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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애편지  


  


  


  


  


  

먼 곳에 서있는 너에게,  

수면을 두드리며 파장을 그려내는 빗방울을 보니 네 생각이 나. 물속으로 뛰어든 빗방울은 부치지 못한 편지를 또 한 번 적셔내. 넌, 잘 지내? 여기는 들리는 소리 하나 없어. 어디선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잘게 부서져 귀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네 소리가 그리워. 과거를 여행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너는 가끔씩 밀려와 나를 헤집어 놔. 여전히 난 그립기도 하고 밉기도 해, 네가.   

난 강물이 되어 너를 생각해. 찰랑이는 물결에서 공중으로 흩어지는 수증기가 되었다가 마음이 무거워지면 하늘을 부여잡고 죽죽 미끄러져 내려와. 어쩌다 벌어진 바위틈을 만나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단단하게 자리 잡아. 마치 그곳에 한평생 있었던 것처럼. 점점 파고들어가 결국엔 바위를 갈라내는데, 슬프게도 너는 그런 나를 안아버렸지.  


  


  


  


  


  

너의 일부는 내게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고, 놀이터 모래밭에서 비밀이랍시고 심심한 이야기를 까놓고 놀던 과거를 공유한 관계였다. 책장 깊숙한 곳에 꽂혀진 일기장을 펼치면 비뚤비뚤한 글씨로 네 이야기가 가득했다. 얼마나 높이 그네를 타는지 시합하는 것을 좋아했고 놀이터 옆에서 팔던 붕어빵은 꼭 지느러미부터 먹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 많이 닮아있었고, 닮아있는 서로를 좋아했다.  


  

해질녘 놀이터는 언제나 우리 차지였다. 같이 놀던 다른 아이들은 저녁때가 되면 엄마의 부름으로 하나 둘씩 모래밭을 비웠고 우리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다가도 빈 놀이터의 공허함을 즐겼다. 두 자리밖에 없어 눈치를 살피던 그네도 한 자리씩 나눠 가질 수 있었고 미끄럼틀은 마음껏 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때와 다름없이 빈 놀이터의 모래밭에 자리 잡고 앉은 우리는 잡다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다가 그날의 마지막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너는 내게 먼저 탈 자리를 선뜻 양보했고 난 그게 뭐라고 퍽 좋아했던 것 같다. 서둘러 미끈하게 아래로 뻗은 철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내려오다 다리가 미끄럼틀에 끼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나 끼었어, 라고 외치기도 전에 너는 내 뒤를 이어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동안에도 몸을 뺄 수 없었던 나는 내려온 너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너의 몸이 부딪힌 덕에 끼인 다리는 빠졌지만 모래밭에 그대로 무릎을 박은 꼴이 되고야 말았다. 그 순간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날래지 못한 모습을 너에게 보였던 게 참으로 부끄러웠다.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놀라 안 다쳤어? 라고 물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헐, 피나!”  


  

분명 아프지는 않았는데 새빨간 피를 봐서일까,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네 모습을 보아서일까는 몰라도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우는 내 모습에 너는 적잖게 당황하며 내 팔을 네 목에 두르고 비교적 가까운 너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너는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의자를 끌어다 딛고 높은 천장에서 구급약통을 꺼냈다. 한참을 자잘한 글씨를 읽어가며 머리를 갸웃거리며 훌쩍이는 내게 혹시 연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괜히 성을 내며 마데카솔은 없느냐고 되물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글자를 몇 개 더 읽던 너는 이게 맞는 것 같다며 오래된 연고와 반창고를 들고 와서는 불거진 내 무릎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 아프겠다.”  


  

꼭 자신이 다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린 너는 연고를 검지에 콩알만 하게 짜내어 상처 위에 슬슬 문질렀다. 연고의 냉기에 절로 아픈 소리가 나왔다. 너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상처부위에 연고를 덧발랐고 반창고를 붙이는 것으로 미숙한 치료를 마친 것으로 보였다.  


  

“아, 이렇게 하면 더 빨리 낫는대.”  


  

무릎을 펴고 접어올린 바지를 내리려는데 너는 발목을 잡고 무릎을 다시 세워 방금 붙인 반창고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순간적이라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한 나에게 너는 ‘우리 엄마가 알려줬어.’, 라고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매일을 같이 놀며 지내던 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딱히 다른 친구가 필요하지 않던 우리는 주위에 각자의 친구를 쌓아갔다. 성격이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던 너는 유난히 친구가 많았다. 같이 지내는 시간은 터무니없이 줄어갔지만 나는 서운함을 느끼거나,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게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  


  

“야, 끝나고 피씨방 가자.”  


