카에 머물 시점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였고, 어쩔수 없이 서군이 가담한다.
음력 9월 15일 본전투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에서 동군으로 배신하자, 이에 편승해 동군으로 배신했고, 서군의 오타니 요시쓰구 군을 괴멸시킨다.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사와 산성 공략에도 참전한다. 같은 시기 함께 배신한 3명의 다이묘와 달리, 전투 전 이미 이에야스에 의사표명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받지 않아 소령을 안도 받을 수 있었다.
게이초 14년(1609년) 음력 9월 이요 국 오즈 번 5만 3천여 석에 가증 이봉된다.
이요 국 오즈 번
게이초 19년(1614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단, 차남 야스모토는 도쿠가와 가문측에 가담해 참전했다.
겐나 원년(1615년) 가독을 야스모토에 양도하고 은거한다.
그후, 오즈를 떠나 교토 니시노토인에 머물렀고, 불가에 입적해 臨松院이란 호를 사용했다.
간에이 3년(1626년) 음력 8월 6일 교토에서 사거한다. 향년 73세였다.
[편집] 인물과 일화-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으로 거론된 무장 중 최연장자이다. 단, 연도로 보자면, 1631년에 가토 요시아키가 죽어 연도상으로는 1626년에 죽은 야스하루 보다 오래 산것처럼 보이지만, 가토는 와키자카보다 늦게 태어나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으로 거론된 무장 중 와키자카 가문을 제외한 타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잡은 에도 시대 때 가문이 몰락하거나 가세가 기울었다.
-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군에 대패한 이후, 인근 섬에서 해초로 연명했다고 한다.
- 오사카 전투에서 중립을 표하는 등, 도요토미 가문의 은공을 잊지 않고 있다고 사료되어 막부로부터 의심을 받아 오사카 전투가 치러진 다음해에 은거해 오즈를 떠나 교토에서 생활한다.
- 관위가 중무소포(中務少輔)인 시절, 교토 후시미의 우지 강 지류에 저택을 지어 기거했으며, 중무소포의 당나라 관직명인 중서(中書/주조)로 불리었다. 이에 저택이 있던 일대는 주조지마(中書島)로 불리고 있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쇼군인 시절, 관영제가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을 작성하기 위해 각 다이묘에게 가계도를 제출하게 하였다. 이 때, 여타 다이묘 들은 자신들의 가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귀족 가문과 연이 있다록 작성했지만, 와키자카 가문은 야스하루의 아버지 와키자카 야스아키로부터 이어지는 계도를 작성하고 모두(冒頭)에 “북남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하는 이 실의 연이 있는 끝은 후지와라”라는 와카를 붙여 제출했다.
- 이 와카의 의미는 와키자가 가문의 뿌리는 후지와라 가문의 북가(北家)인지 남가(南家)인지는 모르지만 후지와리 가문이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야스하루의 아비 야스아키 대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 정직함과 와카를 적어 제출한 풍류에 탄복한 이에미쓰는 이를 상찬했다. 관영제가계도전의 집필과 완성시기는 1641년 ~ 1644년이고, 가계도를 제출한 것은 그 이전이지만, 이에미쓰의 쇼군 취임 연도인 1623년을 고려할 때, 와카를 작성해 제출한 이는 야스하루가 아닌 차남 야스모토일 가능성이 크다.
- 야스하루가 아버지 야스아키를 위해 건립한 교토 묘신지(妙心寺)의 린카인(隣華院)은 4대 와키자카 요시테루까지 묘가 모셔신 사찰이다.
- 효고 현 다쓰노 시의 다쓰노 신사에서는 야스하루를 제신으로 모셔 제를 지내고 있으며,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야스하루가 사용했다는 창이 봉납되어 있다.
