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는데 집안이 너무 조용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거나 그런거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그런 나를 비웃는 듯 식탁에 사이 좋게 마주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석진. 그리고 설마하고 부풀었던 내 기대는 풍선 터지 듯 펑펑 터져버렸다. 하기야 이게 무슨 인셉션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내 속을 다 뒤집어 놓고서 갑자기 사라진다면 꿈이라도 정말 화날 것 같았다. 하루종일 집안 물건들을 다 박살내도 안 풀리겠지. 붕붕 뜬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가니, 나를 쳐다보는 그 둘은 어제 내가 규칙을 썼던 공책을 펼쳐두고 있었다. 낙서말고는 아무것도 안 적힌 것을 보아하니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맑은 눈을 보면 일어난 건 꽤 된 것 같고.
얘넨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싶은데, 정국이 손에 볼펜 잉크를 여기저기 묻히고선 해맑게 웃어보인다. 그 손을 보니 왜 공책에 낙서 밖에 없는 지 알 것 같았다. 붓처럼 잡아 든 볼펜을 보면서 내가 한숨을 쉬니 의아하단 표정으로 나를 한번, 제가 쥐고 있는 볼펜을 한번 쳐다보는 정국.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같이 눈을 굴리는 석진까지. 적응력이 빠르다고 생각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방치해 둔 잘못이었다. 그래,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할 것들이 몇개인데 내가 미쳤다고 디비 자고 있었지. 얼룩덜룩한 손에서 볼펜을 빼오려고 손을 뻗는데, 정국이 갑자기 나를 가리켰다.
"진아. 죽은 줄 알았던 저 아이, 이제야 일어났구나."
되게 게으르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석진의 덧붙임까지. 아침부터 시비걸고 있네. 괜히 꽁해져서 볼펜을 빼앗아 드니 금새 또 입을 삐죽거린다. 볼펜은 이렇게 쥐는 거란 말이야. 내가 한번 볼펜을 제대로 잡아 쥐니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둘. 그러더니 속닥속닥, 내 쪽을 가리키며 잘만 속삭인다. 규칙에 귓속말 금지도 추가시킬까 하다가 참았다. 나는 착하니까. 공책과 볼펜을 방에 가져다 두고 다시 나오는데 그 모든 행동을 빤히 지켜보는 모습에 나만 새삼스레 쪽팔려졌다. 쟤네야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거겠지만 남정네 두명의 시선을 계속 받고있는게 생각보다, 뭐랄까…… 조금 많이 민망하다. 잘못한 게 없는데 쥐구멍에 숨고싶은 기분. 이러다 발 한번 헛디디면 그 순간 놀림거리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일텐데. 후에 있을지도 모를 끔찍한 상상을 하다가, 헛기침을 하고 이 상황을 내 스스로 못 버틸 것만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둘이 뭐하고 있었어?"
"또 말을 낮추는구나."
"요. 깐깐하긴."
석진이 허벅지 위에 얹어두었던 책을 양손으로 들어보였다. 계속 읽고 있었던 것인지 중간 즈음으로 펼쳐져있는 책. 설마하고 봤더니, 첫날 정국이 들고있던 그 책이었다. 책이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 팬북. 아니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왜 자꾸 저 책만 읽는거야. 뿌듯한 표정으로 현대어를 공부하고 있었다는 석진의 말에 나는 뒷목을 잡았다. 너네가 팬픽 용어 공부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구요. 공부했단 말이 거짓은 아닌지 조금 어색한 느낌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워진 석진의 말투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정국, 너는 뭐했는데?"
하니까 대답이 없다. 내 시선을 외면하고 손장난만 치는 정국. 하나도 바뀐 게 없어보이는 정국의 말투가 심히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이랄 것도 없이 확신이 든다. 석진이 저걸 정독하며 현대어를 습득하는 동안 정국은 혼자 낙서를 했을 게 분명하다. 그건 깨끗한 석진의 손만 보아도 답이 나온다. 정국을 쳐다보던 석진은 정국이 째려보자 조용히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애써 말을 걸어놨더니 다시 찾아온 정적에 죽어나는 건 나 뿐이었다. 근데 자꾸 손가락을 꼬물꼬물. 애는 애다 싶었다. 물론 동갑이지마는.
의자를 빼고 정국의 옆에 앉자 움찔하면서도 끝까지 나는 안 쳐다본다. 더럽게 고집만 쎄가지곤. 아무리 봐도 대답 할 생각은 없어보여서 이번엔 석진한테 시선을 옮기자, 그걸 또 알아채고 날 쳐다보는 석진. 본인이 대답 할 의향이 없다면 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끝이지. 근데 또 놀리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다. 전정국은 놀려야 제 맛인데. 괜히 혼자 딴짓하고 부끄러우니까 말 안 하는 꼴이 괘씸해서 한번 더 놀릴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석진 오빠."
"예."
"전정국이, 뭐했어요?"
