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키드
*
'도와달라는 소리는 안해.'
'그럼 뭘?'
'이번 기회에 우리쪽과 손 좀 잡자. 카이렌을 없애버릴 생각이거든.'
'...박찬열 네가?'
'아니. 우리가.' 정작 대답은 듣지도 않고서 제 멋대로 동맹을 정해버린 찬열 덕분에, 첸은 오랜만에 '골치'라는걸 경험하고 있었다. 분명 방금전만해도 기분좋게 두 녀석들과의 대담을 즐기고 있었던것 같은데…카이는 나중에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찬열은 뒤따라 일어나려는 자신을 붙잡아 앉히더니- '얘기좀 하자.' 이런…앉는게 아니었어. 첸은 제 손목을 잡아앉히던 찬열을 떠올리곤 나즈막히 한숨을 쉬었다. 그냥 뿌리치고 카이와 놀걸 그랬나.
우우웅- 항해를 시작하는 엘리스 아일랜드의 뱃고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찬열은 서서히 불어오는 해풍에 머리칼이 휘날리는 첸을 바라보다, 곧 제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후 8시. 무도회의 끝은 점점 다가오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까지는 겨우 삼십분 남짓이다. 최소한 그 시간안에 뭐가됐던 움직여야 했고 첸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이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첸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카이렌을 철저히 고립시켜야 합니다.' 당부하듯 되뇌던 세훈의 말이 떠오른다. '첸을 적으로 만드는건 위험합니다. 신의안을 우리쪽으로 끌어들여서, 동맹을 맺는겁니다.' 동맹은 무슨, 저 야비한 얼굴위로 주먹이 꽂히지 않은게 다행이다. 손 좀 잡아보자는 말에 능글맞게 웃는 저 면상을, 오비서가 봤어야 하는건데. 비워진 잔 위로 와인이 넘실거리며 채워지는 것을 보던 찬열이, 영 내키지않는 세훈의 충고를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비서는 사람보는 눈이 없어. 하다하다 이젠 저 인간손을 잡자고… 착잡한 심정에 그냥 자리에서 일어날까 고민하는데- 어느새 선실 창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오비서가 주먹을 말아쥐는게 보인다. 그 위협적인 움직임에 금새 엉덩이를 붙인 찬열이, 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너와 내가 나서면 카이렌은 순식간이야. 게다가 흑사회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고, 또 무엇보다."
"무엇보다?"
"로렌스맨하탄의 자금비리."
"…음-"
"내 손에 들어왔거든. 아시아 블랙머니가 무너지는건 금방이야."
흥미로운 표정을 한 첸의 얼굴위로 찬열의 손이 USB를 쥐고 양 옆으로 흔들었다. 조용한 사방아래, 대답대신 미소짓는 얼굴을 마주한 그가 어쩔거냐는 표정을 지었고, 곧 USB를 제 손에 쥐는 첸이 있다. 달빛에 은색 겉면이 반짝이는 그것을 첸은 엄지로 몇번 쓸어내리다 시선을 옮겨 찬열을 바라봤다. '확실해?' 어느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한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가 불쌍한데…"
"지금 내앞에서 누구 편을 드냐."
"올해로 십삼년이야. 우리가 서로 알고지낸 횃수로만."
"…의리있는 약쟁이네. 이야- 나한테는 마약밀매를 뒤집어씌우고, 카이킴은 불쌍해서 눈뜨고 볼 수가 없나봐?
신의안의 첸이 언제부터 이렇게 감상적이었나."
"…벌써 한참 전 일이야. 아직도 꽁하니 그때 일을 못있어서는."
"말 돌리지마. 손 잡을거야. 말거야."
난감한듯 시선을 돌리는 첸을 향해 찬열이 '당장 대답하던가. 아님 여기서 나가.' 라며 검은 해수면위로 고갯짓을 해보인다. 장난이라기엔 진지한 표정에 첸이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게… 왜 이리도 생생하게 떠오를까……. 금방이라도 행동으로 옮길것 같은 찬열의 얼굴을 마주보며 첸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 고집을 무슨 수로 꺾어. 변한 것 하나없는 찬열의 어릴적과 지금을 머릿속에서 번갈아 떠올리던 첸이, 곧 얼마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돕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찬열이 한숨 돌리기도 전에, 그가 궁금한듯 입을 열었다.
"…카이렌을 없애서 조슈아 네가 얻는게 뭐야."
"뭐긴 뭐야. 평화지. 카이킴이 언제고 우릴 가만둘것같냐? 그 인간 성격에 벌써 수쓰고도 남았어. 그래서 내가 총대를 맸잖아."
짐짓 제가 다 해결한다는 어투여서, 첸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곧 살벌하니 찬열의 말을 하나하나반박했지만.
"미안하지만 누군가 한 쪽은 나서야했어. 그게 너일줄은 상상도 못했고. 아- 샤오위나 나나 우린 너한테 총대메라고 한적 없다. 알지?
네가 먼저 독단적으로 킬러를 뉴욕으로 보냈고 썬포그의 계획과 다르게 실패했지. 두 사람은 카이에게 인질로 잡혔고. 응? 안그래?"
"…나도 잘 해보려다가 이렇게 된거잖아. 지금."
팩트만 집어 콕-콕- 찔러오는 첸의 대답에 찬열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싶은데 힐끔 살펴본 선실 안으로, 오비서가 아직도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후우우우- 힘없이 한숨을 내쉰 찬열이 뒤잇는 첸의 말들을 그저 듣기만한다. 오세훈이… 또 주먹을 쥐었어….