- 2003년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중 특별기획 2부작 이순신 1편의불패의 장군, 신화가 되다.〉에 임진왜란 무렵 와키자카 가문이 효고 현 다쓰노 시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나온 것[2]은 잘못된 것이며,
- 임진왜란 무렵 와키자카 가문은 효고 현의 아와지 섬 지역을 다스렸다. 다쓰노 시 지역을 다스린 시기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손자뻘이 되는 와키자카 야스마사 때이며, 야스마사 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의 혈연관계가 아닌 홋타 마사모리의 차남이다. 아울러 와키자카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이지만, 3대 와키자카 야스마사의 친아버지 홋타 마사모리가 막부의 로주 및 후다이 다이묘인 관계로 와키자카 가문은 3대 야스마사 이후, 후다이 다이묘로 대우받았다. 이런 배경으로 10대 와키사카 야스타다 도자마 다이묘 가계로는 이례적으로 로주에 올랐고, 지샤부교를 겸했다. 이는 11대 와키사카 야스오리에게 때에도 이어졌으며, 야스오리는 번조 야스하루를 제신으로 다쓰노 신사을 창건한다.
- 대한민국의 조이온에서 개발한 역사 게임 임진록의 속편 《조선의 반격》에서 이순신을 저격한 장본인이자 서군의 일원으로 묘사되었다. 와카자키라고 잘못 표기되기도 하였다.
- 2004년부터 방영된 대한민국 드라마《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묘사되어 등장한다.
없음
제1대 스모토 번 번주 (와키자카 가문)
1585년 ~ 1609년
후 임
없음
전 임
없음
제1대 오즈 번 번주 (와키자카 가문)
1609년 ~ 1615년
후 임
와키자카 야스모토
<해군 3>
가토 요시아키 30세=>이요 국 마쓰야마 번주
출생1563년
사망1631년 10월 7일
국적
별칭孫六, 茂勝
직업무인
부모가토 노리아키
가토 요시아키(일본어: 加藤嘉明, 1563년 ~ 1631년 10월 7일)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의 무장, 다이묘이다. 이름이 가토 요시아키라라는 설도 있으며, 다른 이름은 시게카쓰(茂勝)이고, 통칭 마고로쿠(孫六)이다. 시즈가타케의 일곱 자루 창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편집] 초기 활동에이로쿠 6년(156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 가토 노리아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해에미카와 잇코 잇키가 발발하였는데, 아버지 노리아키가 잇키측에 가담하고 이에야스를 배신하였다. 이로 인해 노리아키는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고, 요시아키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마침내 요시아키는 오와리노쿠니에서 가토 가게야스의 천거를 받아 하히데요시에게 발탁되어고쇼로 일하게 되었다.
[편집] 시즈카타케 전투오다 노부나가 사후인 덴쇼 11년(1583년)에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사이에서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전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맹활약함으로써, 시즈가타케의 일곱 자루 창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가토 요시아키(일본어: 加藤嘉明) 는 이후 덴쇼 13년의 시코쿠 정벌, 덴쇼 15년의 규슈 정벌, 덴쇼 18년의 오다와라 전투 등에서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덴쇼 14년에는 전공을 인정받아 아와지노쿠니의 1만 5천 석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아와지 국(淡路国あわじのくに 아와지노쿠니[*])은 난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구니이다. 현재의 효고 현 아와지 섬과 누시마 섬에 해당한다. 단슈(淡州たんしゅう)라고도 한다.
분로쿠 원년(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 수군에게 번번히 패배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 이 해전 에서 요시아키는 왼팔의 부상을 입었다. 그 공적으로 분로쿠 4년에 이요노쿠니의 6만 석 영지를 지급받았다.
정유재란 때에도 명나라의 수군에 포위되어 울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였고, 영지도 10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편집] 귀국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귀국하였고,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에야스파에 속하였다.
게이초 4년,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시다 미쓰나리 살해를 기도하였을 때 습격자 중 일원으로 가담하였다.
