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있습니다)
The Lignt
w. 오이쓸
"조심해요!!!!"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산산조각이 나는 그 파열음에 공기가 깨져갔다. 진동하는 그 어수선함에 정신을 못차리고 위를 바라본 순간 제 옆으로 달려오는 백현이 보였다. "박찬열!!!" 갑작스럽게 저를 덮치는 그 유리조각들을 눈치챘을 때 이미 저는 저 멀리 튕겨져 나간 후였다. 윽.하고 터지는 고통에 손을 보니 유리조각 몇개가 박혀 피가 터져나왔다. 내가. 왜 무사하지. 그럴리가 없는데. 순식간에 울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앞을 바라보니 백현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ㅂ...백현..." 조금 떠진 그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힌 유리조각을 뺄새도 없이 달려가 그를 안아들자 그의 눈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찬열아. 그의 몸에 수없이 꼿아내려진 그 유리들을 조금씩 빼내며 흐르는 눈물줄기가 자꾸만 뿌옇게 변질되어 앞을 흐리게 만든다. 제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가 저를 대신해 피를 쏟고 호흡이 가빠져온다. 찬열아. 한번 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와 그를 보며 다그쳤다. 미친놈아 조용히해. 울음이 목구멍에서 막혀와 말하는 도중에도 울컥하는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고 갈라져온다. "나.. 니 얼굴이 안보여." "입닥쳐..흐윽...닥쳐 변백현." "보고싶은데." "흐으....윽...." "세상이 까맣고 빨개서 니가 안보여." 쿨럭하고 뱉어내는 새빨간 핏덩이에 자꾸 눈물이 쏟아져 미칠 것만 같았다. 누가 빨리 신고 좀 해주세요. 제발 누가 우리 백현이 좀 살려줘요. 애원하는 제 말에 그제서야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전화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머 어떻게 해. 쏟아지는 안타까움에도 백현은 초점없는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피로 뒤덮여 맑고 사랑스러운 그의 눈이 보이질 않았다. 떨려오는 제 손을 들어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 앞에 가져다대고 조심스럽게 좌우로 저었다. 그가 정말 보이지 않는지. 아무리 손을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도 그의 초점이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찬열아. 자꾸만 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쏟아내는 제 울음소리에. 세상이 끝났고 제 인생도 끝났다. 그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그 빛을 이제 보여줄 수가 없다. 저 때문에. 빌어먹을 박찬열이. 그의 꿈을 지게 만들었다. "보고싶다." "..흐윽....백현아..." "박찬열." 보고싶어. 찬열아. 애타게 울려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그의 눈이 감기며 피 한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스며들었다. 희미한 숨소리에 그를 껴안고 눈물을 참아가며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그를 더욱 당겨안았다. 백현아. 우리 백현이. 내 백현이. 아무리 불러도 감은 눈을 뜨지 않는 그를 제 품에 그렇게 가두며 제 옷에 뭍은 그의 피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백현아. 사랑해 내 변백현. 사랑해. * * * 추운 11월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고등학교 2년 2학기가 막 끝날 때 쯤이였다. 선배들 반만 닮아봐라. 늘 그 소리를 달고 다니던 2학년 학년 부장 선생님이 반에 들어와 야자를 관리하고 있을 때 즈음 핸드폰이 우웅거리고 제 바지주머니를 울려대자 다급하게 손을 내려 꾹 막았다. 허벅지로 전달되어오는 그 진동에 몸이 흠칫거리자 저를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이 제 앞으로 다가오며 한 쪽 눈썹을 정확히 삼각형으로 꼬아올렸다.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놔. 아 쌤. 숨을 쓰읍하고 들이키는 그 행동에 쫄아 중얼거리며 제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을 건네자 한순간에 낚아챈다. 아. 좆됐다. 분명 야자끝나고 만나 피씨방을 가자 했던 도경수의 얼굴이 번뜩하고 떠올랐다. 도경수 이 개새끼. 설마 일부러 문자보낸 거 아니야? 욕을 씨부리며 제 책상 반대편 끄트머리 도경수를 보자 그는 이미 수면상태였다. 꼬깃꼬깃해진 천원짜리 다섯개를 매만지다 잠이 들었는지 책상 서랍 끄트머리에 돌돌말아 집어넣은 그 돈을 보며 침을 삼켰다. 아. 