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감녕에 대한 요청에 있어서 내심 좋았습니다.
감녕에 대한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녕의 과거부터 파고들어가야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무뢰한의 우두머리에서 오나라 최고 장수가 되기까지 정말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던 감녕
그러나 멘탈이 조금..._- 문제가 있긴했지만
전 감녕이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었을꺼라 봅니다.
또한 중국에는 삼국지 인물을 모시는 사당이 관우와 공명을 제외하면 극히 드문데,
감녕을 모시는 사당도 존재하며 감녕을 모시는 사당은 매우 장엄하다고 합니다.
감녕은 누구일까요? 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봅시다~
감녕 ( 甘寧 ??? ~ 222)

자는 흥패(興覇)이다. 출생일은 명확하지 않고 파군 임강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에 동네 무뢰한을 모아 범죄 사건 등을 조사하여 범인 체포와 처벌을 하는 등 의협심이 있는 한편 지방의 관리와 결탁하여 온갖 패악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는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항상 허리에 쇠방울을 차고 다녔으며, 그 소리만 들어도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하였다고 전한다.
우연히 현자가 지은 서적을 읽고 감화하여 큰 뜻을 품고 형주의 군웅이었던 유표(劉表)를 찾아가 그의 부하가 되지만 감녕은 평판이 좋지 않아 그의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황조(黃祖) 휘하에 들어가 전장에서 공적을 세웠지만 이곳에서도 실력자로 대우받지 못하자 오나라 손권의 부하 장수가 되어 황조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조가 오나라로 쳐들어오자 적벽에서 수군을 지휘하여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으며 관우가 오나라를 공격해오자 이를 방어하였다. 유수에서 40만 대군의 조조군을 맞아 승리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촉한 사마가가 쏜 화살을 맞아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생애
익주의 토호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들을 이끌고 지역 자경단과 같은 행동을 해 범죄 사건 등이 일어나면 범인 체포와 처벌을 행했다. 또한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는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으로 날뛰었다. 이런 행위를 20여 년간 지속했다.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 등을 들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그들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
익주를 떠나다
이후 익주를 떠나 유표(劉表)를 따른다. 삼국지의 본전에서는 '공격하여 탈취하기를 그만두고 여러 책을 읽었으며 유표에게 가 의탁했다.'라고 익주를 떠나 유표에게 간 경위를 서술했다. 그러나 《영웅기》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원인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처음에 감녕은 익주목 유언이 죽은 후 익주의 토호 출신 조위가 옹립하여 유언을 대신해 자사가 된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을 섬겼다. 그러나 조정에서 호모를 유장 대신 자사로 삼아 내려보내자, 동료 심미(沈彌)·누발(婁發) 및 형주별가(荊州別駕) 유합(劉闔) 등과 함께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유장을 공격했고, 패하여 형주로 달아났다.[2] 그러나 문치주의를 중시했던 유표는 감녕을 잘 대우해주지 못했고 감녕 또한 이상주의만으로는 난세를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해 황조(黃祖) 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황조도 감녕을 예우해주지 않았다. 손권(孫權)이 공격해왔을 때 감녕이 손권의 부하 능조(凌操)를 사살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황조의 부하 소비(蘇飛)는 자주 황조에게 감녕을 중용하도록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는 감녕을 오나라로 보내주었다.
오나라에 등용되다
손권 밑으로 들어간 감녕은 주유(周瑜)와 여몽(呂蒙)의 추천으로 특별 대우를 받게 된다. 감녕이 손견(孫堅)의 원수인 황조 토벌을 진언하자, 손권은 그에게 전군의 지휘를 맡겨 황조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동시에 강하 지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런데 소비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녕이 손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쳐서 피를 흘리며 소비의 구명을 호소해 옛 은덕에 보답했다.
그 후로도 감녕은 담력과 기지를 이용해 뛰어난 군사 능력을 발휘하였다. 적벽 전투에서는 조조군에게 첩자를 보내 가짜 정보를 들려준다. 적벽 전투가 끝나고 남군의 조인(曹仁)과 싸울 때 감녕은 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훗날,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魯肅)이 관우(關羽)와 익양에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 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유수에서 조조의 40만 대군과 대치할 때에는 부하 가운데 용감한 병사 100명 정도를 선발해 조조군에 기습을 가해 혼란을 일으킨 후 크게 승리하는데, 전투 전에 병사들을 격려하고 일일이 술잔을 따라 돌렸다. 이처럼 그는 유능한 인물을 존중하고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위해 기꺼이 싸웠다고 한다. 손권은 “조조에게는 장료(張遼)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 고 그를 칭찬하였다.
감녕은 동료인 능통(凌統)과 자주 불화를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를 감녕이 전사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능조는 감녕이 사살한 것이 아니라 감녕과의 난전 중에 빗나간 화살이 능조의 머리를 관통하여 능조가 전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감녕에 대한 능통의 증오심 때문에 두 사람은 전장에서 공로 다툼을 벌였고 손권이 이를 중재해 화해시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하지만 합비전투에서 능통이 손권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악진(樂進)을 만나 고전하여 죽게 될 위기에 몰리자 감녕이 악진을 물리치고 능통을 구출해주어 능통은 감녕과 화해한다.
이릉 전투 때 감녕은 이미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으며 이릉전투가 발발하면서 사망했다.
《삼국지연의》 속 감녕
감녕은 머리에 촉한의 사마가(沙摩柯)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고,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고 지켜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색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그 뒤 감녕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고깃덩어리를 던지면 까마귀가 공중에서 받아먹는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을 좋아하였으며,무뢰한을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뤄 서로 따랐고,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꽃고 방울을 허리에 찼다.
백성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 즉시 감녕임을 알았다.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 융숭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재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이런 행위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으며, 독서에 몰두하여계략과 지모를 갖춘후 유표에게 의탁한다. 그래서 남양에서 살았지만,나아가 임용되지는 않았다.
후에 그는 몸을 돌려 황조에게 의탁했다. 황조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 그를 공양했다.
그래서 감녕은 오나라로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은 모두 그를 천거했다.
손권은 그에게 옛 신하와 같이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감녕이 계책을 진술하며 말했다.
