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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RANA 

 

 

 

 

 

1. 

 

상혁의 케일릭 시절을 되짚어 보자면 온통 각성에 관한 일화들 뿐이었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까지 매일 다녔던 요가 학원도 그렇고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먹었던 비타민도 그랬다. 상혁의 엄마가 상혁이 피스틸이 됐으면 해서 형질 발현에 좋다는 건 다 사다 먹인 탓이었다. 각성은 유전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속설을 빌어, 상혁이 피스틸이 됐으면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본인 등에 떡하니 새겨진 나무 한 그루가 상혁의 등에도 새겨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분명히 있었고, 스테먼은 피스틸과는 달리 심한 각성통을 거쳐야 함이 최우선의 이유였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덕에 상혁은 절대 제가 피스틸이 될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돈을 쏟아붓고 정성을 들였으면 안 될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상혁은 중학교 삼학년을 맞이했다. 아직 봄이라 조금 추운 날씨에 책상에 엎드려 있던 상혁은 계집애들의 생리통 마냥 척추가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척추 끝에서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고통과 허리부터 등까지 찢어지는 듯한 근육통에 식은 땀이 흘렀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고통에 땀을 뚝뚝 흘리던 상혁을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태형이었다. 눈가가 시뻘개져서 울기 직전의 모습에 번쩍 손을 들어 선생님에게 상혁의 상태를 고하고 곧장 등에 상혁을 업어 나온 태형이 짓무른 상혁의 눈가를 꾹꾹 눌러 눈물을 닦아냈다. 택시를 타고 상혁을 집까지 바래다 준 태형은 미친 고통에 목놓아 우는 상혁의 옷을 들춰 봤다. 등 아래에서부터 새겨지기 시작하는 작은 나무 뿌리를 발견한 태형이 상혁의 손을 잡았다. 

 

"야, 그거 각성통인가봐." 

"어?" 

"너 등에 나무 생기겠다. 멋있네." 

 

얼 빠진 채로 눈에는 눈물을 매달고 태형을 쳐다보던 상혁은 그 말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그렇게 피스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낭패감에 한참 울던 상혁에겐 이 주 간의 각성통이 이어졌다. 피스틸의 등에서 나무가 자라나는 동안은 나무가 피스틸에 기생해 영양분을 모조리 빼앗아 오는 탓에 각성 중에 피스틸이 죽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 덕에 상혁에겐 비타민부터 영양식까지 모든 것이 주어졌는데, 먹이는 족족 토해내는 상혁에 지켜보던 상혁의 엄마와 태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뭐 어쨌거나 무사히 각성을 마친 상혁의 등에는 살을 뚫고 나온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각성 후에 주어진 일주일 정도의 방학 동안 요양을 즐기던 상혁은 당장 학교에서 생길 일에 대한 걱정에 이마를 짚었다. 

 

 

 

2. 

 

태형은 예상대로 스테먼이었다. 파란 장미 한 송이를 팔에 그려넣고 다니는 태형을 보면 가끔 상혁은 부러워 미칠 것 같았지만, 제 사정을 다 알고 배려해 주는 태형에 딱히 별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 될 때까지 상혁은 엄마가 원하는 스테먼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학우들이 형질 얘기만 하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곤 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선 특히나 더 심했다. 

 

상혁이 피스틸이란 사실을 아는 친구는 태형 뿐이었는데, 태형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전부 상혁이 키도 크고 몸매도 좋은 데다가 잘생겼으므로 상혁이 스테먼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놈은 태형 뿐이었지만 곧 한 놈이 더해졌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약 한 달도 되지 않아 상혁과 태형의 학급에 어떤 놈이 전학을 왔는데, 그 놈이 베놈이라더라 하는 소문이 돌아서 말을 섞어 볼 생각도 않던 상혁과 친구가 된 것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던 그 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상혁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안녕, 난 수원에서 올라온 육성재고 김태형 친구다!" 