저거 탐나네. 방금 전까지만해도 누명을 씌우며 씹어댔던 도경수가 천사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슬쩍 가져가도 모르겠지. 금방이라도 경수가 눈을 뜨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저를 볼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들썩이는 엉덩이에 손톱을 잘근잘근 물다가 결국 일을 저질렀다. 의자 틈새와 책상 틈새 사이들을 지나쳐 도착한 그곳에 저를 반기는 그 오천원을 낚아채어 가는 순간 제 눈앞에 삐딱하게 서서 저를 반겨주는 학년부장의 얼굴이 웃고있다. "찬열아." "네 선생님." "미쳤니." "그럴리가.." 복도에 울려퍼지는 마찰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알싸한 고통이었다. 제 탄력있는 엉덩이가 기다랗고 넙적한 막대기와 사정없이 만남을 하고있었다. 악악 소리를 질러가며 잡은 난간에 힘을 주자 시끄러워 새끼야. 다시금 내려쳐지는 그 손길에 눈물이 핑돌고 허리가 쓰라려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 고통을 참아보자 제 시야에 히죽대며 웃고 있는 도경수가 보였다. 그것도 그 오천원을 입에 문 채. 저 개새끼가. 악! 찬열아. 이 선생님은 마음이 참 아프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제 엉덩이를 아작내는 그 손길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혀를 감아 간신히 참아냈다. 마음이 아프긴 개뿔. 힘만 좆나게 쎄가지고는. 몇 대를 더 맞고 제가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서야 끝이 난 타작질에 헉헉대며 엉덩이를 문지르니 저를 보며 숨을 고르는 학년부장의 얼굴이 마귀같았다. 제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치켜올리자 눈깔아 새끼야. 한번 더 그 막대기를 위로 쳐올리는 그 손길에 쫄아 눈을 내리깔자 웃으며 옆반으로 유유히 걸어나간다. 분하고 아파서 앞에서 저를 쳐다보는 도경수에게 침을 찍 내뱉자 소리를 지르며 저를 쫓아오는 그를 피해 가방을 낚아채고 교문 밖으로 무작정 뛰었다. 어어! 저 새끼들이! 뒤에서 들려오는 그 고함에 미소가 걸리고 딱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내일은 팬티 다섯장 입고 올거다 씨발놈아. 즐겁다는 미소를 입에 한가득 걸고 제 뒤를 쫓아오는 도경수의 바지가 꽉 조여보였다. 둘이 숨을 헉헉 대며 달리다 요 앞 버스정류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빠르게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터덜터덜 걷다 이내 쭈그려앉아 헥헥대며 도경수를 바라보니 그 놈도 저와 똑같은 처지였다. 야. 왜. 니 바지 좆나 작아. 패션이야 새끼야. 제 머리를 툭하고 쳐대는 그 작은 손바닥이 꽤 단단했고 그 덕분에 멈췄던 우리는 다시 도망치고 쫓기 바빠졌다. 딱멈춰! 제 앞에서 쪼르르 달리고 있던 도경수가 뒤를 보며 입을 삐죽댔다. 달리기 개못해. 그 입모양에 한번 더 빡도는 세상 안을 질주했다. 앞서 웃고 뛰어가던 도경수가 버스정류장으로 들어서는 길에 멈추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뒤이어 따라와 도경수의 뒷통수를 치자 악 소리를 내며 문지르는 그가 저를 노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꼬라보냐. 하고 돌린 그곳에. 그가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 조금 큰 교복마이가 색스러웠다. 분명 저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를 찬찬히 훑었다. 하얗게 내리비추는 그 가로등에 기대어 땅바닥을 툭툭 차대는 그 검은색 캔버스 운동화가 제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에 손을 꼿고 음악을 듣던 그가 느릿하게 저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번 생긋 웃자 멍하니 있던 경수가 저를 툭툭 쳐대며 귓속말을 해왔다. 야. 쟤 남자맞지? 대답이 없는 저를 한번 더 쿡쿡 찔러오는 그 손을 쳐내며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제가 발을 옮기는 걸 보자 비스듬히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며 한 쪽 이어폰을 빼자 그 속에서 작게 들려오는 음악은 하필이면 제가 제일 열광하는 라빈 누나의 Innocence. 제 움직임을 나른하게 보는 그 시선에 손을 올려 이어폰 한쪽을 낚아채 확인해보니 그 노래가 확실했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뀌는 그의 표정에 씨익 웃자 뭐에요? 라는 청명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빈 누나 노래라서요." "네?" "Innocence 맞죠?" "..에이브릴 라빈이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가 찬 듯 제 손에서 이어폰을 다시 뺏어가 귀에 꼿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귀엽다. 