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년, 진(陳)나라 건강성, 풍채가 대단한 한 남자가 그 몸집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그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내민 채, 빼곰히 무언가를 올려다보았는데 그의 울상 지은 얼굴은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좌우의 미인들을 결코 품 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진숙보,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나라의 멸망을 자초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는 점령당한 황궁 한 가운데의 자그만한 우물 속에 숨어 작은 요행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그를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를 우물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수나라의 50만 대군이 그 주위를 둘러싸 그를 마음껏 조롱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살려 달라고 빌던 그가 어느덧 고개를 다시 들어보니 그의 눈 앞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것은 수나라 문제의 차남이자 원정군의 총사령관, 양광이었다.
진나라가 최후를 맞이하면서 위진남북조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수문제 양견, 그는 중원을 통일하면서 중국 외부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중원의 통일이라는 이 엄청난 소식은 당시 그 주변에 자리했던 모든 나라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일,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그 저력을 외부 세력에게 표출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감당해낼 힘을 갖춘 국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말갈, 거란 등의 북방 유목 민족들을 두고 중원 대륙과 패권 경쟁을 벌여 오던 고구려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은 이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수나라와의 전쟁을 확신했다.
王聞 陳亡 大懼 治兵積穀 爲拒守之策
왕께서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를 매우 염려하셨다.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나라를 지킬 꾀를 강구하셨다. 『삼국사기』
그는 곧장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정도만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보다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하지만 왕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다음해 10월을 넘기지 못하고 승천했고 그의 이러한 노력들을 장자인 영양왕이 물려받았다. 다음은 『수서(隋書)』에서 전하는 580년대 중·후반 고구려의 행보이다.
驅逼靺鞨 固禁契丹 數遣馬 殺害邊人
말갈을 구핍하고 거란을 고금했다. 자주 기마를 보내 변인(邊人, 변경 지대의 주민)을 살해했다. 『수서』
고구려는 말갈과 거란 중 고구려에 종속되거나 친고구려 성향을 보이는 부족들을 압박해 더 확실한 관계를 다져둠과 동시에 반고구려 성향을 보이던 부족들에는 기마를 보내 자주 응징했다. 고구려는 이미 수나라와의 결전을 100%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에 거침이 없었는데, 이때 고구려가 취한 여러 조치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逃竄下國.
몰래 재화로서 이익으로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를 데리고 달아났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쇠뇌 기술자들을 매수하기도 했다. 수나라에서 쇠뇌 제작은 태부시(太府寺) 소관으로 전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그 엄격한 통제를 뚫어낸 채 쇠뇌 기술을 확보해 낸 것을 보면 고구려 조정이 이 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수나라 역시도 각각 말갈과 거란의 일부인 돌지계와 출복 부족들의 내부를 허용하는 등 고구려를 위협하는 팽창을 계속해 나갔다. 이렇듯 양국의 치열한 기싸움으로 갈등이 절정으로 치닫던 개황 17년, 서기 597년이 되던 그 해에 한 통의 국서가 고구려로 전해졌다. 이 국서는 수문제가 보낸 것으로, 그간 고구려가 수를 상대로 벌여온 적대적 행위를 비난하고 고구려를 경멸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隋高祖賜王璽書 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王若洒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 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수나라의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내려 책망하였다. “비록 스스로 속국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말하였다.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단정히 하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곧 짐의 훌륭한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을 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왕은 말해보라.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또한 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짐이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장군 한 명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것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삼국사기』
