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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 전 (2018/10/26) 게시물이에요
교전이라도 했더라면 북한군을 모두 쏴 죽였을 텐데 적은 없었고 비겁한 만 있었다”





정강이 아래로 오른쪽 발을 잃었다. 발을 영영 못 쓰게 될 거라는 사실은 가 터졌을 때 이미 깨달았었다. 잘린 다리 외에도 왼 다리 전면부 전체와 오른쪽 뒤쪽 허벅지, 왼 손등, 성기에 촘촘한 외상을 입었고 왼쪽 고환도 하나 제거했다. 사실 다쳤을 당시 발이 없어지고 흰색의 정강이뼈를 본 것보다도 뜨거운 화약 탄매가 고환을 파고 들어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더 걱정됐었다. 다행히 복부 및 상체는 방탄조끼 덕분인지 하재헌 하사를 들고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치지 않았고 내장기관 또한 무사했다.

중환자실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패혈증과의 사투 속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매일 계속되는 극심한 환상통(없어진 신체 일부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를 항시 주입했고 식사는 전폐했고 소변은 관을 통해 해결했으며 먹은 게 없으니 대변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두껍게 쌓인 붕대들을 보며 나는 잠깐 내 인생의 꿈과 사랑에 대해 포기하며 절망했다. 산소호흡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고 손가락으로 처음 내 의사 표현을 했다. 사실 첫 표현은 얼굴이 가렵다고 긁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은 손가락으로 침대보에 글자를 적는 것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이후 나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났을 때 스스로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도 싫었다. 나는 지금껏 어떠한 좌절이 있어도 이겨내고 말겠다는 그 정신을 얻기 위해 특전사에 입대했고 정신과 육체를 갈고 닦아 수색대대로 간 나는 부팀장으로서 전우와 임무에 대한 큰 책임감을 느꼈다. 바로 그러한 자존심이 하재헌 하사를 구출해야겠다는 일념이 되었다. 호흡기를 떼던 날, 걱정되는 것은 하재헌 하사와 다른 사람들의 생사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 인명피해가 없는지 걱정되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걸로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분노, 그리고 재활 폭발음 듣고 웃었을 그들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사건 당시부터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기까지 사실 분노는 일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장에서는 부팀장으로서 침착함을 유지하여 그 상황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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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다친 입장이었지만 최대한 빠르게 응급조치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고 부상자를 처치하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적이 기습공격을 시도한다면 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흥분하여 고통에 소리를 지르거나 발악을 해서 다른 팀원들이 동요되거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리가 터져도 DMZ를 벗어날 때까지 방탄조끼와 헬멧은 절대 벗지 않았으며 분노를 표출하기 이전에 현 상황을 더 중요시했다.

중환자실에서 내 다리의 붕대들을 볼 때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특히 용변을 보는 간단한 일조차 제한된다는 사실 때문에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화가 났다. 나를 이렇게 만든 북한군에 대한 적대감도 강렬했다. 비겁한 방법을 밥 먹듯이 쓰는 북한군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 그때 적과 교전이라도 했다면 나와 하재헌을 이렇게 만든 북한군 한 놈이라도 쏴 죽였을 텐데 적은 없었고 비겁한 만이 있었다. 불과 열흘 전에 다른 팀이 통과했던 소통문이었는데 (적은) 그 사이에 목함 세 개를 심어놓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폭발음이 들렸을 때 웃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놈들에게 총 한번 쏴보지 못했던 것이 정말 화가 난다.

건강했던 나의 신체가 이렇게 망가졌다는 분노. 걷지 못하는 분노. 내가 수색조장으로서 임무를 좀 더 신중했더라면 좋았을까. 내가 소통문을 열다가 먼저 다쳤어야 하재헌 하사가 안 다쳤을까. 내가 지키지 못해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에 대한 죄책감.

어두운 중환자실의 밤에 살의, 분노, 후회와 자책이 고통과 함께 나를 휘감았다.