남자한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처음인가. 아니 애초부터 그가 누구건 상관이 없었다. 그래. 조금 흙이 뭍은 그 캔버끝과 MP3의 볼륨을 조금 더 높이는 그의 손가락과 귀를 살짝 덮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까지 반하지 않은 것이 없다. 뒤에서 확 잡아끄는 손길에 놀라 뒤돌아보니 도경수가 입술을 깨물고 저를 미쳤냐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돌았냐? 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뒷머리를 정리하는 데도 화가 나지 않는다. 분명 평소 같았으면 도경수를 두번정도 후려쳤어야 했는데 화도 나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미소가 실실대며 흘러나왔다. 쯧쯧거리며 혀를 차는 도경수의 배를 한번 주먹으로 어루만져주니 맞은 부위를 감싸며 허리를 숙인다.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한 남자였다. 하얀 피부가 조명에 빛나고 있었다. 깨끗한 그 얼굴에 손을 올리고 빨간 입술에 제 입술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을 크게 떠 깜빡이다 제 뺨을 한번 내려쳤다. 찰싹하며 울리고 아픔이 싸하게 몰려오자 반대쪽 손으로 제 볼을 잡고 흐으.하는 소리를 내보냈다. 쿡하고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저를 보며 미쳤다고 고개를 내젓는 도경수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뺨을 감싸쥔 저도 고개가 들려지고 앞을 바라보자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그가 입을 말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괜시리 삐져나오는 웃음에 실없이 또 히죽거렸더니 제 등짝을 내려찍는 경수로 인해 기분이 다시 잡쳤다. 저쪽 구석 모퉁이에서 불빛을 깜빡이며 다가오는 버스 한 대에 그가 가방 앞 지퍼를 열어 버스 카드를 꺼내더니 다시 가방을 고쳐매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퍼지는 제 등짝의 고통에 어루만지며 옆을 보니 이미 경수는 앞에 가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저 새끼가 진짜. 이를 갈고있는 저를 한번 보며 희미하게 웃는 하얀 그가 버스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서둘러 올라 대충 돈을 쑤셔넣자 그가 가장 뒷자리에 홀로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망설임없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여앉자 아까 맞은 그 고통이 훅 치고올라왔다. 몸을 베베꼬며 신음을 흘리는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이내 괜찮아요?라고 물어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바라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주는 경수의 친절함에 웃음을 비추자 그가 고개를 획 돌려앉았다. 왜저래. "몇학년?" "아... 고2요." "나돈데! 친구네" "아.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 머리를 벅벅 긁어대다 그와 창문으로 눈이 마주쳤다. 저를 흡수하는 그 눈빛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반대편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경수가 보였다. 제가 먼저 눈을 피하니 그가 픽하니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심플한 핸드폰을 꺼내들어 화면을 달칵거렸다. 책인지 모를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지 몸을 슬쩍 뒤로 빼 훔쳐보니 죄다 시사용어다. 슥슥 화면을 만져대는 그 엄지 손가락도 가늘고 하얗다. 그제서야 생각난 뺏긴 제 핸드폰에 머리를 쥐어뜯자 그가 다시 한번 저를 힐끗댔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한순간에 튀어오르자 순간적으로 휘청이던 그가 제 가슴팍에 부딪혔다. 코끝으로 확 올라오는 그 샴푸냄새와 살내음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자꾸만 간질거리는 마음에 제 쪽으로 쏠린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살짝 닿았던 그 허리가 얇고 가늘었다. 밥을 먹긴 하나? 진지하게 스쳐지나가는 그 생각에 눈을 내리깔자 그가 제게 속삭였다. 2학년 B반 변백현. 귀밑으로 느껴지는 가벼운 입바람에 목을 움츠리자 그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저를 본다. 그리고 뚜렷하게 들려오는 그 한마디. "기억하라고. 나한테 반했잖아." 살살대며 눈꼬리를 휘는 그 웃음에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변백현. 