 

태형의 친구라는 성재의 마지막 말에 상혁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또라이 같은 놈이 또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또라이 놈과 상혁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매우 친해졌다. 성재가 새 멤버로 끼어든 이후로 태형과 상혁은 삼 분의 일만큼 더 시끄러워졌고 장난이 많아졌으며 빨리 뛰어다녔다. 그러다 상혁이 성재에게 제 형질을 들킨 것은 성재가 전학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수업 시간에 속이 비치는 얇은 재질의 옷을 입은 젊은 여 선생의 등에서 여러 종류의 꽃이 만개한 나무를 발견한 성재가 무심코 던진 말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난 저런 피스틸이랑은 절대 안 사귈 거야. 등에 흔적 남는 거 진짜 불쌍하다. 성재의 말에 표정이 확 굳은 상혁이 입을 열려던 찰나에 성재가 펜을 쥐고 공책에 글자 몇 개를 휘갈겨 썼다. 

 

[ 너 피스틸이야? ] 

 

그 문장으로 제대로 재를 뿌려 준 것은 덤이었다. 제 나름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던 형질을 성재에게 들키고 나자 속상해진 상혁이 고개를 태형의 쪽으로 돌렸다. 자는 척을 하는 상혁의 얼굴을 살피던 태형이 주먹을 치켜들고 입 모양으로 죽을래? 하며 성재를 위협했다. 그제서야 상혁이 피스틸이란 게 콤플렉스였다는 것을 깨달은 성재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고 무작정 상혁의 등을 껴안았다. 

 

 

 

3. 

 

성재의 갖가지 노력으로 한 시간 만에 상혁과의 다시 관계를 회복한 뒤에서야 성재는 상혁에게 본심을 내비첬다. 야, 넌 그런 거 상관없이 멋있고 귀여워. 그 말에 상혁은 아부 떠는 육성재의 꼴도 보기 싫다고 치를 떨었지만 말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형질 커밍아웃을 하게 된 상혁은 태형을 찔러 성재의 형질을 물었다. 

 

"쟤 전학 올 때 베놈이라 그랬잖아. 그거 진짜야?" 

"어. 쟤 베놈이야. 꽃이 라넌큘러스랬나? 엄청 화려하더라." 

"아, 그래?" 

"기분 상해 하지 말고." 

"안 그러거든?" 

 

말로는 그랬지만 상혁은 속으로 성재의 형질이 조금, 아주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다. 정작 성재 본인은 상혁의 형질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말이었다. 상혁의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롤을 하기로 한, 화장실에 다녀온 성재를 포함한 셋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한창 간장 치킨이 더 맛있니 양념 치킨이 더 맛있니 같은 걸로 다투던 와중에 상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정해 놔라." 

"어엉."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간 상혁이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은 희대의 실수였다. 한참 옥신각신하다 가위바위보로 메뉴 우선 선택권을 따 낸 성재가 상혁이 들어간 방문을 연 것이 화근이었고, 벗은 몸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있던 상혁은 벙쪘다. 이어 달려온 태형이 성재를 끌고 나가자마자 상혁은 등짝을 보여 줬다는 생각에 분해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이 망할 육덕 새끼! 방에서 들려오는 포효와도 같은 목소리에 태형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뛰어가던 성재를 말리지 않은 저를 탓했다. 

 

 

 

4. 

 

성재와 태형은 유난스러운 상혁의 팬이었다. 거의 따개비 수준으로 상혁을 쫓아다니는 것부터 상혁의 편도 많이 들어 주고, 얘기도 잘 들어 주고, 가방도 들어 주고 하여튼 둘은 상혁을 조금 더 배려하는 편이었다. 처음엔 그 둘의 극성이 기분 나빴던 상혁도 나중엔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다. 반복 학습의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창밖을 한참 바라보던 상혁을 들여다보다시피 하던 성재가 상혁의 눈가를 툭 건드렸다. 차가운 손가락에 상혁이 절로 눈을 찌푸렸다. 

 

"야, 비 진짜 많이 온다. 등 시려워 미치겠어." 

"주물러 줄까?" 

"미쳤어?" 

"그럼?" 

 

성재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에 물방울이 맺혔다. 창문을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이 하얗게 맺힌 습기를 닦아냈다. 너 저기 별 보여? 난 저 밤하늘의 별을 보면 네가 떠오르더라고. 성재의 말에 상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성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상혁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별을 쳐다보던 성재가 손가락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특히 저기 저 별 있잖아." 