들으라고 전정국, 을 더 강조하며 말하자 정국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다. 저봐 저봐, 속은 또 좁아가지고. 솔직한 반응이 금방 드러나는게 재밌다. 작정하고 자리도 석진의 옆으로 이동하니 이제는 표정이 굳은 정도도 아니고 완전 정색. 팔짱까지 껴볼까 했지만 아직 그건 석진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그냥 관뒀다. 그나저나, 이제 오빠란 소리에 석진이 당황하지 않아서 그게 조금 아쉽긴 하네. 속으로 웃음을 겨우 삼키며 정국을 쳐다보는데, 정국이 정색한 표정 그대로 나를 쳐다본다.
석진은 그와중에 전하께선 제가 책을 읽는 동안 이 종이라는 것에 글을 쓰고 계셨고, 그러면서 배가 고프다고 그러셨고. 음, 또…… 전하, 왜 그렇게 보십니까. 라며 열심히 상황 설명을 했다. 거봐, 딱 맞잖아. 석진이 낙서란 표현을 모르니까 글이라고 했겠지만 저게 어딜 봐서 글이야. 전정국은 전정국이다 싶어서 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놀리는 중이니까 나중에 한꺼번에 웃어야지. 내가 힐끔 쳐다보자 한참 정색만 하고 있던 정국이 말을 꺼냈다.
"너 또 진에게만."
참 예의도 없고, 지조도 없는 아이로구나. 정국이 한숨을 쉬었어. 와, 참나. 어이가 없어서. 한숨은 왜 쉰대. 반박을 하려 했지만 정국은 또 꽁해져서 입술을 불퉁 내민다. 지도 나랑 같은 애면서 꼭 오빠 행세를 하려고 저러지. 내가 해주나 봐라. 속으로 온갖 말들을 하면서도 왕은 왕인지라 기에 눌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놀리면 진짜 풀어주기 힘들 것 같기도 했고. 솔직히 정국오빠라는 말 다시 하기도 오글거리고. 결국,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왔는데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 망할. 배를 두 팔로 감싸고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어서 먹을 것을 집어 넣으라고 성화를 낸 건 내 뱃속이었다. 쪽팔려. 아마 말은 안 하고 있는거겠지만 둘도 배가 고플거야, 하면서 혼자 합리화를 시켰다. 전정국은 어제 아침에 식빵 한장이라도 먹었지만, 나나 석진이나 어제부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굶고 있었다. 원래 잘 안 챙겨먹는 나도 이렇게 배가 고픈데, 석진은 오죽할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밥을 차리긴 너무 귀찮았다. 하루종일 굶었는데 그 앞에 라면 내주기도 미안하고. 배달 음식을 시키자니, 그만한 여유의 돈이 없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둘을 쳐다보는데 또 나만 쏙 빼놓고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둘.
또 둘만 저러지. 이번엔 내가 입술을 불퉁 내밀자 정국이 언제 삐졌냐는 듯이 픽 웃는다. 아마도 내 배에서 난 소리 때문이겠지. 웃지말라고 내가 타박하 듯이 얘기하자 주먹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큼큼, 헛기침을 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 못하는 전정국. 덕분에 쪽팔림만 두배. 그나저나, 무슨 신호를 주고 받은거야 하고 석진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져 있는 석진.
"석진 오빠는?"
"너 그 말 쓰지 말거라."
"무슨 말."
"그, 오빠라는 거 말이다."
우쭈쭈. 대답은 안하고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는 부엌 쪽을 쳐다보는데 석진이 이곳저곳을 뒤지며 뭔가를 하고 있기에, 주방 쪽으로 가자 정국이 또 쫓아온다. 아니 얘는 뭐가 이렇게 질투도 많고 의심도 많아선. 뭐하나 어깨 너머로 쳐다보는데, 나름대로 냄비같은 걸 잘 찾아 꺼냈다. 누구랑은 다르게 머리가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정국을 쳐다보자 왜 쳐다보냐면서 괜히 심통을 부린다. 냉장고에서 지박령마냥 남아있던 양파나 계란도 꺼내고 그 외의 재료들을 정리하는 석진의 솜씨가 의외로 능숙하다.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데 옆에서 따분하다며 석진을 괴롭히던 정국은 자기도 공부를 할 것이라며 식탁 쪽으로 다시 돌아가 석진이 읽던 책을 집어 든다. 또 혼자두면 우리 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며 추궁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국의 맞은편에 가서 앉으니 정국이 쳐다본다. 저 시선에 익숙해져야하는데 아무래도 한참 눈을 마주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가보다. 둘 다 사람을 너무 빤히 쳐다봐서 문제다. 아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왜 따라오느냐."
"그냥 온거거든."
"석진 오라버니와 함께 있지 무엇하러."
