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오늘도. 비가 왔다.
Rainy Day
w. 오이쓸
* * *
결혼. 축하해. 그 말을 뱉어내는 게 그리도 힘이 들었다. 미묘하게 미소지은 종인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새하얀 턱시도가 잘어울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경수는 결혼을 한다. 경수와 반대되게 종인은 검은 정장을 입고있었다. 마음놓고 축하해줄 수가 없어서. 오늘부로 꺼져갈 제 마음이 불쌍해서. 굳이 검은 옷을 골라 입었다. 환하게 웃어보이던 경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종인아. 그 말에 뒤돌아걸어나가는 종인의 얼굴이 씁쓸하게 번져갔다. 이제, 내이름 부르지도마. 애칭을 정하자며 머뭇거리다가 이것저것을 중얼거리던 경수가 생각난 듯 미소지으며 깜종! 깜종어때? 귀엽다. 깜종. 조그마한 입술로 오물거리며 말하는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종인이 옅게 미소지었다. 그게 뭐야. 너 까마니까 깜종! 푸스스 웃던 경수에 종인도 같이 웃어버렸다. 깜종, 나쁘지 않네.
형, 결혼식 안보고 가려고? 창문 밖은 비가 오고있었다. 멍하니 빗줄기만 보고있는 종인에게 다가온 세훈이 의아하게 말을 걸었다. 응, 안보려고…. 빗줄기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형, 설마…. 하던 세훈이 그의 팔을 잡으려하자 살짝 뒤로 물러선 종인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미안, 잡지마. 허공에서 멈춘 세훈의 손이 다시 떨구어졌다. 나중에보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 건물을 빠져나가는 종인의 뒷모습이 마치,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히는 걸 빤히 보고있던 종인의 눈이 한순간에 커졌다. 닫히는 문틈사이로 보였던 경수의 얼굴이 아팠다. 이미 닫혀버린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지. 그가 왜 나를 잡으려고… 그럴리가 없어. 분명, 가지마 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분명, 경수의 얼굴을 본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꿈만 같아서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린 끝이났다.
* * *
시간은 세월을 잊은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처음 일주일 그리고… 일년, 또 일년, 2년이 흐르고서야 깨달은 사실은 단 하나. 경수는, 이제 없다. 무의미한 시간들에 아무도 하지않는 야근을 자처했고, 몸을 혹사시켜가며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했다. 경수와 살던 집, 그러니까 지금은 혼자사는 집에 들어오면 늘 그렇듯 불은 꺼져있었다. 지친 몸을 침대위로 던지고 쓰러지듯 잠들던 생활을 반복했던 종인은 차츰 경수를 잊어가고 있었다. 아니, 묻어두고 있었다는 것이 옳았다.
"어…응…지금,갈게. 그래…응…."
모처럼만의 한가한 휴일이었다. 조금 열어놓은 테라스로 빗소리가 들렸다. 귀에 수화기를 댄 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던 종인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느리게 빠져나왔다. 임신 7주 째에 접어들고 있는 누나의 전화였다. 오랜만에 전화를 해놓고서 한다는 말이, 남편이 출장중이라 정기검진을 혼자가야하는데 운전을 할 수 없다며 도움을 청했다. 마땅히 할 것도 없었고,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아직 힘에 겨웠다. 결혼식장을 뒤로 한채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아직은…힘들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옷장 문을 열어 자켓을 꺼내려던 종인의 손이 멈췄다. 구석진 곳에 걸려있는 부드러운 갈색 가디건이 눈에 걸렸다. 그것을 꺼내 다른 곳으로 넣으려던 종인의 손이 차마, 그것을 만지지 못했다. 결국 문을 닫고 선반위에 있던 차키를 집어들었다. 경수의 물건을 치우지않았다. 치울 수 없었다. 정말, 잊어버릴까봐. 혹여나, 그가 돌아올까봐. 운전석에 몸을 묻듯이 앉은 종인이 시동을 걸며 허탈하게 웃었다. 부질없는 짓. 경수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행복하겠지. 그거면 된거다. 그가…행복하면, 그걸로 된거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가 내리는 비만큼이나 무겁고, 쓸쓸했다.
"오랜만이네. 잘지냈냐고 묻기에는 얼굴이 상했네. 너."
"……어디병원?"