 

속삭이다시피 다가온 성재에 상혁이 창문 가까이 얼굴을 붙이려 하던 찰나였다. 성재의 입술이 상혁의 뺨에 짧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야, 너 지금……. 상혁이 발끈 화를 내려다 제 뺨을 감싸고 다가오는 성재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못 이기는 척 입술을 내어 줬다. 상혁의 바지가 성재의 손에 들린 3단 우산의 물기에 의해 젖어 들었다. 

 

 

 

5. 

 

비 오던 밤 우산 하나만 들고 단 둘이 붙어 앉은 버스에서 성재의 고백이 이어졌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으며 사귀고 싶다는 등의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던 성재의 앞에서 상혁은 의외로 부끄럼을 탔다. 얼굴이 벌개져선 그만하라고 성재를 밀어낸 상혁은 결국 성재의 우산을 쓰고 집앞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걸 전부 둘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태형이 모르는 딱 한 가지 사실이 있었는데, 비에 젖은 성재의 어깨를 본 상혁이 무의식적으로 성재를 끌어안은 후의 얘기였다. 

 

"춥지?" 

"아니, 하나도 안 추워." 

"잠시 앉아 있다가 갈래? 지금 집에 아무도 안 계신데." 

 

약간 들뜬 목소리의 상혁이 성재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약간 축축한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길게 찢어진 눈을 마주한 순간 성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아무나(는 아니지만)를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끌어들이다니. 복잡하고도 미묘한 신경질나는 상황에도 고분고분 상혁의 말에 따라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 둔 성재가 이마를 짚었다. 

 

"아, 성재야." 

"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건……, 아니지?" 

 

그 아주 많은 의미가 내포된 문장에 성재의 정신이 다시 한 번 아찔해졌다. 얘는 이런 걸 어디서 배워 오냐는 생각부터 아마 타고난 것일 거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이 초도 걸리지 않아 결론을 내린 성재가 상혁의 팔을 잡고 무작정 벽으로 밀어붙였다. 입술 위로 와닿는 건조한 입술의 촉감에 눈을 내리감은 상혁이 성재의 목에 팔을 둘렀다. 

 

 

 

6. 

 

"등 가리지 마. 왜 가려?" 

"싫어……, 안 보여 줄 거야." 

"너는 나무든 꽃이든 너라서 사랑스러운데?" 

"으응, 오글거려……." 

 

기어코 이불을 들춰내려는 성재의 손길에 상혁이 못 이기는 척 손에서 힘을 풀어냈다. 섹스 도중에도 꼭꼭 가리고 숨기던 등을 한참 바라보던 성재가 상혁의 등을 끌어안고 입 맞췄다. 너 내 꽃이 뭔 지 알아? 뜬금없이 던져진 성재의 질문에 상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태형이 알려 줬던 꽃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 썼다. 

 

"내 꽃은 라넌큘러스야." 

"라넌큘러스." 

"그럼 그 꽃 꽃말은 뭔 줄 알아?" 

"뭔데." 

 

맥이 다 빠진 상혁을 다시 돌려눕힌 성재가 상혁의 입술을 쪼듯 입 맞추고 나지막히 대답했다. 그대는 매력적이에요. 성재의 말에 잠깐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상혁이 다시 진득하게 입 맞춰 오는 성재에 동조했다. 달빛을 받은 상혁의 등에 라넌큘러스 한 송이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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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ㅜㅜㅜ이아름다운세계관은뭔가요.....!!! 등에 꽃과나무가 자라다니 요정같애요.. 제가좋아하는 셋이 나오네요 ㅋㅋㅋㅋ중간에 육덕같은에서 완전뿜었어욬ㅋㅋㅋ 재밌어요
9년 전
독자2
헐 소년소년해서 괜히 설레요ㅠㅠㅠㅠㅠㅠ 잘보고 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
아 육상.... 진짜 사랑이죠.... ㅠㅠ
9년 전
독자4
윽....ㅠㅜㅠㅠ진짜 말도 너무 예쁘고ㅠㅜ 설렙니다ㅠㅠㅠ
9년 전
독자5
헐 완전 취향저격ㅠ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뭔가 청춘스럽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8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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