생살 후벼 파는 고통… 진통제보다 중요했던 건 나의 의지

며칠이 지났을 때 음식을 겨우 먹기 시작했고 한 다리로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가누어 침대에서 내려와 간이 용변 의자에 앉아 용변을 보기 시작했다. 작은 외상들은 점점 응고돼 갔지만, 하루에 한 번 진피까지 녹아버린 상처들과 고환, 잘린 다리의 소독은 극심한 고통을 수반했다. 특히 왼쪽 고환을 제거한 자리에 고환낭을 봉합하지 않고 절개된 구멍으로 포비돈 소독을 하고 안쪽에 포비돈을 적신 거즈를 쑤셔 넣어 지냈다. 절단된 다리는 부분적으로만 봉합하여 나쁜 피가 나오도록 놔두고 안쪽에 새 살이 차오르도록절단면을 개방해 붕대로 감았다. 이틀에 한 번 소독을 하고 붕대를 교체했다.

사건 당시에는 신음 한 번 안 내고 입에 옷가지를 물며 다 참았지만 소독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전신에 땀과 눈물까지 났다. 생살을 몇 번이고 소독액으로 후벼 파고 닦아내는데 진통제조차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병원은 소독해주고 진통제를 줄 뿐 내가 스스로 회복해야 할 몫이었다. 밥상을 차려주면 역시 떠먹는 건 스스로 해야 한다. 내 몸은 의지에 부응하듯 회복 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8월 19일 2차 수술에서 내 다리를 부분적으로, 고환을 완전히 봉합하고 왼쪽 뒤 허벅지에서 피부를 떼어내 진피까지 손상된 왼쪽 종아리, 오른쪽 뒤 허벅지, 왼쪽 앞 허벅지 세 군데에 피부를 이식했다. 수면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수술실 옆 마취준비실은 극도로 추웠고 졸음이 몰려왔다. 간호사들의 모습과 형광등만 보다가 잠을 청했다.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고 일반 환자실로 옮겨지고 나서 8월 26일 괴사한 조직을 제거하고 최종적으로 다리 봉합 수술을 완료했다.



의족 착용 4주 만에 일반인 수준의 동작 구현… 의료진도 깜짝 놀라

10월 8일 중앙보훈병원으로 이송되어 재활을 시작했다. 그 병원은 규모로 따지면 국내 5위 안에 든다. 이러한 큰 병원에서 의족 제작과 재활프로그램을 하게 되는데 막상 도착한 나는 병원 측 환대에 약간 당황했다. 군 병원에 있다가 일반병원 즉 사회로 나와 보니 그 커다란 관심과 이목이 더욱 실감 났다.

본격적인 의족 제작 이전에 미리 준비작업과 같은 스트레칭,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내 몸은 쇠약하고 힘이 없었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고관절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졌고 발이 없는 허벅지의 근육이 다른 쪽보다 더 야위었다. 의족을 착용하고 서서 걷기 이전에 그 신체적 조건이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와중에 보훈병원에 입원한 참전용사분들과 제2연평해전 참전 간부를 만나게 됐다. 나라를 위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유공자가 되어 치료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동고동락한 전우를 떠나보내고 살아남았으며 몸도 건강하지 못하다. 나 또한 그들처럼 큰 자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켰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DMZ작전에서 내가 느꼈던 것과 같이 현재의 자유와 평화는 숭고한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보훈병원에 온 지 1주일이 지났을 때 드디어 내 절단면의 석고본을 본뜨기했다. 그 며칠 후 10월 20일 드디어 처음으로 의족을 착용하였다. 내 의족은 공기압착 방식으로서 실리콘과 우레탄 소재를 이용하여 의족이 다리에 잘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온갖 운동과 스트레칭 훈련을 해왔고 착용하는 순간 일어나 걸었다. 걷는 게 가능한 순간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더욱 자연스럽고 편안히 걷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미친 듯이 적응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하게 발전되는 나의 걸음걸이는 관련 의료진, 의족 기술자들을 놀랍게 하기에 충분했고 4주가 지나 두 차례의 모션 캡처 동작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나는 재활의학과 교과서에 기재된 가장 안정적인 의족 보행자의 데이터를 뛰어넘었고 일반인 수준의 동작을 구현했다.

