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위에서
Written by. 알리에
장례식을 갔다 왔다. 집으로 들어오는 도중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웃 분들을 만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분들이 이야기소리를 들어보니, 최근에 누군가가 또 죽었나보다. 요새 세상이 험하고 서민들은 돈 벌기가 쉽지만은 않아서 그런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야기를 몰래 훔쳐 듣다 보니 어느새 내가 사는 층에 도착했다. 이웃 분들께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이어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부부모임 때문에 늦게 오신다 했었지. 어쩌면 오늘 안 올지도 모른다고도 하셨고……. 내가 돌아올 시각이면 늘 집 안에 계시던 부모님이 집에 없다는 것은, 왠지 쓸쓸했다. 자각을 하자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에 손으로 팔뚝을 삐며 보일러를 확인했다. 역시나, 알뜰살뜰한 나의 어머니께서는 보일러를 끄고 가셨다. 윙윙거리며 작동되는 기계음을 들으며 욕실 불을 켰다 나도 모르게 무심코 물을 틀었다가, 내 손을 불숙 적시는 차가운 물에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섶은 이미 다 젖은 후였다. 제기랄.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차피 씻어야 했기 때문에 수고를 덜은 거라고 생각하며 자위했다.
욕조 안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놓고 들어갔다. 내가 욕조 안에 들어감과 동시에 물이 출렁거리며 약간 넘쳤다. 뜨뜻하게 몸을 감싸는 물에 몸이 나른해져서 평소보다 오래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손가락에는 이미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혀 쪼그라들었다. 이건 언제 만져도 이상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욕실을 나왔을 때에는 시간이 이미 엄청나게 지나있었다. 벌써 밤 11시였다. 목욕을 두 시간이나 했네. 어머니가 안 계셔서 다행이지, 한 바탕 잔소리를 들을 뻔했다. 이건 좀 다행 같았다. 보일러를 틀어놓아서 그런지 거실도 따뜻했다. 왠지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역시 목욕 후에 마시는 맥주 한 캔을 놓칠 수가 없어서, 결국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맥주만 마시기엔 아쉬워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영화를 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마침 예전부터 보려고 생각했었던 영화가 방영되고 있어서 아, 심봤다. 하고 소파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안 되어서 못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운이 좋다니.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기대했던 것처럼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영화관에서 못 봤던 걸 후회할 정도로 말이다. 아, 이건 좀 아쉬운데. 영화를 보다가 맥주 한 캔으로는 모자라는 느낌에 끝내 맥주 한 팩을 꺼내고 말았지만, 굉장히 좋았다. 약간 알딸딸한 느낌 때문인지, 기분도 평소보다 더 많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숨을 뱉으니 술 냄새가 조금 났다. 완벽하게 취하진 않았지만, 정신도 약간 몽롱했다.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오늘 따라 술기운이 빨리 오르는 느낌이었다. 시간은 이제 막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잠을 자려고 누우려다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다시 일어났다. 경수였다. 나는 오랜만에 연락을 한 녀석에 약간 섭섭하기도 했고, 설레기도 한 그런 미묘한 감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기쁜 감정이 더 컸기 때문에,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왜 연락 안했어?”
“바빴지. 이사도 했고…….”
“아, 정말? 어디로 했는데?”
“대학교 근처인데, 아마 너희 아파트랑 가까울 걸. 거기 XX 아파트.”
“어! 나도 그 아파트 사는데?”
“진짜? 너 OO 아파트 사는 거 아니었어? 거긴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 때. 우리 집도 작년에 이사했어.”
나는 오랜만에 연락을 하게 된 친구에 기쁘기도 했고, 약간 오른 술기운 때문인지 경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는 같은 아파트단지도 모자라 운이 매우 좋게도 같은 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한 달 전쯤에 우리 동 앞에 있었던 이삿짐 트럭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누군지 확인이라도 좀 할 걸 그랬네. 그랬다면 경수와 이제야 연락이 되진 않았을 테니까. 이래서 이웃 간의 교류가 필요한가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치 술에 홀렸던 것처럼 경수에게 괜찮다면 옥상에서 한 잔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경수는 승낙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맥주 한 팩과 안주거리를 조금 들고서 옥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도 내가 왜 그렇게 급하게 그와 약속을 잡은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연락이 되었기 때문일까?