"지금 한나라는 매일매일 쇠미해져 가고 있고, 조조는 더욱더 교만해져 끝내는 제위를 찬탈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쪽의 형주 땅은 산세가 편리하고 강과 하천의 흐름이 원활하니, 진실로 우리 나라 서쪽의 유리한 형세입니다.
저는 이미 유표를 관찰했는데, 그의 생각은 원대하지 않고,자식들은 또 모자라서 기업을 계승하여 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공께서 이것을 일찍 살펴보기만 한다면 조조의 뒤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토지를 도모하는 계책은 응당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황조는 지금 연로하여 혼미함이 매우 심하고,
재물과 식량은 모두 부족하며, 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재화를 탐하며,
부하 장수들의 이익을 빼앗아 장수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있고, 배나 무기는 버려진 채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농경에는 게으르고 군대에는 엄한 규율이 없습니다.
공께서 만일 지금 간다면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일단 황조의 군대를 파괴하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서쪽에서 초관을 점령하여 대세를 넓히면 즉시 점차적으로 파군과 촉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대목에서 감녕이 무뢰한에서 잘못을 깨우친 후 얼마나 열심히 노력(독서)을 했으며,
그가 단순한 맹장이 아닌 지모를 갖춘 장수라는것을 알수 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장소는 그 당시 자리에 있었는데, 그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현재 형세가 위급한데, 만일 군대가 과감히 출동한다면 반드시 어지럽게 될 것이오." >
감녕은 장소에게 말했다.
"나라에서는 소하의 임무를 그대에게 맡겼거늘,그대는 남아서 지키면서 혼란을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고인을 배우기를 바라시오?" >
↑ 오나라 최고의 책사 중 한명인 장소를 주먹이 아닌 말로써 압도하는 감녕의 모습.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맹장 감녕과는 결코 다른 모습이다.
손권은 술을 들어 감녕에게 권하며 말했다.
흥패,올해 출정하여 토벌하는 것은 이 술과 같은 것이니,결정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대가 단지 계략을 짜는 일에 힘써 반드시 황조를 이기도록 한다면 그대의 공이오.
어찌 장장사의 말을 의심하시오?
손권은 그래서 서쪽으로 나아갔는데,과연 황조를 체포했고,그의 병사들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공략시키지는 못햇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성을 얻었으며,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새로 얻어서 1천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며 담소 하였다.
사자를 파견하여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여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
↑ 감녕의 용맹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누가 관우를 상대로 이렇게 당당할수 있을까?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양신.하치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에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여몽이 가장 컸고,감녕이 그 다음 이었으므로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다.
이후에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 감녕은 전부독이 되어 병사를 출동시켜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많은 안주를 하사했다. 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다 먹은 후,감녕은 먼저 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마시고,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땅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그 즉시 받을 수 없었다.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어 말했다.
"그대가 폐하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어찌 나와 함께 할 수 있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죽음을 아끼시오?"
이경이 되었을때,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갔다.
적은 깜짝 놀랐으며,끝내는 퇴각했다. 감녕은 이 때문에 더욱 중시되었고,병사 2천명이 증원되었다.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경시하고 장사들을 존중했다.
유능한 인물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건안 20년(215),감녕은 합비 공격에 참가했는데,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합비전의 패배 원인은 오군의 주력이 수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약한 보병과 역병의 발생등이 크다.)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 1천명과 여몽.장흠.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엇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손권은 특별히 그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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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 거리*
[훗날의 노력이 젊은날의 죄값을 치룰 수 있는가?? 감녕 흥패]
1. 대기만성
본래 대기만성이라는 것은 '능력이 느즈막하게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남들 공부할때 놀고, 남들 취직했을때 학교 들어가고, 남들 중간 간부 되어있을때 입사하는 등의 그러한 식의 '남보다 늦은 걸음'을 걷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단, 역시 '成'이라 하니 나중에 이름 한번 날려주면 되는 바이다.
그런면에 있으면 오국의 흥패 감녕은 제대로 '대기만성'이라 말할 수 있을 지어다.
2. 양아치? 깡패? 그것보다는 조폭 건달.
양아치라고 하기에는 그 하는 짓거리가 좀 급이 높고, 깡패라고 하기에도 뭔가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무리들을 이끌고 장강에서 해적질을 하던 녀석이었으니 일종의 '양자강의 조폭'이라고 불리는게 어울리겠다. 그리고 그 또한 그 젊은시절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편이었으니 '조폭 건달' 수준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2-1 눈만 흘겨도 뎅거덩 !
감녕은 큰칼을 옆에 차고 다니면서 - 한신의 흉내냐? - 거들먹 거리기 일쑤였으며 지나가다가 어깨만 부딪힌다거나 누군가가 눈으로 야려보기만 해도 그 칼을 그대로 휘둘러 피를 부르기가 일쑤였으니 그의 거주지인 '파군'에서 소문이 무성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있다. 관우도 하동군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다가 유비를 만났으며 서서도 젊은 시절 '지우'의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는 이름을 감추며 난세를 떠돌았다. 그런데 왜? 감녕은 그렇게 피를 부르는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멀쩡하게 '파군'에서 거주했을까?
일개 서민이 그 위주였다라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고위층'을 죽이고 도망다니는 관우나 서서와는 다르게 감녕을 굳이 잡으려고 돌아다니지도 않은 점이요, 더군다나 굳이 '일개 서민'의 죽음에 그것도 그 '난세'의 시절에 군수가 굳이 살인을 취미삼아 저지르는 감녕을 잡으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혹시 '지주'정도를 건드렸다면 감녕은 바로 그 자신의 '해적선'을 타고는 장강을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몸을 숨겼을 터이니 잡기는 힘든 문제였다.
'고위층'보다는 '일개 서민' 자기보다 약한 놈을 괴롭히면서 '돈'이나 뜯는 양아치 수준의 '살인마'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양아치라 보기 어려운 것이 다음에서의 이유다.
