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조병갑(趙秉甲, 1844년 ~ 1911년)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아버지는 조두순(趙斗淳, 1796년 ~ 1870년)

고종 30년 전라북도 고부군수였으며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유발시켰다.
본 관 양주(楊州).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사촌간이다. 1892년(고종 29) 4월 전라북도 고부군수(古阜郡守)가 되었고 이듬해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1000냥)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안 거둬 주었다는 이유로 전승록(전봉준의 아버지)에게 곤장형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등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부지하여 전주로 달아나 관찰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밝혀져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해배되어 대한제국의 판사가 되었고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조부 조강희(趙岡熙, 1889년 ~ ?)
고부군수 조병갑의 둘때 아들
조강희의 아들은 조중완이고 조중완의 딸은 조기숙
일제 강점기때 경성일보(京城日報)와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일했으며, 친일신문 동광신문(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통감부 기관지
증조부 조병갑 옹호 했다가 여론 거세지자 뒤늦게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