"너 회사 앞 사거리에서, 반대편 길로…"
옆에서 재잘대는 누나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종인은 입을 다물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조금 떨렸다. 늘 운전하는 차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어색했다. 잘지내는 척, 괜찮은 척 하려고 애를 썼는데, 어릴 적부터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돌봐주던 누나는 속일 수가 없나보다. 까슬한 종인의 얼굴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던 그녀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몇 달만에 보는 종인은 전보다 말라있었다. 안쓰러움과 바보같은 종인으로 인해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다그칠수록 상처받는 건 종인 그일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같이 들어가줘?"
"됐어, 점심이나 먹고와."
"…먹었어."
"거짓말 못하는 건 여전하네. 갔다와. 좀 걸려."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미소짓는 그녈 보며 복도에 서있던 종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간호사를 따라가면서도 인스턴트 말고, 식당가서 밥먹어라. 하며 엄마처럼 잔소리하는 그녀가 문 뒤로 사라지자마자 종인은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산부인과…. 그도 아이가 있을까. 있다면, 그를 닮은 딸아이였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종인의 눈꼬리가 축 쳐지며 고갤 무릎사이로 묻었다. 나는…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김종인?"
미친 게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갤 들지 않은 종인의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건가. 잊은 줄 알았다. 정말… 정말 나는… 당신을 잊고싶어…. 순간, 조심스럽게 어깨위로 올려지는 체온에 머리를 들자 눈앞에 보이는 경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눈이 커다랗게 뜨인 종인이 그의 손을 낚아채고 어루만졌다. 아…하며 곤란하다는 표정의 경수가 보였다. 정말이구나. 나는, 정말 그를 보고 있는 거구나.
"정말…너일줄은, 몰랐네."
"……잘지냈어?"
"뭐라고 말해야, 전처럼 웃어줄건데?"
"잘…"
말을 멈춘 종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지냈다고 해줬으면 좋겠는데…너도, 나처럼 힘들어서, 나랑 같은 이유로 힘들어서…잘못지냈다고하면, 그래서 행복할 내가, 나쁜걸까. 입안에서 뱅뱅 돌던 그 말을 삼켜내고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허릴 숙여 종인과 눈을 맞추고 있던 경수가 몸을 일으키고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가버릴 것만 같아서 종인 또한 불안한 마음에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있던 경수가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을 따라간 곳을 보던 종인이 작게 아…하고 탄성했다. 경수가 나온 곳을 본 종인의 눈이 흔들렸다.
'불임클리닉'
그것을 빤히 보던 경수가 고갤 돌리고 다시 종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종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인 경수기 입술을 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잘…지냈어. 너는?"
"…나도, 잘지냈어."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경수의 눈이 웃질 않는다. 억지로 미소지은 것처럼 입꼬리만 가득 끌어올린 경수가 종인의 손을 떼어냈다. 붙잡고 있던 체온이 사라지자 식어가는 종인의 손이 허공에서 툭.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힐끗 쳐다보던 경수가 한번 더 미소지었다.
"우리…어디가서 얘기할까?"
"………"
"바쁘면…너, 바쁘면…괜찮구…."
우물쭈물 말을 하는 경수에게서, 값비싼 향수냄새가 났다. 그가 입고있는 와이셔츠 또한, 고급브랜드 제품이었다. 찬찬히 그를 보던 종인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 미소지어주었던, 과거의 제 표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처럼, 괜찮다며 웃어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종인의 얼굴에도 어색한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안바빠. 그 한마디에 경수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졌다. 앞서 걸어나가던 종인이 자연스레 보폭을 줄여 경수의 발에 맞추었다. 그것이 또 허탈했다. 잊은 줄 알았는데, 자연스레 그와 있었던 과거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누나에게 문자를 찍어보낸 종인이 곧바로 온 답장을 보며 미소지었다.
'우연히 만났어, 얘기하고 올게.'
'또 어깨 쳐진 거 보여주려면 오지마. 나 친구 만날거니까 올 필요없어.'
'고마워.'
답장을 보낸 뒤 병원 앞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로 가 문을 열자 머뭇거리던 경수가 뒤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으로 쪼르르 달려가 차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있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종인에게 미소지은 뒤 다시 다가온 경수가 괜찮다며 웃어보였다. 가요. 익숙하다는 듯이 올라타는 경수를 보며 작게 한숨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비가, 아침보다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누구?
"아…아내…."