"잘 해보려다 안되서 내게 손을 내밀었고, 결과적으로 나까지 카이렌을 적으로 돌리게 됐어 조슈아.
재수없게 실패했다가는 베이징에 뒀던 신의안 본부를 타이페이로 옮기는건 물론이고,
중국패권을 넘보던 카이렌이 이걸 기회로 중국에 세력을 넓힐거야.
네가 말한것처럼 샤오위가 나서준다면야 좋겠지만… 하긴, 그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로렌스 맨하탄이 네 손에 들어온 이상. 샤오위가 카이를 죽일테니까."
"아니. 틀렸어."
단호한 대답에 첸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찬열이 입을 열었다.
"카이를 죽이는건 나야. 첸."
"…"
"카이킴을 감옥에 처넣을 생각이거든. 영원히 회생하지 못하게끔."
"…박찬열."
"이번엔 정말 끝이야. 내 아버지가 하지 못한일을. 내가 해 보일테니까."
달빛에 형형하니 반짝이는 와인잔을 집어든 찬열이, 그 위로 입술을 갖다 대었다. 움직이는 목 울대너머로 붉은 와인이 하염없이 들어간다. 다 비워진 잔을 내려놓은 찬열이 떠오르는 해수면위의 별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첸은 그런 찬열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느때보다 복잡한 얼굴을 한 첸이, 한숨대신 나즈막한 휘파람을 불었다. 제 시야안의 찬열을, 그리고 이 배안 어디엔가 있을 카이를. 두 사람을 둘러싼 과거의 기억을 드문드문 떠올리다, 이내 곧 고개를 가로 젓는다. 과거의 기억과 상관없이 이 두사람은 서로를 끔찍이도 싫어하는게 당연하니까. 자신은 그것을 알고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위에 올려뒀던 제 수트자켓을 집어든 첸이 '적당히 마셔.' 라고 말했고 반짝거리는 핑크스팽글이 보며 찬열이 토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구리다 진짜.'
"구리다니. 오늘을 위해서 특별히 맞춤제작한거야."
"레이도 이제 끝물이네. 그걸 옷이라고 너한테 입히디."
"…글쎄. 난 만족하는데, 사람들은 아닌가봐. '집에가면 옷부터 태워-' 라고 카이가 말하던걸.
너나 카이나 안목이 비슷한가."
"비슷한게 아니라 정상이야. 옷이야 네가 알아서 하고. 적당한 때에 내 비서가 연락줄거야.
때 맞춰서 우리쪽으로 합류해."
'오케이-' 구겨진 셔츠깃을 메만지며 대답한 첸이 고개를 들어 찬열을 힐끔- 바라봤다. '왜, 또 뭐.'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눈동자에 찬열이 얼굴을 뒤로뺀다. 꽃분홍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입을 달싹인다. 뭐야 얘 왜이래…
"조슈아. 네가 한 가지 모르는게 있어."
"뭘- 그냥 가면 안되겠니. 좀."
"손 잡자. 가 아니라. 부탁인거지. SOS."
"…야."
"유치하게 자존심 세우기는."
'넌 아직도 어려.' 제 이마를 아프지않게 미는 손가락을. 찬열은 대답대신 위로 꺾었다.
*
"항구에 도착하기 오분전. 신의안과 우리쪽 가드들을 선상위로 포진시켜.
카이를 맨 마지막까지 남겨둔다.
백현은 준면과 함께 경수를 찾아. 세훈은 내 곁에서 모든 상황을 통솔하고.
혹시 모르니까, 카이의 가드들을 살피는것도 잊지마."
유람선 곳곳에 집결되어있던 조직원들을 한 곳으로 부르기 위해 세훈이 핸드폰을 들었고, 찬열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준면과 백현이 재빨리 복도로 뛰어갔다. 한창 열기가 달아오른 홀 위로 열린 창너머 해풍이 넘어온다. 천정위의 붉은천이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마치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몸을 흔들었다. 여인들의 드레스자락이 나풀거리며 파트너의 발목을 휘감았고 가면안에 가려진 얼굴은 저마다 입꼬리를 올린다. 그저 하릴없는 한국부호의 가면무도회 정도로 알고있을 저들은, 감히 이곳에서 제 목숨줄이 댕강- 하고 잘릴 수 있다는걸 꿈에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것을 지휘하는 단 한사람, 찬열의 시선위로 들어온 검은가면의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계단위의 찬열을 마주본다.
'경수가 나한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던데.'
'흑사회, 신의안이 날 죽인다더군. 아- 카이의 로렌스 맨하탄을 노린다며. 그게 정말이야?'
'…그게 사실이던 아니던 나와는 상관없어.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조슈아 너 때문이니까.'
묘하게 일그러진 웃음. 속이 뒤틀리는 광경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제 얼굴과는 달리, 카이는 뭐가 즐거운지 입술을 끌어올리며 한껏 조소를 머금었다. 비웃음. 웃음이라 치부했던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찬열을 향한. 악마처럼 뒤틀린 웃음을 짓던 카이가, 곧 홀 한가운데에 멈춰서서 계단위의 찬열을 향해 입술을 딸싹거리며 말을 만들어 낸다. 소리없이 벙긋거리는 입모양으로, 카이는 말을 꺼냈다. 찬열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본다. 마치, 모든 신경이 입술 끝에 달려있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위로, 찬열은 카이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불과 십오분전, 찬열을 앞에 둔 그가 테이블위로 칼을 내리꽂으며 했던 경고의 말을.
