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nte Espressivo
written by 오이쓸
* 안단테 에스프레시보(Andante Espressivo) - 감정을 가지고 느리게 또는 짝사랑을 이루어지게 하는 주문.
"미안"
그래. 또 시작이다. 늘 반복되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 변환점을 찾을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이 자리에 멈춰서있었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 남자. 오세훈.
제 앞에서 입술을 앙 다물고 저를 노려보는 오세훈을 저는 오늘까지해서 스무번은 족히 넘게 찬 것 같았다. 후회할거에요. 이번엔 정말 다시는 고백안한다니까요? 거의 반 강요식의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오세훈은 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한 집을 위해 행사에 피아노 연주 알바를 뛰다가 알게 된 남자였다. 그는 제가 공연하러 간 어느 파티가 끝나고 난 뒤 저를 쫓아와 다짜고짜 고백을 뱉어냈던 철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보나마나 어느 부잣집의 망나니 아들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 이틀 거절해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찾아와 제 속을 한번씩 뒤짚어 놓는 오세훈 때문에 미치겠다.
저를 아직까지도 쳐다보며 숨을 고르는 세훈 덕에 저는 이미 알아주는 대스타가 되어있었다. 형. 진짜 좋다구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어쩌라는 건지...
애처로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 눈길에 닭살이 오소소 돋으며 전공서를 들고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 때문에 이 무거운 전공서를 지금 20분 넘게 들고 있었거든? 이가 빠득빠득 갈리면서도 말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저 녀석은 알고보니 제 애인의 의형제였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의형제지만 실질적으로 제 애인과 옆집사이랄까. 가뜩이나 요새 변했다며 징징대는 그로 인해 머리가 아파오는데 자꾸만 질척대는 오세훈으로 인해 얼마 남자 않은 제 첫 리사이클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응. 알아 근데 미안. 엄청난 생각끝에 나온 이 한마디로 인해 그의 표정이 차츰 굳어지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고 곤란해 죽을 것만 같다. 똑닥거리는 제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며 애가 탔다.
박찬열이 기다리는데. 벌써 30분이나 늦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 때문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또야? 복도 한 가운데서 열렬히 고백받고 있는 저와 이 남자를 수근대는 게 느껴졌다. 넌 부끄럽지도 않니 미친놈아.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형. 한번 짧게 끊어서 저를 부르는가 싶더니 또 은근슬쩍 손을 잡아오려고 한다. 어어? 이 새끼 봐라? 어색하게 웃으며 그 손을 풀어내자 이젠 제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끌어당기고 있었다. 오세훈. 화가 치미는 걸 꾹 참고 그를 부르자 이내 싱긋 웃으며 저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맞닿은 손을 보자 그의 소매 끝에 뭍은 물감이 보였다. 칠칠맞기는. 혀를 한번 쯧하고 차자 걸어가던 그가 저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형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 있단 말이에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저를 재촉하는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다. 항상 이게 문제지. 저는 오세훈을 밀어내지 못한다. 왜냐고?
나도 그 이유를 알고싶다. 젠장.
계속해서 울려대는 제 핸드폰을 꾹 누르며 떨어지려는 전공서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누가 미대 지망생 아니랄까봐 온몸에서 물감냄새를 풍기는 오세훈 때문에 코끝이 찡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전공서에서 빠져나갈 것처럼 흔들리는 제 악보를 다시 한번 깊게 쑤셔넣었다. 나 연습있거든? 조금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려도 해맑게 웃기만 하는 그를 뿌리치자 제 손등에 노란 물감이 뭍어나왔다.
아. 결국 작게 터져나온 짜증에 손등을 벅벅 문지르자 더욱더 번져만가는 그 물감을 세훈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저를 쳐다보는 그 사이에 공기가 어색해지자 애꿋은 손등만 다시 벅벅 문질렀더니 손등이 빨갛게 변해가고 있었다. 제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폰은 이미 멈춘지 오래였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면서 그를 달래야하나. 짜증이 툭툭 터져나왔다. 자각도 못하고 계속해서 문질렀던 손등의 살갗이 벗겨지려고 했다. 따끔따끔 아파오는 손등을 바라보자 크고 하얀 손이 제 손등 위에 가볍게 올려졌다. 느릿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한번 더 싱긋 웃는 오세훈이 입을 뗐다.
"형 오늘 연습없는 거 알아요."
"개인연습 있다구."
"이것만 보고가요. 형한테 먼저 보여주려고 내가 아무한테도 안보여줬는데."
"오세훈."
빨리요. 응?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에 한숨을 푹 쉬고 발을 뗐다. 그제서야 다시 제 손을 잡고 앞서 걸어가는 그의 넓은 어깨에 이유모를 두근거림과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그 물감냄새가 다시 코끝에 머물렀다. 창문 끝으로 보이는 박찬열의 모습에 다시금 머리가 울렸다. 이미 화가 나있는 그의 모습에 지끈 거리는 머리를 짚고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오늘도 연습은 글렀다. 제 손을 노골적으로 어루만지며 느끼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저를 보며 말하던 과대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백현아 내가 널 많이 믿는 거 알지? 역겨운 목소리로 제게 속삭이던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던 제 모습에 온몸을 부르르 떨자 의아하게 쳐다보는 세훈의 손을 꾹 잡아쥐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제 말에 다시금 웃어보이며 저를 끌고가는 그의 손과 제 손이 닿아있는 곳이 화끈거린다. 노란 물감을 너무 문질렀나. 제 눈에 조그맣게 보이는 개나리 꽃에 눈을 부비적대고 헛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미쳤구나 변백현.
