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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이즈 김영훈ll조회 278l
이 글은 4년 전 (2020/2/21) 게시물이에요

https://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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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나를 뱉어낸다 | 인스티즈


이애리, 동해역에서 밤새 소주를 마시다

 

 

 

오징어들이 벗어놓은 몸 꺼풀을

사람들은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거나하게 취한 술이

온몸을 헤집으며 철썩일 즈음

열차는 동해역을 지나가고

기적소리만 플랫폼에 울고 섰다

 

기다림에 지쳐서가 아니라

빈 술병이 허전해서 보듬고 있다

갈증이 해무처럼 아늑해질 수 있다면

오징어똥물 뒤집어쓴대도 무슨 상관인가

 

역 광장에 오두마니 소나무 한 그루

부랑아의 자유라도 누가 되지 않으니

바다로 나갈 거면 갈아타도 좋다







 너는 나를 뱉어낸다 | 인스티즈


우대식, 근사록(近思錄)에 관해

 

 

 

주자(朱子)가 성리학에 대해 쓴 책 제목이 근사록(近思錄)이라 했다

()이라는 글자에 놀랐다

이른 새벽부터 내 시()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이 근()이라는 말이 천근만근으로 나의 생각을 눌렀다

늦가을 서리가 기와를 타고 녹아내려

이마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나의 생각은 나에게서 얼마나 떨어진 것일까

누추한 주막에 들어 붐비는 생각의 잔()을 마시다

도마 위에 놓인 오래된 칼을 보았다

그 칼로 내 생각 아닌 것들을 단번에 쳐내고 싶었다

하여, 나도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근사(近思)해보고 싶었다

()가 아니어도 좋다







 너는 나를 뱉어낸다 | 인스티즈


김경후, 그믐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들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있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엔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뿐







 너는 나를 뱉어낸다 | 인스티즈


박남희, 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

 

 

 

어깨와 허리가 결리기 시작한 것은

사고가 난 후 며칠만의 일이다

큰 차와 작은 차의 충돌이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입장만으로는

통증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

허공끼리의 충돌이 통증을 불러온다

허공은 무수한 통증을 숨기고 있다가

딱딱한 물체끼리 충돌하는 순간

딱딱한 감촉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통증은

이전에 누군가 버린 것들이다

통증은 스스로가 있던 몸의 부위를

잘도 기억해낸다

허공과 허공이 부딪히는 순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기억합금처럼

통증은 딱딱한 몸으로 스민다

 

딱딱해진다는 게 문제다

몸은 어떤 물체와 충돌하는 순간 딱딱해진다

부드러움을 잃는다는 것이 사실은 통증이다

사고가 난 후 며칠 만에 찾아온 통증은

이전의 누군가의 상처와 이별하느라고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왕에 딱딱해졌으니

당분간은 통증과 친해져 볼 생각이다

내 안에서 와글와글

통증이 새로운 언어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시가 써질 모양이다







 너는 나를 뱉어낸다 | 인스티즈


김경인, 아무도 피 흘리지 않은 저녁

 

 

 

너는 나를 뱉어낸다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내는

너의 아름다운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비루한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흩어진다

푸르고 차가운 하늘에 흐릿하게 별이 떠오르듯이

내가 너의 문장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돋아나듯이

귀는 자꾸 자라나 얼굴을 덮는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에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자

나는 나로부터 흘러나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아무도 죽어가지 않는 저녁에

침묵의 벼랑에서 불현듯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나는 죽어간다,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이 저녁에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하자

네가 내게 던진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상한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네가 뱉어낸 글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났다

개라고 부르자 개가 된

그림자가 컹컹, 팽개쳐진 나를 물고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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