"…안가봐도 되는건가?"
"괜찮아…잠깐…친구만난다고 그래서…"
친구. 그 말에 씁쓸하게 웃던 종인을 눈치챘는지 경수는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침묵을 유지했다. 곧 끊어질 듯 위태로운 공기가 아슬하게 흘러갔다. 빗소리가 차안을 두드렸다. 조금 더 가자 보이는 카페에 잡고있던 핸들에 힘을 주었다. 종인의 눈에 아픔이 서렸다. 처음 만난 그곳,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 그 앞에 차를 세운 종인을 빤히 보던 경수가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이러려고…종인이 너를…다시 아프게 하려고, 얘기하자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창백한 경수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던 종인이 먼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조수석 문앞으로 다가가 열려던 손을 잠시 머뭇거리자 보고 있던 경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항상 문을 열어주던 습관에 또 생각나버린, 아픈 기억에 종인의 눈가가 찌푸러졌다.
카페는 한산했다. 비가 오는 늦은 오후라 그런지 손님이 더더욱 없었다. 딸랑거리는 문 소리에 무언가 익숙한 듯, 그렇지만 불편한 발소리가 카페안에 울렸다. 늘 앉았던 자리에 가려던 종인이 몸을 틀어 반대편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경수는 잠시 멈춰서서 늘 앉았던 가장 구석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에, 앉아서 웃고, 얘기하고…. 아찔하게 퍼지는 커피향에 추억도, 퍼져나왔다. 잊은 줄 알았다. 잊고싶었다. 결혼이, 모든 걸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병원에서 마주친 종인의 모습에, 심장이 떨어졌으니까. 다시, 종인에게 안겨 울것만 같아서. 경수는 입고있던 자켓 끝을 힘껏 움켜쥐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종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저는…"
친절하게 웃으며 물어오는 종업원에게 입술을 달싹이던 경수의 말을 가로막은 종인이 자연스레 말했다. 경수의 시선이 종인에게 머물렀다.
"카라멜 카페모카랑 카페라떼 주세요."
알았다는 듯이 가려는 종업원을 한번 더 부른 종인이 슬프게 웃었다. 다음 이어지는 말에 경수는 숨을 들이켰다. 안그러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구겨진 옷자락만 쳐다보았다. 앞이 흐릿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바보…바보같은 김종인.
"죄송한데, 카라멜 카페모카에…생크림…듬뿍 올려주세요. 단 거… 좋아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생크림 듬뿍 올린 카라멜 카페모카. 그건, 경수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즐겨마시던 것이었다. 2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평소처럼, 예전처럼 자연스러운 종인의 행동에 경수는 입을 세게 물었다. 울지말자, 울지말자…. 고갤 숙인 경수를 멍하니 보던 종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냈다. 예전의 우린, 이렇게 될 줄 알고있었을까. 몰랐겠지. 몰랐으니까…그렇게 사랑했겠지.
'생크림 듬뿍? 그렇게 매일 단 것만 먹으니까 살이 찌지.'
'지금, 나 살쪘다고 잔소리 하는거야?'
'입술 내밀지마. 또 뽀뽀하고 싶잖아.'
'…바보. 그런 말 하지마. 부끄러워…'
'…미치겠다. 너 때문에.'
단 걸 좋아하는 경수에게 잔소리하면서도 대꾸하던 그가 귀여워 자주 놀리곤 했었다. 이젠, 그것도, 할 수가 없다. 작게 떨리는 경수의 어깨를 보던 종인이 휴지를 뽑아 건넸다. 내밀어진 손에 더 울음을 터트리는 경수를 다독여줄 수도 없어서, 종인은 착잡한 마음에 침만 삼켜댔다. 울지마, 왜울어. 다정한 목소리에 경수는 휴지로 눈을 막아냈다. 곧, 침묵이 퍼져갔다.
잠시 후 진정이 되었는지 코 끝이 빨개져서는 애써 웃어보인다. 경수의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걱정스러운 종인의 눈빛에 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경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밝은 목소리를 꺼냈다.
"안물어봐?"
"…뭘?"
"내가 왜… 불임클리닉에서 나왔는지…."
"…묻고싶지않아."