'게임은 적당히하고 허튼수는 일찌감치 집어치워. 재밌지도 않으니까.'
'겁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은 경수의 배짱이 귀여워서 봐준거야.
한번만 더 이따위 짓으로 내 목을 따려들면.'
'어느날. 네 침대위에.'
'사랑하는 연인이 심장이 뚫린채 죽어있을거다.'
폭풍의 눈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본다. 나직이 내려앉는 침묵위로, 카이가 입을 달싹여 만든 그 말들은. '리어를 넘겼으니.' 서늘한 시선이 검은 가면위로 닿았다. '경수는-' 화려하기만 한,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내린 찬열이 카이를 향해 가면을 겨눴다. '내가 데려간다.' 건방진 얼굴위로 찬열이 가면을 내팽겨치듯 집어던졌고, 곧 홀위로 그의 의도와는 달리 사뿐히 내려앉는 그것을 카이가 주워들었다.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위로, 다갈색의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마주했다. 방금전의 카이가 제게 했던 것처럼, 대신 입은 더 크게 벌린 찬열이 소리없는 대답을 꺼냈다.
[조옷- 까.]
그것은 곧. 휘몰아치던 폭풍이. 이제 얼마 지나지않아 터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
쾅- 쾅- 복도위로 두 사람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저 끝 객실부터, 지금 제가 서있는 반대편까지 거의 다 왔지만 경수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문고리를 잡아당긴 백현이 나즈막히 욕설을 뱉으며 아무도 없는 객실문을 닫는다. 1,2층은 한곳도 빠짐없이 둘러봤고 이제 3,4층인데. 4층은 야외 정원이고 이제 남은곳은 3층 밖에 없었다. 어느새 땀으로 덕지덕지 이마위에 붙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긴 백현이 반대편을 향해 뛰었다. 경수를 찾지 못한 준면또한 백현의 뒤를 이었고,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개씩 뛰어넘었다. 가쁜숨을 몰아쉬며 복도위로 올라선 백현이 제 앞의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끼이익- 듣기싫은 마찰음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새끼…대체 어디 숨긴거야."
방 안을 모두 둘러보고, 하다못해 침대밑도 살펴봤지만 사람 머리칼하나 안나온다. 뒤이어 반대편문에서 나온 준면이 고개를 저었고, 3층 마지막 객실마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백현이 '아오!!!-' 고함을 지른다.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얼마 안가 항구에 도착하게되면 그때는 더 어려워진다. 사람들 틈에서 경수를 찾을 길이없다. 열이 올라 벌개진 얼굴위로 초조한 숨소리가 복도위,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리춤위로 양 손을 올린 준면이 입술을 깨물다, 풀며 말을 꺼냈다.
"…카이가 뻔하디 뻔한곳에 경수를 숨겼을리가 없어."
"근데 없잖아요 지금. 그 미친새끼 그거… 약이라도 안빨았나 몰라."
"설마, 그럴리가. 똥강아지, 우리가 안가본 곳이 어디지? 경수가 있을 만한 곳이 어딜까."
대답대신 애꿎은 손톱만 깨문 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준면의 말대로 한 곳이라도 안들러본 곳이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두 사람은 유람선 안 곳곳을 살펴봤고. 경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헝클인 백현이 복도위로 구둣발을 내리찍었다. 열받네 진짜.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던 준면이 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선교?"
'네? 뭐라고요 쌤?'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든 준면을 향해, 백현이 의아한듯 되물었다. '왜요? 뭐 짚히는거라도…' 대답대신 백현의 손목을 잡아챈 준면이 복도 반대편을 향해 뛰었다. 방금전과 반대로 계단을 두개씩 내려가며, 백현이 알고나 가자며 준면에게 물었고, '조종실!' 다급한 목소리가 끝맺기도 전에 준면을 앞지른 백현이 선실 밖을 향해 뛰쳐갔다. '야,야 똥강아지!! 같이가!' 하지만 이미 한참 앞지른 녀석에게 제 외침이 들릴리가. 조종실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뒷모습이 흐릿해질 때가 되서야 준면은 이를 꽉 깨물고는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같이좀 가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를 손으로 몇 번 두드린 백현이 조종실에 다다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굳게 닫혀있는 문앞에 서서 뒤를 힐끔- 돌아보니, 저 멀리 복도끝에서 달려오는 준면이 보인다. 제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준면을 뒤로하고 백현은 거칠것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긴장과 불안감으로 날 선 눈빛이 조종실 안을 살폈고, 곧 의자에 앉아있는 선장이 제 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게 보인다. 뭐야…이 불안감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만보는 선장의 얼굴위로, 잔뜩 겁에질린 모습이 겹치는것은, 순전히 제 착각인가. 백현은 방금전과 달리 조심스레 조종실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단단히 굳어있는 눈매위로, 원인모를 두려움이 내려앉는다. 정갈한 흰 제복을 입은 선장에게, 백현은 시선을 옮겼다. 덜덜떨리는 손끝을 한 곳으로 가르킨 선장이 입을 열었다. 두려움에 잠긴 말끝은, 자꾸만 흐려졌다. '벼…벼…벽에…'
"도…도와주…"
"똥강아지!! 같이좀 가자니까-"
제 눈가를 어지럽히는 빨간 레이저는 뒤로하고, 열린 문안으로 들어선 준면의 목소리도 뒤로한, 걸어가던 걸음을 마치 시간이 멈춘것처럼 멈춰세운 백현이 입술을 달싹였다. 조종실 벽 한켠을 빠짐없이 빽빽이 에워싼 것들을 보며 손등으로 눈을 세게 문질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백현이 선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현과 같은 눈을 한 선장은 로프에 의해 팔을 제외한 몸이 의자위로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모든것은 명확해졌다. 단순히 불안함이라 치부했던 기시감은, 그것은, 현실이었다. 우렁차게 백현을 부르던 준면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폭탄이잖아."
