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수취인불명 06
W. 리플(Riffle)
-B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이었다. 모든 고통을 견뎌내고 어둠에서 벗어난 시간.
다만, 변한 것은 꼬리를 흔들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내 주위의 공기와 내 방 너머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
내 손에 퍼지는 따뜻한 온기에 입가에는 웃음이 맴돌았다. 백현아, 그만 일어나야지. 얇은 이불 위로 배를 토닥이는 따뜻함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몸을 일으키자 부스스 떨어져내리는 졸음에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나는 순간 소매를 접어올리다가 두 개가 아닌 숨소리에 멈칫했다. 경수 왔어요?
먼저 내려가요. 내가 백현이 데리고 갈게.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물결이 되어 돌아왔다.
"아니예요. 저랑 같이 내려가면 되죠"
나는 침대 옆 협탁의 뭉툭한 모서리에 손을 올리고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눅눅한 바람이 턱 께에 머무른 채였다.
내가 어깨에 가만히 올라오는 손을 내치지 않자 곧 이어 손등에 다른 한 손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잘잤어? 귓바퀴를 돌아 깊숙하게 파고드는 음성에 슬쩍 손가락을 오므렸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두 어번 고개를 흔드니 낮은 웃음이 뱃고동처럼 퍼졌다.
그는 어느새 내 일상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곁에 있어준 사람들보다 빠르게 스며들었고 늘 맡아왔던 향수처럼 그윽하게 다가왔다.
언젠가 어설프게 격식을 차린답시고 꼬박꼬박 말을 높였더니 그는 토라지는 척 내게 장난을 걸어오며, 백현씨. 우리 이제 편하게 이름 부를까요? 내 옆구리를 찔러오기도 했다.
깨울 때는 침대를 흔들지 말 것, 잠이 올 정도로 나른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것, 절대 언성을 높이지 말 것, 이름을 부를 때는 성을 붙이지 말 것, 스스로 일어나도록 옆에서 지켜봐줄 것…
어느 것 하나 침범하지 않았지만 내가 쌓아올렸던 성벽은 죄다 무너진 듯 싶었다. 나는 반 쯤 잠겨있던 목소리를 깨워 작게 입을 벌렸다.
"빨리 일어났네"
"오늘따라 눈이 빨리 떠지던데"
솔잎 향이 배어있는 그의 체취에 나는 단번에 낯선 것임을 알아챘다. 산책 갔다 왔어? 응. 집앞 소나무 숲에.
"오후에는 나랑 같이 숲에 산책 가자. 그늘 져서 시원할거야"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난간에 올려주고 숫자를 세어가며 계단을 내려갔다. 덩달아 저 밑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에 나는 방긋 웃었다. 아, 좋다.
주억거리는 내 고개를 가볍게 잡아채서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냈다.
가끔 나를 향한 시선이 따끔하게 느껴질 때면 부끄러워하는 나에게 말없이 하던 행동이었다.
백현아. 순간 훅 하고 끼쳐오는 뜨끈한 숨에 나는 절로 고개를 움츠렸다.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가고 그는 바람 빠지듯 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놀랐잖아…
"너 답장은 안 해줄꺼야?"
"무슨 답장?"
"그거.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너한테 보냈던 거"
모른 척 하기는. 경수는 불퉁거리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턱 아래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나는 조심스레 밥그릇을 움켜잡았다.
눈처럼 하얗다던 편지 봉투는 그가 찾지 못하게 배게 밑에 숨겨둔 터였다.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몸을 웅크려 자꾸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밤새고 읽어내린, 그가 나에게 쓴 편지.
얼굴조차 몰랐을 우리가 주고 받은 소박한 감정 꾸러미를 챙겨들고 나는 마음 속 깊이 넣어두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감정이 빠져나가지 않게끔.
"너랑 같이 있는데 무슨 답장을 보내…"
"그래서 안 써준다고?"
수저를 달그락거리더니 내 손에 쥐어주곤 손가락으로 이마를 딱 튕겼다. 아! 알았어…. 하고 칭얼거리니 앞에서 실실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활발해진 공기를 헤치고 말소리가 섞여들었다.
내가, 이토록 들떴던 적이 있었나. 부풀어오른 마음 뒤에 불쑥 고개를 든 불안감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일어나는, 나와 함께하는 이들과 웃을 수 있는 아침. 내 손으로는 깨고 싶지 않은, 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시간.
