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시점에 주인공이 이미 인격적으로 "완성" 되어 있는 상태였다는 거임.
주인공이 어린 아이이거나 젊은 청년이라면, 보통 초반에는 미숙하고 잘 몰랐다가 작품 내의 경험을 통해 점차 성장하면서 변화해가는 서사를 취함. 그리고 이게 관객들을 주인공의 여정에 몰입시키고 함께 성취감을 느낄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니까, 대부분의 고전 작품이나 전통적 영웅서사는 이런 식이지.
근데 콘클라베의 주인공인 로렌스는 이미 늙었음. 살아온 세월이 길고, 인생에서 많은 것을 성취해낸 고위직에 지도층이기도 하니까, 신념과 인격도 이미 형성이 완료된 상태일 수밖에 없음.
이래서 로렌스는, "내가 콘클라베를 관리한다" 라는, 이제까지 해본 적 없었던 특수한 경험을 하게 되긴 하는데, 이 새로운 경험이 로렌스 본인을 뒤흔들고 로렌스가 그에 맞춰 변화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로렌스가 주변 환경에 대처하고 주변을 바꿔나가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됨. 감상 포인트가 주인공의 성장이나 변화가 아니라 반대로 주인공의 대처와 영향력에 있는 거임.
1. 콘클라베가 시작되면,
- 로렌스가 다른 추기경들을 맞아들이고, 새로운 멤버인 베니테스를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고, 그 새로운 멤버를 기존 추기경들에게 소개함.
- 로렌스가 추기경들에게 투표 절차와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는지 시범까지 보임.
- 로렌스가 야누시의 제보를 듣고, 트랑블레에게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레이에게 추가 조사를 지시함.
- 첫 미사를 로렌스가 집전하고, 그 미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교황" 에 대해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강렬한 설교를 함.
심지어 이 모든 과정에서 최대한 침착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를 유지함. 여기까지만 봐도 로렌스는 유능하고 노련한 경력직 주인공임. 초반에 허둥대다가 깨지면서 하나씩 배워나가는 성장형 주인공이 아님.
2. 추문이나 비리가 발생하면,
- 로렌스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관계자들을 만나보고 증거를 수집하거나, 외부 정보가 필요할 경우 레이에게 조사하도록 시킴.
- 그리고 로렌스가 직접 그 대상자를 찾아가서 당신은 교황 자격이 없다고 통보함.
- 아데예미에게: "아뇨. 희망은 없습니다. 유감이지만 당신은 절대 교황이 될 수 없을 거예요."
- 트랑블레에게: "투표에서 당신 이름을 철회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교황이 될 자격이 없어요."
- 벨리니에게: "알도, 나는 다섯 번의 투표에서 자네를 뽑았다네. 하지만 내가 틀렸었군. 자네는 교황이 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로렌스의 통보를 들은 후보들은 전부 낙마하고 이후 다시는 유력 후보가 되지 못함. 이러한 로렌스의 영향력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이 그나마 트랑블레인데, 그렇기에 로렌스가 다른 후보들보다도 더 깔끔하고 비참하게 밟아버림.
그리고 이쯤 되자 벨리니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거지. 이 콘클라베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은 로렌스라고.
"자네가 이 콘클라베를 조종하고 있네. 어디로 우리를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그 굳건한 손길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아."
(You are steering this Conclave. Exactly where, I do not know. But that firm hand of yours has its admirers.)
벨리니의 이 대사는 원작에도 똑같이 나오는 대사임. 다만 영화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는데, 벨리니가 저 대사를 던진 직후에 로렌스가 비로소 중대한 결심을 내리기 때문임. 자기가 교황이 되겠다고.
"요한, 요한이라 하겠네."
(John. I would choose John.)
이 부분에서 로렌스가 가진 "영향력" 은 정점에 이르게 됨. 지금까지는 콘클라베의 유능한 관리자나 막후 진행자일 뿐이었지만, 이제 로렌스 본인이 대놓고 유력 후보로서 지지자들을 이끌어가게 된 거지. 그리고 로렌스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투표지에 "교황이 되실 분" 으로 자기 이름을 쓰기 시작함.
근데 이게 완전히 뒤집히는 전환점이,
갈!!!!
이 폭탄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로렌스는 이제껏 발휘하던 영향력을 잃음. 흔들림 없이 주도적으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던 주인공이 아니라, 반대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수동적으로 흔들리는 입장으로 변함.