국서의 표현은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고, 시종일관 고구려를 비난하며 폄하하고 있었다. 특히, 장군 한 사람에게 명해도 고구려를 정벌할 수 있다는 오만한 문구는 이 국서의 클라이막스였다. 때문에 이 국서가 고구려 조정의 공분을 사고, 영양왕의 낯빛을 일그러뜨렸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왕의 다음 행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기에 충분했다. 왕은 수나라 조정에 사의(辭意)를 표하는 대신 백산부와 속말부를 비롯한 여러 말갈 부족들에 병력 차출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마침 부족한 물자 보충을 꾀하고 있던 말갈 부족들은 전리품의 배분을 약속받고, 저마다 앞을 다투어 영양왕의 부름에 응답했다.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왕께서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를 침공하였다.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우리의 군사를 물리쳤다. 『삼국사기』
말갈은 각 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기껏해야 수천 명 남짓이었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모인 병력은 무려 1만에 달했다. 그리고 영양왕이 이끄는 말갈 기병은 순식간에 요하를 넘어, 무려라(武羈邏)를 비롯한 요서에 위치한 고구려의 여러 라(邏, 순찰지)들을 통과하고 영주를 향해 내달렸다. 이에 깜짝 놀란 영주총관 위충이 즉시 반격하여 고구려군의 퇴각을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이미 사방 곳곳에 말갈 기병들의 말발굽 자국을 잔뜩 남긴 뒤였다. 만일, 왕이 국내의 병력을 동원하려 했다면 귀족들과의 합의를 거쳐야 했으므로 군사를 동원하기까지 시간이 지연될 여지가 충분했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빠른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한편 이 소식이 수나라 수도 대흥에 알려지자, 수문제는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구려 정벌 준비에 만전을 기해 오며 수십만의 대군을 조련했었고, 이제 그 대군이 고구려 땅을 밟기까지 겨우 수개월의 준비만을 앞둔 터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고구려에 선수를 빼앗기자 그는 즉각 대응을 선언하며 고구려 원정군의 지휘관과 전투 부대 편성을 지시했다.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나후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그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삼국사기』
문제의 지시로 수륙군 도합 30만 대군이 편성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격적인 출정이 이루어진 것은 지휘관의 임명과 전투 부대의 편성이 끝나고 4개월씩이나 지난 뒤었다. 그 해 6월, 수나라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수십만의 대군을 각각 육로와 해로로 내보내 평양성을 향해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육군은 임유관에서부터 군량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한 굶주림과 장마는 군의 사기를 심하게 저하시켰다. 설상가상으로 평양성으로 직행하던 주나후의 수군마저 태풍을 만나 표몰하면서 수나라군의 고구려 원정은 시작도 전에 크나큰 위기를 맞았다.
이런 기회를 고구려가 놓칠 리 없었다. 관련 기록의 부재로 구체적인 과정은 알 길이 없으나 고구려군은 수나라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쟁취했으며, 이는 가뜩이나 불리했던 수나라군의 처지를 더욱 궁지로 밀어넣었다.
9월 기축(己丑)에 수나라의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고려 왕 고원(영양왕의 본명) 역시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글을 올려 ‘요동분토신모(遼東糞土臣某)’라고 칭하니, 황제가 이에 군사를 파하고 그 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자치통감』
이처럼 고립무원의 위기에 처한 수나라군에게 하나의 동아줄을 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전쟁이 발발하고 벌써 3개월째, 아직 요하조차 제대로 건너지 못한 수나라군이 퇴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고민한 끝에 수 조정에 사죄사를 파견했다. 그리고 이로써 철군 명분을 얻은 문제 역시 곧바로 회군을 지시해 마침내 수나라군의 퇴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원정군의 십중팔구는 고향땅을 밟을 수 없었고, 이후 문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모든 욕심을 포기했다.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 양광)
이로부터 6년이 지난 서기 604년, 문제가 의문의 죽음을 맞고 그 차남이었던 양광, 즉 수양제가 즉위했다. 양제는 본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야망이 아주 대단한 인물로, 아버지인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6년간 매월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을 투입하여 대운하 건설을 마무리지었고, 낙양에 동경(東京)을 건설하는 데 매월 200만 명, 돌궐을 견제할 장성 건설에도 100만 명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요서 지역의 세력 범위를 고구려 방면으로 확장해 나가며 고구려군과의 국지전을 불사했다. 그러니 이런 그에게 있어 고구려 정벌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서기 607년, 그는 동돌궐 계민가한의 군영에서 마주친 고구려 사신을 향해 “왕이 직접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침공할 것이다.”라는 경고를 남겼지만, 고구려는 이에 불응하고 혹시 모를 수와의 전면전을 대비하여 미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 신라의 우명산성 등을 공격하여 후방을 단단히 했다.