조종실 안을 가득메운 붉은 경고등이 두 눈동자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수히.
*
"카이가 폭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가드 몇명을 그리로 보냈는데, 정확한 규모는 잡히지 않는 상태입니다."
"…폭탄처리는 가능해? 규모조차 안잡히는거면, 꽤 크다는 얘기잖아."
"선장말에 의하면, 폭탄을 설치하는 동안 눈을 가렸다는군요. 정확히 어디에 설치했는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감히 짐작도 못한답니다.
족히 한시간이 넘도록 조종실에 있었다니…아마도 배 한척은 쉽게 날리는 양일겁니다."
"그러니까, 이젠 빼도박도 못한다는 거네."
험악하게 굳은 찬열의 얼굴을 살피며, 세훈은 제 손의 핸드폰을 꽉- 쥐었다. 카이가 제 편을 이곳에 끌어들인것도 모자라, 폭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쓸 줄은…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이곳에서 카이렌의 카이를 잡아들일 생각이었고, 그를 국제재판소에 넘겨 최소 30년형은 받게끔 만들고자 했는데. 어이없게 뒤틀어진 계획을 떠올리자니, 세훈은 제 속히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폭탄제거는 가능해?"
"불가능합니다. 폭탄제거에 필요한 액화질소도 없을뿐더러, 제거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걸려요.
차라리 그 안에 뉴욕항구에 도착해서 경찰의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계탔네. 썬포그에 카이렌까지. 경찰들이 좋아서 쌍수들고 환영하겠다."
"항구까지 십분도 안걸립니다. 보스- 카이가 혹시 원하는게 있던가요?
요구라던가, 바라는것 말입니다."
백현의 물음에 미간을 구긴 찬열이 대답대신 담배를 물었다. 담배필터를 치아로 잘근잘근 씹자니, 세훈이 담뱃대끝에 불을 지폈다. 폐안으로 깊숙히 밀리는 연기가 밑도끝도 없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꼭 백현의… 매력처럼. 돌겠네. 이제 하다못해 별거에… 연기를 빨아당겨 홀쭉해진 볼이 연기를 내뿜음과 동시에 원래 자리를 잡았고, 몇 번을 반복한 찬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수를 달라는데."
"…경수…를요?"
"내가 거절했어. 단칼에."
좆까라고 했지. 세훈에게 말하지않은 뒷말을 곱씹으며 찬열이 불쾌한듯 눈을 찌푸렸다. 건방지게 누굴 달라고 감히. 카이가 어딘가에 꽁꽁 숨겨놨을 경수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옛날, 할아버지가 제게 직접 맡긴 한 소년은 오늘날 썬포그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고. 찬열은 그의 하나뿐인 보스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을 되새기며, 그는 담배연기를 빨아당겼다. 후으-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사납게 치켜뜬 눈의 찬열이. 명령을 내린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카이를 내게 끌고와."
*
"설마 폭탄을 배안에 설치할 줄은 몰랐다. 하긴, 니가 제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올리는 없다만."
"잘 아네. 설마 카이렌의 보스가 맨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었을까봐."
"…폭탄이고 뭐고, 그 전에 니가 죽는수가 있어."
"자신있으면 덤벼봐. 제 2의 타이타닉을 지금 당장 눈앞에 보여줄수도 있어."
태연한 얼굴로 대답한 카이가 제 품안에서 작은 소형리모컨을 꺼내들었다. 빨간색, 검은색의 버튼. 단 두가지 뿐인 그위로 엄지를 갖다댄 카이가 찬열을 향해 옅은 비웃음을 그렸다. 네 행동에 수백명의 목숨이 날아갈거야 박찬열. 마치 알아서 잘 행동하라는 눈빛에 찬열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풀었다. 끝까지 당당한 저 면상을, 오늘 제가 갈갈이 찢어놓을거라 생각했는데. 계산을 빗겨간 오판이었다. 카이는 엘리스 아일랜드 머리, 즉 조종실에 어마어마한 양의 폭탄을 설치했고 찬열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첸과의 동맹도 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 상황을 운 좋게 비켜갈 방법은 단 두가지. 카이를 이대로 돌려보낸뒤 후일을 도모하느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이를 죽이고 경수를 되찾느냐. 애석하게도 현실적인 방법은 전자다. 부정할 수 없는 답에 찬열이 답답한 듯 타이를 끌어내렸다. 장기고 뭐고, 온 몸이 뒤집어지는것만 같다. 눈 앞에서 카이킴을 돌려보내자니.
"오늘 즐거웠어. 조슈아. 배도 정박했겠다. 난 이제 가봐야겠는데."
느긋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난 찬열이 타오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주위를 둘러싼 썬포그의 가드들 사이로 걸어간 타오가 밖으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고, 찬열을 향해 다음에 보자며 농담조로 인사를 꺼낸 카이가 막 몸을 돌릴 때였다. 탁자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으며 그 위로 서늘하니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경수는."
"리어를 넘겼잖아. 왜 내게서 경수를 찾는거지?"
"두 녀석 모두 내 사람이고, 썬포그의 조직원이다. 당장 내놔."