의외의 답에 눈이 커진 경수가 고개를 당겨올렸다. 마주친 두 눈이 아팠다. 종인이 사뭇 진지한 눈으로 경수를 쳐다보았다. 종인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유려하게 굴려가며 톡톡 튕겨댔다. 불안할 때마다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입술을 잘근대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종인의 모습에 경수는 금세 후회를 했다. 왜 괜히 말을 꺼냈을까. 그런데, 왜 그는 궁금하지 않을까. 제가 왜 불임클리닉을 갔는지. 왜…굳이 같이온 아내를 따라가지 않았는지…. 왜… 울었는지. 많은 생각들이 경수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커피가 나오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안물어봐?"
"물어보면, 대답해주려고?"
"…너가 궁금하면…"
"말하지마, 굳이, 말할필요없잖아."
제가 궁금하지 않았던걸까. 눈을 몇번 깜빡이던 경수가 애꿋은 커피잔만 쳐다보자 종인이 라떼 한모금을 홀짝였다.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왜 궁금하지 않는지, 왜 물어보지 않는지, 그것을 말한다면. 그는 또 죄책감을 안고 떠날까. 경수 만큼이나 종인 또한 많은 생각들을 하고있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묻지 않았다. 경수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는다. 직접 자신의 입으로 아픈 이야기를 꺼내야 할 그를 생각하니, 묻고싶지 않아졌다.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를 상처주고 싶지 않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한낮 궁금증으로 인해, 그가 또다시 자기 자신을 해치는 건 보고싶지 않다. 그것은…저도 아프니까.
"병원엔…왜온거야?"
"누나가 정기검진 받는 날이여서, 사정상 같이 오게됐어."
"그렇구나…"
또 한번의 침묵은 전보다 무거웠다. 경수는 내심 안심했다. 혹시, 종인도 결혼을 했을까. 혹여, 그도 아이를 가졌을까. 그 생각에 심장이 덜컥 거린건 사실이였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지난 날을 잊을만큼 행복하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만난 종인은, 결혼식에서 봤을 때보다 더 마르고 아파보여서 그런데, 괜찮은 척 행동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저 때문에 그렇게 된거라고 탓했지만, 종인은 경수를 탓하지 않았다. 결혼한다는 말을 꺼냈던 경수에게, 탓하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저, 축하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나가던 종인의 뒷모습이 무기력해보였었다. 그것이, 아팠다. 종인은 알까. 그가 떠난 뒤, 경수가 한참동안이나 자리에 앉아 울음을 쏟아냈다는 것을.
"아내…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아…응…좋은 사람이야…착하고…"
"다행이네, 정말."
"너도…결혼해야지…."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말할수록 줄어드는 목소리에 종인은 경수를 쳐다봤다. 다 식어가는 커피를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컵을 보다가 다 비워져가는 제 커피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수의 커피잔은 가득 채워져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커피로. 제 커피잔은… 비워져간다. 바닥을 드러내보이며, 점점 없어져간다. 경수의 말에 대꾸하지 않던 종인이 나른한 눈을 경수에게로 옮겼다. 결혼 같은 거 안해, 지금도, 앞으로도. 종인의 단호한 말에 경수가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볼이 조금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붉어진 경수의 볼을 보던 종인이 눈을 감았다. 그래, 하지 않을 거다. 지금도…앞으로도.
"왜…안해."
"하기싫어."
"좋은사람 만나야지…."
"상관,없잖아."
화가 나거나,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만 나오는 종인의 말투는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목소리만 낮게 울려대는 종인을 보던 경수가 탁자 위로 올려져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종인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커피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경수는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를 보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가봐야겠다…비가…너무 많이와서…. 그 말에 눈을 뜬 종인이 지나치려는 경수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한순간에 종인에게 안겨버린 경수는 등뒤로 느껴지는 체온에 먹혔던 울음이 다시 나오는 듯 했다. 붙잡힌 팔목이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행복해?"
"………"
"행복,해?"
"……응."
풀린 팔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카페를 나왔다. 비가 옷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있을 종인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해서 아무렇게나 팔을 뻗어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가면 되냐는 택시기사의 말에 무작정 출발해달라는 말을 뱉는데, 눈물도 같이 나와버렸다. 입을 막고 달리는 택시안에서 경수는 복잡한 감정들이 터진 것처럼 울었다. 또, 저는, 종인에게서 도망쳤다. 또.