그 후 의족 제작회사인 독일의 ‘오토봇’에서 보훈병원에 세미나 일로 독일인 기술자가 왔었는데 방문한 김에 나와 하재헌의 상태도 봐주었다. 그는 이 정도의 보행능력과 발전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했다. 나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집념과, 회복하여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과, 발이 하나 없어도 괜찮을 거란 희망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족의 정착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내 다리의 절단면이 근육이 빠지고 모양이 바뀌기를 거듭하고 고정화될 때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의족의 소켓을 완전히 내 잘린 정강이에 알맞게 맞춤으로 제작하는 것인데 종아리 근육이 빠져서 원래보다 더 의족으로 들어가면 무릎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다리 길이도 비대칭이 된다. 그래서 지속적인 의족 A/S와 운동이 필요하다. 땀도 문제인데 운동 한번 하고 나면 의족 안에서 땀이 소주 한 컵 정도 나온다. 이것 또한 1년의 세월 동안 인체가 적응하여 더는 땀이 안 나는 시기가 온다고 교육받았다.

다리를 다치니 살도 많이 쪄버렸다. 이것은 의족에도 연관이 있고 보행에도 연관이 있다. 결국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은 체력단련이었다.

병원에서 더는 할 것이 없어 나는 12월 2일 중앙보훈병원에서 퇴원했다. 그 후 의무심사를 기다리느라 국군수도병원에서 2주를 입원해 있다가 12월 17일 완전히 병원생활을 끝내게 된다.
국가적 관심을 한 몸에 - 선천적 장애 극복한 ‘의족 모델’ 에이미 멀린스와의 만남 가장 기억에 남아
북한 도발 사건은 처음부터 국가적 관심을 받았다. 모든 관심과 집중을 받았는데 그 일환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면회를 받았다.

처음에는 중환자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왜냐하면 중환자실에는 나보다 더 심각한 병자들이 많은데 나를 보러 오시는 면회객들로 인해 혹시나 다른 환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이 악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병원은 나와 다른 환자의 안정을 위해 면회에 대해 내 의사를 물어봤었지만 결국 나는 그들의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수색대대 전우들과 각 군부대의 지휘관님들, 주임원사님들, 주한미군사령관님 및 주임원사님 그리고 국회의원분들도 많이 찾아오셨고 놀랍게도 박근혜 대통령님께서도 방문해주셔서(일반실에서) 고마운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모두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감사함이다.

이후 일반 병실로 옮겼을 때도 면회는 더욱 늘었다. 나는 그들에게 최단기간의 회복을 목표로 했었고 정신적으로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오셨는데 그중 인상 깊은 만남이 있었다.

20년 전 DMZ 수색대 출신으로 적 를 밟아 한 다리를 잃은 분께서 초등학생 늦둥이 딸과 함께 부산에서 나를 만나러 온 적이 있다.

그는 사회에서 8년 동안 낙담하고 좌절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결국 힘을 내어 의족을 착용한 채로 태권도를 갈고 닦았고 대회도 나가고 태권도협회의 간부 위치까지 올라 있었다. 또한 많은 마라톤 대회에서 활약한 마라토너로서도 아주 유명한 분이었다.

그는 내게 지난 8년의 무의미한 좌절을 나 또한 겪을까 싶어서 찾아왔다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다리가 없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많은 참전용사분께서 오셔서 다 이겨낼 수 있다고 힘을 주셨다. 한쪽 안구와 양손이 없으신 분, 두 다리가 없으신 분, 다리 하나와 팔 하나씩 없으신 분 등, 그들은 각각 신체의 한 부분이 없거나 보장구에 의지하고 있었다. 의족을 찬 미군들도 두 명 방문했는데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의족을 착용한 모습으로 내게 힘을 주고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등학교 선배인 조윤선 님의 소개 및 통역으로 만나게 된 미국의 에이미 멀린스 씨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다.