2-2 사치와 향락
'비단'이라는 것은 '동탁'이 '서량자사'의 관직을 사기위해 '십상시' 매수를 위하여 보낸 물품 중에서 하나요, 동탁이 여포를 꼬시기 위해서 보내준 물품 중에 들어있던 품목이요, 왕윤이 초선으로 연환계를 쓰려고 할때 동탁을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며 슬쩍 손에 쥐어준 품목 또한 비단이다.
그뿐인가. 곽가는 홀로 '비단 관복'을 해입었으며 - 잘 모르는 사람일테지만 평숙 하안이라고하는 하이 소사이어티 엘리트를 추구하는 놈 또한 '비단 관복'으로 옷을 해입는등 적어도 '비단'이라는 품목은 일반인, 서민층이 보기에 굉장한 고가품인 것이다. 그런데 감녕은 이 '비단'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의 해적선의 그물이 '비단'이었다라고 하였으며 배를 묶어놓는 끈이 '비단'이었고, 배가 출발할때 '비단'을 푸는 것이 아니라 '비단'을 베어버리고 출발했다가 와서는 '비단'을 새로 구해 다시 묶어놓았다. 감녕의 부하들은 모두 비단옷에 비단 자수를 수 놓아서 감녕 패거리가 한번 떴다하면 길 전체가 번쩍번쩍 빛날 정도여서 사람들이 눈을 뜨고 보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뿐인가. 감녕이 파군에서 살인마의 짓을 저지를 무렵에는 발바닥에 흙을 묻히지 않기 위해서 거마와 기마를 타고 다녔으며 배 또한 쾌속정이라 양자강에서 감녕의 배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군수인들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거마에서 내리거나 배를 타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흙을 밟아야 했을터인데 아마 그렇다면 그 사이의 흙을 밟지 않기 위해 '비단'을 깔고 다니지 않았을까? 아니면 부하들을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짓밟고 다녔거나 말이다.
뭐 내가 알바는 아니다만 뭐 그럴 놈 아니겠어?
2-3 양자강의 해적선장 하록그는 우선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장강'에서 해적질을 하면서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하니 뭐, 그런 것 아니겠나. 김두한의 '우미관패'라거나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같은 그런 원시 조폭 같은 무리들로서 말이다. 뭐, 그네들처럼 '돈'을 납부받지는 않았겠지만 강에서는 '해적질'로 땅에서는 '살인마'로 그 악명을 떨치니 누군들 좋아했을까?
하지만 그 '무리'들은 '감녕'이라면 목숨걸고 따랐을 법은 하다. 지금의 조폭들이야 '돈'때문에 조직을 배신하지만 김두한 시대의 그러한 조폭들같은 경우에는 '죽을때까지 보스위한 충정'이었을터이며 김두한 쫄따구들도 김두한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며 '조직'을 와해시켰을때도 끝까지 김두한의 옆에 남아있던 그런 시대의 '낭만적 관계'라고 하면 될라는가?
파군의 '조폭 건달 보스' 감녕. 그런 그가 어찌해서 오국의 장수가 되어서 '명망'을 높이게 되었을까?
3. 느즈막히 정신을 차려서......이십대 후반에 이놈이 갑작스레 정신을 차린다. 계기는? 나와있지 않으니 알수는 없다만 난세가 더욱 심화되다보니 '이름'한번 날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자신 워낙에 '살인'과 '악명'이 파군에 떨쳐있다보니 자신의 패거리의 확장에 무리가 있었을 터이고 그렇다고하여 아무곳에서나 '거병'을 하면 주위의 유표, 손견의 세력들이 워낙에 쟁쟁하니 그 자신 버티기 힘들터이다.
일개 조직의 보스라면 그 정도는 당연 계산할 수 있어야 할터이다. 더이상 자신의 세력이 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보면 '중앙관료'는 아니더라도 '주자사'들의 밑에서 '관병'으로서 들어가 이름을 날린다면 난세에 이름 날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터라 여겼을 터이다. 그러니 이십대 후반에 들어가서 느즈막하게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런데 감녕이 무인의 길에 들어선 인물이 유표다. 형주의 강하팔준으로 명망이 천하사해를 덮치는 유표였다. 그런 유표가 살인마 감녕을 무장으로 받아들였다.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감녕은 황조의 장수로서 있었으니 황조가 쓸만한 인물이라 여겨서 받아들인 것이고 이는 유표가 알리가 없고, 황조가 굳이 보고했을 것도 없다. 그러니 유표는 자기 부하무장중에 '살인마'가 있었으리라고 여기지는 못했을터다.
그런데, 솔직히 난세에 형주의 주목으로 있으면서 장수들을 거느리는데 개들중에 '살인마'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있은들 뭔 상관이겠는가.
4. 위에 장문원이 있다면 오에는 감흥패가 있다.합비전투에서 800명의 단기로 오군을 철격퇴 시킨 문원 장료의 명성은 오국에 '울던 아기도 장료의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친다'라는 그 '악명'을 떨치게 하기에 이르고 만다. 이에 손권은 하늘을 우러러 '우리 오에는 왜 저런 장수가 없나이까?' 하고 울부짖었겠다마는 하늘은 오나라에 그런 장수를 주었다. 흥패 감녕이 있지 않은가.
합비전투는 '장료'의 시나리오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흥패 감녕'의 서브 시나리오도 기다리고 있었다.
합비전투에서 오국이 위의 유수구 점령에 이르렀을때 능조와 감녕은 서로가 '더 적은 병사수로 점령가능하다'라는 것으로 손권앞에서 논전을 벌인다. 이에 손권은 감녕에게 100 명을 주고 유수구를 함락시키라 이른다. 감녕은 100 명의 정예병으로 그 유명한 '오리깃털작전'으로 인하여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유수구 적진 본대를 함몰시키고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감녕의 활약상으로 인하여 '강좌호신 (江左虎臣)'이라고 오국에 그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갔으며 그 활약상을 들은 손권은 껄껄 대고 웃으며 한 말이 바로 저 말이다.
너희들에게 장문원이 있으면, 우리는 감흥패가 있다. 까불지들 마라.
