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틀요괴 06
w. 해오름달
토요일.
즐거운 주말의 시작.
간만에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 책상 위에 주저앉아서 바늘에 광내고 있는 생명체를 보니.
나는 동동을 대상으로 교육의 장을 열었다.
나는 검정색 네임펜으로 A4용지에다 열심히 적었다.
<계약서>
김삐잉을 '갑' 이라 하고, 동동을 '을' 이라 한다
"왜 내가 을이야?"
"더 힘센 사람이 갑이고 약한 사람이 을인 거야."
".........."
계속.
'을'은 '갑'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 '을'의 목숨은 '갑'에게 달려있다.
"너 그 바늘가지고 허튼 짓 하기만 해봐."
"알았어.... 그리고 바늘이 아니라 칼이다!"
계속.
'갑'은 '을'에게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만약 이를 거부할 시, '을'의 목숨은 '갑'에게 달려있다.
김삐잉 (인). 동동 (인).
"이거 너무한 것 같다... 불리한 것 같다... 히잉..."
동동은 눈썹을 구기며 우는 소리를 해댔다.
나는 보틀 뚜껑을 살며시 들어보이며 압박의 눈빛을 보냈다.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친일파가 된 듯한 느낌이다.
동동은 발을 동동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양심에 엄청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요괴새끼가 나중에 돌변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는가.
나는 완성된 계약서를 L자 파일에 고이 끼어놓았다.
"나는 그럼 집주인 옆에서 노예처럼 살라는 거야? 싫어!
히잉... 영혼을 가져갈 인간을 잘못 선택했지 뭐야.
하필 이렇게 무서운 인간을 만날 게 뭐람."
아니,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넌 당하면서 살았을 듯....
동동은 보틀 옆에 철푸덕 주저앉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어쩐담. 임무 수행 기간이 딱 닷새가 남았는데."
"에? 너 그럼 5일이 지나면 가야하는 거야?"
"응! 닷새가 지나도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보틀요괴가 나를 찾으러 올거야.
그 사이에 빨리 영혼을 가져가야 하는데...."
"넌 이제 틀렸다 야. 네가 어떻게 사람을 죽인다는 거야? 좆만한 게."
동동은 입을 삐죽 내밀고 나를 째려봤다.
삐쳤니?
"지금 날 무시했써?"
그 말에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동동은 진짜로 삐친 건지 보틀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뚜껑도 지 손으로 닫고 있는 게 웃기다.
이내 보틀 안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기다렸다.
3시간 기다렸다.
점심 먹고 또 2시간 기다렸다.
토요일 오후 시간대의 무법자인 유딩들이
밖에서 시끄럽게 소리질러대며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으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나는 노크하듯이 보틀을 땡 땡 두드렸다.
귀를 갖다 대봐도 아무런 기미가 없다.
몸소 굽힌 허리도 아파오고 짜증도 난다.
나는 동동의 말투를 흉내냈다.
"지금 날 무시했써?"
이것도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년 취급할 듯....
"....너 뭐하니?"
문 앞에 엄마가 나타났다.
나는 책상을 향해 허리를 구부린 채로 얼음이 되었다.
등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 그냥, 기...김한빈이 문자를 씹어서.
걔가 날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서. 하하..."
"....그래?"
엄마는 나를 수상하단 눈빛으로 훑고는
침대에다 옷가지를 내려놓고 갔다.
나는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동동의 보틀은 아무리 째려봐도 꿈쩍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완전히 1층으로 내려간 걸 확인한 후
보틀을 집어들고 가까이에다 속삭였다.
"고집 부릴래...? 계약 위반이야 이거...!"
정말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평범한 보틀에다 대고 얘기하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나는 책상에다 보틀을 탕- 소리나게 내려놨다.
난쟁이 주제에 승질 부린다 이거지.
나는 옷을 챙겨입고 지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무작정 동네 시가지로 향했다.
뿌레쥬르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 알바 오빠가 나를 잘 안다.
내가 김한빈이랑 싸우고 삐쳤을 때마다 김한빈이 빵조공을 바쳐서 이기도 하다.
뿌레쥬르에 들어섰다.
알바 오빠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 삐잉이 왔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려는데
빵 진열대에서 빵을 고르던 누군가가 나를 돌아봤다.
"빵순아, 빵 먹으러 왔냐?"
김한빈이다.
나를 보면서 실실 쪼개며 비아냥댄다.
살쪘다고 짜증내면서 먹을 건 다 먹는다는 둥.
나는 김한빈에게 뺨 때리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내 거 사러온 거 아니거든? 선물할 거거든?"
"선물? 누구한테?"
나는 김한빈을 옆으로 밀어제끼고
마카롱 진열대로 향했다.
어느날의 수수깡 파티처럼 참 알록달록 했다.
나는 오렌지 마카롱 두 개를 고르고
동동의 청자켓이 생각나는 파란 마카롱 두 개를 골랐다.
뿌레쥬르 오빠가 작은 상자를 조립해 마카롱을 넣었다.
선물할 거라는 내 말에 금색 리본으로 포장도 해줬다.
옆에선 김한빈이 자꾸 귀찮게 보채었다.
"아 진짜 누구한테 선물하냐고."
"아 있어. 그냥...친구?"
"친구 누구. 남자, 여자."
"걔는 남자애지...? 근데 왜?"
"남자? 남자아-??"
뿌레쥬르를 나와서도 김한빈은 제 갈길을 안 가셨다.
내가 가는 길을 계속 졸졸 쫓아다녔다.
완전히 떼어놓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왠지 모르게 미행당하는 느낌이었다. 끈질긴 놈....
찝찝했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고 앞만 보고 집에 왔다.
집에 오는 내내 동동에게 뭐라고 말하며 이걸 줘야 할지를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시간이다.
동동도 배가 많이 고프겠다.
내 방 문 내가 여는데 괜히 가슴 떨렸다.
애가 보틀에서 나와있을까? 안 나왔으면 어떡하지?
아직도 안 나와있으면 수수깡 몽둥이로 아주 그냥....
"....어...?"
보틀이 없다.
왜 없지.
"동동...?"
나는 나지막이 동동을 불러봤다.
하지만 썰렁한 방에선 아무 응답도 없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어야 할 보틀도 없다.
바닥에 떨어졌나, 아무리 살펴봐도 보틀이 없다.
나는 지갑이니 마카롱이니 모두 침대 위에 팽개치고
황급히 1층 거실로 뛰어내려갔다.
엄마가 부엌에 있었다.
"엄마! 내 방에 있던 보틀 못 봤어? 물병 말이야."
"영문 써져있는 투명 물병 말하는 거야?
그거 식기세척기에다 넣고 돌린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