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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35
이 글은 7년 전 (2018/8/18) 게시물이에요







 귀가 서럽다 | 인스티즈

이대흠,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귀가 서럽다 | 인스티즈


백우선, 나무의 지도

 

 

 

한 그루의 나무를 아는 데에도

수만장의 지도가 필요하구나

 

손바닥만 한

오만 분의 일 지도

 

이어지고 이어지는

생명 입자들의 길

 

네게로 가는 길도

다 들어 있구나






 귀가 서럽다 | 인스티즈


이만섭, 부드러운 칼

 

 

 

사과를 깎다 보면

과도의 예리한 날이 육즙을 즐긴다

 

칼은 한 마리 활어처럼

스륵스륵 과육 사이를 헤엄쳐 다니고

은근히 피워내는 사과 향기

주변이 오롯하다

 

제 몸 베이면서도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는 사과의 짜릿한 비명이

환하고 둥글게 피어난다

 

상큼한 맛을 즐긴 칼은

이윽고 사과의 몸을 빠져나와

포만감에 겨운 듯 소반 위에 드러눕는다

 

꽃 핀 자리처럼

눈부신 사과의 속살 지어놓고

달콤한 육즙에 젖어

자르르 윤기 흐르는 과도의 날

 

그 견고한 부드러움






 귀가 서럽다 | 인스티즈


장석남, 동지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 같은

 

어깨에 한 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귀가 서럽다 | 인스티즈

천양희, 문장들

 

 

 

당신은 어떻게

관악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다고 쓸 수 있었나요

개미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인생은 덧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음악은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또 어떻게

나무에는 강렬한 향기가 난다고 쓰고

꽃이 구름처럼 피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삶을 그물이라고 쓰고

환상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다시 어떻게

환상도 사실이라고 쓰고

가난도 때로는 운치가 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자기 자신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쓰고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의 문장들에 많은 빚을 졌다고

나는 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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