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진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하나의 잉크가 물가에 번졌는데,
물이 전체로 물들었고
하나의 빛이 번져
따스함을 일으켜 봄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너는 분명 하나의 빛도, 잉크도 아니었는데
내게 번짐을 알려 주었다
그 뜻을 깨우쳐 주었다
이내 네가 내 안 가득 번지고
나는 막을 겨를이 없다
번지다/백가희
여자가 보고 싶었으나
흔들리는 억새풀 뒤쪽 초승달한테 홀려서
그러니까
초승달만 받아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
나는 그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그런 사랑이 무섭고 후미져서
짚고 싶은 벽이라 부를까
벽을 짚으려는 순간
벽은 구름으로 기화한다
그렇다고 그를 허공이라고 부를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초승달이 뜨고
우리는 따가운 억새풀 뒤쪽에 책을 덮고
달을 보았다
증상은 낭만이라지만
그렇다고
그를 초승달이라 부를까
의심의 순간에도
서로 달빛에 노랗게 익었으므로
그러니까
레몬이라 부를까
레몬 달빛/최문자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 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모진소리/황인숙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세계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읊조립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 속에 가득한 혁명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당신에게 답장을 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나도 당신처럼 시를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부/윤진화
내려놓으면 된다
구태여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말거라
부는 바람이 예뻐
그 눈부심에 웃던 네가 아니었니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너에게/서혜진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 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장이지
안녕?
나는 잘 있어요
잘 웃고, 잘 먹고, 잘 죽어요
안녕?/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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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벅 3040만 다닌대 1020은 스벅안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