그러더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휙 돌린다. 풀린 줄 알았더니 삐친게 확실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를 듣다가 내가 질투냐나고 물어보자 또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안하는 정국. 저거 맨날 입 다무는거봐. 완전 꾹꾹이. 꾹왕. 정꾹왕. 묘하게 라임이 도네. 자꾸 생각이 빠진다. 다시 정국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입술은 불퉁. 그나저나 정독 했다면서 질리지도 않나. 하고 정국을 쳐다보는데 분명 시선을 뚫어져라 책을 향하고 있지만 책장은 넘어가질 않는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야, 너 책 거꾸로 들고 있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정국이 재빨리 책을 바로 잡더니 나를 한번 휙 쳐다보곤 작은 집에 갈 것이라며 작은 집이 어딨냐고 묻는다. 갑자기 왠 작은 집…… 하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뒷간 말이다, 너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돌려 말하면 알아 들어야 할 것 아니냐.' 하고 심술을 부린다. 아니 부끄러운 건 자기면서 왜 괜히 나한테. 아무튼간에 진짜 유치해. 초딩도 아니고 저게 뭐야. 손을 들어 화장실 쪽을 가리키니까 확인하듯 저 곳 말이냐,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국.
내가 가리킨 곳으로 도망가듯 쏙 들어간 정국의 뒷모습을 보다가, 금방 나올 것 같지는 않아서 다시 석진이 요리를 하고 있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정국 자기도 체통 못 지키는 건 똑같으면서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러긴. 투덜거리는 와중에 신기하게도 맛있는 냄새가 나서 군침이 절로 돌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한번 본 석진이 냄비 뚜껑을 닫으며 내 쪽으로 돌아섰다.
"전하께서 달이 깊어질 때 종종 배가 고프시다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상궁을 불러내면 이 시각에 음식이 들어가면 몸에 안 좋다고 화를 올리고 다시 돌아가버렸기에 제가 음식을 하곤 했는데, 그게 손에 익은 모양입니다. 다행히도 먹을 것들이 있어서 간단히 음식을 내려하는데, 냄새는 괜찮습니까. 그나저나, 아까 전하의 호통이 들린 것 같은데 무슨 일 이랍니까.
내가 오자마자 또 무섭게 말을 쏟아내는 석진. 한명은 입을 너무 다물고 있어서 문제고, 한명은 너무 말이 많아서 피곤해 둘이 적절하게 조화롭게 딱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마음을 겨우 접고 대충 별일 아니라고 둘러대는데 석진이 작게 웃는다. 그나저나 아까 오빠 소리에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던 석진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하룻밤 사이에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잘 받아들이는 게 좀 이상한데.
"근데 아까 오빠 소리에 왜, 어제처럼 안 부끄러워해요?"
그랬더니 박수를 한번 치곤, 연습했다고 하는 석진. 뜬금없이 무슨 연습을 해. 안 부끄러워하는 연습이라도 했나. 내가 의아하단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책에서 본건지 턱 밑에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보이며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전하와 연습했습니다. 그대가 자는 동안 전하께서 저에게 계속 오빠 소리를 해주면 제가 익숙해지는 연습."
완전 게이득 아니야 이거. 정국이 석진에게 오빠나 오라버니 소리를 했을 생각을 하니 괜히 내가 다 설렌다. 아, 이 호모렌즈. 이 호모스러운 마음. 엄마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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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님, 계란찜님, 꾹이님, 이킴님, 듀드롭님, 민슈가님, 단미님, 오라버니님, 봄날님, 눈설님, 홍콩님, 슈갭님, 스웩님, 나침반님,
취향저격님, 허니버터칩님, 슈가파파론리파파님, 정국꽃님, 사과찡님, 짱구님, 꽃잎님, 보름달님, 망고님, 중전님, 권지용님, 론리님 ♡
아참, 공지글을 삭제하는 바람에 이벤트 공지도 함께 삭제가 되어 다시 언급합니다 8ㅅ8
낰낰, 조선시대에서 왔소 작품 00화부터 꾸준히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중 1~2분을 추첨하여 나중에 제작 될 책자를 선물 해 드릴 계획입니다!
물론 암호닉 신청 되있으셔야하고, 성의있는 댓글을 달아주셔야한다는 조건이 붙겠죠 =)
결론은 암호닉 많이 신청해달란 얘기입니다. 껄껄.
더 많은 독자분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저번에 투표수 보니까 투표수는 꽤 높은데 댓글이 그만큼 따라오질 못해서 (주륵)
댓글 화력 좀 불태워주세요! 활활, 버닝. 아 뜨겁다, 와 뜨겁다!
그리고 가끔 암호닉 댓글 따로, 그리고 그 답댓으로 긴 댓글을 따로 남겨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너무 부탁만 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댓글 수정으로 댓글을 하나로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크다면 큰거고 작다면 작은 제 소망입니다 =)
그리고 여기까지 보셨으면 솔직히 댓글 달아줘요, 이리와서 같이 놉시다.
같이 철 없는 정국이도 혼내보고, 멋있는 석진 오빠도 앓아보고. 예. 얼마나 좋아요! (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