春二月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來 與王相謀
봄 2월,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므로 왕이 국지모를 보내 군사 일정을 물었다. 황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와 왕과 상의하게 했다. 『삼국사기』
그러던 서기 611년 2월, 양제는 마침내 조서를 반포하여 고구려 정벌을 선언했다. 그러자 때에 맞춰 백제 무왕은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파견하여 군사 일정을 물었는데, 이는 협공 내지는 길잡이 역할을 하겠다는 의사의 전달이었다. 양제는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후한 상과 더불어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 무왕과 상의하게 했다. 그는 백제가 지난 598년 수문제의 원정이 실패한 직후와 607년에도 줄기차게 고구려 정벌을 요청해 왔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양제의 이러한 반응이 무색하게도, 백제는 실제로 양단책(兩端策)을 쓰면서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고구려와도 우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정작 전쟁이 일어나자 수나라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기 612년 정월, 상시 수십만 명 이상을 동원한 1년에 걸친 엄청난 준비 끝에 마침내 출정식이 다가왔다. 천하를 뒤덮은 수십만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고취대(鼓吹隊, 요즘으로 치면 군악대)가 일어낸 장엄한 음악 소리가 대군의 군영을 가득 울렸다.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총 군사의 수는 무릇 113만 8,300명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200만 명이라고 하였고,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되, 서로 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하였으며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는데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대열의 끝과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60리에 뻗쳤다. 양제의 진영에는 12위, 3대, 5성, 9시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이르렀다. 근래에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적이 없었다. 『삼국사기』
수군을 제외한 육군의 전투병만 대략 48만 명, 치중대를 비롯한 비전투병과 어영군(御營軍) 6군을 포함하면 무려 113만 8,300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이 양제의 외마디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이만한 대군을 운영하기 위하여 각군 간의 거리를 각각 40리로 유지하고 매일 1군씩 연속적으로 출발하게 했는데, 이 출발에만 꼬박 40일이 소요됐다고 하며, 또 깃발이 뻗친 길이가 960리, 즉 380km에 달했다고 하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는 당시 기준으로 전근대에 동원된 최대 규모로, 고구려와 주변 인접국은 물론이요, 당사국인 중국에서도 혀를 내두른 역사상 유례없는 대군이었다. 양제는 이 대군을 셋으로 나누어 대군의 운영의 효율성을 증진하고자 했는데 우선,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맡긴 5만 명 가량의 수군은 좌익위대장군 내호아에게 맡겨 해로를 통해 곧장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했고,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등에게는 따로 305,000명의 별동대를 내주어 압록강 서쪽으로 집결하여 대기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약 80만에 육박하는 대군은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요하로 진격했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요동성의 병력을 중심으로 한 방어군을 편성하여 수나라군의 요하 도하를 저지했다.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양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수에 도착했는데, 모든 군사가 모여들어 강 앞에 진을 쳤다. 이에 아군이 물을 사이에 두고 거수하자, 수의 병사는 건너오지 못했고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했으며 그것을 완성하자 끌어와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는데,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했다. 아병이 강하게 공격하자, 수군 가운데 효용이 있는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벌였으나 아병이 고지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병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고 무리 중에 전사자가 상당했다. 『삼국사기』