응. 나 너한테 반한 것 같다. * * * '실명입니다.' '거짓말.' 매일마다 찾아갔던 그 교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방과후의 교정은 조용하고 어둡다. 아무도 없는 학교를 저혼자 걸어나가며 손을 달싹이자 환영으로 보이는 백현이 제게 다가와 웃으며 제 손을 감쌌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미소지으며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는데 그대로 관통해 사라져버린다. 희미하게 퍼지는 그 아릿한 슬픔에 눈가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백현아. 자꾸. 니가 그리워져서 미치겠어. 손가락 틈새로 뭍어나오는 그 먼지를 털어내자 뿌옇게 앞이 시렵다. 노을이 지는 창가에 앉아 저를 보며 미소짓던 그가. 이제 더이상 저를 볼 수 없댄다. 다시는 앞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의사는. 수업 중이던 백현의 교실 창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거리며 그를 찾았었다. 필기를 하다가 눈을 돌려 윙크하는 그 눈에 입을 막고 쓰러지는 척을 하자 웃음을 참지 못해 소리내어 미소지은 그가 복도로 나와 벌을 설 때도 옆에 앉아 꼼지락대며 그를 껴안았다. 백현아. 응? 사랑해. 제 앞에 보이는 듯한 그 추억을 이제 저 혼자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기억을 잃었다. 온몸을 뚫어버린 그 유리들 틈에서 그 작은 몸이 살아남은 것이라도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사한다 믿었건만. 볼 수도. 저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를 제 발로 떠나왔다. 쏟아내는 피 눈물을 받아내며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선생님의 눈치를 봐가며 사랑한다 작게 속삭였던 제게 그는 꽃잎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줬다. '나도.' 그와 제가 같이 앉았던 복도에 쭈그려앉으니 그가 저를 안으며 말해줬던 그 기억이 제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문을 열자 매일같이 맡았던 그 분필냄새가 아프다. 탁탁거리며 쓰여지는 공식들과 하얗게 분필이 뭍어있는 선생님의 손가락까지. 아직 모든 게 생생하기만 한데 고갤 돌려 그의 자리를 봐도 그가 없다. 텅 비어버린 책상으로 다가가는 발길 조차도 너무 무거워서 느리장을 부렸다. 그가 앉았던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 그가 엎드렸던 책상에 고갤 박고 떨어지는 눈물을 쏟아내자 방울방울 고여 모이는 그 눈물 웅덩이를 보며 입을 막았다. 난 네 반에 매일같이 찾아와 널 보며 인사했고. 넌 날 볼때마다 눈가가 휘어지게 웃어주며 찬열아. 라고 불러주었다. 손에 감기는 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입맞추자 간지럽다고 날 툭툭 쳐대는 네 손길도 그저 사랑스러웠고. 물리시간에 졸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네 목소리에 일어나 창밖을 훔쳐보며 체육수업을 하고 있던 네 모습에 키득커렸고. 불꽃놀이를 보자며 야자를 튀고 내 손을 잡아끌며 뒷산 언덕까지 올라가 헉헉대는 날 보다가 이내 터지는 밤하늘에 아이같이 기뻐했던 너를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백현아. 내 백현아. 막을 수 없는 눈물을 손으로 비벼대다 책상 서랍 속 보이는 네 조그마한 글씨체에 손을 뻗어 집어든 쪽지안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었다. 박찬열. 보고싶다. 눈이 보이지않게 되던 그 순간까지 네가 그토록 외쳐댔던 그 말이 적혀져있는 그 종이 쪼가리를 안고 난 또 눈물을 흘렸다. 교실 바닥에 구르고 있던 연필을 짚어 잇새로 삐져나오는 고통을 참고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다시 닦아가며 삐뚤삐뚤 네게 답장을 적었다. 언제 누군가가 이걸 발견할 때쯤엔 너와 내가 함께있을까. 우리 둘 중에 누구라도 살아는 있을까. 고이 접어 다시 책상 속으로 쑤셔넣고 이미 젖어버린 소매 끝을 다시 잡아 눈을 훔쳐내며 일어나 교실 문을 닫았다. 더이상 보이지 않는 교실풍경에 마음이 다시 먹먹해져와 그렇게 닫혀진 문앞에서 한참동안이나 서성거리고 망설였다. 이 문을 다시 열면 네가 저기에 앉아 날 보고 있을까. 힘들게 적어나간 그 말을 네가 가장 먼저 발견해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을까. '기다릴게.' 서툴게 적은 내 글씨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눈물이 많은 너니까 분명 울겠지. 근데 백현아. 네가 울어도 좋으니 내가 적은 저 종이를 한번만 더 봤으면. 딱 한번만 더 봤으면 좋겠다. 날 보지 않아도 좋으니 저 종이. 저 조그마한 내 마음 하나를 한번 더 봐줬으면 좋겠어. 