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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거에 대한 제목+내용 검색 결과
윤세원ll조회 1244l 1
이 글은 5년 전 (2018/12/03) 게시물이에요

"만약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우리가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다"

-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 남서쪽 발루치스탄 주에 있는 해발 3,000m의 라스코 산에서 지하 핵실험이 단행되었다. 30일에는 두 번째 핵실험이 있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어떠한 공식적인 발표도 하지 않았지만 위력은 10~15t으로 추정되었다. 숙적인 인도가 핵실험을 한지 꼭 보름 뒤였다.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겠다!"파키스탄의 핵개발 | 인스티즈

(핵 실험이 단행된 라스코 산. 북한의 핵 실험장인 풍계리와 유사한 지형이라고 한다. 파키스탄은 산 중턱 여기저기에 터널을 뚫고 5개의 핵무기를 일제히 터뜨렸다. 이 때문에 실험장 일대는 방사능 누출로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핵 실험 한 달 전인 4월 6일에는 사거리 1,300km의 탄도 미사일인 가우리 미사일의 발사에 성공했다. 북한의 도움을 받아서 제작된 가우리 미사일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었다. 이로써 파키스탄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그리고 인도와 이스라엘의 뒤를 이어서 7번째 핵 보유국이 되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과 고도의 기술력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의 제재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핵 보유국들은 모두 부유한 강대국이다. 1980년대 초반에 남아공이 소량의 핵무기를 개발한 적이 있었지만 국제 사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91년 NPT 체제에 가입한 후, 스스로 전량 폐기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에게 넘기고 비핵화를 선언했다. 국제 사회의 원조를 얻기 위함이었다. 핵이 있어서 강대국이 아니라 강대국이기에 핵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때까지의 상식이었지만 파키스탄은 그 상식을 깨뜨렸다. 파키스탄은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나라였다. 인구는 과잉에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변변한 자원도 없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했다. 강대국은 고사하고 국제 사회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파키스탄이 제 분수에 걸맞지 않는 핵무기 보유에 나선 이유는 인도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은 1947년에 독립한 이래 인도와 세 번이나 싸웠다. 명목상으로는 카슈미르의 영유권 때문이었지만 해묵은 종교 갈등과 경쟁 의식, 서남아시아의 패권 싸움이기도 했다. 파키스탄 군 수뇌부는 비록 수적으로는 열세해도 질적으로는 자신들이 우세하다고 믿었지만 단 한 번도 인도를 이길 수 없었다. 더욱이 1971년 12월에 있었던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단 2주 만에 인도군의 맹공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주력 부대가 괴멸되면서 파키스탄군은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파키스탄은 국토의 절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파키스탄에게 미국에 대한 커다란 배신감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파키스탄은 숙적인 인도를 상대하기 위하여 미국에 기대었다. 인도가 "비동맹"을 내세우면서도 소련에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또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인도와 적대적인 파키스탄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면서 1954년 5월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은 25억 달러의 경제 원조와 7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파키스탄은 소련 국경에 인접한 페샤와 기지를 미국에게 대여하고, 미국은 이곳에서 U2 정찰기를 발진시켜 소련 영내를 촬영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오면서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첫째로 공산 진영이 분열되고 인도와 중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인도가 친소련에서 친서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베트남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서남아시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특히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파키스탄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미국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다. 당시 닉슨은 파키스탄을 원조할 의사가 있었으나 행정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유가 어떠하건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나 몰라라 하는 친구는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자연스레 파키스탄과 미국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인도가 미국에 접근한 반면, 파키스탄은 소련과 중국에 접근했다. 이념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하루아침에 적과 우군을 교체하는 것이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냉전 시절에 볼 수 있었던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1964년 10월 26일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했다. 당장 인도도 숙적인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자 1966년 "핵무기 개발 10 계획"을 수립하고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네루는 겉으로는 비폭력 주의를 내세워 미-소의 핵 보유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고 "절대로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라고 공언하면서도 정작 뒤로는 대규모 핵 연구 단지를 만들고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인드라 간디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8년 뒤인 1974년 5월 18일 서부 라자스탄 주 구자라트 사막에서 첫 번째 핵 실험에 성공했다. 위력은 히로시마 원폭과 맞먹는 15kt 정도였다.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인도 정부는 핵무기 실험이 아니라 평화적인 목적의 연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겠다!"파키스탄의 핵개발 | 인스티즈

(핵 실험장을 방문한 인드라 간디 총리)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인 1971년 12월 20일 파키스탄 인민당의 당수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파키스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인도의 핵 개발을 우려하면서 "만약 인도가 핵무기를 가진다면 우리는 국민들이 풀을 먹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할 만큼 강경파였다. 부토는 패전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했다.