3월, 요하를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수군이, 동쪽으로는 고구려군이 진영을 구축해 상호간의 대치 상태가 이루졌으며 고구려군은 압도적인 숫적열세에도 불구,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수나라군의 도하를 저지해내는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수군 진영에서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공부상서 우문개를 필두로 하여 요하의 길이를 계산한 3개의 부교를 만들어냈고 이어 그것을 동쪽 언덕에 닿게 설치하여 도하를 감행하려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부교 설치가 완료되자 좌둔위대장군 맥철장이 이끄는 선봉대가 머뭇거릴 틈도 없이 즉각 돌진에 나서기까지, 이 모두가 정말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고구려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이 감행된 그 순간, 수군은 밀려오는 당혹감과 함께 좌절하고 만다. 부교가 잘못 만들어졌음을 그제야 눈치챘기 때문이다. 부교는 요하 동쪽 언덕에 닿기에 고작 1장이 모자랐고, 이 탓에 기동력을 잃어버린 수군의 선봉대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맥철장을 비롯하여 그 수하였던 전사웅, 맹차 등이 모두 전사했고, 양군의 첫번째 전투는 고구려의 대승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수나라군은 단지 수적으로만 우세한 오합지졸들만이 아니라 400년 만의 중원 통일을 이룩한 노련한 전사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극심한 피해 속에 퇴각하면서도 부교를 다시 회수해갔고, 결국 소부감 하조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부교를 제작해냈다. 이로 인해 이어진 수나라군의 2차 도하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요하의 고구려군은 무려 1만의 사상사를 내는 참패를 겪은 뒤에 요동성으로 퇴각해야 했다.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제군은 승기를 타고 요동성을 포위했다. 『삼국사기』
고구려군이 요동성으로 퇴각하자, 이들을 쫓던 수나라군도 마찬가지로 요동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성을 포위한 수나라군은 무려 80만.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고, 그들에게는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가 마땅히 없었다. 도리어 수의 대군이 성앞에 군영을 치고 각 군을 정비할 때,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을 감행해 왔다가 패배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수군은 반복되는 승리에 자신감을 얻어간 반면, 반대로 고구려는 크게 위축되어 야전을 포기하고 수성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5월과 6월, 그리고 전쟁이 종결되는 7월까지 요동성이 석 달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고 버텨낸 것이다. 당시로부터 33년 뒤의 일이지만, 고당 전쟁 당시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약 2만 가량이었으므로, 이 전투에서 요동성을 사수해낸 고구려 군사의 수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요동성은 무려 석 달 동안 40대1에 해당하는 전력차를 극복해낸 셈이다. 수군이 앞세웠던 수백 대의 포차와 충차, 운제 그리고 수십만의 인명 등은 모두 고구려군의 필사적인 육탄 방어 속에 무용지물이 되어 갔다. 그러던 6월 기미일, 4월 말부터 유성현 임해둔으로 잠시 휴양을 떠나 있던 양제가 전선으로 복귀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공성 실패에 책임이 있는 모든 제장들을 불러모아 힐책했다.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諸將咸戰懼失色
“공(公) 등은 벼슬이 높다고, 혹은 가세를 믿고 짐을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려고 하는가? 전일 짐이 도읍에 있을 때에 공 등이 짐이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병패가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겠다. 이제 짐이 여기에 온 것은, 공 등의 잘못된 행실을 판단하여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 등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쏟지 않고 있으니, 짐이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제장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고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삼국사기』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장수들에게 더 이상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참수’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얼마나 광기가 서려 있었으면 이를 지켜보던 제장들이 모두 놀라 얼굴색이 변하고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런 발언을 할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수나라군의 요동성 공략 실패의 책임에서 그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장수들의 재량권을 제한함에 따라, 요동성에서 거짓 항복 협상을 제의하는 족족 수군 진영에서는 번번이 공격을 중지하고 양제에게 보고를 올려야만 했는데, 그렇게 지연된 시간이 요동성의 군민이 힘을 비축하고 수군의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양제의 이런 선언으로 인해 수나라 장수들은 제각기 성과를 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요동성뿐만 아니라 인근의 여러 성들도 모두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결국 성과는 없었다. 수군은 단 하나의 고구려 성도 함락하지 못했으며 수나라의 백만 대군이 본토를 비운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는 소식은 이미 주변 이민족들의 정보망으로 빠르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 양제는 기존의 계획을 철회하고 새로운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요동성과 그 인근 여러 성을 공략 중이던 병력을 그대로 두어 요동의 고구려군을 고착시키고, 압록강 서쪽에서 대기 중이었던 우중문과 우문술의 별동대와 내호아의 수군을 움직여 평양성 직공을 지시했다. 오로지 백만 대군만이 할 수 있는, 제법 그럴싸한 전략이었다.