*
"여기는 한번도 안 와봤어?"
"응. 그냥 집 주변으로 산책만 했어. 위험하니까"
"아…"
그의 목소리는 곧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창문을 열어놓은 것보다 열 배는 더 시원한 공기를 맛볼 수 있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것처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 와사삭 무언가 부서지는 것도 같고 바람이 몇 가닥으로 갈라지기도 하는.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에 부딪혔다.
"너랑 있으니까 해보는 게 많은 것 같아"
"이런 곳이 얼마나 많은데. 너 데려가고 싶은 곳도 많고"
그러니까 무서워 하지마, 앞으로. 흐릿한 목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다리가 풀리고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대답을 해주어야 하나.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밝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와도 나는 까마득한 어둠 속을 걸었다. 가시밭길도 있었고 그는 모르는 구덩이도 있을지 모른다.
쭈그려 앉은 내 앞에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끄응 하는 거친 숨이 들리고 그는 내 신발 코에 묻은 것들을 털어주었다.
솔잎과 흙 따위가 묻어있을 더러운 걸, 직접 손으로.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거야"
백현아.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문득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곱게 접혀있을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한 웅큼 약을 집어 삼켜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면.
그가 다가와주었으면 하면서도 나는 멀찌감치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수야 나는 이만큼 이기적인 사람이야.
나는 불완전하고 그는 완전했으므로.
-K
참 뜨거운 곳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는 곳.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발걸음을 했어도 나를 중심으로 보내줄 수 있는 소중한 공간. 너무나 따뜻해서 불안감마저 싹을 틔워내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는 아주머니가 골라준 책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점자의 배열을 따라 손을 옮겨가면서 입모양으로 글자를 만들어냈다.
차를 음미하듯 천천히 글자를 녹이다가 탄식을 내뱉기도 하고 까르르 웃기도 하고. 뭉게구름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사람.
그를 멍하니 보고있노라면 밀물이 밀려들 듯 수많은 감정이 나를 찾아왔다.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는 하얀 얼굴은 솜사탕처럼 나를 부풀게 만들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넘길때면 정체모를 감탄사를 불러냈으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는 이름 없는 가슴떨림을 자아냈다.
그는 오직 귀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감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이해하려 가끔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더 이상 다치지 않는 지를 배우면서 나는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래, 그 뿐이었다.
*
폭우가 쏟아지던 날 사고를 당했어요. 차에는 가족들이 전부 타고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백현이의 엄마과 백현이 뿐이었어요.
초등학교도 채 들어가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 기억은 아직까지도 백현이를 지배하고 있어요. 잠도 들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깨기도 해요. 비 오는 날을 싫어하고 낯선 것들을 무서워하고요.
백현이는 겪어 보지 못한 게 많아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알지 못하는 것도 많지만 그걸 알기 때문에 감정을 쉽게 드러내려하지 않죠.
언젠가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서 들은 그의 모습들. 고개를 빳빳히 들고 잔뜩 긴장한 미어캣처럼 쉽게 놀라고 달디 단 사탕만 주면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
자꾸만 그의 옆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에게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백현아"
"응"
"내 모습,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내 앞에 앉아 입을 달싹거렸다. 내가 원망스럽기도 할텐데. 나는 너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눈에 담아가고 있는데 너는 그러지 못하니까.
나는 그의 작은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티끌만한 상처도 없는 손을 보고있자니 무언가 울컥,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네 탓도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닌데 자잘하게 남은 자갈에 긁힌 듯 마음에는 생채기가 났다.
자그마한 하얀 손이 옷을 스쳐 쇄골을 지나 목줄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백현아. 나는 웃으면 입술이 하트 모양이 된대, 이렇게.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이끌며 입술에 그의 손가락을 올렸다.
까슬까슬하게 튼 입술을 매만지다가 그 주위를 빙 둘러 차츰 손이 올라왔다.
"볼이, 되게 부드럽다. 속눈썹도 길어 경수야. 네가 말하던 진한 눈썹도 알 것만 같아"
손가락 끝의 감각은 살아 숨쉬듯 피부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손을 뻗쳤다. 나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의 손을 겹쳐잡고 손가락 마디에 잘게 입을 맞췄다.
"너는 어떻게 손까지 예쁘냐"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감추기 위한 비겁한 술수였다.
*
아직은 덜 자란 이들이 겪는 성장통의 댓가는 불안감의 증폭과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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