1. 인도를 믿어서는 안된다. 파키스탄의 파괴에만 열중하고 있다.

2. 서방이 약속하는 '안전 보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지원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3. 재래식 전력만으로 인도를 이길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증거가 있는 이상 핵무기만이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자기 사정에 따라서 도움을 줬다, 안 줬다 하는 미국은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파키스탄의 안보는 스스로의 손으로 지킬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파키스탄만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제3세계 동맹국들은 미국을 불신하고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독자적인 핵 개발에 나섰다. 그중에는 장제스가 통치하는 타이완, 그리고 박정희도 있었다.


부토는 1972년 1월 20일 중부에 있는 도시 물탄에서 비밀리에 핵 전문가 회의를 열었다. 파키스탄은 비록 가난한 나라였지만 1954년부터 민간 차원의 핵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기에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핵 과학자들이 있었다. 이 회의에는 군 수뇌부와 저명한 핵 과학자들이 참여했으며 핵무기 개발을 결의했다. 파키스탄 핵 개발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부토는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이슬람을 위한 핵 개발"이라고 선전하면서 하나의 성전으로 포장했다. 부토의 예상대로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은 당장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특히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이슬람의 보검(the sword of islam)이라고 부르면서 적극적인 후원에 나섰다. 부토는 핵 개발에 성공하면 리비아에 우선적으로 핵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의 핵 개발에 압둘 칼람이 있다면 파키스탄에는 압둘 카디르 칸이 있었다.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벨기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라늄 농축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유랭코(Urenco)’라는 네덜란드에 있는 민간 핵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중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패배하고 인도가 핵 개발에 성공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칸은 부토 총리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어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무기를 개발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1975년 12월 핵심 기술인 원심 분리기 설계도를 빼돌린 후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부토는 "프로젝트 706"을 출범시키고 칸을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겠다!"파키스탄의 핵개발 | 인스티즈

(부토와 칸. 이 두 사람에 의하여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만들자 당장 미국이 발끈했다. 1976년 8월 미 국무 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부토에게 "당장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끔찍한 최후를 당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그런데 1977년 3월에 실시된 총선이 부정 선거라는 비난이 쏟아지면서 부토더러 사임하라는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결국 7월 5일 육군 참모 총장인 무함마드 지하울하크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했다. 부토는 자신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기에 축출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년 동안 연금되어 있다가 부패와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79년 4월 19일 처형되었다. 강경파인 부토는 제거되었지만, 미국으로서는 뜻밖에도, 새로운 수장이 된 지아울하크 또한 핵 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청교도적인 윤리에 따라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카터 행정부는 핵무기의 확산을 막겠다면서 이란, 리비아 등 반미 국가들은 물론이고 동맹국에 대해서도 핵 개발 시도를 결코 묵인하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파키스탄이 순순히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자 모든 원조를 중단시켰다. 밴스 미 국무 장관은 파키스탄의 핵 연구소를 폭격하든지, 칸을 암살하던지 양자택일만이 남았다고 공언할 만큼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전격 침공한 것이다. 당장 미국은 꼬리를 내렸다. 파키스탄더러 4억 달러의 원조를 제안한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내 반소 저항 세력을 돕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을 발판으로 삼아야 했다. 칼자루를 쥔 쪽은 지하울하크였다. 지하울하크는 미국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미국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카터보다 더 보수적이고 강경한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 알아서 더 많은 원조를 제안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고 보수 성향의 공화당의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레이건은 30억 달러의 경제 원조와 20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카터 때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핵 개발에 대한 제재는 당연히 흐지부지되었다. 미국의 필요에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비핵화 정책의 원칙은 파키스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도만 하더라도 1974년에 핵 실험을 했지만 제재는 커녕 오히려 미국의 암묵적인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게 인도는 대소 봉쇄의 중요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의 관대함은 인도와 파키스탄에만 국한되었고 남한과 타이완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미군이 주둔하지 않은 파키스탄과 달리, 미군이 있는 남한과 타이완은 미국의 눈을 피하여 핵무기를 개발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의 묵인 아래,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이 제공한 군사 원조의 절반 이상은 핵 개발에 쓰였다. 칸은 몰래 중국, 북한과 거래하면서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부품과 기술을 확보했다. 1985년 10월에는 우라늄 농축에 성공했다. 핵 개발도 초읽기였다. 미국 법률 상 원칙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국가에는 원조를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의회에서 반발하자 레이건과 부시는 파키스탄에서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의혹을 찾을 수 없다고 몇 차례나 장담하면서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계속 밀어붙였다. 미국과 파키스탄의 밀월은 1989년 2월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더 이상 파키스탄을 도울 이유가 없어졌다. 당장 원조는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1990년에는 파키스탄이 대금 지불까지 완료한 F-16 전투기 28대의 인도를 거부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고 파키스탄은 이미 핵무기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충분히 확보한 뒤였다. 1992년 2월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를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오히려 미국의 제재로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핵 기술과 노하우를 다른 국가에 판매하겠다고 나섰다. 파키스탄 상무부는 국제 신문에 핵 기술을 팔겠다는 전면 광고를 내걸었다. 파키스탄의 주요 고객으로는 북한과 이란, 리비아 등이 있었다. 1993년 12월에는 베나지르 부토(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고 핵 기술을 제공하는 대가로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받기로 했다. 부토는 김일성에게 "우리는 비핵화가 아시아 국가들의 핵 기술을 획득하고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 때 북한이 제공한 노동 미사일은 가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베이스가 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하여 핵 동결 협약을 협상 중이었지만 여기에는 플로토늄 제조만 금지되어 있고 우라늄 제조는 빠져 있었다. 북한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클린턴 행정부의 허술한 일처리 덕분에 북한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채 파키스탄을 통하여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확보하고 핵 개발에 성공한다.