"…적당히 까불어. 내가 경고했으면 알아 처먹으라고. 박찬열."
'이 새끼가!-' 거칠게 뒤로 밀려난 의자가 벽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 찬열이, 카이를 향해 달려들듯 몸을 숙였고 옆에 서있던 세훈이 잽싸게 찬열의 팔을 잡아당겼다. '진정하세요.' 진정할 보스는 아니지만, 최소한 이성적인 사리판단은 해야한다. 다른 팔을 붙잡은 준면을 향해 세훈이 고갯짓을 해보였다. 세훈과 준면이 조심스레 찬열을 뒤로 이끌어 물러세웠다. 찬열이 열에받쳐 이를 갈았고, 세훈은 착잡한 얼굴을 하고서 카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빨간 버튼위로 엄지를 올린 카이가, 찬열을 향해 이죽이듯 말을 꺼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봐. 모처럼 불구경한번 제대로 하겠는데."
"…입 닥쳐."
"경수를 찾을 생각은 하지마. 카이렌에도 똑똑한 천재해커 한명쯤은 필요하지 않겠어?"
"씨발. 닥치라고."
살벌한 음성에, 카이는 대답대신 얼굴위로 웃음을 그렸다. 호선으로 접힌 눈을 한 그가 간결한 동작으로 제 뒷춤에 꽂혀있던 총을 빼어들었다. 탁- 안전장치를 풀어, 찬열의 미간 정중앙을 향해 정확히 총구를 겨눈다. 그와 동시에 썬포그의 모든 가드들이 카이와 타오를 향해 위협적인 자세로 총을 들었다. 순간 험악해진 분위기에 세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고, 준면은 제 수트안에 있던 리볼버를 쥐었다. 설마하니, 오늘이 대망의 그날인가. 두 조직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시작이 과연 엘리스 아일랜드가 될것인지에 대하여, 준면이 고민하는동안 세훈은 다른 의미에서 머리를 굴렸다. 두 조직간의 교점이… 단순히 카이렌이 아니라 경수다…? 유독 경수를 사이에 두고 날선 공기를 내뿜는 카이를 세훈은 조심스런 시선으로 살폈다. 뭘까. 카이가 왜…. 하지만, 곧 그가 뚜렷한 확신을 갖기도 전에 총구를 서서히 내린 카이가 미련없이 몸을 돌린다. 열린 문 너머로 카이가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보스."
"…"
"카이를 잡아들이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자칫하다간 배 위에서 모두 죽을수도 있어요."
"…알아. 나도."
전쟁을 시작하기엔 시점이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다. 당장이라도 쏠것만 같은 표정으로 제게 총구를 겨눈 카이를 떠올리며, 찬열은 테이블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쾅!- 실내안을 울리는 거친소음에 세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곧 고개를 드는 찬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후일을 도모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야… 보스의 안전을 지킬수 있으니까요."
"오비서."
"네."
"…경수는 두고 간다. 네 말대로 다음기회를 잡아."
마음같아서야 당장 카이를 죽이고 경수를 되찾아오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찬열은 무고한 수백명의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적어도 제가 배운 '정도'라는 것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제것을 지키는 행위는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뉴욕의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여서 얻는 도경수는. 경수 본인이 치를 떨것이므로. 조악한 변명이라해도 찬열은 다음기회를 도모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대답대신 핸드폰으로 첸에게 전화를 건 세훈이 뉴욕 썬포그 본사에서 만나자고 말을 꺼내는 동안, 방금 전만해도 제 곁에 있던 누군가를 찾아 눈길을 옮기던 준면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흐어억…' 방금전만해도 굳게 닫혀있던 창문이, 쥐도새도 모르게 열려있는건 둘째치고.
"보…보스…"
"왜. 귀신이라도 본거야. 표정이 왜그래."
마치 못볼것이라도 봤다는 얼굴의 준면이 급하게 말문을 텄다. 제가 본게 신기루가 아니고서야, 지금 이곳에 없는 단 한사람. 그 녀석이 그곳에 있는게 확실하다. 카이의 마이바흐를 뒤쫓아 미친듯이 달려나가던.
"리어가. 백현이…"
"…당장 말해."
"카이를 뒤쫓아 갔습니다."
*
"나와!!!!"
"아…안됩- 으아악!"
당황한 기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잡아 차밖으로 끌어내린 백현이 거칠게 차키를 끼워넣고선 문을 쾅- 닫았다. 곧 굉음을 내면서 찬열의 부가티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방금전 카이가 떠나간 길을 따라 백현이 좀 더 속도를 낸다. 반쯤 내린 차창안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광풍이 백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속도계의 빨간선이 위태롭게 끝을 향해 치달았고, 무섭게 치고나가는 차를 향해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켰다.
'경수는 두고간다.'
아니 절대로. 이번 만큼의 보스의 뜻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돈보다 신의가 먼저라고, 사랑보다 우정이 일순위라고 배워왔던 자신이기에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껏 단 한번도 보스의 말에 반기를 든적이 없던 백현이지만, 제 파트너의 생사와 관계된 문제라면 수천번이고 보스의 명령을 거역할것이다. 한낮 패기라고 여길 수 있는 제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알고있다. 앞뒤 잴것없이 창밖을 향해 뛰어내린 행동도, 보스의 차를 훔쳐 카이를 뒤쫓는 지금도. 자신은 썬포그에 돌아가서 맞아 죽을 각오로 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것이다. 치지직- 무전교란인지, 단순히 제가 듣고싶지 않아 만드는 환청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을 부르는 인이어가 계속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파랗게 질리도록 입술을 깨문 백현이, 좀 더 속도를 높였다.