라는 것이겠지. 그런데 '장문원'에 대한 겁은 있었는가 보다. 나중에 장료가 나이가 들어 또 쳐들어오?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조심하라
라며 신신당부를 하였으니 '적군'의 무장은 '기대이상'이고 내 부하들은 '기대이하'란 말이냐. 손권의 그런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5. 젊은 시절의 짓이 후일의 노력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감녕은 수많은 서민들을 살생하고 비단을 빼앗아서 호위호식을 하고 장강을 넘나들면서 수적질을 일삼던 그 놈이다.
또, 무인의 길로 들어서면서 전쟁시에는 항상 선봉을 서고, 물러설때는 마지막에서 후방을 맡았으며 다른 무장들에게 늘 겸허하였으며 주군으로부터 지극히 높은 신망을 받은 무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젊은 시절 그 '조폭 보스'짓을 일삼던 놈의 회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양은이파 조양은이는 '옥살이'를 하고 나와 '교인'이 되었다고 하여 '보스'라는 영화까지 만들었지만 또다시 조직을 만들고 이권개입에 들고, 사기치고 다시 들어가버렸으니 회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옥살이를 살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후로 늘 '성실'함으로 오국의 일군을 이끈 감흥패의 젊은 시절의 그 죄값은 보상되었는가?
옥살이를 살고 나와 '죄값'은 치뤘지만 또 똑같이 그 짓을 저지르고 있는 조양은은 또 '옥살이'를 살고 나오면 '죄값'은 치뤘다고 볼 수 있는가?
감흥패가 '젊은 날의 짓'에 대해서 '마음'에 품고 평생에 두고 '마음고생'을 했는지는 내가 알수는 없는 노릇이다만, 그 '미안함'으로 '평생'을 두고 살았다면 되려 그것이 '몇년'의 옥살이로 죄값을 치루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감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지금도 아직도 감히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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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감녕을 까마귀떼가 지켰다?]
감녕은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청해온 번병들의 화살을 맞고 상하에 빠져 죽었다.그 시체는 물결을 따라 표류하고 있었는데, 번병들이 시체를 건져 상을 받으려고 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와 부리로는 번병의 눈을 쪼고, 발톱으로는 번병의 머리통을 긁었다.
급기야 번왕은 까마귀에 쪼여 죽고, 번병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까마귀들은 강에서 표류하고 있는 감녕의 시체를 계속해서 보호하고 있었는데 3일 밤낮이 지나자
감녕이 생전에 주둔했던 부지구로 돌아와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부지구에는 늙은 석공이 한 사람 있었는데, 두 제자를 데리고 밖으로 일을 하러 나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늙은 석공은 우선 감녕을 해안으로 건져 올리고 몸에서 독이 묻은 화살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옮기라고 한 뒤, 자신은 한 걸음 앞서 장례 준비를 하러 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작은 이익을 탐하는 소인배로 자신들의 사부가 자리를 떠나자 즉시 감녕의 전포를 벗겨 돈으로 바꾸려고 했다.
두 사람이 막 손을 쓰려는 순간 까마귀 떼들이 또 시끄럽게 울기 시작하더니, 우르르 몰려 들어 두사람을 쪼아 죽였다.
늙은 석공이 향친들을 불러모아 감녕을 대령산 아래에 매장 시키자, 그 까마귀 떼도 대령산으로 날아와 밤낮으로 감녕의 묘를 지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나중에 또 어떤 재산을 탐하는 사람이 와서 도굴을 할려다가 까마귀 떼에게 쪼여 죽었는데
원래 이 까마귀 떼들은 모두가 다 전사한 감녕의 부하들이 변한것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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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의 전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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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의 100인 습격은 진실인가? 허구인가?]
이후에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 감녕은 전부독이 되어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 많은 안주를 하사했다. 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다 먹은 후 감녕은 먼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먼저 마시고, 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땅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그 즉시 받을 수 없었다.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어 말했다.
"그대가 폐하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 어찌 나와 함께 할 수 있소?
나는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공은 어찌하여 유독 죽음을 아끼시오?"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사나운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 공손히 술을 받았으며, 그런 연후에 병사들에게 각기 한잔씩 따라 주었다.
2경이 되었을때,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갔다. 적은 깜짝 놀랬으며 끝내 퇴각했다.
감녕은 이 때문에 더욱 중시되었고 병사 2천명이 증원되었다. -정사 감녕전-
조공이 유수로 출전했을 때 보기 40만이라 불렸고, 강물에 임하여 말을 물먹였다. 손권이 병사 7만명을 거느리고 응전하면서 감녕을 시켜 3천명을 거느리고 전부독이 되게 하였다. 손권이 비밀리에 감녕에게 명령을 내려 밤에 위군으로 난입하게 하였다. 감녕이 수하의 건장한 병사 1백명을 골라, 빠른 길로 조공 진영의 아래로 가서 목각을 뽑아 불며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급을 참수했다. 북군(조조의 군대) 는 놀라 시끄럽게 북을 울리며 불을 별빛처럼 환하게 드니, 감녕이 이에 진영으로 돌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다.
인하여 밤에 손권을 알현하니 손권이 기뻐 말하길 "늙은이(조조) 를 너무 놀래킨 것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라 했다.
곧 비단 1천여 필과 검 1백 자루를 하사했다. 손권이 말하길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만 하다." 라고 했다. 한달여 간을 멈추고 머무르다 북군은 바로 퇴각하였다. -감녕전 주석 강표전-
결론. 감녕의 100인 기습은 허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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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은 정말 사마가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릉전투에 참전했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다.
정사에서 감녕의 행적이 최후로 언급되는건 214~215년의 합비 전투이고...(손권이 장료에게 굴욕을 당한 전투)
그 이후의 행적이라고 하면 반장전에 나오는 감녕이 죽자 반장이 이어받았다는 부분인데...
반장이 관우를 잡아 죽이는데에 참가했고 그 이후에 고릉태수가 되었고 그 이후에 감녕이 죽어 계승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감녕은 관우가 죽는 219년까지는 살아있었다고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그로부터 이릉전투까지는 몇년의 공백이 있으므로 그 사이에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나라 입장에서는 중대한 전투였던 이릉 전투에서 참전한 장군들 이름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감녕의 위치상 듣보잡이 아니니 당연히 한당 등과 함께 언급되었을 것이다.) 이릉전투 이전에 이미 죽었다고 추측해도 무리는 없을것이다.
