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에서 묘사한 마른 전투. 한참 싸움을 벌이고 있을 당시에는 그 전투가 지닌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1914년 9월, 파리 외곽에서 벌어진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는 이에 가장 합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연합국이 독일군을 극적으로 격퇴한 전투였지만 그 이후의 충격파는 실로 대단하였다. 앞으로 4년 동안 현실에 등장한 지옥으로 평가 받는 1차대전의 서부전선이 바로 마른 전투를 기점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역설적인 가정이지만, 만일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였다면 이후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른 전투 당시 돌격하는 프랑스군. 1914년에 벌어진 마른 전투는 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극적인 전투였다.)
1차 대전은 인류사에서 처음 겪어 본 참화였다. 비록 20여년 만에 더 큰 전쟁을 다시 시작할 만큼 인간의 망각 능력이나 전쟁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지만 적어도 종전 직후에 반전, 염전 사상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 만큼 그 후유증이 대단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은 우리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전쟁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 자체가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피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하고 컸지만, 비슷한 상대가 너무 팽팽하게 대치하다 보니 정작 거시적인 전쟁의 흐름은 정적이라 표현하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상당히 단순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마른 전투 이후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 해 11월에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나 전쟁 말기에 참전한 미국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주요 교전국들은 이처럼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미친 듯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전쟁 발발 이전에 서로 편을 나누어 팽팽히 대립하였고 같은 편이 전쟁을 벌이면 군사적으로 개입하도록 조약을 맺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쟁 개시의 명분이 생기자 유럽 전체가 전쟁터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을 당시만 해도 국지전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한 달 전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처의 피살 사건에 대한 세르비아의 책임을 묻기 위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고 나름대로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를 발판으로 호시탐탐 발칸 반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견제하기 위한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후견인 자격으로 적극 개입하면서 전쟁의 판은 커졌다.
특히 뒤늦게 통일을 달성하고 국력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키기 시작한 독일의 패권 의지는 대단하였다. 통일 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프랑스 고립을 통한 평화 유지’ 정책을 호전적이고 변덕이 심한 빌헬름 2세(Wilhelm II)가 파기하면서 주변국과 급격한 마찰이 벌어졌다. 야심만만한 젊은 황제는 통일 후 거대하게 성장한 국력에 맞먹게 대외 팽창을 적극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해외 식민지를 선점한 영국, 프랑스와 마찰을 불러왔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독일과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일찌감치 유럽 대륙의 강자가 되었던 프랑스는 인접 한 독일(신성로마제국)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에 통일의 기운이 돌면 여차 없이 개입하여 이를 방해하였다. 17세기에 30년 전쟁이나 19세기에 있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결국 독일은 1871년 보불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프랑스의 간섭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 이 전쟁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독일과 일대일로 대결을 벌여서 당한 최초의 패배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굴욕을 겪은 프랑스는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프랑스에게는 백년전쟁 이래 영국이 가장 큰 적이었지만 어느덧 주적이 바뀌었다. 독일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보불전쟁 이후에도 사사건건 독일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대외 팽창을 막는 프랑스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응징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의 심각한 대립은 장차전을 예고하였고 결국 1차 대전에서 가장 커다란 싸움의 주인공이 되었다.

(보불전쟁 당시 세당 전투에서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 이 전쟁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가장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 vs 프랑스의 제17 계획
독일은 적극적인 대외 팽창으로 말미암아 갈수록 고립되었고 1905년이 되었을 때 외교적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만일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면전도 고려해야 할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당시 독일군 참모총장이던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은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었다.그는 동원 체계를 고려한다면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드는데 약 6~8주 정도가 소요된다고 판단하였다. 바로 이 때 서부에 전력을 집중하여 프랑스를 제압한 다음에 러시아를 상대하면 둘 다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슐리펜은 독일군 전체 전력의 80퍼센트를 서부 전선에 할당하였고 그 중 가장 강력한 순서대로 우익부터 배치하였다. 이들은 전쟁 발발 시 플랑드르(Flandre)를 통과하여 파리로 쇄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대한 신뢰가 너무 크다는 점이 사실 문제였다. 슐리펜은 양면전이라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계획을 수립하였을 뿐이지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양면전이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임자들은 계획이 너무 완벽하다고 믿어 양면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부의 경우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독일은 거의 동시에 프랑스와 러시아에 먼저 선전포고하는 무모한 행동도 삼가지 않았다.