항구를 벗어난 부가티가 해안가도로를 주파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삼 분. 싸늘하게 굳은 얼굴위로 뉴욕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
끼이익!- 속도가붙어 핸들을 돌리는것도 쉽지가 않다. 도로위로 바큇자국을 내며 왼쪽 빌딩옆을 아슬하게 비켜간 부가티가 이번에는 전방 10m앞의 표지판을 그대로 박아버렸다. 쿵!!- 하는 육중한 파열음을 내며 뒤로 꺾인 표지판이 도로위를 나뒹굴었고, 백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좀 더 속력을 높였다. 씨발, 이거 내차도 아닌데. 보스가 애지중지하는 애마는 이제 죽고 없다. 보넷위로 움푹파인 굴곡을 보며 그는 말없이 다시금 핸들을 꺾었다. 방금전 카이가 지나쳤을 길을 곧장 따라가며, 백현은 한계까지 스퍼트를 올렸다.
시속 140킬로를 가뿐히 넘어선 부가티는 금새 카이의 흔적을 따라잡는다. 빨간 표지판에 적힌 'Under Construction' 팻말이 위협적으로 가까워지자 백현은 핸들을 돌려 공사중인 도로안으로 들어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밤이라 인부들은 없었고, 휑한 도로위로 크레인 몇 대가 보일 뿐이다. 그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치던 부가티가 절대 늦출것 같지않던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그 이유는 카이렌소속 경호차량들이 제 시야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백현은 미리 챙겨뒀던 권총을 품안에서 꺼내들었다. 반쯤 열려있던 차창을 완전히 내리고, 핸들을 한 손으로 고정한채 흔들리는 창틀에 기대어 저격자세를 잡았다.
몇 녀석들이 창문을 내리고 이쪽을 확인하는게 보인다. 카이를 경호하는 차량은 총 세대. 맨 앞의 한 대, 가운데가 카이, 그리고 맨 뒤의 두대가 나머지 경호차량일 것이다. 점점 간격을 좁혀오는 부가티를 향해 맨 뒤 검은색 벤츠의 조직원 한명이 백현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백현은 저격자세를 바꿔, 창틀위로 팔을 올렸다. 그 위를 지지대삼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제게 총을 겨눈 조직원을 맞췄다. 아스팔트 위로 핏자국이 흩어진다. 백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자세를 고정했다. 어느새 그를 향해 겨눠진 총구가 셀 수도 없었다. 긴박한 상황에 절로 숨이 낮아지는데, 제 귓가가 시끄럽다. 보스다.
'--치직-츠으-백-현!! 변백현! 대답해!!'
'네'
귓속의 인이어를 고쳐끼운 백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다시금 들려오는 음성은 볼품없이 흩어졌다. 쇳소리마냥 갈라지는 목소리로 제게 명령하고 있을 보스를 생각하며 백현은 다시금 저격자세를 잡았다. 자칫하다가는 핸들이 제 멋대로 돌아 차가 뒤집힐 수도 있는 상황.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는 보스의 음성에, 백현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어-얼른-!!-나와! 도망쳐!! 복귀하라고!!'
앞뒷말은 모두 자른채 간간이 들리는 단어는 뭣같게도 자신의 복귀를 명령한다. 거칠게 갈라져 치지직- 거리는 인이어를 아예 빼버린 백현이 바닥에 놔뒀던 수신기마저 발끝으로 차버린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 걱정을 하고 있을 보스생각에 속이 착잡하다. 방금 제 손에서 벗어난 인이어는 마치 명령불이행의 자신을 향해 지껄이듯 계속해서 치지직-, 간간이 보스의 거친욕설을 뱉었다. 후일이 걱정되긴 했으나, 백현은 곧 제 쪽을 향해 빗발치는 총알세례에 급히 정신을 차리곤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탄유리위로 수십개의 총알자국이 박혀들었고, 타이어를 노린 녀석들이 아스팔트위로 총구를 겨눴다.
아무리 대단한 방탄유리라도 지금같은 총알세례라면 얼마 안가 깨지고 말것이다. 총알이 박힌채 균열을 일으키는 앞유리를 보며 백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없다. 당장 저 새끼들부터. 핸들위로 올려뒀던 손을 내려 백현이 시트를 한껏 뒤로 밀어제쳤다. 제친 시트를 발판삼아 썬루프를 밀어올리고는 곧장 내려와 휘청거리는 차의 브레이크를 밟는다. 급하게 멈춘 바퀴위로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고,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옆 좌석에 놓아뒀던 제 팔뚝만한 길이의 MP7을 들어올린 백현이 썬루프 바깥을 향해 상체를 들어올렸다, 곧 사격자세를 잡는다.
멈춘 백현을 향해 몇 녀석들이 총구를 집어넣었는지, 이제 그를 주시하는 조직원은 고작 넷 남짓. 방심은 금물이다 새끼들아. 움직이는 차와 멈춘 차창밖에서 총을 겨루는것은 천지차이다. 정확히 세번째 벤츠위로 시선을 고정한 백현이 입술을 끌어당겼다. 멀어지는 차량을 향해 MP7의 육중한 고개가 서서히 들렸고, 곧 미련없이 당겨진 방아쇠가 탄환을 쏘아보냈다. 쾅!!!!!- 길 위에서 검은불꽃을 내며 터진 차량이 가드라인을 처박고 튀어나간다.