즉, 감녕은 실제로는 만왕 사마가에게 죽는 굴욕을 당할 일도 없었고 아예 이릉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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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주에서 감녕의 행적에 대한 기록]
자치통감 흥평 원년의 기사입니다.
馬騰之攻李傕也,劉焉二子範、誕皆死。議郎河南龐羲,素與焉善,乃募將焉諸孫入蜀。會天火燒城,焉徙治成都,疽發背而卒。州大吏趙韙等貪焉子璋溫仁,共上璋為益州刺史,詔拜潁川扈瑁為刺史。璋將沈彌、婁發、甘寧反,擊璋,不勝,走入荊州;詔乃以璋為益州牧。璋以韙為征東中郎將,率衆擊劉表,屯朐
。
한자에 약해 전문 번역은 불가하고, 예전에 번역본을 읽은 것에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등이 이각을 공격했다. 유언의 두 아들이 죽었다. 유언은 사람들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갔다. 발병하여 이후 죽었다. 유언이 사망하자 조위가 유장을 추대하였는데, 동쪽에서 감녕등이 모반하였다.
이런 내용입니다.
정사에서는,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 융성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제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그래서 지방 관원 중에서 어떤 이는 그의 박해를 받아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게 되었다. 이런 행위는 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이후에 그는 이런 행위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으며, 제자백가의 책을 약간 읽고서 곧 유표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그래서 남양(南陽)에서 살았지만, 나아가 임용되지는 않았다.
라고 해서 도적질로 행위의 목적자체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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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도 인정한 감녕의 성질]
손교전 중....
손교는 일찍이 사소한 일로 감녕(甘寧)과 분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감녕에게 간언하자, 감녕이 말했다.
“신하와 공자(子)는 하나의 항열이오. 정로장군(征虜)이 비록 공자이지만, 어찌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사람을 모욕할 수있겠소! 나는 영명한 군주를 만났으니, 마땅히 공적을 내고 목숨을 바쳐 군주에게 보답해야 할 뿐이거늘 진실로 세간의 관례에 따라몸을 굽힐 수는 없소.”
손권이 이 말을 듣자, 편지를 써서 손교를 꾸짖어 말했다.
- 우리가 북방(北方 : 조조)과 적이 된 이래, 중간에 이미 10년이 지났으며, 처음에 서로 대치할 때는 네 나이가어렸으나, 지금은 거의 30세가 되려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서른 살이면 서게 된다.(三十而立)’는 것은 단지 오경(五經)을학습하라는 것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중략)..... 요즈음 듣기로는 그대가 감흥패(甘興霸)와 더불어 술을마시다가 술로 인하여 발작을 일으켜 그 사람을 능멸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여몽(呂蒙)의 감독하에 있기를 구했던 사람이다. 그사람됨이 비록 거칠고 호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못할 경우도 있지만, 그는 비교적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 내가 그를가까이 했지만, 그를 사사롭게 대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하고 아끼는데, 그대는 그를 소원하게 하고 증오하고 있다..... (생략)
손교는 편지를 받자, 상소하여 잘못을 사죄하고 마침내 감녕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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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은 손오의 최고 장수라고 볼 수 있을까?]
1. 감녕의 등장
-감녕의 첫 등장은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려고 할 당시였다. 당시 황조는 크게 패하여 도주하고 있었고, 손권군의 추격은 급했다.
그 추격의 선봉은 바로 훗날 오의 맹장이 되는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였고, 활을 잘 쏘는 감녕은 후방에 있다가 활을 쏘아 능조를 죽여버렸다.
그 덕에 황조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감녕의 출신을 업신여기며 오히려 감녕의 빈객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먼저 감녕의 출신이 연의에서는 '수적, 해적' 정도로 나오지만 정사로 보면 딱히 그런것 같지는 않다.
해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그냥 말도 안되는 건달의 우두머리, 즉 조폭 두목 정도로 보면 될것 같다.
무뢰한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사람을 만나거나 지방 관원을 만날때, 그들이 잘 접대하면 즐겁게 교제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들을 풀어 재물을 빼앗아버렸다. 이런 행위는 20년간 지속되었다는데 이러한 모습에서 해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것 같고, 그냥 날건달이었다.
사실 이러한 행위를 20년간 지속했다는 점에서 감녕의 나이를 가늠하자면 유표에게 출사했을때 최소 35살 이상은 되었던것 같다. 장수로서의 시작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사족으로, 주태와 장흠 또한 수적 출신이라는데 사실 정사에는 그런 구절을 찾을 수가 없다. 주태와 장흠 입장으로써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2. 손권에게 투항하다.
-감녕은 황조가 자신을 쓰지 않아 떠나가고 싶었지만 붙잡힐까 두려워 그러지 못했고, 소비가 알려준 계책으로 비로소 손권에게 투항했다.
투항 당시 여몽과 주유 등이 그를 추천했고, 손권을 만나 자신의 계책을 말했다.
혹자들은 감녕이 천하삼분지계를 주창했다 라고 하는데 그의 주장을 보면 삼분지계보다는 천하이분지계가 맞는 것 같다.
"황조의 군대를 파하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 서쪽에서 초관을 점거하여 대세를 넓히면 즉시 점차적으로 파군과 촉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삼분의 계책이 아닌 손권이 직접 파군과 촉군까지 소유하자는 계책으로 주유의 생각과 흡사하다.
손권은 그런 감녕을 칭찬했으며 그 후 감녕의 말을 따라 황조를 쳐서 그를 죽였다.
손권과 감녕이 친하다고 하나 처음부터 그런것은 아니었다. 감녕은 성질이 포악하고 살인을 좋아하였으며 항상 여몽의 생각을 거슬렀고, 또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했다.
갓 투항한 건달 출신의 장수가 자기 명령을 어기고 성질 또한 괴팍하니 어찌 마음에 들겠는가? 손권은 감녕에게 노여움을 느꼈으나
여몽은 항상 그를 위해 진정하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감녕같은 장수는 얻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말해 비로소 감녕은 손권에게 쓰임을 얻게 되었다.
3. 주유를 수행해 전투에 임하다.
