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된 카테고리 유머·감동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
안평대군은 세종이 문종을 옆에서 도우라며 정치에 참여 시킨 대군 중 한명이다. 세종의 피를 이어 받아 문종과 마찬가지로 박학다식 하고 똑똑했으며, 특히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전해진다.
박팽년은 그의 시를 ‘깊이 체득하여 독실히 좋아했으므로 그 시법의 오묘함이 월등하였다.’고 평가했고, 정조는 그의 필체를 국조의 명필 중 명필이라고 극찬했다. 가야금 연주는 천상의 가락이라는 찬사를 받은 세종 판박이 미술품 수집에도 진심어어서 자신의 소장품을 기록한 화기(畵記) 를 남겼다. 당시 안평을 시, 서화, 가야금에 능하여 ‘삼절’이라 칭함
한시는 세종 문종보다 안평이 더 잘 썼다는 말이 있다. 그에 비해 수양은 별로였는데 다방면에서 뛰어난 동생에게 열등감이 있었을걸로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음..
안평대군
당시 19세 궁에서 일만 하면서 쪄들어 살던 안평대군은 세종 20년 4월 어느 날 봄밤에 잠을 자다가 멋진 꿈을 꾸게 된다.
잠자는 안평대군
무슨 꿈이냐면
1447년 4월 20일 밤, 내가 막 베개를 베고 눕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고 꿈을 꾸게 되었다. 문 득 보니 인수 박팽년과 함께 어느 산 아래에 이 르렀는데 겹친 봉우리는 험준하게 우뚝 솟고 깊 은 골짜기는 그윽하였으며, 복사꽃 수십 그루가 서 있는 사이로 오솔길이 숲 가장자리에서 갈림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서 머 뭇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시골 옷차림을 한 사람 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공손히 인사하며, "북쪽 으로 이 길을 따라가다 골짜기를 들어서면 바로 도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와 인수가 말을 채찍질하여 들어가니 절벽은 깎아지른 듯하고 수풀은 울창하고 빽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 쳐 흐르고 길은 휘도는데 백 번이나 꺾여 금세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인수에 게 말하였다. 바위에 나무 얼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 함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정 녕 이곳이 무롱도원이로세!" 그때 누군가 몇 사 람이 뒤에 있는 듯하여 돌아보니 정보 최항, 범 옹 신숙주 등 평소 함께 시를 짓던 이들이었다.
각각 신발을 고쳐 신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하 며 두루 돌아보며 여유롭게 즐기다가 홀연히 꿈 을 깨었다.
무릉도원이세요
안평대군은 꿈 내용을 친하게 지내던 화원 인견한테 설명하면서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안평은 안견의 후견인? 같은 존재였음)
화원 안견
참고: 안견은 안평대군도 아낀 화원이지만 세종 또한 무척 아꼈다. 중인의 신분으로 정4품까지 오른 조선시대 최초의 화원이나 정확한 생물연대를 알 수 없고(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모름;), 남겨진 작품도 몇 없다.
화원 안견
안견은 사흘만에 꿈을 완성 시켜주었고, 안평대군은 아주아주 마음에 들어하며 직접 발문을 적어 기록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상
世間何處夢桃源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野服山冠尙宛然 은자(隱者)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著畵看來定好事 그림 그려 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自多千載擬相傳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後三日正月夜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在致知亭因故有作 淸之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펼쳐보고 짓는다. 청지 씀
도원도와 도원기를 완성하고, 안평대군은 꿈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박팽년을 불러 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에게 찬문을 받으며 몽유도원도는 완성 되었다.
최항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 따라 꿈과 더불어 경치로 변해가는 글과 그림이 모두 신묘하여 마음에 더욱 사무친다.”고 하였고, 고득종은 ’마치 신선에 사는 곳에 오른 듯하다.‘고 서술했다. 다음은 성삼문의 시문 중 일부이다. 그 역시 안평대군과 안견에 의해 제작된 몽유도원도에 경이로움을 드러냈다.
상상속 최항
아침에 도원의 그림을 보고 / 朝見桃源圖
저녁에 도원의 기문을 보았네 / 暮見桃源記
고금에 도원이 있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겠으니 / 始信今古有桃源
신선에 관한 말 허탄한 것이 아니어라 / 神仙之說非誕僞
무계정사 터에 있는 무계원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와 비슷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 무계정사를 지어 예술적 담론을 나눴으나, 역적모의 장소로 지목됨,,,
실제 그가 가지고 있던 별장에는 많은 작품들이 있었을걸로 추측하는데 현재는 목록만 확인 할 수 있을 뿐 조선초기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안평이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당시 예술의 선두에 앞선 인물이었기에 너무 안타까움
상상 속의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정치적으로 큰 뜻은 없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종때부터 국정에 참여하면서, 학문과 그림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문사, 관료들과 친하게 지냄 김종서 황보인과도 마찬가지 그에 비해 수양대군은 친구 잘못사뒤는 예 뭐 그런 ㅎ.. 그래서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보며 엄청난 위협을느끼고 평소 내재되어 있던 열등감이 폭발 하지 않았을까? 왕권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역적으로 처단 아무튼 안평대군은 조카를 지키고 왕가의 피바람만은 막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보다는 그림과 시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으로 보여짐(내눈엔)
참고로 세조가 안평대군의 자식들 사사하고 유배보내 병들어 죽게해서 대가 끊김 영조가 관작을 회복 시켜주면서 자손이 없는 걸 알고 금성대군 혈손에게 봉사하게 하라고 명함 금성대군 종손이 아직도 제사를 지내주고 계신대 신기
왕실족보인 선원속보에 보이는 안평대군과 후손.
그리고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 있다.
어떻게 일본인이 개인소장을 하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기사 찾아보다 흥미로워서 가져옴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99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 - 통일뉴스
백민(白民) 이양재(李亮載) 지난해(2023년) 12월 27~28일에 느닷없이 천리대학 소장품 『몽유도원도』의 환수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금년(2024년)에는 설날을 앞두고 2월 4일부터 또 듣보잡 기사가
www.tongilnews.com
https://blog.naver.com/geomri/221395670188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06900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75614
http://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3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763576906

인스티즈앱
이 중국배우 진짜 너무 예쁘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