皆會於鴨綠水西 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矟幷衣資戎具火幕
(구군의) 모든 군사가 압록수 서쪽에 집결했다.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와 회원의 두 진에서 인마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배갑, 창삭, 병의, 융구, 화막 등을 줬다. 『삼국사기』
이 무렵,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 즉 30만 별동대는 이미 계획대로 압록강 서쪽으로 집결하여 양제의 주력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주력군이 2개월간 요동성 함락에 실패하면서 이들의 기존 계획에도 자연히 차질이 생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력군의 도착을 기다리지 말고 곧바로 평양성으로 직공하라는 양제의 지시가 전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식량이었다. 기존 계획에서는 양제의 주력군과 합류하기 전까지만 버티면 되었기에 단 3개월 치의 식량만이 제공되었고, 양제의 지시를 받은 6월 중순에서는 이미 1개월 치의 식량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한 식량으로 평양성까지 진군해 충분한 군량을 지닌 내호아의 수군 부대를 만날 때까지 버텨야만 했고, 그마저도 직접 식량과 장비를 짊어지고 행군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일부 식량을 장막 밑에 묻어 버리는 등의 사태가 벌어진 탓에 온전하게 유지되지 못했다. 결국, 우중문과 우문술 등 별동대의 수뇌부는 황명에도 불구하고, 선뜻 전진을 결정하지 못했으며 별동대는 그대로 압록강 서쪽에 눌러앉아 버리고 말았다. 고구려는 이 상황을 주시하며 요동 외에서 차출해 모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과 평양성을 사수했는데, 이중 먼저 변고가 터진 것은 평양성이었다. 군량 부족으로 쉽게 움직임을 가져가지 못한 압록강의 별동대와 달리, 내호아 휘하의 수군 부대는 바닷길을 타고 쾌속질주하여 그대로 평양성 60리 안까지 접근해 왔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성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아군과 조우했는데 그들이 나와 쳐서 아군이 대파당했다. 『삼국사기』
수나라 수군의 접근을 보고받은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즉시 출동하여 적군의 상륙 시점에 맞추어 요격을 시도했지만, 도리어 대패하여 병력의 손실만을 입게 된다.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에 손실이 더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고구려 지휘부에서는 서둘러 인근 병력을 모두 끌어모으고 징발병을 포함해 평양성 바로 앞에 군진을 치고 맞섰지만, 내호아는 이미 평양성의 방어가 예상보다 훨씬 부실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簡精甲四萬 直造城下
정갑 4만 명을 뽑아 성 아래로 바로 나아갔다. 『자치통감』
이때 참모 중 누군가가 혹은 내호아 본인이 새로운 의견을 피력했다. 이대로 죽치고 앉아 막연히 육군의 합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예군을 선발하여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부총관 주법상이 신중론을 펼치며 반대했지만, 종래에는 이 의견이 채택되었고 내호아는 주법상을 이 작전에서 배제시킨 채 정갑(날래고 용맹스런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 아래까지 진군했다. 말이 정갑이지, 총 5만 명 중에 4만 명이라 하면 전투 수행이 가능한 모든 병사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高麗主高元掃境內兵以拒之 列數十里 護兒笑謂副將法尙及軍使曰 吾本謂其堅城淸野以待王師 今來道死當殄而朝食
고구려 군주 고원이 경내의 병사를 쓸어서 그에 맞섰으니 군진을 벌인 것이 수십 리였다. 내호아는 웃으며 부장 주법상과 군사에게 말하였다. “내 본시 그들이 성을 견고히 하고 들판을 깨끗이 청야로서 왕의 군사를 기다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이처럼 나오니 스스로 죽을 길을 택한 것이다. 마땅히 그들을 멸하고 아침밥을 먹자!” 『북사』
곧, 평양성 아래에서 양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에 앞서, 내호아는 “마땅히 고구려군을 멸하고 성안에서 아침밥을 먹자!”라고 말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는데 정말로 수나라군의 전투력은 고구려군을 압도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수군(水軍)으로 육전이 익숙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은 이들에게 완벽하게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내호아는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걱정을 걷어내고 승자의 미소를 내보였으며, 반대로 고구려군의 지휘관들은 굳은 표정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而僞敗 護兒逐之 護兒逐之入城 縱兵俘掠 無復部伍
아군이 거짓으로 패하자, 내호아는 퇴각하는 군사를 쫓다가 곧 성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윽고,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처 대오를 정비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승리에 도취된 내호아의 군대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뒤쫓았다.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퇴각하던 아군을 맞이하기 위해 성문을 열었는데 추격하던 수나라 군사들이 그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오히려 그 문 안에 적군의 진입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종종 급조한 군대에게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윽고 수만 명의 수나라 군사들이 성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끝도 없는 행렬이 일제히 몰려들어 도통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곧 수나라군은 눈앞의 전리품을 쓸어담기 시작했고, 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모두 달아나 이들의 잔치를 방해할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이대로 성안이 장악된다면, 고구려의 사직은 그것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기대했던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둔 내호아는 승리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병사들의 약탈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나라군의 발걸음이 아직 닿지 않은 평양성 내 어딘가에서는 비장한 표정을 한 누군가가 군사들을 불러모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효용이 뛰어나기로 이름났던,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였다.