그녀는 양쪽 정강이 아래가 없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강하게 키우셨다. 양발이 없어도 일상 생활하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하고 터득하게끔 했다. 아기 의족을 신고 그녀가 넘어지더라도 어머니는 마음이 아프지만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딸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터득했다. 자라난 멀린스 씨는 육상선수로서, 양발을 의족으로 대체한 스프린터였고 그녀는 미국의 국가대표가 되었다. 이후 여러 의족 개발 단체에서 그녀를 모델로 삼았고 의족의 기능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의족을 표현했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새로운 의족은 그녀의 다리에서 테스트 됐다. 아름다운 의족은 패션모델로서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 후 영화계에도 데뷔하여 현재까지 6편 이상의 영화에서 단역과 조연을 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그녀는 나와 하재헌에게 말했다.

“꿈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이루어진단다.”

그녀의 약점이었던 발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가 되었고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어줬다. 나는 그 정신의 원천에 대해 물었고 대답은 꿈에 대한 희망과 목표였다. 그녀는 강인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밝고 희망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만난 장애인 모두의 공통점은 건강하게 살고 있었고 마음도 일반인보다 더 건강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것을 전력을 다해 본받았다.

위국헌신 - 국가와 국민이 알아준 군인정신… 이만한 명예가 어디 있을까
우리 사건이 이렇게 큰 관심을 받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위국헌신에 대해 국가와 국민이 알아주는 것이니 군인으로서 그만한 명예와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임관교육과정에서 군인정신을 배웠다. 군인정신이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다. 당시 막 임관한 나로서는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문자를 읽어도 진정 그 느낌은 어떠한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동안 군인으로서 부끄러울 언행을 경계했으며, 지휘관과 선배들의 명령과 조언에 충실했으며, 전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저함 없이 뛰어들었고, 휴전의 평화 속에서 단 한 번의 실제상황을 위하여 가혹하게 훈련하고, 힘들고 위험한 임무에 충실했으며, 내 가족과 친구와 전우를 위해 맡은 바 책임을 수행하였다. 죽음의 위기에서도 지켜온 나의 군인정신은 국가와 국민 모두가 알아주었고, 그것은 참 가치 있었다. 현실은 분명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군인으로서 진정한 군인 본분을 잊지 않고 당당하게 군 생활한다면 국가와 국민은 우리의 헌신을 잊지 않는다.

다시 나의 자리로 - 새로운 임무에 미친 듯 적응하고 미친 듯 공부하며 살 것이다

나는 수색대대원으로서 여전히 DMZ를 누비며 적들이 감히 넘어오지 못하게, 다시는 나와 하재헌 같은 일이 없게 수호하고 싶다. 수색대대는 최전방의 사선에서 매일 적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감시의 사각지대가 바로 수색대대의 무대이다. 지난 2000년도 수색대대장이셨던 이종명 대령님께서는 사고를 당하기 전 전우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험하니 내가 간다.”

나는 바로 그곳에서 뜨겁게 군 생활을 했고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신체가 DMZ 임무수행에는 부적합해서 떠나지만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국가와 국민과 전우를 적들로부터 지킬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나의 꿈과 열정을 쓸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이제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컴퓨터 관련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내가 수색대대에 처음 왔을 때처럼 미친 듯이 적응하고 미친 듯이 공부하며 몸 관리도 살기 위해 할 것이다. 하재헌과 그의 가족에게도 축복이 있길 바라며, 내가 앞으로 자주 찾아뵐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비록 몸은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편하지만 나는 살아 있음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

나는 특전사에서 태어나 불굴의 정신과 독기를 배웠고 수색대대로 날아와 조국수호와 전우애를 배웠다. 발을 한쪽 잃었지만 명예를 얻었고 이제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나의 몸을 적신다.

이번처럼 삶의 고통도 나의 일부분이며, 앞으로의 새로운 고난과 역경도 기쁘게 받아들여서 당당하게 부딪치며 성장하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신께서 주신 인생을 최선을 다해 즐길 뿐이다.

발목사건 김정원하사 수기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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