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가 주민들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1815년 4월 5일 분화
VEI 7등급 9위
120km³ 양의 화산재 분출
기원후 폭발규모 3위
웅장한 탐보라 화산 칼데라 위성사진. 마치 운석구덩이를 연상케 한다.
기원후 더 강력한 분화인 백두산과 타우포 헤타페 화산이 있지만 실질적, 그리고 자세한 추정 피해규모를 따르면 유사 이래 올타임 넘버원이다.
얼마나 화산재를 내뿜어댔으면 무려 인근 600km 주변은 이틀 동안 깜깜한 밤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적도 부근인 인도네시아에 눈이 내릴 정도 였다고 한다.
폭발소리가 2600km나 떨어진 수마트라섬에서도 들렸다는데 이는 비교하자면 베트남 하노이에서 난 소리가 서울에서 들렸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소리면에서는 크라타카우 화산 미만잡).
폭발 후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과 재의 분출로 전 세계 대기의 햇빛을 가려 온도가 급격히 하락해 전 세계적으로 1816년 1817년 이 2년은 "여름이 없는 해"라고 명명되었다. (16년 영국의 여름 3개월 평균 기온은 13.4도에 불과했다는데 이는 소빙하기의 여름에 가장 추울때보다 낮은 온도다.)
이산화황이 만든 일명 "마른 안개"는 태양을 어느 정도로 가렸나면 무려 유럽에서 맨눈으로 태양의 흑점을 선명하게 관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공짜 선글라스!
이 분화로 탐보라 인근 지역에서만 12만 명이 끔살 당했다. 당시 생존한 몇 십 키로미터 밖의 한 부족장의 증언으로는 한시간동안 엄청난 열기의 먼지바람이 폭풍처럼 강타했다고 한다...
이 분화로 인해 유럽에서는 2년간 여름에 서리가 내려 흉작이 계속 돼 곳곳에 폭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전체가 16~17시즌 동안 끔찍한 기근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유럽 곳곳에 장티푸스와 페스트가 창궐해 수 만명 이상이 죽었다. 또한 이는 유럽인들의 미국으로의 대량 이민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1818년 181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의 원인이 된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아메리카도 안전한건 아니었다. 여름에 강물이 꽝꽝 얼고 눈보라가 매섭게 쳤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애팔래치아 산맥 부근에 밀을 다량으로 심어서 그나마 조금 상황을 타파했다고 한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의 운남지역은 이미 1815년 가뭄으로 기근이 심했는데 16년 17년 핵겨울까지 맞으면서 그야말로 생지옥 그 이상이 펼쳐졌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순조 16년인 1816년에 대기근의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2년만에 130만명이 사망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세도정치로 이미 나락가던 경제가 가속이 붙어가면서 조선 말기의 처참한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대략적인 추측으로는 이 분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수 천 만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이 대폭발로 인한 대기근은 문학사에도 족적을 남기게 하는데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은 1816년 7월 날씨가 너무 나쁜 영국을 떠나 알프스를 구경하러 제일 좋은 뷰포인트를 찾아 스위스 제네바까지 갔지만 거기도 날씨가 너무 나빠 결국 방콕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친구들과 무섭고 기괴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흡혈귀라는 소설의 토대이고 이 소설은 훗날 19세기 말 드라큘라라는 케릭터로 진화 하였다. 또 함께 놀던 친구의 부인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구상했다.
탐보라 화산은 폭발 후 텅 비어버린 마그마 방이 붕괴하여 거대한 칼데라를 형성 하였는데 비포 에프터가 너무 명확해서 당시 얼마나 강한 폭발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추정되는 대분화 전 탐보라 화산 모양
대분화 후 탐보라 화산 분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