高元弟建驍勇
고원의 동생 고건무는 효용이 매우 뛰어났다. 『북사』
建武募五百人
건무가 결사대 500을 모집했다. 『수서』
그는 결사대 500명을 지휘했다. 이들은 5부의 병에서 차출한 고구려 최고의 정예병들로, 적은 수에도 상당한 조직력과 전투력을 자랑했다. 모두 제멋대로 흩어져 재물을 약탈하던 수군은 돌연 기습을 가해온 고건무의 결사대를 당해내지 못했다. 양군의 전력 차는 80배에 달했으나, 그것은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졌을 때나 차이를 만드는 것일 뿐이었고, 고구려군이 일방적으로 수군을 도륙내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이날, 수백 명 남짓의 고구려군에 참획당한 수군은 무려 수만 명에 달했다.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이때 복병이 일어나 내호아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내호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여, 다시는 감히 다른 군대와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삼국사기』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쌓여가는 수만 구의 시체를 목격하면서, 내호아는 그제야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눈치챘다. 요동과 압록강의 전선에 주력이 집중되면서 평양성의 고구려군 중 정예라 할 만한 이들은 앞서 언급한 5부병의 병력뿐이었는데, 그 점을 유념하면서도 고건무 등의 평양성 고구려 수뇌부에게는 눈앞에 등장한 수군을 섬멸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육군 별동대와의 합류를 막기 위함이었는데, 만약 이들이 육군과 합류한다면 평양성은 충분한 군량을 확보한 35만 대군의 포위를 받게 되는 위험에 놓일 수도 있었다. 결국 고구려군은 공성계(적을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리는 계략)라는 하나의 모험을 택했고, 고건무의 대활약으로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내호아는 포로가 될 뻔했다가 겨우 모면하였고, 성안에 진입했던 수군은 4만 명이었으나 간신히 살아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왕이 대신 을지문덕을 수의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는데 실은 그들의 허실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우중문은 보다 앞서 만일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문덕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로 와 있다가 강하게 말리자 마침내 이 말을 따라 문덕으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했다. 『삼국사기』
한편,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압록강에서는 각기 사정을 안고 있는 양군의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고구려군은 수군의 군량 부족을 염두해 둔 시간 지연이 목적이었고, 수군은 이를 알면서도 정말로 평양성 직공을 시도하기에는 안고 가야 할 위험이 너무 많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 있었다. 더 필사적인 쪽은 고구려군이었다. 고구려군은 계속해서 거짓 항복을 제안하며 철군을 요구했고, 이미 요동에서 고구려군의 숱한 기만 전술에 놀아났던 수군은 이를 쉽게 믿지 않으며 고구려 왕이나 대대로(大對盧)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올 것을 요청했다. 이는 우중문이 이미 양제로부터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라는 내용의 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으나 막상 문덕이 정말로 진영을 방문해오자 그들은 우물쭈물대다 기회를 놓쳤으며 이로 인해 우중문과 우문술 간 지휘권 경쟁만 더욱 심화되었다.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이 정예 부대로 문덕을 쫓으면 공을 이룰 수 있다 말하자 술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중문이 성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작은 적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소?” 『삼국사기』
문덕이 무사히 돌아간 후, 우문술은 식량이 고갈되었음을 이유로 퇴각을 주장했지만 우중문에 의해 묵살되고 도리어 “10만 대군으로 고구려군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뵐 수 있겠냐.”는 면박만을 받게 된다. 이때, 우중문은 육합성에 머물고 있는 양제에게 이 같은 문제를 호소하고 결단을 내려줄 것을 촉구했는데 결국 양제가 우중문에게 전권을 부여하면서, 평양성 진공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시간을 헛되이 소모하는 동안 압록강의 고구려군에게 평양성의 승전 소식이 전달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구려군의 전략에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기존의 고구려군은 지연전을 구사하며 수군의 자진 퇴각을 기대했지만, 평양성 전투의 보고를 듣고 난 뒤에는 섬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수나라군의 육군 별동대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 三十里 因山爲營