학교를 빠져나와 걸어가는 그 길목에 쭉 늘어선 가로수길이 싱그러웠다. 바람이 천천히 불어오고 나무도 그에따라 흔들리며 제게 고갯짓을 해주고 있었다. 춥지도 않고 그리 덥지도 않은 봄이 오긴 왔나보다. 길가에 조금씩 피어나는 꽃들을 멍하니 보다가 무심코 그의 뒷통수를 바라보자 그의 덮수룩한 머리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방안에 쳐박혀서 피아노만 쳐댄다고 뭐가 되나. 기분도 거지같은데. 전공서 끄트머리 틈새로 삐죽 나온 악보를 흘기다가 결국 제 가방안에 완전히 쑤셔넣어 버렸다. 이미 머릿속에서 앵앵대는 찬열의 잔소리는 무시한 지 오래였다. 지만 바쁜 줄 아나. 어제 전화도 안받은 주제에. 뒤끝이 심각한 저를 모르고 한 것도 아니였을테고 시위하는 건가. 요새 바쁘다고 놀아주지도 않았더니 밀당한답시고 전화를 죄다 씹어버린 그로 인해 짜증이 치밀던 찰나였다. 잘된거지 뭐. 스스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얼굴에 맞대어오는 그 바람에 미소를 지었다. 인생 별 거있냐.
* * *
불청객이다. 몇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제가 불청객임이 틀림없다. 글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하나. 한마디로. 끼어들어서는 안될 자리에 낀 듯한 그런 불편한 느낌이랄까. 고급 빌라 안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열자마자 보이는 물감들에 인상을 찌푸리고 발로 툭툭 밀어내자 신발을 벗던 그가 제 발목을 덥썩 잡고 죽어가던 물감을 집어들었다. 소중하게 해줘요. 얼마 전에 산거란 말이야. 히죽 웃어대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에 보이는 긴 생머리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쭈뼛쭈뼛 스기 시작했다. 굳어있는 제 모습에 제 뒤로 다가온 세훈의 움직임도 멈췄다. 제 손목을 잡고 등뒤로 밀어내는 그의 손길에 간신히 중심을 잡고 숨을 뱉어냈다.
"어떻게 들어왔어."
차갑게 말하는 그의 치아틈새로 색색거리며 나오는 숨소리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오세훈 등 뒤로 숨어들어온 저를 지그시 노려보는 눈길에 다시금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눈을 들어 앞을 보자 저를 끝까지 따라붙는 시선에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긴생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손에 걸려있는 값비싼 악세사리가 딸각 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그 귀걸이마저 날카로웠다. 한참을 저만 바라보던 그 시선이 세훈에게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탁 하고 트이는 숨통에 헉헉대자니 저를 잡고 있던 세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보다 깨끗해서 놀랐네요."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그 얼굴이 세훈을 넘어 제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새하얀 투피스 정장이 꽤나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그 반지 하나가 제 눈에 들어왔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너무 단조롭지 않은 그 반지가 약지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세훈씨. 여리한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귀에 닿았다. 무겁고 차가운 공기에 저도 모르게 세훈의 옷자락을 꾹 잡자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내려와 제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져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박히는 게 느껴지자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방문틈사이로 보이는 그림 한점이 시리다. 벚꽃을 중심으로 수놓아진 그 색색별의 봄꽃이 따뜻해보였다.
이를 앙 다문 세훈이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거칠게 휘어잡아끌었다. 나가.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꾹 감았다. 오세훈. 엎치락 뒤치락하던 두사람이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왔다. 늘 하던대로 박찬열을 만나고 연습실로 들어가 쳐박혀서 피아노만 눌러대면 되는 거였다. 쓸데없는 바람이 또 하루를 망쳐놓고 있었다. 여전히 제게 쏘아대는 그 여자의 눈빛을 받아치며 입을 뗐다.
"약속있는 걸 깜빡했다. 그림은 다음에 볼게."
형. 하고 부르는 세훈의 말에도 꿋꿋이 신발을 신고 고갤 들었다. 가만히 제가 하는 것만 바라보던 그 여자가 제게 웃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그 눈의 의미를 모를 제가 아니였다. 잊고 있었다. 저만 보고 있을 거라고 느꼈던 오세훈에게 여자가 있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신발옆에 미처 치우지 못한 물감들이 아직도 널부러져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세훈에게 웃어보이자 늘 웃고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관문을 여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조용히 닫히는 그 문틈으로 저를 바라보는 오세훈이 보였다. 미안 오세훈. 장난은 여기까지하자.
뒤로 점점 멀어져가는 빌라를 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부재중 전화 12통. 모두 찬열에게서 온 전화다. 괜시리 불안해져오는 마음에 입술을 씹어대니 피가 스물스물 기어나온다. 아까보다 조금 쌀쌀해진 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쉬우면 또 전화하겠지. 그대로 다시 쑤셔넣은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서 조금씩 매만지다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체크해대는 제 모습이 우습고 초라했다. 뭘 바라고 오세훈을 따라간건지. 진짜 박찬열한테 반항이라도 할 생각이었나보다. 서서히 산넘어로 사라지는 해로 인해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아직도 기다리려나. 저도 모르게 서두르는 발걸음에 또 한번 웃음이 나왔다.
넌 진짜 병신이구나 변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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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치는 백현이가 쓰고싶어서 시작한 글.
세훈이는 미술을 합니다. 미술하는 오미자. 상상이 안되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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