이제 하나.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백현이 다시 총을 집어들었다가, 이내 곧 몸을 내려 엑셀을 밟았다. 세번째 차가 불꽃과 함께 사그라드는 모습을 확인한 맨 앞 차량이 금새 뒤로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카이를 경호하는 차량은 두 대, 엄청난 속도로 멀어진 거리를 금새 따라잡는 부가티를 향해 총알이 빗발쳤다.
차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녀석 중 하나가 운전석을 향해 무언가를 집어던진다.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도로위에서 굴러오는 그것을 확인한 백현이 재빨리 핸들을 돌렸다. 미친놈새끼가 수류탄을- 군대에서나 볼법한 그것이 제 앞에서 쾅!!- 요란한소리를 내며 터졌고 바람에 밀려드는 연기에 백현이 차창을 올렸다. 룸미러로 확인한 제 몰골이 엉망이다. 언제 총이라도 맞았는지 목 언저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낸 백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에이 씨발, 산재도 안되는데.
엑셀을 밟아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고나간 부가티는 금새 멀어졌던 간격을 좁혔다. 백현은 차창을 내려 다시 시야를 확인했다. 불투명한 유리판위는 난사된 총알덕에 한치앞도 쉬이 판단할 수 없어 육안으로 상대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내 곧, 거의 좁혀진 거리에 요동치는 몸을 애써 고정한 백현이 발목언저리에 끼워뒀던 데저트 이글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축축하게 와이셔츠를 적신 핏물때문에 차안이 온통 핏내로 가득하다. 언제 맞았는지 기억도 안나는 상처를 곱씹으며 백현은 차창밖으로 다시한번 총구를 겨눴다. 가속에 휘몰아치는 광풍탓에 눈뜨기도 어려워 이를 꽉 깨물고서 방아쇠를 잡아당겼고, 타이어위로 그의 총알이 파고들었다. 뒤틀어진 타이어 휠이 방향을 잃고 요동친다.
균형을 잃은 벤츠가 빠르게 회전하며 백현이 탄 부가티를 스치고 지나갔다. 볼품없이 아스팔트 바닥위로 처박히는 차량을 룸미러로 확인한 백현이 안심을 하기도 전에, 나머지 경호차량이 그를 향해 닥치는대로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파팍- 총알세례를 견디지 못한 앞유리가 서서히 가쪽에서부터 금을 내며 깨진다. 밖으로 내밀었던 몸을 안으로 집어넣은 백현이 다시시 MP7를 집어들었다. 서서히 깨진다…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키는 균열을 바라보자니 절로 마른침을 삼켜진다. 이제 하나. 차선을 좌우로 넘나드며 시야를 방해하는 마지막 경호차량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백현이 방아쇠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한 발을 들어 핸들을 고정한 채, 한껏 뒤로 몸을 젓힌 자세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 탕!!- 거침없이 앞을 향해 튀어나간 탄환이 검은벤츠를 뚫었고, 백현은 사방이 요동치는 가운데 제 앞으로 쏟아지는 유리조각에 질끈 눈을 감는다.
카이를 경호하는 차량은. 이제 단 한대도 남지 않았다.
*
사방에서 날아꽂히던 총알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다. 백현이 질끈 감은 눈을 떴을때.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있었다.
하늘위로 솟구치는 불꽃아래, 형체도 못알아볼 만큼 일그러진 벤츠가 도로위에 덩그라니 남아있다. 도로 한 가운데를 막고선 불꽃이 백현의 시야를 가렸고, 카이의 차를 가렸다. 아니. 가렸다기에는 이상하다. 천천히 엑셀위로 발을 떼며 브레이크를 밟은 백현이 차를 갓길에 세웠고, 엉망으로 망가진 부가티의 시동을 끈 그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진 도로위, 유일한 빛이라고 할 수 있는 불꽃이 점점 제 몸을 일으킨다. 휘청거리는 그 너머,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음에 백현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흥분인지, 긴장인지, 가시지 않은 감정으로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백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카이의 경호차량 모두를 처리했는데. 뭔가 잘못됬음에 백현이 인상을 굳혔다. 제 시야를 메우는 불꽃, 그리고 아직 가시지않은 회색연기, 사방으로 퍼지는 피비린내는 고사하고. 경수가… 경수가 탄 차량이… 카이의 차가 없다. 아니, 애초에 없었다는 것처럼. 긴박한 상황에 남겨졌을 바퀴자국하나, 거친 엔진소리, 어느 무엇하나 흔적이 없다. 카이의 마이바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된거야."
손톱이 패이도록 쥐었던 주먹을 들어 그대로 아스팔트위로 주먹을 내리꽂는다. 뼈가 으스러지는 아픔보다, 눈앞에서 경수를 놓친 제 아둔함에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수류탄, 회색연기. 빌어먹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맞춰지는 퍼즐조각에 백현이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 그때 제 시야를 가리고서 도로를 빠져나갔을 것이고, 이미 한참 격차를 벌려놨을 것이다. 뒤를 쫓기에는 백현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아스팔트위로 꽂힌 제 주먹아래로 뭉근한 핏물이 점점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위로 갈곳을 잃은 눈동자가 도로위를 헤맸다. 보스를 뒤로하고, 모두를 걱정시킨 댓가가. 고작. 이거라니. 긴 터널과도 같은 어둠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백현은 지독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씨발!!!! 어떻게 된거냐고!!!"
