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박카스
W. 리플(Riffle)
BGM) F(x) - Love Hate
▶ 박카스 한 병 : 힘내라, 청춘이여!
(부제: 축! 청춘 게이들의 첫 만남)
빨간색 스니커즈가 아스팔트와 뜨겁게 마찰했다. 나풀거린다기보다 정신없이 뜀박질을 한다는 게 어울릴 듯 했지만.
계단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웅웅 울렸지만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백현은 얼굴로 쏟아지는 바람을 걷어내며 기숙사 건물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뛰어내려왔다.
볼썽사납게 퉁퉁 부은 얼굴은 어젯밤의 숙취를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어젯밤 괜히 맥주가 땡기더라니. 난 이제 망했어. 박찬열 개새끼, 같이 마셔놓고서 깨우지도 않고 가냐!
불안정한 의식의 흐름 너머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가 들려오긴 했는데. 팔을 툭 건드는 느낌과 제 이름을 불러대던 박찬열의 목소리가 마냥 꿈이 아니었다니.
백현은 뒤숭숭하던 꿈자리를 악몽으로 치부해버렸다. 쌉싸름하게 알코올의 향이 맴돌던 입안은 어느새 바싹 말라있었다.
백현은 눈도 뜨지 않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을 꺼버린 제 손이 원망스러웠다. 선배들은 하필이면, 월요일날 아침에 강의를 신청할 게 뭐람!
강의 신청을 도와준 선배들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귀염 좀 떨면서 비싼 밥까지 사다 바쳤는데. 톡톡 터지는 하얀 물방울 속에서 저를 향해 웃는 미소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백현은 코를 훌쩍였다. 애처럼 칭얼거리고 싶은 걸 꾹 누르고있는 참이었다. 1학년 1학기 첫 강의 시간, 대학 생활의 첫 걸음을 지각으로 날려버리다니.
대학 새내기의 풋풋함은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함께 떠나보낸 지 오래였다. 팔목까지 흘러내린 커다란 백팩의 무게에 어쩐지 발이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신입생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취업전선에 찌들어있는 졸업반이라면 모를까. 군대로 치자면 군기가 다빠진 채 잔뜩 늘어져있는 말년 병장 정도.
백현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유독 아침잠이 많았다. 특히나 어제처럼 술을 한잔 한다거나 조금만 침대에 늦게 눕는 밤이면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지각을 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 지각을 밥 먹듯 일삼던 변백현의 추레함을 떠나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어쩐지 이런 일이 되풀이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헥헥거리는 숨소리를 뒤로 밀어보내며 백현은 신관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이미 강의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저와 마주치는 얼굴은 없었다.
목에는 달랑달랑 이름표가 걸려있었다. '언론관광학부 12학번 변백현'
백현은 뒷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축 늘어진 눈꼬리에 울상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입을 삐쭉거리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들 첫 강의라 그런지 새내기들만의 긴장감에 일찍 도착한 듯 했다. 비어있는 자리는 맨 앞자리와 맨 뒷자리 뿐이었다. 백현은 부리나케 맨 뒷자리에 가방을 올렸다.
오리엔테이션 진행을 준비하던 교수는 자신이 준비해 온 종이를 나눠주는 것에 한참 정신이 팔려 눈치를 채지 못한 듯 했다. 백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잠시 책상에 엎드려 밭은 숨을 내뱉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제 옆에 앉은 남학생을 슬쩍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인데.
백현은 목에 걸려있는 이름표를 확인했다.
'언론관광학부 12학번 도경수'
아, 얘구나. 잘생겼다고 여자애들이 좋아하던 애가. 신입생 OT 때, 다같이 얼큰하게 취해있는 자리에서 저 얼굴을 훔처보며 내지르던 여자애들의 찬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근데 얘 성격 좀 싸가지 없다던데. 뭐라 그랬더라, 그…. 태연 누나가 번호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싫다고 했었나.
그냥 뭐, 잘생기긴 했네. 얼굴값 하는가 본데. 백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차싶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면 민망할텐데.
언제부터였는지 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눈길에 백현은 멋쩍은 듯 몸을 일으키며 입꼬리를 당겼다. 저기….
"혹시 출석확인 했어?"
"아니 아직"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았다. 이렇게 보면 괜찮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래? 다행이다. 백현은 웅얼거리며 주위의 눈치를 봤다. OT나 MT를 다녀와서 꽤 친해진건지 여자애들은 저들끼리 눈인사를 하기 바빴다.
백현은 낯선 얼굴들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많이 어색한데. 정신없이 뛰어오는 바람에 엉망이 된 옷을 추스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뭔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었다. 뭐지. 뭐하려고 그랬지. 백현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별안간 얼굴을 확 굳혔다.
