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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9/13) 게시물이에요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인스티즈

최영철,

 

 

 

청소부가 한나절 쓸어놓고 간

지상의 길이

마음이 차지 않는지

가로수는

조금 전까지 산들거리며 하늘을 닦고 있던

제 손바닥을 거두어

우수수 아래로 날려 보냈다

지나가는 사람들 발길에 채이고 밟히면서

그 손바닥들은

제멋대로 흩어진 지상의 길을

팽글팽글 구르며

닦고 또 닦아주었다

 

말끔히 닦인 그 길로

금방 진흙탕을 건너온 한 사나이의

비틀거리는 발자국이 찍히고 있다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인스티즈


김기택,

 

 

 

옆구리에서 아까부터

무언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작은 할머니였다

만원 전동차에서 내리려고

혼자 헛되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빈틈없이 할머니를 에워싸고

높고 튼튼한 벽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중얼거리며 떠밀어도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태아의 발가락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

전동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닫혔지만

벽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는 동안

꿈틀거릴수록 점점 작아지는 동안

승객들은 빈틈을 더 세게 조이며

더욱 견고한 벽이 되고 있었다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인스티즈


장석주,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인스티즈


노향림, 마루

 

 

 

마른 걸레로 거실을 닦으며

얇게 묻은 권태와 시간을

박박 문질러 닦으며

미국산 수입 자작나무를 깐

세 평의 근심 걱정을 닦으며

지구 저쪽의 한밤중 누워 잠든

조카딸의 잠도 소리 없이 닦아 준다

다 해진 내 영혼의 뒤켠을

소리 없이 닦아 주는 이는

누구일까

그런 걸레 하나쯤

갖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인스티즈


이동순,

 

 

 

새벽녘

마당에 오줌 누러 나갔더니

개가 흙바닥에 엎드려 꼬리만 흔듭니다

비라도 한 줄기 지나갔는지

개밥그릇엔 물이 조금 고여 있습니다

그 고인 물 위에

초롱초롱한 별 하나가 비칩니다

하늘을 보니

나처럼 새벽잠 깬 별 하나가

빈 개밥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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