몰아치는 바람아래, 서서히 불꽃이 몸집을 부풀린다. 부서진 자동차를 집어삼킨 불꽃이 넘실거리며 백현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눈 앞에서 경수를 놓쳤다는 자괴감에 빠진 백현이, 그것을 알아챌리가 없었다. 지금 그에게, 이 공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목적이자 이유가 사라진 길위로 차가 한 대 멈추는것도 모를만큼. 찢어질듯 바큇소리를 내며 멈춘 차 안에서, 누군가 뛰어내렸고 곧 백현을 향해 뛰어온다. '위험해!!!-' 거친 고함을 내지르며 제 뒷덜미를 잡아당긴 손길에, 그제서야 백현이 정신을 차리곤 앞을 쳐다봤다. 깜빡거리는 눈동자위로 익숙한 손바닥이 시야를 가로막아 눈앞이 어두웠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을 품안에 끌어당긴 사람이 누군지.
백현을 당겨 도망치듯 부가티 뒤로 몸을 날린 찬열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는 곧, 제 품안에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을 떠올리곤 거칠게 어깨를 틀어쥐었다. 놀란 눈이 자신을 마주했다. '너…너….' 마음 같아서야 당장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싶은데, 방금전 위험한 상황이 떠오른다. 다친데는 없는지, 제 몸을 살피며 걱정스런 눈길을 한 찬열을 향해, 백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보스."
"뭐가 죄송한데. 겁없이 2층 창밖에서 뛰어내린거, 아니면 내 차 도둑질한거.
그것도 아니면."
"…"
"네가 그렇게 존경한다는. 보스의 명령을. 처음으로 어겼다는거. 그걸 말하는거야?"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보스의 명령을 어기고, 겁없이 보스의 차를 훔쳐, 보스의 눈앞에서 달아났다. 제가 생각해도 충분히 화가 날만함에 백현이 대답대신 고개를 숙였다. 벌을 받으라면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당연했고. 보스의 실망감이 제게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백현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찬열의 속이 더 타들어가는 것을 꿈에도 모를 백현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또 다시 죄송하다며 찬열의 속을 헤집었다. '그만해.' 백현의 사과를 자르며 찬열이 입을 열었다.
"…멀쩡하니까 됐어. 사과는 그만해."
"아…"
"다쳤으면 안봐줬어. 그나마 멀쩡해서 봐줬다. 오늘은."
짐짓 다행이라는 어투로 말을 끝맺은 찬열이, 백현의 머리칼위로 제 손을 얹었다. 제 손바닥위로 착하니 감기는 조막만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찬열이 옅은 웃음을 머금는다. 오늘 백현의 책임은 언젠가 먼 훗날 물을 생각이었다. 머지않은 그때를 떠올린 찬열이 백현을 향해 입을 열려는 듯 말을 꺼내는데, 머리칼을 부비던 제 손을 잡아내린 백현이 난감한듯 '으으-'하는 신음을 내뱉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검은 부가티뒤로, 얼마 투과되지 않는 불길에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찬열이 고개를 앞으로 기울인다. '보스 저 사실은…' 작은 목소리로 백현이 말을 하는게 들린다. 좀 더 크게 말하라며 찬열이 말을 꺼냈고, 순간. 힘없이 제 쪽을 향해 기울어지는 몸을, 놀란 찬열이 품안에 끌어안았다. '백현아, 백현아!-' 쓰러진 백현의 어깨를 흔들며 찬열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찬열이 백현을 안아들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제가 끌고온 차 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백현……"
어둠에 가려 보이지않던 몸 위로. 차갑게 식은 핏물이 백현을 덮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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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월요일 뵙겠다고 했는데... 지금 시간이 새벽 세시가 넘었네요.... 정말...정말.... 미안합니다 (__)
이런 시간개념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먹은 작가를... 그대들은 용서하지 않을...용서해줘요ㅜㅜㅜㅜㅜ 흑ㅜㅜㅜㅜ 미안해요ㅜㅜㅜㅜ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되나요ㅜㅜㅜㅜ 그런의미에서 큐인미 12화는 금요일 업뎃♥♥♥
목요일 올리고 싶었는데, 그날은 제가 친가에 가는 관계로 다음날인 금요일 올리겠습니다...^^;;; (어..그리고 닥남은 수요일 올라와요. ...얘를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 큐인미 12화 13일 업뎃.
음...이번화 부족한게 많을거에요;;; 우리 똑똑한 독자님들ㅜㅜㅜ 요즘들어 추리력이 급!! 상승하시는 여러분은 '헐퀴- 이 허접한 글으ㅇㄴㄴㄴ?!!' 이런 반응을 보이실 수...도 있지만 ㅜㅜㅜ 그래도 재밌게 봐주세요..ㅜㅜㅜ (여담이지만, 이제 보니 경수가 이번화에 한편도 등장하지 않네요;; 핡... 다음화엔 카디행쇼...) 백현의 불같은 레이스와...사라진 애인을 찾아 급히 뒤따라온 찬열신을... 여러분은 어여쁘게 봐주셨을거라 믿습니다...^^;;;;;식은땀이... 날고뛰는 종대는...어느순간 사라졌어...???!!! .. 고친다는게 어쩌다보니 종대분량을 칼같이 잘랐다는..;;
그리고 다음화스포는...음... 없어요.
^^...장난이죠.
1. 복수극의 서막 2.카디...행쇼...하면 안되겠니. 3.능글첸.
이정도 되는데...지금 제 손가락이 멘붕인 관계로 재밌는 글이 나올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쓸거에요!! 그럼 우리 다음화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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