그럼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메마른 공기가 갈라진 입술사이를 타고 들어와 색색대며 숨구멍을 막는 기분에 호흡을 멈추고 계단 높이 보이는 창문을 응시했다. 새파랗게 푸른 하늘에 햇빛이 따사롭다. 이제 그는 햇빛조차 보지 못하는. 영원히 까만 세상에 갇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그가 말했던 그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찬열아' '응?' '보고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하고 되받아 치자 넌 내 목을 껴안으며 말했었다. 왜 가수들 무대에서. 응응. 노래부를 때 그 가수 위를 비춰주는 빛있잖아. 조명? 응. 그 말을 하고 있던 네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여졌고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싶어. 갑자기 왜? 난. 응. 한참동안이나 대답하지 못하는 너를 그저 기다리고 있는 내게 가볍게 입맞추더니 넌 가장 환한 미소를 보이며 예쁘게 웃었다. '가수가 되고싶어.' 무대에 올라 그 빛을 보고싶다는 너의 말에 난 웃었고 비웃는거냐며 내 가슴을 톡톡 쳐대는 네 작은 주먹을 손에 쥐고 난 다시 네게 입을 맞췄었다. 그래. 볼 수 있어. 변백현은 내꺼니까. 운동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던 제 눈에서 똑하고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원 밖을 나오기 전 들렀던 백현의 병실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누구 없냐고. 옆으로 다가가 백현을 말리는 어머님의 손길에도 그는 소리지르며 울고있었다. 붕대에 점점 젖어들어오는 그 핏줄기가 다시 한번 제 눈에 일렁여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엄마. 나 아무것도 안보여. 엄마.. 엄마. 귓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백현의 목소리가 저를 죽여나간다. 백현은 저만 기억하지 못했다. 스스로 박찬열을 지워버렸다.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쉬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넌 계속해서 눈물을 뽑아냈고 터져버린 실핏줄에 넌 피를 또 한번 토해냈다. 널 보며 웃었던 나와 날 보며 웃었던 네가 이제 기억나지 않아 머리를 두어번 툭툭 치니 점점 더 새하얘지는 기억에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나도 너 닮아가나보다 변백현. 차라리. 나도 잊어버렸으면 좋았다. 널. 변백현을. 그리고 변백현만 사랑했던 박찬열을. 잊었으면 좋겠다. "백현아..." 허공으로 부서지는 제 목소리에 다시 한번 미소짓자 바람이 불어온다. "미안해." 나는 오늘도 네게 못다한 말을 혼자 하고있다. 손에 쥔 목걸이를 주먹안으로 말아쥐고 난 후 너를 한번 더 불러보았다. 사랑해 백현아. * * * 오랜만에 나온 바깥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비록. 제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코로 느껴지는 봄꽃내음과 입안 가득 들어오는 달콤한 공기와. 무엇보다 얼굴을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빛에 기분이 한결 나아져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비어버린 제 뇌를 한탄하고 절규해도 어차피 되살아나는 기억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집안에 틀혀박혀 지낸지도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익숙해진 까만 세상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였다. 처음 1년은 제 자신을 위해 울었고 그 다음 1년은 자꾸만 떠오르는 한 남자를 위해 울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대답하리라. 나를 위해 울어줬던 그 남자의 얼굴이요. 라고. 시야가 빨갛게 물들여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제 손을 잡고 끌어안아주던 그 남자를 기억하고 싶다고. 바람이 살랑거리며 제 목언저리를 간지럽히자 부드럽게 흔들리는 목걸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오늘은 좀 더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밑창으로 전해지는 잔디의 푹신함에 꾹꾹누르며 앞을 걷는데 갑자기 짖어대는 개한마리로 인해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에 더듬거리며 짚어보니 목걸이가 없다. 넘어질 때 부딪힌 충격으로 풀어진 듯 했다. 까만세상에서 나 홀로 손을 뻗어 그 넓은 잔디밭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막연히 드는 불안감과 초조함,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제 쪽을 향해 짖어대는 개를 피해 엎드려 손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들려오는 한 목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쉿. 