* * *
비맞았어요?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아내의 눈을 피한 채 조금 피곤해…하며 이층으로 올라가던 발걸음이 느리게 옮겨졌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속이 뒤틀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얼른 샤워하고 와요, 밥해놨어. 하는 말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녀는 좋은 여자였다. 착하고, 아이를 낳으면 잘키워줄 수 있을 그런 여자였다. 그에 반해 저는 좋은 남편이 되주질 못했다. 김종인 때문에, 아니, 김종인을 못잊는 저 자신 때문에. 도망치듯 이층으로 올라온 경수가 욕실 문을 열어젖히고 죄를 지은 사람처럼 다급히 문을 걸어잠궜다. 숨소리가 가빴다.
'…행복해?'
행복하지…않아.
'행복,해?'
…안행복해.
'……응.'
따뜻한 물이 경수의 몸을 타고 흘렀다. 차가운 빗줄기에 젖은 옷이 이번에는 따뜻한 물에 더 젖어가고 있었다. 달달 떨리던 턱이 멈췄고, 대신 눈꺼풀이 떨려왔다. 샤워부스안에 쭈그려 앉은 경수가 새하얗게 질린 손을 얼굴위에 올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나…안행복해…종인이 너…보고싶어서…너무…보고싶어서……. 경수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즈음, 욕실 문이 낮게 울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히 일어나 샤워기를 조금 더 세게 틀자 물줄기가 더 굵어지고, 물소리가 커졌다.
"괜찮아요?"
"저녁…다됐어?"
"응…목소리가 왜그래요? 울었어요?"
"아냐, 비맞아서 그래. 얼른 나갈게."
알았어요-. 멀어지는 발소리에 경수는 멍하니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를 쳐다봤다. 아직, 그는 카페에 있을까. 마치, 제가 카페에 남겨져 울었을 때처럼, 그도 울고있을까. 마음 약한 종인이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도,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종인을 만나기 전 잠깐동안 사귀다 헤어진 사이였다. 집안끼리 결정한 결혼에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놓은 건 경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헤어지자는 경수를 그녀는 붙잡지않았다. 그저, 한번만 더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긴 채 평소처럼 돌아갔다. 현실의 벽은, 경수가 감당하기엔 버겁고, 무거웠다.
"오늘, 병원혼자보내서 미안해"
"괜찮아요. 친구는 잘 만났어요?"
"…응."
"근데…여보…우리 결혼한지 곧…2년인데…엄마가 손주얘기를 자꾸 하네…."
"나중에 얘기해. 피곤하다."
여보. 이름을 부르는 그를 뒤로한 채 등을 지고 누웠다. 한숨섞인 숨소리가 들려왔고, 불이 꺼졌다. 늘 이런식이었다. 아이얘기가 나오면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답답하고 먹먹했다. 아내와 2년간 이런식의 생활을 해온 경수에게 아이가 생길리 없었다. 아내도, 경수도 불임이 아니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거부했다. 종인에게 죄책감이 들어서…라고 하면 핑계겠지. 사실은, 제가 자신이 없었던거다. 종인외의 다른사람에게 마음을 허락한다는 것이. 김종인 이외의 사람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는 것을, 경수는 스스로 거부했다.
베개커버가 또 다시 눈물로 젖어들어갔다. 경수가 몸을 일으켜 자고있던 그녀의 등을 감싸자 그녀가 뒤척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경수의 눈이 미안함을 가득 담고있었다. 말없이 경수를 보던 그녀가 작게 말을 꺼냈다. 혹시 오늘 만났던 친구가…. 차마 이어나가질 못했는지 빨간 입술을 앙 다문 그녀가 눈을 감았다. 여보…당신은…나랑 행복해요…? 정말, 나는…안돼?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들어갔지만, 경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미안해."
"…무슨말이에요?"
"이제, 좋을대로해. 후회없이, 당신 행복한 길로…."
"여보…"
"…정말, 미안해. 당신 상처주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안되겠어, 안될 것 같아. 나는…당신이 원하는 아이, 못하겠어."
"…경수씨."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망설임없이 뛰어나가는 경수를 보던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2년, 시간이 해결해줄거라고 다짐했던 마음이, 오늘에서야 거짓이라며 무너졌다. 돌아오자마자 무너질 것만 같았던 경수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오늘 만난 이가 분명, 그 사람이리라. 점점 진정이 되어가고, 이제야 내사람이구나 다짐했는데 오늘 본 경수는 충분히 망가져있었다. 상처란 상처는 다 받은 사람처럼 아픈 얼굴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못말리는 사랑에, 그를 보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바람빠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은, 와인이라도 마셔야 할듯 싶다.