옥상에 올라가니, 경수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전화하기 전에 이미 옥상에서 있었던 듯싶었다. 반가움에 경수를 끌어안았을 때, 그의 몸이 굉장히 차가워서 그렇게 생각되었다. 감기 걸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몸에 순간 그냥 우리 집으로 가서 마실래? 하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추위를 타지 않는 건가? 이렇게 두껍게 입은 나도 조금 추운 것 같은데……. 그는 재킷 하나만을 입어놓고서도 춥지 않은 것 같았다. 뭐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옥상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경수와 나는 사이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소꿉친구라던가, 절친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나를 동시에 아는 친구가 많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후에는 친구들이 우리를 젓가락 같은 사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니, 그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고교 시절 우리는 그렇게 친한 사이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는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새기기 시작했다. 인간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말다툼이나 싸움 같은 마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부터 우리는 멀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의식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멀어졌던 이유를 잘 모르겠다. 우리가 같은 여자를 좋아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멀어졌던 걸까?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곧바로 회사에 취직했고, 경수는 대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 또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우리가 멀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늘 부터 다시 그때처럼 가까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나에게 연락한 이유도 나와 다시 친해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화로는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부터 여자 친구 같은 사적인 질문까지 나누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전히 여자 친구가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그만큼 다정하고 잘생긴 남자는 찾기 힘든데……. 고등학교 때에도 그랬지만 경수가 애인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인 건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고 했다. 잘되길 바란다고 말했더니, 경수는 왠지 씁쓸하게 웃었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두 사람 다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만났기 때문에 물어볼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적막은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 우린 이런 사이였다. 억지로 말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이였다. 오랫동안 조용히 있던 나는, 문득 경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최근에 나에게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습지도 않게 나에게는 스토커가 한 명 생겼다. 여자도 아닌 남자인 나에게 말이다. 내가 여자처럼 생긴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금방 괜찮아 졌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 스토커는 -스토커라고 하기엔 조금 미안하지만- 스토커답지 않게 불쾌한 행동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매우 다정했으니까. 사랑 받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확실히 들 정도로 봄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스토킹의 시작은 익명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대충 [어제 입은 빨간 스웨터 너랑 정말 잘 어울리더라]라는 식의 메시지였는데, 나는 잘 못 온건 줄로만 알았다. 여자 친구도 없고, 심지어 여자도 아닌 내게 그런 식의 다정한 메시지가 올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그 전날 확실히 빨간 스웨터를 입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나에게 보낸 메시지라는 걸 깨달은 것은 그 다음번에 온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다음번에 온 메시지는 [오늘 두른 검은색 목도리 보다는 그저께 두른 빨간 목도리가 너한테 어울려.]였었지.”
“불쾌하진 않았어?”
“전혀. 사랑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 좋았는데. 알잖아. 나 그런 거에 조금 약한 거. 그리고 나 은근히 인기 없는 편이라, 조금 기뻤다고.”
경수에게 말했다시피, 나는 그때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스토커는 내게 해를 가하지도 않았었고, 오히려 정말 짝사랑하는 소녀같이 수줍음 가득한 말투와 행동을 내게 보여줬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가 그 사람과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말을 섞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절대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텍스트로 내게 전해지는 그 사람의 마음은, 늘 나를 걱정하고 있었고 내가 건강하길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스토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마니또 같달 까……. 내가 말을 내뱉자마자 경수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경수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가 인기가 없었다고? 고등학생 때 널 좋아하던 여자애들이 몇 명인데."
"무슨 소리야. 고백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아, 그건……."
"네가 뭐?"
내가 경수에게 되묻자, 경수는 말을 줄이며 고개를 획 돌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경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에 동의했다. 역시 내말이 맞았다. 난 인기가 없었다니까…
"아, 아니야. 너 인기 없던 거 맞아. 나도 그랬고."
"네가 인기가 없었단 말이 더 이해 안 간다. 너 허구한 날 여자애들한테 불려갔잖아."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래."
"모르긴 뭘 몰라. 네 고등학교 시절은 내가 다 꿰고 있어!"
"확신해?"