착하지. 개를 달래는 그 목소리에 세상이 조용해지자 제게 다가오는 구두굽 소리가 들려 누구세요? 라고 물으니 괜찮아요? 안다쳤어요? 하며 다정한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저를 일으켜주는 그 따뜻한 손에 무언가가 울컥했지만 제 자신을 달래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바지를 털어주는 그 세심한 손길에도 그저 멍하니 서서 눈을 깜빡였다. 왠지 보일 것만 같았다. 닿은 그 손이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보이지 않는 제 세상을 밝혀주진 않을까 그렇게 혼자 바보같은 착각을 했다. "아..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왠지 웃음이 담긴 그 목소리에 저도 같이 웃어보이니 한참동안 저쪽에서 말이 없다. 갔나 싶어서 손을 앞으로 내저으니 부드러운 손가락이 저를 잡아준다. 저기.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그를 부르니 네.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조금 젖어있다. 잘못들은거겠지. 괜찮으시다면 목걸이 좀 찾아주시겠어요? 그가 혹여나 거절하면 어쩌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돌아가는 거였는데. 늘 걷던 그 산책로가 아닌 조금 더 걸어보자는 그 욕심에 가장 소중한 그 목걸이를 떨어뜨려버렸다. 기억을 잃었을 때 제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목걸이였다. 말이 없는 그로 인해 그래. 시각장애인을 도와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풀썩거리고 이리저리 휘저어지는 풀소리에 몸이 멈췄다. 한참을 그렇게 들려오던 풀소리가 멈추고 일어나 손을 터는 그 소리에 찾았어요? 하고 물어보니 느리게 그가 말을 내뱉는다. "아니요...목걸이는 없네요." "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저기." "네?"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았어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작은 중얼거림에 웃음이 나왔다. 작업하는 건가? 그러기엔 너무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한 그 순수함이 느껴지고 마음이 간질거렸다. 작게 미소지은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려 키득거리자 그가 당황하며 진짜에요. 한번 더 힘주어 말해준다. 여전히 입가에 남아있는 미소를 그에게 지으며 그거 되게 식상한데. 하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초점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제 눈을 보고있을까. 제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이 남자는 알고있는걸까. 작게 떨리며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미소가 가셨다. "정말..많이 닮았어요." "이름이 뭔데요. 그사람?" 혹시. 저를 알고있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 것이다. 혹여나하는 기대는 끊임없이 차올랐고 매번 착각하는 제 자신이 안쓰럽고 비참했지만 그 끈하나마저 없었다면 저는 살아갈 수도 없었으리라. 대답이 느린 그를 기다리며 손톱을 매만지고 있을 때 그가 푹 젖은 목소리로. 한번에 알아챌 수 있을만큼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제게 아주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매만지던 제 손톱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변...백현이요." "어? 저랑 이름이 똑같.." 멈춰버린 공기의 흐름에 서로 말이 없었고 저를 바라보고 있을 그에게 손을 다시 뻗자 그 단단한 팔이 저를 잡아준다. 나..알아요? 무언가가 터져버릴 듯한 기분에 울음을 참고 그에게 되물으니 손등에 물 한방울이 떨어져 흘렀다. 비가 오나 싶었는데 여전히 제 얼굴에 내리쬐는 햇살은 따뜻하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손을 힘껏 잡는 그가 슬퍼보였다. 저한테까지 나는 눈물냄새에 숨이 턱하고 막히며 입안가득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괜한 기대였나봐요. 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목을 쥐어짜서 겨우 새어나간 그 말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저주받은 변백현. 넌 볼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사람이다. 