술 등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라 압록수를 건너서 문덕을 추격했는데, 문덕은 수군이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매번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 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들은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무리의 의견에 떠밀려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삼국사기』
6월 말, 마침내 우중문과 우문술 필두의 30만 별동대가 압록강을 넘어 평양성으로의 진격을 시도했다. 이중 우문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 탓에 억지로 따라나섰는데, 이상하게도 직전까지 굳건하던 고구려의 방어선들이 너무 쉽게 무너저 내렸다. 수군이 조금만 전진을 해도 고구려군은 목책을 불사르고 저마다 달아나기 바빴으며 심지어 하루에 7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기도 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서둘러 평양성에 도착해 내호아의 수군 부대로부터 무사히 식량을 제공받을 수 있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그렇게 살수를 넘어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내호아는 보이지 않았지만 평양성은 성 위에 백기를 단 채 항복 의사를 타진해 왔다. 그러나 점차 약속을 어기고 회답을 거부하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내호아의 패전 소식을 전하며 조롱하고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을지문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전해 왔다.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신기한 책략은 천문에 다하였고 묘한 지혜는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네. 만족함을 알고 이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언뜻 상대를 칭찬하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서둘러 돌아가라는 반협박과 조롱이 담겨 있었다. 이 시를 받아든 우중문은 등골이 서늘했겠지만 답서를 지어 보내며 재협상을 시도했다. 그러자 문덕은 이번에는 우문술에게 사자를 보내 회군하면 고구려 왕이 직접 요동으로 가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는데 이는 회군의 명분을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수군이 그대로 철군한다 해서 문덕이 이를 고이 보내줄 생각은 없었으며, 그것은 우중문과 우문술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완전히 고갈된 군량과 지쳐 버린 군사로는 회군 그 이상의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수나라군의 퇴각과 고구려군의 요격은 이제 누구나 예상 가능한 기정사실이었으며 다만 수군은 기습을 대비해 방진을 친 채 행군했다.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문덕이 군대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는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가서 살수에 이르렀다. 군사가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문덕이 군대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들이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0,5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700명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삼국사기』
이미 예고되었던 바와 같이 수군의 퇴각길은 아주 험난했다. 사면에서 고구려군이 들이쳐 지속적으로 타격했으며 혹사된 병사들의 몸뚱이는 단 1리도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살수에 이르렀을 때, 아마 경험 많은 노병들은 그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강을 도하하는 도중에는 병력이 분리되기 때문에 기습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군이 강을 절반쯤 건넜을 그 무렵, 정말로 저 멀리서 고구려군의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가 나타나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중장기병이 선두에 서서 후미를 담당한 신세웅 부대를 도륙내자, 이어 삽시간에 전군이 통제 불능에 이르며 갈갈히 찢겨나갔는데, 『동국통감』에서는 이를 마른 나무와 썩은 나무를 꺾듯이 했다고 묘사했다. 살수에서 물귀신 신세를 면한 수군은 겨우 수천 남짓이었으나, 그마저도 고구려군의 계속된 추격 속에 살상되어 요동까지 목숨을 보존해 간 이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양제는 거지꼴로 살아 돌아온 이들의 몰골을 보고는 진노를 감추지 못하며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은 채 철군에 돌입했지만, 곧 다시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재침공한다. 아직 고구려 땅에 묻어둔 수십만 장정들의 시체가 채 썩기도 전인 고작 수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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