  

그렇다고 우리가 아예 얼굴조차 대면하지 않는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끔 한 번씩 옆자리가 비게 되면 서로를 찾았다. 물론 그 마저도 많은 너의 친구들에 치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은 내가 먼저 가방을 챙겨들고 네 주위에서 서성였다. 여전히 네 주위에는 너의 친구들이 득실거렸다.  


  

“어? 야, 흑차. 네 여자 친구 왔다.”  


  

감색 교복을 제 멋대로 구겨 입은 무리들이 킬킬거렸다. 너와 나의 사이를 의심하는 유치한 장난은 중학교에 들어서부터 더 심해졌다. 나는 이런 장난에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나는 내 나름의 대처를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만해, 그런 장난. 사람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단호한 어조로 분위기를 단숨에 갈라버린 건 너였다. 킬킬대던 무리는 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어물쩍거리다 말을 돌렸다. 내가 하던 대처법은 네가 알려준 것이었다. ‘너는 여자고, 내 친구. 그러니까 네가 내 여자 친구라는 건 맞는 말이야, 그렇지?’ 예전엔 그렇게 말하며 놀림 받은 나를 위로하는 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있는 것조차도 어색해 죽을 맛인 나와, 그런 나를 지나쳐 친구들을 이끌고 나가는 네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날의 네가 너무 당황스러웠고, 이 당황스러움이 그 날로 종지부를 찍듯 바로 다음날부터 너는 나를 평소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입으로 소리 내지는 않아도 손을 들어 인사하고, 거리에서 우연히 만날 때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 그 정도 관계는 영원히 그럴 것처럼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 영원은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의미를 잃었다. 다른 학교로 배정받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이 사실에 내가 슬퍼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멀어졌다고 생각한 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한 번 밀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고 나면 망설임이 적어지는 것처럼. 새 교복을 입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던 네가 통째로 사라져도 덜그럭거린다거나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서서히 너를 잊어가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알아차렸으면 무척이나 애달팠겠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는 너를 다른 것으로 채워버리고야 말았다.   

  


  


  


  


  


  

어렸을 적 긴 시간동안 지냈던 탓에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던 너는 정말로 거짓이 아니었어. 십 삼년을 일 년으로 지우려 든 내 자신이 웃겨. 십 삼년, 숫자로 13은 별것도 아닌데 저게 햇수라니까 기시감이 든다. 너도 그래?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과연 십 삼년을 그리워하는 내가 맞을까, 앞을 보는 네가 맞을까?  


  


  


  


  


  

강당엔 새내기들이 요란하다. 언제 일 년이 지나가버렸냐는 듯 나는 벌써 헌내기로서 하품을 쩍쩍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앞뒤 양옆으로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고의 신입생은 모두 여자일 수밖에 없다. 유난히 지루해 하는 A는 그걸 제일 아쉬워했다. 쟤 예쁘게 생겼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A가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몇 번을 짚어도 어디냐며 되묻기에 나는 그만두고 겉옷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교실 안은 갑갑했다. 이미 이학년으로 트랙 위에 놓인 아이들은 한껏 긴장한 상태로 펜을 놀렸다. 뒷자리에 자리한 나는 그 광경에 놀라고 숨막혀했다. 교실 한구석에서 혼자 외따로 떨어진 듯, 나는 그들을 묵묵히 구경하다 쓸데없이 화장실을 몇 번이나 다녀왔다. 몽롱한 상태로 정규 수업을 마치고 절반은 자고 절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나면 벌써 지긋지긋한 고등학생으로서의 하루는 끝나있었다. 이것을 삼십일 정도 반복하면, 한 달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었다.  


  

일학년 때 활동했던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나를 호출했다. 푹 끓인 커피와 일거리가 잔뜩 흐트러진 책상에서 분주한 선생님이 다짜고짜 나에게 이번 동아리 기장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재차 되물으며 작년에 함께 했던 얘들 이름 몇 자를 대었다.  


  

“이미 물어봤는데 다들 다른 동아리에 가입했더라고.”  


  

벽에 붙은 동아리 목록을 슬쩍 훔쳐보았다. 진즉에 교실 벽에 붙어있었지만 특별히 가입하고자 하는 동아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기장을 맡으면 부담스럽기에 짝이 없다. 거절하고자 입을 우물거리는데 일거리를 제쳐 두고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검지 손톱으로 책상 위를 톡톡 내리치는 선생님의 손가락이 거슬렸다. 나는 마지못해 긍정의 표시를 했다.  