독일의 침공
1914년 8월 4일, 독일이 당시 영세 중립국이던 벨기에를 전격 침공하면서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틀 전 영토 통과를 요구하였지만 벨기에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독일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이 받든 슐리펜 계획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시 독일이 동원한 8개 야전군 중, 무려 7개 야전군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고 그 중 개전 당시에 대부분이 현역으로만 구성된 가장 강력한 3개 야전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파리를 포위할 예정이었다.
독일의 예상치 못한 벨기에 침공은 비록 프랑스, 러시아와 협상을 맺어 놓았지만 참전 의무까지는 없었던 영국을 자극하여 조기에 전쟁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약소국 벨기에는 8월 7일 요충지인 리에주(Liege)를 함락당하는 등, 초전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밀려나기는 했지만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계획이 차질을 빗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강한 벨기에의 끈질 긴 저항에 독일은 당황하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프랑스는 벨기에에 몰려든 독일군이 주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판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독일군 조공이 워낙 선방하였기 때문이었다. 8월 6일 독-프 국경에 배치 된 프랑스군 주력이 제17호 계획에 의거, 진격하였지만 처음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퇴각하였고 이후 우여곡절끝에 보주(Vosges) 산맥 일대를 점령하는 것으로 공세를 마쳤다. 그렇다 보니 프랑스는 그곳에 독일군 주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프랑스로 쇄도한 독일군
사실 독-프 국경을 전담하던 독일 제6, 7군은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역할이었고 만일 프랑스의 공세가 거셀 경우 독일 영내로의 후퇴도 용인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들이 프랑스군 주력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잡아 놓을수록 파리 점령은 쉬워질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러한 독일군 2선급 부대에 막혀 자르부르크(Sarrebourg), 모랑주(Morhange) 등에서 연이어 손실을 입고 혼비백산하였을 정도로 무능하였다.

(전쟁 초기 파리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출정하는 프랑스 기병대. 하지만 프랑스는 초기에 독일을 공격하다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시급히 달려온 영국 원정군(BEF-British Expeditionary Force)이 길목인 몽스(Mons)에 전개하였지만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프랑스가 남쪽에 정신이 팔려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벨기에를 돌파한 독일군과 이에 밀려 후퇴하는 영국군의 모습이 눈에 보이자 프랑스는 기겁하였다. 벨기에가 항복하거나 독일이 벨기에를 완벽히 점령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8월 22일이 되자 독일군 주력이 프랑스로 진입한 것이다.
예상보다 독일이 엄청난 예비군을 동원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북쪽의 독일군이 주공임이 가시화되자 제17호 계획은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프랑스군 주력은 남쪽의 알자스-로렌 일대에 몰려 있던 상황이었다.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프랑스 제4, 5군 만으로 노도와 같은 독일군 주공을 막아내기는 어려웠고 순식간 파리는 위험에 노출되었다. 조프르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예비대를 긁어 모아 제6군을 편성하였다.
위기의 순간에 조프르의 이러한 시도는 뒤에 대단한 빛을 발하였다. 그는 8월 말, 전군을 후퇴시키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회심의 한방 역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이때 사용할 수 있게끔 예비대를 아껴두었다. 그는 퇴각하는 동안에도 독일군에게 지속적으로 포화를 퍼부어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고, 정부 또한 수도를 보르도(Bordeaux)로 옮겨 필사의 저항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반면 독일은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졌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을 총괄 지휘하는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J. L. von Moltke)의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 그는 슐리펜이 세워 놓은 계획에 의거하여 전쟁을 시작하였지만 정작 그대로 따르지 않고 툭하면 여기저기 손을 봐서 상태를 악화시켰다. 우선 우익을 강화하라는 슐리펜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동부 전선에 러시아군이 등장하자 이곳에서 2개 군단을 차출해서 파견하는 자충수를 두어 버렸다.

(몰트케의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연속적으로 자충수를 두었다. 그는 결국 보불전쟁을 이끈 백부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마른 전투 이후 좌천되었다.)
당시 독일군 주공, 특히 1군은 하루 평균 30킬로미터의 강행군을 계속하였으나 이런 속도를 한달 이상 계속 지속한다는 것은 보병들에게 무리였다. 거기에다가 갈수록 보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력을 빼가기까지 하였다. 그렇다 보니 상황을 임의적으로 판단하여 진격로를 바꾸는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연합군을 추격한 독일군은 운명의 장소인 마른 강에 다다랐다.
한 번의 기회
파리로 향하던 클루크가 방향을 틀면서까지 노렸던 목표는 후퇴하던 영국군이었다. 먼저 영국군을 격파하면 그 우측에 있는 프랑스 5군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들의 제거없이 파리로의 진격이 힘들 것이라 생각하여 임의적으로 방향을 꺾었고 이에 대해 몰트케는 경악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사후 승인해 버렸다. 1차 대전처럼 커다란 전쟁을 치르기에 몰트케의 능력은 이처럼 너무 부족하였다.