-적벽 대전 당시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에서 조조를 무찔렀다. 남군에서 조인과 대치할 무렵에는 주유에게 곧장 이릉으로 진격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주유는 건의한 감녕에게 직접 명을 내려 이릉을 취하게 하였고, 감녕은 수백의 병사로 이릉을 취한뒤 새로 채워 1천명을 채웠다.
조인은 이릉을 수복하기 위해 5,6천 명을 시켜 이릉을 탈취하게 했고 고작 천명에 불과한 병사를 이끌던 감녕은 곧 포위되었다.
며칠간 이어진 조인군의 맹렬한 공격에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는데 감녕만은 담소자약했다. 담소자약(=태연자약)이란 고사성어는 감녕에게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후에 주유의 원군으로 조인군은 퇴각했고, 감녕은 이릉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4. 노숙을 수행해 익양에서 관우에게 대항하다.
-노숙은 당시 관우에게 대항하기 위해 장수들과 상의했고, 감녕은 당시 3백여명의 병사만 있었는데 5백명을 증원시켜준다면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하였다.
즉시 노숙은 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주었고 감녕은 그날 밤 출발하여 관우가 물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손권은 천하의 관우에게 맞선 감녕의 공로를 기려 서릉태수에 제수하고 양신,하치 두 현을 통솔하게 하였다.
5. 환현 공략의 선봉에 서다.
-여몽이 손권에게 환현 공략을 주창했고, 손권은 이에 따라 직접 환현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장수들 사이에서 여몽은 감녕을 선봉에 추천했고,
여몽 자신은 정예부대로 그 뒤를 이었다. 새벽에 여몽은 직접 북채와 북을 잡았으며,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타고 넘어가 결국 주광을 포로로 잡았다.
연의에서는 감녕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 주광을 철쇄를 던져 죽이는데, 코에이에서 감녕에게 준 철쇄는 아마 이 이야기에서 유례하지 않았나 싶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 여몽이 으뜸이었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다.
6. 유수구의 전설
-조조가 손권에게 대항하기 위해 직접 유수로 출병했을 때, 손권은 감녕에게 전부독이 되어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을 내렸다.
강표전에 따르면 감녕은 3천명을 거느리고 전부독이 되었으나, 오히려 건장한 1백명 만을 골라 뽑아 밤에 녹각을 뽑아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 급을 참수했다. 조조군은 놀라 시끄럽게 북을 울리며 불을 환하게 밝히니 그제서야 감녕은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다.
손권은 감녕을 크게 칭찬하며 조조를 디스한다.
"늙은이를 너무 놀래킨 것이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만 하다."
7. 위의 명장 장료에게 저항하다
-합비 공격 당시 장료의 거센 저항도 있었지만 역병 또한 유행하여 결국 손권은 군을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데 손권은 소요진 북쪽에 오직 호사 1천여명과 능통, 여몽, 장흠, 감녕과 더불어 있었다.
대군을 물린 마당에 총대장이 왜 천여명을 거느린 채 퇴각을 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는 의아하지만 아마 대군으로 뚫지 못한 아쉬움과 더불어 장료가 설마 급습해오겠는가 하는 자신감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장료는 멀리서 이를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기습했다. 이에 능통 등은 필사적으로 싸웠고, 감녕은 화살을 쏘며 저항해 가까스로 손권을 보호한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때문에 북을 치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를 질렀고, 진수는 그를 웅장하고 강인했다 라고 표현하였다.
유수에서 감녕에게 당한 위군의 수모를 장료는 오히려 배로 갚아준 것이다. 하지만 장료의 안타까운 실책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손권을 알아보지 못한것...
장료는 그가 손권이었음을 알게 되자 탄식했다고 한다. 장료는 두번이나 손권을 잡을뻔했으니 판정에서는 감녕이 장료에 미치지 못하였다.
8. 최후
-그 후 감녕의 행적은 잘 드러나지 않고, 감녕이 죽은 후 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이질에 걸린 상태로 이릉전투에 나섰다가 사마가에게 뒤통수에 활을 맞고 나무 아래서 쓸쓸하게 숨졌다.
죽은 감녕을 까마귀 떼가 시신을 지키기 위해 덮었다고 하는데 연의의 작자는 이상하게도 감녕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것 같다.
연의에서 감녕은 주태나 능통 등을 제치고 오나라 제일의 용장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코에이에서도 항상 오의 무력 탑에는 감녕이 되었고, 철쇄라는 무기를 쥐어 주기도 했다.
평한다 - 감녕은 세병제의 영향으로 인해 평생 대군을 이끌지 못하고 오로지 소수의 병력만을 운용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한 한계로 인해 그의 군사적인 역량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통솔력을 측정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용맹은 능히 알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오의 훌륭한 조아(爪牙)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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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은 장소보다 오히려 나이가 많았을 수도 있다]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유언이 죽자, 아들 유장이 대신하여 자사가 되었다. 장안에서 영천사람 호모(扈冒)를 배수하여 자사로 삼아 한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형주의 별가(別駕) 유합(劉闔)은 유장이 거느리던 심미(沈彌), 누발(婁發), 감녕(甘寧)이 반란을 일으키나, 유장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패주하여 형주로 달아났다.
194년, 유언전의 주석에 실린 기록.
놀랍게도 감녕의 이름이 나오는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감녕은 파군사람이었고 촉지역에서 20년 동안이나 도적질을 해왔기에 상당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촉 지방에서 감씨가 그리 흔한 성이 아니었기에 그만큼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거니와 감녕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록은 감녕이 도적질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나 유표에게 의탁했다는 것과도 앞뒤가 맞음..
유언 사후 유장의 집권에 반란이 일어난 것은 평소 유언이 하도 촉의 호족들을 짓밟와놨고 또한 동주병(=장안,형주 등 익주 동쪽 지방의 이주민)들을 우대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촉의 토호에 해당하는 감녕이 여기에 불만을 품을 동기도 충분하죠. 이름 뿐만 아니라 출신지와 행적을 살펴봐도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반란사건의 주모자격인데다 또 변변한 결과도 없이 쫓겨났기에 본전에서는 '침탈하고 협박하기를 그만두며 제자백가의 책을 읽고 유표에게 의탁했다' 고 어물쩡 넘어갔던듯, 특이한 것은 형주별가 유합에 대한 기록인데 형주목 유표가 배후에서 반란을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가 194년의 일.