  


  


  

치어리더 동아리며 보컬 동아리며 하다못해 뜨개질 동아리에 비해도 문예창작을 위해 모인 사람 수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다른 동아리에 비해 홍보가 적었던 탓도 있지만 나까지 합하여 다섯은 동아리 구성에도 아슬아슬한 수였다. 허나 선생님은 적은 수에 꽤 만족한 눈치였다. 어쩌면 작년과 같이 A4용지 하나씩 나눠준 뒤 새 학기나 고등학생과 같은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인 주제로 오디션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문득 작년에 연필을 쥐고 머리 싸매던 내가 생각나 움찔거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학년 삼반 신민지……,”  


  

동아리 내 이학년이란 나뿐이었다. 이것 또한 몹시 불편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전부 처음 보는 얼굴에 나 아닌 다른 아이들의 얼굴엔 무언의 경계가 서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아 쥔 손에 땀이 배었다. 사월인데 벌써 날이 덥다.  


  

“그럼, 질문 없나요?”  

“남자친구 있어요?”  


  

대략 삼분가량의 자기소개가 끝이 나면 질문이 이어졌다. 자유롭게 하는 질문이었지만, 꼭 머리 맞대고 짠 듯 공통된 질문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은 꼭 나오는 필수 질문이었는데, 눈물겹게도 저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한 사람이 지금껏 없었다.  


  

“아, 네. 있어요.”  


  

내가 비록 이 동아리에 몸 담군지 햇수로 이 년째지만, 그 이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이것은 필시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총각 선생님도 말라붙은 이 여고에서, XY염색체와 짝짜꿍 놀이를 하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니. 수줍은 듯 당당하게 긍정의 대답을 한 여자애는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에게도 흥미를 안겨준 모양이었다. 어느 학교 몇 학년에서부터 키, 외모를 따지는 아이들의 열띤 목소리를 가라앉힌 건 커피를 내리러 갔다 돌아온 선생님이었다.  


  

내 소개는 간결하게 마무리되었다. 애들도 그 전과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내었고 특히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엔 껄껄한 웃음과 함께 부정을 탔다.   


  

“에이, 그럼 남사친은 있어요? 남자사람친구.”  


  

그 순간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있다고 하기엔 네 존재가 너무나 흐리고 없다고 하기엔 남자사람친구란 말에 물밀듯 밀려오는 너를. 여덟 개의 눈은 올곧이 나를 향하고 나는 그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아니라고 해도 될 것 같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엔, 아마도,  


  

“있긴 있지.”  


  

지우기엔 아쉬운 네가 있었지.  


  


  


  


  


  

난 머리가 좋지 않아. 새로운 것을 채우려면 오래된 것을 삭제해야 돼. 그게 멋대로 지워지는 문자메시지함과 같아서, 내가 마음대로 지우고 싶은 것만 지울 수는 없어. 다섯 살 때 엄마 몰래 계란을 삶아먹으려다 화상 입고 혼난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고, 기억하고 싶었던 기억은 속상하리만큼 희미해. 내게 너는 후자야. 적어도 그렇게 믿었지.  


  


  


  


  


  

“언니, 저 시 이만큼 썼는데 한 번 봐줄 수 있어요?”  


  

적은 수라 그런지 동아리 부원들과는 두루두루 친해졌다. 그 중 붙임성이 좋은 민지와는 덜 쓴 작품도 공유하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본 민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긴 생머리에 청순하게 생겨 〈연애소설>에 손예진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자기는 왜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냐며 울부짖는 친구에게 민지를 닮으면 생긴다는 조언까지 할 만큼, 민지는 예쁜 아이였고 이 아이의 남자친구는 복 받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남자친구 생각하면서 쓴 거야?”  


  

민지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딱 봐도 알만한 게 제목부터 ‘연애편지’다. 달달하면서 귀여운 구절이 줄을 잇는데 그게 또 보기 좋다. 장문의 시가 아닌데도 연애의 떨림이 꾹꾹 눌러쓴 글자에 배어있었다. 나는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다 노트를 도로 건넸다.  


  

“예쁘다.”  


  

구절이, 시 전체가, 글씨체가. 노트를 받아들고 수줍어하며 맑게 웃는 네가. 당연하게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날 낯설게 새로이 다가온 것처럼.  


  


  


  


  


  

너는 봄바람을 닮았다. 매년 불어오는 것이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이, 항상 예쁘다 생각했던 네가 어느 날 새롭게 느껴져 다시 한 번 네 얼굴을 보고 싶게 만들어. 다시 한 번 본 네 얼굴은 여전히 내내 어여쁘더라.  


  


  


  


  


  

“어, 진짜? 고마워, 오빠! 그럼 좀 있다가 봐!”  