게이초 5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모반을 주장하고 토벌 명령을 내리자
가토 요시아키(일본어: 加藤嘉明)도 출진하였다.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비운 사이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졌는데, 가토 요시아키(일본어: 加藤嘉明)는 그 전초전인 기후 성 전투, 오가키 성 전투에 참전했고,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는 미쓰나리의 군대와 싸워서 전공을 올렸다.
전투 이후, 그 공적으로 이요 마쓰야마 번 20만 석으로 증가 전봉되었다.
이요 국 마쓰야마 번
마쓰야마 성
히데요시로부터 은급을 받은 다이묘라 하여 이에야스로부터 위험시되었던 요시아키는 오사카 여름 전투 때는 에도 성 수비로 머물렀으며, 오사카 겨울 전투 때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따라 참전했다.
겐나 5년(1619년)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영지 몰수에 따른 히로시마 성 접수를 담당했다.
간에이 4년(1627년), 아이즈 번의 가모 다다사토가 사망하고 후계 문제로 가모 가문이 삭감 전봉되면서, 아이즈 번 40만 석 영지로 전봉되었다.
아이즈 번(일본어: 会津藩 아이즈한[*])은 일본 에도 시대 무쓰노쿠니의 아이즈 군에 존재했던 번으로, 지금의 후쿠시마 현 서부 지역을 지배하였다.
가토 요시아키(일본어: 加藤嘉明) 는 마쓰야마 번주로 취임한 뒤 마쓰야마 성을 건축하고 있었는데, 결국 아이즈로 옮겨가면서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성이 완성된 것은 가모 다다토모가 재임할 때였다.
간에이 8년(1631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적자인 가토 아키나리가 그 뒤를 이었다.
[편집] 주요 가신- 쓰쿠다 가즈나리
- 반 나오유키
- 아다치 시게노부
전 임
없음
이요 마쓰야마 번 번주
1600년 ~ 1627년
후 임
가모 다다토모
전 임
가모 다다사토
제1대 아이즈 번 번주 (가토 가문)
1627년 ~ 1631년
후 임
가토 아키나리
<해군 4>
구키 요시타카 51세=>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가담으로 자살
구키 요시타카 (1542-1600)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년~1600년 11월 17일)는 일본의 수군 무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나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에게 대패했다.
[편집] 생애구마노 해적 출신으로 구마노 해적의 세력이 약화되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로 들어가 수군장으로 활약해 시마 지방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밑에 들어가 여러 해전에서 활약했고 1592년 임진왜란에는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함께 9,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 수군을 구원하려 출동하였으나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하여 쓰시마 섬의 군선 관리 책임을 맡았다.
이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내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측인서군 편에 참전했으나 친아들 구키 모리다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인 동군에 가담해 부자가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구키 모리다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청하여 죄를 면하게 해주려고 했으나
그 소식이 전달되기 전에 구키 요시타카는 자살했다.
<해군 5>
구루시마 미치후사 32세† 임란 전사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1561년 ~ 1597년 10월 26일) 는 일본의 이요 국 출신 전국 무장이다.
이요국
1567년 아버지 구루시마 미치야스가 죽자 고노 미치나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지만 고노 가문과의 불화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가신이 되었다.
1585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을 맡아 1만 4000석의 영주가 된다. 이후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참전하였고 1597년 명량 해전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함께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 12척 함대에 맞서 싸웠으나 전투 도중 전사하였다.
아울러 형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1592년 당포 해전에서 전사했다.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마타시'(또는 마다시-馬多時)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단, 마타시란 인물에 관해서는 또 하나의 설이 있으며, 아와지 섬을 중심을 활약한 해상세력 간 씨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자제 중 간 마사카게(菅正陰)로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을 가진 인물이다. 몰년의 년대와 죽은 장소가 비슷하고 마타시(馬多時)와 독음도 같기 때문에 이 인물을 거론하기도 한다.[1]

인스티즈앱
🚨(텍혐) 래퍼 리치이기 입장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