"왜. 아닐 것 같아? 난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
내가 자신감 있게 말하자 경수는 목청껏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확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화가 나 보였다. 나는 급변한 경수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는 옥상 난간에 기대며 담뱃갑을 빼들었다. 왠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는 바닥에 놓여 있는 맥주 캔을 들고서 남아있는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이 분위기를 깰 수 있을지 몰랐다. 자신도 없었다. 경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지…?
음습한 분위기가 경수를 휘감았다. 나는 이 분위기가 낯설어 몸을 떨었다. 경수는 굳은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경수의 얼굴 주위에는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연기에 휩싸여 얼굴이 잘 보인다고 느껴졌다. 날아갈 것처럼 희미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는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옥상 난간을 두들기며 손장난을 했다. 손가락이 옥상 난간에 부딪힐 때마다 투투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경수와 나의 간격이 꽤 길어 들리는 게 불가능 했지만, 정말 크게 들렸다. 마치 바로 앞에서 손장난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수는 순간 하던 손장난을 뚝 하고 멈추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어느새 담배가 필터 부분까지 타들어 간 것이 보였다. 경수는 뜨겁지도 않은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천천히 옥상 밖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모습에 위압감을 느꼈다.
"김준면."
"……"
"정말 나를 그렇게 잘 알아?"
"……"
"그럼 우리 게임 한 번 할까?"
그는 느린 어조로 내게 말했다. 게임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하나씩 내고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맞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게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출발지는 내가 있는 옥상 한가운데이고, 도착지는 경수가 있는 옥상의 끝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를 틀릴 시에는 한 발자국 씩 앞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문제를 맞혔을 때에는 문제를 낸 사람이 앞으로 가야 했다. 결국 경수가 있는 곳인 옥상 난간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안감에 그 제안을 피할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남자의 승부욕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내 입으로 내가 경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이미 내뱉었기 때문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뒤로 숨기며 억지로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반에는 쉬운 문제들이 태반이었다. 대충 생일 따위의 것들이었으나, 나와 경수 모두 틀리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엎치락뒤치락 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슬슬 문제의 수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첫사랑이나, 첫 경험. 이런 것 따위의 문제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우리가 못 본 게 벌써 2년이라고! 라는 불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내가 너무 운이 없기도 했고, 경수는 너무나도 잘 맞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없어졌다. 너한테 유리한 게임이라서 제안한 거지? 하고 빈정거리듯이 묻자, 경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계속 문제를 못 맞히는 내가 안쓰러웠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경수는 내게 점차 다가왔다. 일부러 틀렸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모른 체했다. 결국 우리가 같은 라인에 서게 되었다. 옥상 난간까지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다섯 발이 채 안 되었다.
"나는 네가 두르는 빨간색 목도리를 좋아한다."
경수의 말에 나는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느껴지는 기시감인지 깨닫지 못한 나는, 그저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확률은 5:5였다. 나는 어느새 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힌트라도 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경수를 바라보자, 경수는 그저 미소만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나 봐줬는데……. 좋아하니까 저렇게 말을 했겠지? 싶다가도, 일부러 저렇게 꼬아서 낸 건가 싶기도 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아, 너무 어려워……. 결국 답을 결정한 나는 힘 있게 외쳤다.
"진실!"
"맞았어."
"어휴...너무 어려운거 아니야?"
"나에 대에서 모르는 게 없다며."
"아니……."
"네 차례야."
경수는 한 발짝 앞으로 가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말했다. 넌 쉽다 이거야? 경수가 왠지 얄미워져서 새된 눈으로 그를 째려보니, 경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내야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면서 겨우 문제를 냈더니, 경수는 조금의 생각도 하지 않고 단번에 답을 맞혔다. 제기랄. 어떻게 한 번을 안 틀려……. 경수가 앞으로 가는 경우는 내가 문제를 맞혔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건 그냥 내가 지는 게임 아니야? 다시 한 번 문제를 주고받으니, 어느새 우리는 난간과 딱 한 발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제 경수가 내는 문제가 승패를 가릴 것이다. 내가 질 것인지, 경수가 질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면 내가 틀림과 동시에 내가 질 것 같다. 긴장감이 나를 휩쓸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입 안에 계속 침이 고였고, 땀으로 인해 손바닥이 축축해 졌다. 마침내 경수가 입을 열고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네 스토커는 나다."