  

8월, 어느 무거운 빗줄기가 허공에 그어진 날 중 하루였다. 문집의 중간점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보충이 막 마친 나와 민지를 남겨 할 일을 안겼고 그 일을 끝낼 무렵,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너에게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언니, 언니 우산 안 빌려도 될 것 같아요. 오빠가 우산 가지고 온대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사물함에 우산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더 챙긴 나는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만, 나와 상반된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겨들고 나를 부르는 네 모습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눈치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울 뿐이었다.  


  

핸드폰 화면과 교문을 번갈아 쳐다보던 네가 환한 미소를 지은 쪽은 교문이었다. 아마 여기서 몇 정거장 떨어진 남고의 교복인 것 같은 차림에 검은 우산과 빨간 우산을 각기 다른 손에 쥔 남자가 천천히 여기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 여기는 내가 말했던 동아리 기장 언니고. 언니, 여기는 내 남자친구 학연오빠에요.”  


  

그 순간 첫 번째로 몇 년의 공백 끝에 차학연이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아이의 더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에 놀랐고, 두 번째로 몇 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걸음걸이로 얼추 차학연임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 내 눈에 놀랐다. 얼굴을 보니 학연 또한 놀란 눈치였다.  


  

“와, 이게 무슨 운명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아는 사이에요? 언니 오빠 알아요?”  


  

나는 긍정했다. 학연은 반갑다며 손까지 내밀었다. 그 손을 받아 악수를 나누는 동안에 세 사람을 감싸는 묘한 공기의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손을 거의 뿌리치다시피 우산을 펼쳐들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 듯 인사했다.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도망치는 내내 온몸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물방울에 지치고야 말았다. 지금 마음 한 편이 무거운 것은 전부 비가 오는 탓이었다.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우산을 챙길 일이 없을 테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면 학연과 우산을 나눠 쓴 그 아이에게 서운함 따윈 느끼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그러한 상황으로 학연과 재회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 둘 사이를 곱씹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나를 발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이 두렵고, 왜 두려워하는 것일까.  


  

「번호 안 바뀌었네.」  


  

진득해진 몸을 씻어내고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니 일거리를 주듯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반가웠을 학연이다. 화면을 손톱으로 두드리다 글자 몇 개를 박아 넣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먼저 가서 미안해. 답장은 빨랐고 한 두통의 문자를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중단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 먼저 말을 걸어준다면 참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을 때 가끔씩 추억하던 학연이 더 보고 싶었다.  


  


  


  


  


  

그 날 이후로 너를 만나는 게 무서웠어. 너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할까. 너를 보며 너와 가까운 그 아이를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를 보는 너는 참 맑은데 나는 왜 장마에 머물러 있는 걸까. 몸을 갈라내는 빗줄기 사이에 서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빗줄기를 맞을수록 커지는 두려움은 나조차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시침과 분침이 모조리 빠져버린 시계도 시간은 잘만 갔다. 그 동안 나는 일부러 민지를 피했고 학연과의 연락도 짧게 끊어버렸다. 내 뜻대로 그 두 사람은 억지로 나를 찾아내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감 있는 사이가 가장 편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 예전에 나와 학연이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의 우연을 바라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었다. 학업에 치여 살고 나 혼자만의 미래를 생각하며 지내다 보면, 모두 잊힐 것들이었다. 생각을 곱씹다보면 눈물이 났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낱장의 짧은 추억과, 길게 서술된 과거의 기억.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 이것이 나의 청춘이었다,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이불을 쥐었다 폈던 모든 기억들은 퍽 멋지게 섞여 나를 성장시켰다, 라고 말하기엔 설움이 컸다. 가장 보통의 존재, 지금 그들에게 나는 그렇게 남았지만 혼자서 눈물을 삼켜내는 나는 특별해지고 싶었나. 그들에게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나.  


  

몇 시간 전에 온 문자메시지가 있었다. 화면에 들어찬 글자는 학연의 이름으로 박혀있었다. 하얗게 얼굴을 쏘는 화면의 빛에 눈을 찌푸렸다. 「열한 시 - 놀이터에서 기다릴게.」 시계를 보니 지금 나가면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조끼까지 벗었던 교복을 다시 주워 입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 놀이터에 다시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래밭이었던 바닥에 우레탄이 깔렸다. 낡은 철 미끄럼틀이 빠지고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새로 들어섰다. 가로등 아래 비추는 놀이터는 새로운 놀이기구들로 가득 차있었고 그 속에 학연이 홀로 그네에 앉아있었다. 예전에 느꼈던 공허함은 없었다.  