클린턴 행정부는 파키스탄에게 핵 개발 포기를 종용하면서도 외교적인 회유와 압박 이외에 별다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북한과 리비아가 미국의 보복을 우려하여 명목상이나마 NPT 체제에 가입하고 협상에 나섰던 반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아예 NPT 체제의 가입조차 거부했지만 미국은 모른 척했다. 북한의 핵 개발에는 소극적으로 일관하면서 남한, 타이완 등 극동의 동맹국들은 자칫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까 엄중하게 감시하는 것이 미국의 이중적인 잣대였다.


미국이 마지못해 움직인 것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 실험에 나서는 1998년에 와서였다. 1998년 5월 12일 인도는 미국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2차 핵 실험을 강행했다. 당장 파키스탄이 맞대응으로 핵 실험을 준비하는 것이 포착되자 클린턴은 직접 샤리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파키스탄이 핵 실험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F-16 전투기의 인도와 경제-군사 원조를 제안했다. 채찍 대신 당근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감정이 잔뜩 격앙되어 있었던 파키스탄 정부는 핵 실험을 강행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공식적으로 핵 보유를 천명하면서 그동안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해 왔던 미국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겠다!"파키스탄의 핵개발 | 인스티즈

(파키스탄의 핵 실험이 실시된 라스코 산과 핵 개발 팀.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칸 박사.)


여기까지 온 이상 클린턴 행정부도 이란, 리비아 등 다른 국가들의 핵 개발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묵인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즉각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 제재에 나섰다. 인도에 대해서는 연간 1억 4,300만 달러의 직접 원조를 중단할 것과 군사 기술의 이전 금지, 미국 은행의 대출 및 보증 중단, 발전소 건설 계획 등을 취소시켰다. 파키스탄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인도 바즈페이 총리는 핵 실험을 한 다음날인 5월 13일 "이상적으로는 우리는 핵무기가 없는 세상에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보호받고 평등하다고 느끼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면서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했다.