제 마음속에서 울리는 그 말들이 전신을 타고 올라와 눈가에 머물렀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쏟아져내릴 것만 같아서 제 손을 잡아주고 있는 그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져보니 온기가 가득 차있는 그 피부가 축축하다. 제가 매만지는 손길에도 그저 아무말 없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의 눈이 제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제 손가락이 눈가를 스치자 감기는 그 속눈썹을 닦아주자 손끝 가득 뭍어나오는 눈물이 차가웠다. "울어요..?" "아니요.." "울잖아요.." ".....그냥.. 그냥요.." 작게 떨리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한번도 누군가를 안아준 적이 없던 제가 서툴게 팔을 들어 그를 안았다. 잊혀져버린 기억 속에서는 누굴 안아준 적이 있었을까. 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따뜻한 사람이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울고 있는 이 남자를. 제 품에 가득 안아줄 수 있을만큼 그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었으면 좋겠다. 제 손이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감싸안자 그도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어깨를 감싸고 제 어깨에 얼굴을 뭍는다. 젖어들어오는 그 눈물에 말없이 등을 쓸어내려주니 떨림이 조금 심해지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참아내는 저 또한 말없이 그의 팔을 느끼며 눈물을 참았다. 왜 이 사람에게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정말 날 아는걸까. 울지마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제 목소리에 저를 감고 있는 팔의 힘이 조금 더 세진다. "백현아." 너무도 익숙하게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몸이 굳어 까만 세상을 주시하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강타하는 작은 고통에 가슴을 움켜쥐니 그가 저를 한가득 안아왔다. 아파. 너무 아프다. 그가 저를 부른 게 주문이였던 것처럼 미칠듯한 고통이 저를 휩싸고 슬픔이 저를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날 아나요? 정말 날 알아요? 제 손을 꼭 잡아주는 그 손길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행복..할 수 있지." 자꾸만 물어오는 그 남자의 슬픔이 제 몸에 전염되어 넘쳐 흐른다.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은 너무도 짜고 아파서 그렇게 입을 앙다물고 참아보아도 소용이 없다. 대답해줘. 이젠 눈물에 먹혀버린 그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왔다. 숨을 참고 가슴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그가 미소짓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제 손등에 떨어져 흐르는 그의 눈물이 이제 따뜻하다. 더이상 차갑지 않았다. 천천히 제 손을 놓고 뒷걸음질 치는 그를 잡으려고 다급히 손을 뻗자 공기만 만져진다. 분명 그는 저를 알고있었다. 왜 가는거에요. 왜가요. 입안에서 맴도는 그 말을 끝내 뱉어내지 못하고 더욱 심해지는 가슴통증에 결국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 "흐윽....저기요..갔어요?..." 멀어지는 발소리에도 혼자 주저앉아 그렇게 외쳤다. 불어오는 바람에 제 마음이 흩날려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없어져간다.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제 마음을 그렇게 손으로 쳐대며 이 아픔이 가시길 빌었건만 더욱더 짙어지는 그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울었다. "가지마요...잠깐만요.." 봄날에 불었던 그 따스한 바람결에 잠시 들렸던 그 말을 잘못들었던 거라고 믿었었다. 멀어지며 들리던 그 사랑한다는 말이 제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다짐해도 자꾸만 파고들어와 자리잡는 그의 목소리가 저를 죽여나간다. 그 때. 그가 박찬열이라는 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기다릴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밤 11시. 그는 세상에 몸을 던졌다. 제가 그토록 찾던 그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사랑해 백현아. 나도. 나도 사랑해 찬열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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