이 이전에 감녕은 촉군승이 되었다가 관직을 그만뒀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에야 20년동안 도적질을 했죠.
이미 194년에 40세를 훌쩍 넘겼을 가능성이 높고, 194년에 사십이라면 조조와 동갑입니다...(장소는한살어림)
엄청나게 어리게 잡아도 서른예닐곱은 됐을듯요
이후 203년에 황조 휘하에서 능조를 사살했는데
이로부터 3년 전에 황조의 휘하가 되었다니 황조 밑으로 들어간 해는 200년 무렵으로 보입니다.
유표에게도 한 6년간 푸대접받았단 소리;;; 털리고 오니 일단은(스폰서였기에)받아들였지만 아예 기용할 생각 자체가 없었던 듯..
그 외에 자식뻘(....)인 손교,여몽과도 트러블이 있었는데, 여몽은 평소 감녕의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감녕같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며 항상 변호해주던 입장이었고 여기에 더해 유표 휘하시절에도 거의 10년 동안 무시당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성격에 문제가 많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분대로 사람을 죽였다'는 표현도 있고, 여몽과 불화가 생긴 일도 전적으로 기분따라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하다하다 여몽이 승질이 뻗쳐 생긴(감녕과실 100%의)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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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서 보는 감녕]
1. 감녕은 어릴 때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을 좋아하였으며, 무뢰한을 불러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뤄 서로 따랐고, 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꽂고 방울을 허리에 찼다. 백성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 즉시 감녕임을 알았다.
2.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 융성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제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3. 그래서 지방 관원 중에서 어떤 이는 그의 박해를 받아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게 되었다. 이런 행위는 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이후에 그는 이런 행위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으며, 제자백가의 책을 약간 읽고서 곧 유표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4. 그래서 감녕은 오나라로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 모두 그를 천거했다.
5. 손권은 그에게 옛 신하와 같이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감녕이 계책을 진술하며 말했다."지금 한나라는 매일매일 쇠미해져 가고 있고, 조조는 더욱더 교만해져 끝내는 제위를 찬탈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쪽의 형주 땅은 산세가 편리하고 강과 하천의 흐름이 원활하니, 진실로 우리 나라 서쪽의 유리한 형세입니다. 저는 이미 유표를 관찰했는데, 그의 생각은 원대하지 않고, 자식들은 또 모자라서 기업을 계승하여 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공께서 이것을 일찍 살펴보기만 한다면 조조의 뒤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토지를 도모하는 계책은 응당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하여 혼미함이 매우 심하고, 재물과 식량은 모두 부족하며, 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재화를 탐하며, 부하 장수들의 이익을 빼앗아 장수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있고, 배나 무기는 버려진 채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농경에는 게으르고 군대에는 엄한 규율이 없습니다. 공께서 만일 지금 간다면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일단, 황조의 군대를 파괴하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서쪽에서 초관을 점거하여 대세를 넓히면 즉시 점차적으로 파군과 촉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6. 손권은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장소는 그 당시 자리에 있었는데, 그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현재 형세가 위급한데, 만일 군대가 과감히 출동한다면 아마도 반드시 어지럽게 될 것이오." >
감녕은 장소에게 말했다.
"나라에서는 소하의 임무를 그대에게 맡겼거늘, 그대는 남아서 지키면서 혼란을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고인을 배우기를 바라시오?"
7. 손권은 술을 들어 감녕에게 권하며 말했다.
"흥패, 올해 출정하여 토벌하는 것은 이 술과 같은 것이니, 결정은 그대에게 맡기겠소.그대가 단지 계략을 짜는 일에 힘써 반드시 황조를 이기도록 한다면 그대의 공이오. 어찌 장장사의 말을 의심하시오?" >
손권은 그래서 서쪽으로 나아갔는데, 과연 황조를 체포했고, 그의 병사들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이열~~~~ 통무지 전부 버프입니다)
8.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 공략시키지는 못했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9.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새로 얻어서 1천 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 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 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10. 사자를 파견하여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11.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 양신ㆍ하치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태수직 얻고, 일단 지력버프겠네요 이 점은)
12.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으로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13.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여몽이 가장 컸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다.
14.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 감녕은 전부독이 되어 병사를 출동시켜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 많은 안주를 하사했다. 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여 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다 먹은 후, 감녕은 먼저 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마시고, 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땅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그 즉시 받을 수 없었다.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어 말했다.