파키스탄 또한 칸 외무 장관은 "우리에게는 3개월이나 6개월, 또는 1년 동안의 경제 제재를 감수하던가, 아니면 인도의 패권주의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던가 두 개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라고 공언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경제력이 우세한 인도에 비하여 가난한 파키스탄에게 훨씬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경제는 파산 직전의 상황이었다. 외화 보유고는 13억 달러에 불과한 반면, 외채는 32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이미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한다고 해서 더 잃을 것이 없다는 쪽이었다. 또한 석유와 같은 에너지는 사우디, 쿠웨이트 등 파키스탄과 혈맹 관계인 이슬람 형제국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미국의 경제 제재에 동참한 나라는 일본, 독일, 스웨덴, 캐나다 정도였다.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 제재가 당사국의 반감만 살 뿐, 별다른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따라서 경제 제재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경제 제재는 대외 무역의 비중이 크고 부유한 나라에게나 통하지, 빈곤에 익숙한 나라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경제 제재를 선언한지 반년도 되지 않은 1998년 10월, 미 의회는 인도,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2개월 뒤 클린턴은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협력 관계를 복원시켰다. 미국의 완패였다.


게다가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9.11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알카에다의 배후로 지목했다. 파키스탄의 가치는 아프간 전쟁이 끝난지 12년 만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부시 정권은 파키스탄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원조를 쏟아부었다. 9.11 테러부터 2009년까지 약 8년 동안 미국이 제공한 군사 원조는 110억 달러에 달했다. 파키스탄이 북한과 핵 물질을 거래했다는 증거가 포착되었지만 모든 책임은 칸 박사의 독단으로 치부되었고 그를 가택 연금하는 것으로 끝내 버렸다. 무라샤프 대통령을 비롯한 파키스탄 정부는 핵 밀매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상식적으로 칸 박사 혼자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미국은 묵인했다.


1998년 이후로 파키스탄이 더 이상 핵 실험을 실시하지는 않았지만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막대한 원조 아래 꾸준히 핵무기를 생산했다. 2016년 스톡홀름 국제 평화 연구소는 파키스탄이 매년 10~15개의 핵무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보유한 핵무기의 숫자가 130개 정도라고 파악했다. 또한 가우리-2, 샤힌 등 다양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다. 미사일 이외에도 파키스탄 공군이 보유한 F-16 전투기와 미라지-3/5 전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으며, 지난 2010년 중국과 공동 개발한 4세대 전투기인 JF-17 조인터 파이터 전투기(중국명 FC-1 샤오룽) 또한 핵탄두 탑재가 가능하다고 한다.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만들겠다!"파키스탄의 핵개발 | 인스티즈

(2015년 3월 9일 파키스탄이 발사한 샤힌 3호 장거리 미사일. 사거리가 무려 2,750km에 달하여 인도 대부분의 지역을 사거리에 놓고 있다.)


파키스탄의 핵 보유는 여러모로 북한과는 닮은 꼴이다.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핵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나 독재 정권이 국민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겨 국내를 결속시키려는 것, 너무나 빈곤하기에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에 겁을 먹지 않는다는 점까지.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미국의 무관심이다. 핵 클럽 국가가 아닌 인도, 파키스탄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은 채 핵 개발에 성공하기까지는 미국의 묵인이 있었다. 애초에 미국의 원조가 없었더라면 파키스탄처럼 가난한 나라가 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이 파키스탄더러 대놓고 핵을 만들라고 사주하지는 않았더라도 간접적으로 도운 셈이나 다름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이라크에게는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가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만으로 무력 침공한 반면,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무시해 버렸다.


북한은 미국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버티기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이 만들어 준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선례 때문이다. 물론 국제 정치란 어차피 정의가 아니라 이해타산의 영역이므로 제아무리 북한이 미국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난하건 말건 미국은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파키스탄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에 나설 것인가. 착각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질질 끌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북한의 뒤에 중국과 러시아가 있다고 하지만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들 나라와 거래하여 북한을 고립시킬 수 있다. 단지 북한 때문에 자국의 이익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여길 뿐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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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뉴스공장 -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인터뷰 전문ㅋㅋㅋ ''' 11.10 22:26 135 0
2018 미국 중간 선거 상원, 하원 중간 결과 패딩조끼 11.07 13:19 321 0
남경필 친일파 집안이라 꺼려지셨던 분들 보시긔!! (+남경필 tmi들) 알케이 11.06 23:53 466 0
프랑스 식민지 뉴칼레도니아 이야기 세기말 11.06 11:28 1404 0
현재 3일 남은 미국 중간 선거 김밍굴 11.04 08:02 496 0
남경필 친일파 집안이라 꺼려지셨던 분들 보시긔!! (+남경필 tmi들)1 송희진 11.02 20:01 1366 4
지방선거 왜 참패했나 의총 열었더니 절반은 나가버린 한국당 초코틴틴세븐 10.31 14:58 34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