그리곤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를 앙 다문 얼굴이 독립운동가의 것처럼 결연했다. 백현은 미친듯이 액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박차녈 개싸갖ㅣ야. 지 혼자 내빽ㅗ!! 넌 이따 내가 족치ㄹ거ㅇㅑ」
오타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살벌한 문자를 보내놓고 백현은 심통이 난 얼굴로 다리를 달달 떨었다. 가기 전에 두들겨 깨우던가 해야지. 툭 한번 건드리고 가냐? 심지어 발로 건들인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 의리 없는 새끼.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새끼. 내일은 내가 먼저 일어나서 알람 다 꺼놓을 거야.
백현은 찬열에게 답장이 왔는지 확인하려 무릎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힐끔거리다가 아직도 저를 향해 신기한 듯 시선을 두고있는 경수를 쳐다보았다. 왜?
"아니, 그냥.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우리 OT 때 봤었나?"
"아… 못봤던 것 같은데. 아마 다른 조였겠지"
차마 자신만 보았노라 말하기엔 뭔가 껄적지근한 기분이 들어서 백현은 대충 둘러댔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비참해졌다.
"근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까부터…."
백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제 얼굴을 문질거렸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거야. 아침에 뭐 묻히고 나왔나? 아니면 로션이 뭉쳤나?
"아니, 뭐. 너 되게 웃겨서. 표정이 진짜 다양해"
…저거 욕이지? 백현은 기가막힌 듯 경수를 쳐다보았다. 실실 웃다가 결국엔 팔에 고개를 묻고 끅끅거리는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현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경수의 뒷통수를 노려보다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넘어온 종이쪼가리를 낚아챘다.
그래. 태연누나가 싸가지 없다고 한 거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내 표정이 어때서!
옆자리에 같이 앉기가 탐탁치 않았지만 지금 와서 자리를 옮기기도 그렇고 맨 앞자리에서 교수의 시선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냥 오늘만 이렇고 앞으로 안 마주치면 되지. 내가 친해질 것도 아니니까! 백현은 애써 경수의 얼굴을 무시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됐고. 이거 뭐하라고 나눠준거야?"
"아 이거. 옆에 앉은 사람끼리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라던데"
너랑 나랑 짝이야. 경수는 종이를 흔들어보이다가 백현과 자신을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키며 짝! 이라고 외치며 씩 웃었다. 순간 백현의 볼이 붉어졌다.
미, 미친! 왜 갑자기 웃고 지랄! 백현은 제 볼을 감싸며 경수의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종이에 쓰인 질문을 차근차근 읽으며 불이 붙은 제 마음에 모래를 끼얹었다.
내가 왜 이러지. 요즘 내가 너무 외로웠나? 박찬열이 소개팅 해준다고 했을 때 그냥 한다고 할껄! 백현은 심각한 얼굴로 제 연애사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나부터 시작하여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기도 했다.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거야. 백현은 자신의 생각에 격하게 수긍하며 경수가 제 쪽으로 밀어놓은 종이를 집어들었다. 읽어내려갈수록 백현의 눈썹이 씰룩였다. 반듯반듯한 글자의 획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름 도경수. 나이 20살….
"어, 나도 트래비 맥코이 좋아하는데!"
오오, 하는 감탄사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을 쳐다보던 경수의 눈이 보기좋게 휘어졌다. 백현은 애써 죽여놓았던 불씨가 다시금 활활 타오르는 걸 느꼈다. 무슨 자격증이 이렇게나 많아. 집도 잘 사나봐. 헐. 심지어 한식 자격증도 있어.
어느새 저를 향해 몸을 돌린 채 턱을 괴곤 아빠미소를 짓고 있는 경수를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이러는 건 너가 대단해서가 아니야. 너가 잘생겨서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친해지고 싶어졌어. 경수야 아까 친해질 것도 아니라고한 건 기분탓일거야.
백현은 우물쭈물거리다가 슬그머니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경수는 그와 동시에 웃음이 터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백현은 멍하니 경수만 쳐다보았다.
어머, 얘 웃을 때 입술이 하트야.
"백현아"
"어?"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 아직"
"그럼 내가 밥 해줄게. 우리 집 갈래?"
백현은 뭔가 속아 넘어간 얼굴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신상을 기입해놓았던 종이를 집어들어 경수의 앞에 쓱 내밀었다.
"…너도 내꺼 보던가"
도경수의 제안에 대한 무언의 동의였다.
덩기덕 큥더러러럭 덩기덕 큥덕! 'ㅅ' |
사랑하는 백현아, 생일 축하해. 하트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