그럴 만도 한 게, 이 폭탄테러는 로렌스조차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범주의 사건이란 말임. 그간 로렌스는 여러가지 뜻밖의 사건을 경험해왔지만(교황 사망, 아데예미 추문, 트랑블레 비리 등등), 그건 최소한 로렌스의 세계관에서 "있을 수 있는" 사건들이었음. 그래서 힘들고 괴롭더라도 로렌스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했음. 근데 이건 로렌스의 예측 범위를 넘어설 뿐 아니라 능력 범위도 넘어서는 사건임.
바로 이 상황에서, 로렌스를 밀어내고 주도적 위치로 올라서는 인물이
빈센트 베니테스.
베니테스는 이제까지 비중 면에서 주인공인 로렌스에게는 상대도 안 되던 인물이었음. 스토리에 끼치는 영향력도 적고 투표의 흐름을 주도하지도 않음. 지금까지 베니테스가 다른 인물들과 차별화된 요소가 있다면, 로렌스의 숨겨진 영향력을 유일하게 처음부터 알아보고 로렌스에게 표를 준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임.
그런데 그 베니테스가 갑자기 전면에 나서면서 스토리를 주도하기 시작함. 왜냐하면, 이 폭탄테러는 로렌스와 다른 추기경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재난이지만, 베니테스에게는 이미 익숙한 경험이거든. "전쟁을 아는" 베니테스는 다른 추기경들과 달리 공포에 질리지 않고 증오에 사로잡히지도 않음.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작품의 구도가 달라짐. 베니테스가 주도적 역할을 하며 사방에 영향력을 끼치고, 로렌스는 그런 베니테스의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입장이 되면서, 일종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짐.
1. 테데스코가 종교전쟁을 주장하거나 타 종교를 짐승에 비유하는 폭언을 터뜨리면,
- 베니테스가 일어나서 공개적으로 꾸짖기 시작함.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아십니까?"
- 그 동안 로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 이제까지 유력 후보들을 하나하나 거침없이 날려버렸던 로렌스가 이번에는 입을 다물고 침묵함.
2. 레이가 로렌스에게 베니테스의 비밀을 털어놓으면,
- 베니테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함. 오히려 로렌스가 몹시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함.
- 베니테스가 로렌스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 반대가 아님에 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음.
-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로렌스가 그 "비밀" 에도 불구하고 베니테스를 교황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함.
저 마지막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작중에서 로렌스가 타인의 영향에 의해 자기 신념을 대폭 전환하게 된 첫 사례이기 때문임. 아까도 말했지만 로렌스는 이미 완성된 인격을 가진 노인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음. 외부의 강한 파도와 부딪치더라도 더 강한 힘으로 밀어내면서 자기 중심을 지키는 인물이고, 이제껏 콘클라베는 로렌스가 그런 식으로 주변을 바꿔나가는 내용으로 전개되어 왔음. 그런데 이 나이든 노인이 베니테스 때문에 뒤늦게 자기 신념을 수정하며 변화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게 된 거임.
만약 이 작품이 고전적인 영웅서사였다면, 주인공 역할은 베니테스였겠지. 콘클라베에 생판 처음 와봐서 허둥거리며 낯설어하는 어린애. 생전 처음 보는 세계에 내던져져서 처음부터 하나하나씩 배워나가는 주인공. 원작 보면 베니테스는 초반에 "후보를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투표를 하죠?"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식당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기둥 뒤에 숨어있기도 했음. 보다못한 로렌스가 강제로 끌어내서 사람들 앞에 소개해줬을 정도로.
이런 베니테스가 주인공을 맡았다면, 로렌스는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원숙한 스승이나 선배 역으로 나왔을 거임. 베니테스가 로렌스의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거나, 로렌스가 트랑블레를 단호하게 격퇴하는 모습에 베니테스가 갈채를 보내는 장면이 나왔겠지. 그러다가 폭탄테러 사건을 기점으로 베니테스가 드디어 스승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라이벌로 치고올라가는 식이었을 거임. 젊고 성장하는 제자가 늙고 노회한 스승을 밟고 올라서는 구도는 클리셰잖아.
그런데 이 작품은 노인인 로렌스를 주인공으로 택함으로써 이런 클리셰를 피함. 그래서 로렌스는 결코 전형적인 "나이들어 퇴장하게 된 늙은이" 가 아니고, 반대로 베니테스도 전형적인 젊은이나 신입생이 아님. 로렌스는 베니테스의 비밀을 감싸줌으로써 노인도 여전히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고, 베니테스는 교황이 된 뒤 추기경들을 하나하나 따스하게 안아줌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동시에 늙은 옛 세대도 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했음.
그래서 난, 로렌스가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의 의미를 해설한 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함.
「그 이름은, 전통으로의 복귀와 전통에서의 해방 모두를 약속하는 듯 보였다.
It seems to promise both a return to tradition and yet a departure from it.」
로렌스베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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