* * *
불 꺼진 집에 들어가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꼬여 앞으로 고꾸라져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하게 돌아왔다. 제 몸에서 나는 익숙치 않은 술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입을 막고 욕실로 뛰쳐가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 꺼내고 싶었다. 아직까지 심장안에서 펄떡대는 경수에 대한 감정.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도경수 자체를 꺼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오는 건 없다. 입을 헹구자마자 울리는 초인종에 종인은 물을 잠궜다. 현관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느리기만 했다. 그것이 또, 무기력했다.
"………"
"………"
문을 열자 보이는 경수의 얼굴에 제가 또 꿈을 꾸고있나싶어 말을 하지 않았다. 경수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터졌다. 그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자 흐느낌이 좀 더 심해졌다. 왜울어… 달래주는 목소리나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손길에 안심되서, 결국 다시 돌아와버린 종인의 품이 따뜻하기만해서 눈물만 흘려대고 있었다. 어깨를 감싸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예전처럼 옷자락을 꼬옥 쥐며 고개를 작게 비비는 행동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조그맣게 들리는 경수의 목소리에 고갤 숙이니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해…"
"…어?"
"안…행복해. 너 없어서…너가 아니어서…나…하나도 안행복했어…정말…너무 보고싶어서…"
떨리는 경수의 목소리에 그를 안고있던 종인의 손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점점 뒷걸음질 치는 종인에 울음이 멈추고 경수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종인을 덮쳤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오늘의 만남이 잠겨진 자물쇠를 풀었으리라. 결국 또 경수를 흔들었다. 종인은 소파에 힘없이 앉아 시선을 떨어트렸다.
"나 때문에…그럴필요없어…나괜찮으니까…"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괜찮지않잖아. 너는…나없이 괜찮아…?"
애타게 말하는 경수의 목소리에 종인은 눈을 감았다. 안괜찮았다. 경수를 보자마자 안고싶었고, 우는 그에게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현실이, 또 그를 아프게 할것을 알고있었다. 저 따위는 어찌되도 상관없었지만, 그가 아픈건 역시…싫다.
"…늦었으니까 오늘은 자고가…손님방…치워놨으니까…"
말을 이어나가던 종인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뚝 끊겼다.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때마다 한걸음씩 다가오던 경수가 종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달큰함이 입안 가득 밀려들어오자 굳었던 종인이 빠르게 경수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뒷머리를 받쳐주었다. 달뜬 숨이 사이사이로 새어나오자 잠시 입술을 떼어 준 종인이 힘없이 웃었다. 다시 물어도 되나? 의아하다는 경수의 눈이 동그래지자 눈꺼풀 위에 입을 짧게 맞춰준 종인이 경수의 눈가를 쓸어주며 말했다.
"…행복해?"
"…………"
"행복,해?"
"…너랑, 행복하고싶어. 이제 상관없으니까…행복해지자. 우리…"
경수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맞닿은 입술사이로 종인의 웃음이 프스스 새어나왔다. 꼭 잡은 경수의 손에 깍지를 끼자 파르르 떨리는 경수의 눈꺼풀부터 목, 어깨에 쪽쪽대며 입을 맞췄다. 작게 그가 몸을 움츠리자, 종인이 경수를 가득 품에 안았다.
"나…지금 행복해."
아직 고여있는 경수의 눈이 맑게 빛나며 그가 웅얼거렸다. 경수의 동그란 코끝을 살짝 깨문 종인이 다정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수는 주먹을 말아쥐고 가슴위로 살포시 올렸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사랑해. 지금도, 앞으로도."
종인의 입술이 말을 뱉어내자 경수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되돌아왔다. 이제서야. 다시 가까워지는 종인의 얼굴에 경수는 눈을 감고 뜨거운 숨을 맞이했다. 그래, 김종인이라서, 김종인이니까. 행복한거다. 그게, 너니까. 나는 행복하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Fin.
쓰고나니 길구나,,하고 생각했던 카디.
오랜만에 쓰는 카디는 어렵다.
새드로 쓰려고 했는데, 한번도 해피를 제대로 써본적이 없어서
그냥 해피. 해피는 역시 못쓰겠다.....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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