  

학연에게 다가서자 웃으며 제 옆자리의 그네를 가리켰다. 나는 거기에 앉아 학연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음, 나 그 애랑 헤어졌어.”  


  

입술이 벌어지고 뱉어진 말을 듣는 순간 당황스러움과 함께 혼란스러웠다. 그 둘과 떨어져 걸을 때 못된 생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둘이 헤어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내린 결론이 뭔들 지금과 같지만 않으면 더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틀린 것이었다. 완전히 틀려먹었던 거다. 그네 위로 밤하늘이 무섭게 내려와 나를 짓눌렀다.  


  

“왜, 왜?”  

“나 때문에.”  


  

학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발을 디딘 그곳에서 겨우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학연은 알 수 없는 말만을 늘어놓았다.  


  

“말 못했던 게 있어. 고민 많이 했고 어쩌면 오래 전부터 해왔던 생각일지도 몰라. 확신이 서면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못 기다릴 것 같아.”  

“……그게, 뭔데?”  

“확인할 수 있게 허락해주면, 아주 잠깐이면 돼. 확인하고 나서 말할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네에서 일어선 학연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숙여진 내 얼굴을 들어 제 얼굴과 마주했다. 학연의 손이 초점을 잃고 표류하는 내 두 눈을 가렸다. 앞이 깜깜해지고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가을 밤, 서늘하게 부는 밤바람 곁에 서고도 손부채질을 하는 학연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생각해.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몸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억눌렀다.  


  

“나도 확인, 해봐도 될까.”  


  

학연은 말없이 무릎을 굽혀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묽게 빛나는 가로등 불에 비치는 두 눈은 아직 그대로구나. 방금과 같은 느낌이 입술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졌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학연과 입을 맞추고 있는 동안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내 머리를 지배해버린 사람은…….  


  

“나도 너를 생각해.”  


  

너는 그 옛날 같은 웃음을 보였다.   


  

“어릴 적 네가 나를 보며 그렇게 웃다가 순식간에 지금처럼 커져서는……,”  

“…….”  

“그 애 옆에 서있어.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지금의 너보다 그 애를 더 많이 생각해. 미안…, 미안해.”  


  

짧게 끊어 말하지 않으면 단 한글자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었다. 나는 못 참고 네 앞에서 울었다. 너는 지금의 나를 보았지만 내가 본 너는 과거에 살았다.   


  

너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나는 속으로 밀어놓았던 울음까지도 토해버렸다.  


  

“괜찮아.”  


  

놀이터에 내 울음소리가 웅웅댔다. 나는 숨 막히도록 울었다가 겨우 그치고는 자리에서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아 있었다.  


  

“학연아.”  

“응?”  

“부탁할게, 그 애한테 전화해서 다시 만나자고 하면 안 될까?”  


  

그 애가 좋아. 네 옆에 섰을 때 봄처럼 웃는 그 애가 좋아. 그 애 옆에 선 네가 좋아.   


  

“그럼 나도 부탁 하나 하자.”  

“응, 그래. 뭐든지.”  

“연락 끊지 마라.”  

  


  


  


  


  


  

열애편지  

긴 장마는 평생 동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을 그리며 평생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지독한 첫사랑을 하였다.  

그대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으니  

이제 나는 퍽 행복하다.  

그러니 마지막 편지는 내내 여기 있겠다.  


  


  


  


  


  

끝끝내 말하지 못한 비밀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 둘째는 내가 너를 상상 이상으로 좋아했다는 것. 나는 지독한 첫사랑을 하였다. 그 때 너는 왜 나를 보지 않았나. 내 순수한 열정은 너를 미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그러했던 너를 사랑한다.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그곳에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늦은 발신

안녕하세요, 제 독자님들. 엄청 오랜만이에요. 마지막 글이 구월이니 벌써 네달이 지났네요.  

그 동안 못 와서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이 글 이후에도 언제쯤 다시 돌아올지 확신을 못 선다는 점에서 더더 미안해요.  

할 말 엄청 많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ㅠㅠ.
  

오늘부터 설 연휴 시작이죠? 긴 연휴동안 아프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잘 보내요! 저 먼데서, 아마 잊힐 쯤 다시 올게요. 그 때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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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ㅠㅠㅠㅠ허류ㅠㅠ분위기ㅠㅠㅠ역시 작가님 ㅠㅠㅠ잘보고 가요...아련해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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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아 뭔가 간질간질하면서도 먹먹하고
예전의 작가님의 글을 본건 없지만ㅠㅠㅠ 잘보고가요!!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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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아련하다.. 노래랑도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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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헐대박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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