그런데 방향을 꺾은 곳 바로 앞에 공교롭게도 조프르가 시급히 편성하여 놓았던 프랑스 제6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 1군의 길게 신장되어 버린 우측면이 고스란히 프랑스군에게 노출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프랑스도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독일도 시급히 창설된 프랑스 6군의 존재를 몰랐다. 놀랍게도 전쟁의 향방을 가를 거대한 세력이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일 1군에 쫓기고 있던 영국 원정군도 프랑스군과 공조가 이루어 진 상태가 아니어서 이런 상황을 몰랐다. 놀랍지만 전쟁 말기인 1918년에 가서 겨우 연합사령부 결성에 합의하였을 만큼 영국과 프랑스는 별개로 전쟁을 치렀다. 섬나라다 보니 영국 육군은 규모가 크지 않았음에도 전원이 장기 복무자로 구성되어 자질이 우수하였고 특히 사격술은 최고 수준이었다. 따라서 영국 원정군은 처음부터 보병과의 대결에서 독일에게 밀리지 않는 용맹함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대구경 대포를 앞세운 압도적인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무턱대고 도망친 것은 아니었지만 참전한 이래로 계속 밀려다녔다. 독일 1군이 방향을 바꾸어 추격을 계속하자 영국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9월 3일 마른 강을 건너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실시된 공중 정찰에 독일 1군의 측면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9월 7일 기회를 엿보던 조프르는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전쟁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스로 무너진 독일군
독일군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프랑스 6군이 이틀에 걸쳐 맹공을 퍼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에 클루크는 당황하였으나 우르크(Ourcq)로 돌파를 시도하는 프랑스군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모누리(Michel-Joseph Maunoury)가 지휘하는 프랑스 6군은 사실 급조된 부대였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하여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바로 이때 파리의 택시들이 징발되어 병력 수송에 이용되었다.

바로 이때 영국군이 마른 강을 건너 독일 1, 2군 사이의 벌어진 간격을 파고 들어오자 소심하였던 독일 2군 사령관 뵐로브는 퇴각을 명령하였고 때마침 몰트케의 대리인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파견 나온 헨취(Richard Hentsch) 대령도 철수에 동의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군은 공세에 나선 것이 아니라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력 수색에 돌입한 것이었고 또한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독일군의 간격도 그리 우려할 만큼 크지도 않았다.
결과
엔 강 북쪽의 슈멩 데 담(Chemin des Dames)까지 물러난 독일군은 위치를 선점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그런데 곧바로 추격하여 올 줄 알았던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지쳐 있어 곧바로 다음 작전을 벌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사실 연합군은 마른에서 방어를 위한 수세적인 공세를 벌였을 뿐이지, 독일이 후퇴할 경우 어떻게 다음 작전을 펼칠 지까지는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독일군의 사기를 고려하여 11월 3일까지 명목상으로 참모총장직을 유지하였지만, 몰트케가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난 9월 12일에 전투는 종결되었다. 전략적으로 독일이 후퇴하면서 패하였지만 전술적으로 연합군이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양측 합쳐 150여만의 대군이 충돌한 이 전투에서 독일은 약 22만의 전사상자를 기록하였지만 연합군은 그보다 조금 많은 26만의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던 파리는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마른 강의 기적(Miracle of the Marne)’이라고도 부르는 이 혈전이 바로 마른 전투다. 1918년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구분하여 1차 마른 전투라고도 하는데, 워낙 역사적 비중이 커서 마른 전투라고 하면 이 전투를 의미한다. 마른 전투의 여파는 단지 파리를 구했다는 프랑스의 생각보다 훨씬 컸다. 바로 전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일찌감치 쓸모 없어진 프랑스의 제17호 계획과 더불어 불과 한달 만에 독일의 야심만만한 슐리펜 계획도 완전히 용도 폐기되면서 전쟁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9월 13일 영국군이 엔 강을 도하하였지만 높은 능선에 위치한 독일군 공략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양측은 그 자리에서 진지를 깊게 파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하며 방어전에 돌입하였고 진지는 하나 둘 연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후 독일군은 프랑스 영내에 주저앉게 되었는데, 이때만 해도 양측 모두는 일시적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땅은 거대한 참호로 바뀌었고 앞으로 4년간 하루 평균 5천여 명의 생명이 끊임 없이 숨져가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호기를 한 번씩 상실한 양측은 이후부터 1차 대전의 서부 전선을 상징하는 참호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쟁 발발 한달 만에 있었던 마른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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