"그대가 폐하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 어찌 나와 함께 할 수 있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죽음을 아끼시오?" >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사나운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 공손히 술을 받았으며, 그런 연후에 병사들에게 각기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이경이 되었을 때,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갔다. 적은 깜짝 놀랐으며, 끝내는 퇴각했다. 감녕은 이 때문에 더욱 중시되었고, 병사 2천 명이 증원되었다
15.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 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경시하고 장사들을 존중했다. 유능한 인물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7.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18.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찍이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19.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후, 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20. 일을 마친 후,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 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 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20. 여몽의 모친은 맨발로 달려 나와서 여몽에게 이렇게 권했다."황상께서는 너를 육친처럼 대우하고 국가의 대사를 너에게 위탁하셨는데, 어떻게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감녕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느냐? 감녕이 죽은 날, 설령 황상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네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법도에 부합되겠느냐." 여몽은 평소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즉시 허물을 명백히 하고 마음속의 원한도 사그라들었다. 그는 직접 감녕의 배로 와서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흥패,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빨리 올라오시오!" >
감녕은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대를 저버렸소." >
감녕은 여몽과 함께 돌아와 여몽의 어머니를 보고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
21. 감녕이 죽은 후, 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
1. [감녕은 본래 남양사람인데, 그의 선조가 파군에 빈객으로 있었다. 감념이 관리가 되어 계연으로 천거되고 촉군의 군승에 보임되었으나, 얼마 후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2. [감녕이 경박하게 협기로 사람을 살해하고 망명자를 집에 숨겨주었는데, 이것이 군중에 소문이 났다. 그가 출입할 때, 뭍에서는 수레와 말을 펼쳐놓고, 물에서는 빠른 배를 연이어 놓았으며, 시종하는 자들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어 마치 길에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멈추어 설 때면 항상 비단으로 배를 메었다가 떠날 때면 혹 이를 잘라 버려서 사치함을 보였다]
3. [감녕의 그의 가동과 빈객들 8백명을 거느리고 유표에게 갔다. 유표는 유생이라 군대의 일을 익히지 못하였다. 이때 여러 영웅 호걸들이 각각 병사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감녕이 유표의 사세를 살펴보니, 아무리해도 이루는 바가 없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아울러 그 화를 받게 될까 두려워, 오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황조가 하구에 있었는데, 군대는 지나가지 못하니, 이에 머물러 황조에게 의탁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황조는 그를 예우하지 않았다.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자, 황조의 군대는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는데, 그 병사를 추격하니 위급하였다. 감녕이 활을 잘 쏘았는데, 병사를 거느리면서 후방에 있으면, 활을 쏘아 교위 능조를 죽였다. 황조가 위급함에서 벗어나고, 군대는 파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감녕을 처음처럼 대하였다. 황조의 도독 소비가 수차례 감녕을 천거했으나, 황조가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의 빈객을 유혹하니, 빈객들이 점차 도망하였다. 감녕은 떠나가고 싶었으나, 붙잡힘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홀로 걱정하며 나갈 바를 몰랐다. 소비가 그의 뜻을 알아, 이에 감녕을 맞이해 술자리를 베풀고 말하길 “내가 그대를 천거한지 여러 차례였으나, 주인이 능히 쓰지 않는다. 해와 달은 멀리 넘어 가니 인생이 얼마되겠는가. 마땅히 먼곳에서 가 도모하면, 무릇 지기를 만날 것이다”라 했다. 감녕이 한참 후에 말하길 “비록 뜻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 했다. 소비가 말하길 “내가 그대를 주현의 현장으로 삼고자 아뢰고, 이에 떠나간다면, 누가 더불어 판적에 임하여 바꾸겠는가?:” 라 하였다. 감녕이 “심히 다행입니다” 라 했다. 소비가 황조에게 아뢰니, (황조가) 감녕이 주현으로 가는 것을 들어주었다. (감녕이) 망명객들과 불러 모으고 의를 따르는 자들을 합쳐서, 8백 명을 얻었다]
4. 손권이 황조를 격파시켰을 때 먼저 상자 두개를 만들어 황조와 소비의 머리를 넣으려고 했다. 소비는 사람을 시켜 급히 감녕에게 위급함을 알리도록 했다. 감녕은 " 소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잊겠는가 ? " 라고 했다. 손권이 부장들을 위해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감녕은 좌석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피눈물을 흘렸다. 손권에게 말하기를 " 소비는 옛날 저에게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저는 소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전에 길가에서 죽어 장군 휘하에서 목숨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비의 죄는 주륙을 당함이 마땅하지만, 특별히 장군께서 그의 머리를 저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손권은 그의 말을 듣고 감동하여, " 오늘 그대를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가 그가 달아난다면 어쩌겠소 ?" 라고 했다. 감녕이 말하기를 "소비는 찢기는 화를 면하고 다시 살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면 오히려 달아나지 않을것입니다.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의 머리를 대신 상자에 넣을것입니다."라고 했다. 손권은 그래서 소비를 사면시켜 주었다.
5. 조공이 유수로 출전했을 때, 보기 40만이라 불렀고, 강물에 임하여 말을 물먹였다. 손권이 병사 7만을 거느리고 응전하면서, 감녕을 시켜 3천명을 거느리고 전부독이 되게 하였다. 손권이 비밀리에 감녕에게 명령을 내려 밤에 위군으로 난입하게 하였다. 손권이 수하의 건장한 병사 1백명을 골라, 빠른 길로 조공의 진영 아래로 가서, 녹각을 뽑아 불며, 보루를 넘어 진영에 들어가, 수십 급을 참수했다. 북군은 놀라 시끄럽게 북을 울리며 불을 별빝처럼 환하게 드니, 감녕이 이에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불렀다. 인하여 밤에 손권을 알현하니, 손권이 기뻐 말하길 “늙은이를 너무 놀래킨 것 아니오? 오로지 경의 담력만 지켜봤소.” 라 했다. 곧 비단 1천필과 칼 1백 자루를 하사했다. 손권이 말하길 “맹덕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흥패가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만 하다” 라 했다. 한달여간 멈추고 머무르다, 북군은 바로 퇴각하였다.
6. 원래 능통은 감녕이 자신의 아버지 능조를 죽게 했으므로,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감녕은 항상 능통을 경계하고 서고 만나지 않았다. 손권 역시 능통에게 한을 품지 말라고 명령했다. 일찍이 여몽의 집에서 연회를 열어 주흥이 무르익자. 능통은 칼을 가지고 춤을 추었다. 감녕이 이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 나도 쌍극무를 출수 있소." 라고 하였다. 여몽이 말하기를 " 감녕도 할 수 있겠지만, 나의 기교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하면서 칼을 잡고 방패를 쥐고서 몸으로 두 사람 사이를 베었다. 후에 손권은 능통의 마음을 알고, 감녕에게 병사를 인솔하여 반주로 옮겨 주둔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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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 왈 :
조조에게는 장문원이 있겠지만,
내게는 흥패가 있다.
그만큼 손오의 대들보로 성장한 감녕
감녕은 배에 서천에서 난 좋은 비단으로 돛을 만들고, 허리에는 구리방울을 차고 다녔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말도~"감녕의 구슬소리가 들리면 모두 몸을 사린다"
이 대목에서도 역시 흥패의 무예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감녕의 인생을 보면
진짜 고생끝에 낙이온 인물이죠...
어릴때 유언의 폭정에 저항하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눈칫밥 먹으며 능력인정 안해주는 상사 밑에서 고생고생하다가
오나라에가서 최고의 명장이 된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입니다
인생자체가 타인에게 힘과 교훈을 주는 인물중에 한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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