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 황경신]
먼 세월 흘러 너를 우연히 다시 만나니
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너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우리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겠구나.
사랑을 하여도 금세 이별이겠구나.
수 천번의 봄이 되풀이되고
수 억의 꽃봉오리가 되고 져도
내가 있는 풍경속에서 너는 늘 그렇게 슬플거구나.
[몽혼 - 이옥봉]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걸.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소낙비 - 서덕준]
그 사람은 그저 잠시 스치는 소낙비라고
당신이 그랬지요.
허나 이유를 말해주세요.
빠르게 지나가는 저 비구름을
나는 왜 흠뻑 젖어가며 쫓고 있는지를요.
[섭씨 100도의 얼음 - 박건호]
너의 표정은 차갑고
너의 음성은 싸늘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화상을 입는다.
[나는 그대를 사랑했다오 - 푸슈킨]
나는 그대를 사랑했다오.
그 사랑은 나의 영혼 속에서
여전히 불타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의 사랑은
이젠 그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다오
희망도 없이 침묵으로
난 그대를 사랑했다오.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질투로
가슴 조이며
신이 그대로 하여금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만든 그대를
나는 진심으로 묵묵히
그대를 사랑했다오.
[내가 너를 -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푸른 밤 - 박소란]
짙은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 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달의 이야기 - 서덕준]
아픈 마음과 광활한 외로움은 잠시 뒤로 할게
세상에 당신 하나 남을 때까지 철없이 빛나기만 할게
나 아닌 아침과 오후를 사랑해도 좋아
밤이면 내가 너를 쫓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