"뭐야… 당연히 거짓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경수를 바라보았다.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뒤덮었다. 날씨도 급속도로 추워지고 있었다. 겨울이라 춥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내 입에서 입김이 절로 나왔다. 나는 추위에 몸이 절로 떨렸다. 진정시키려 했지만, 턱이 제멋대로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경수가 나를 난간에 밀쳤다. 등이 아파왔다. 난간에 부딪힌 등이 쓰라려서 인상을 찌푸리자, 경수가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말했다.
"네가 졌어."
그때, 내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경수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내 생각과 달리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힘껏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그나마 헐거워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빼내 핸드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핸드폰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이어질 수 없었다. 경수가 내 손을 다시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급박해 보였고, 나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받지마."
"…왜?"
"받지말라고!"
"그러니까 왜!"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경수가 나에게 왜 이러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의 스토커였단 이유가 내가 전화를 받지 말아야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경수는 정확한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내게 강요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윽박을 질렀다. 나는 경수에게 재차 이유를 물어보고 있었고, 그는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서 그냥 나에게 전화를 받지 말라 요구하고 있었다. 그 행동이 반복 되다 보니, 결국 전화벨은 끊기고 말았다. 나는 경수를 강하게 밀쳐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억누르고 있지 않으려는 듯, 내가 밀치는 대로 가볍게 밀려났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뭔데, 왜 이러는데!"
"오늘만, 아니 지금만 받지 마. 지금만. 제발 지금만……."
"……그래. 이건 됐다 치고, 스토커는 뭔데. 왜 이제 말한 거야? 왜 그런 짓을 한거야?"
나는 이 말싸움이 전혀 끝날 기미가 안보여 결국 한 발 물러섰다. 이것보다 더 급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토커 이야기였다. 나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짓을 했던 거지? 그렇게 숨겨놓고서 왜 이제야 내게 진실을 밝히는 거지? 왜 나에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까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복잡하고, 아파왔다. 공황상태였다. 그냥 장난질을 한 걸까? 아니면 정말 그가…….
"불쾌하지 않았다며. 그거면 된 거 아니야?"
"……"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 아니야. 네 생각이 맞아."
"뭐?"
"내 입으로 직접 말해줄까? 그래? 내가 여기서 더…!"
"……"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함을 지르던 경수는 일그러진 얼굴로 격한 숨을 토해냈다. 그는 이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처음 봤다. 평생 웃는 얼굴만 봐왔었는데… 그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는 그 떨리는 손으로 내 소매를 살며시 잡아왔다. 그 손짓이 매우 간절하고,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나조차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구는 건지. 왜 이렇게 애달프게 구는 건지. 아까와 영 딴판인 그의 행동에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 행동에 담긴 마음이 너무 깊게 다가와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여전히 내 소매를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해왔다.
"좋아해. 내가 널 너무 좋아해."
"……"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만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제발. 나 갈 때까지만, 제발 전화 받지 마. 하지 마……."
그 순간, 마치 결정권은 내 손안에 있다는 것처럼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머뭇거렸고, 흔들리고 있었다. 경수의 말을 들어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호기심과 경수의 애원. 이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이 전화를 받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네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건데…! 경수는 나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절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딱 붙이고서 불안한 기색만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경수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으면서도 그러기 싫었다. 마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갈팡질팡하며 이 기로에 서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숨을 죽였다. 경수의 애원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이 옥상위에 오로지 나만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나를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경수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이때, 결정권은 정말로 오로지 내 손안에 있는 것이다. 결국 호기심은 경수를 이겼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내가 후회했을 게 분명했지만, 내가 핸드폰을 집어 드는 것을 보는 경수의 얼굴이 한없이 침울해져서, 한없이 미안해졌다. 나는 경수의 불거진 눈빛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결국 그를 등진 채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발신인조차도 확인하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내 오랜 친구인 김민석 이었다. 그는 경수와도 잘 알고 있는 사이었다. 나는 전화를 건 사람이 김민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호기심이 풀어지기는커녕 더 부풀어 났다. 도대체 그가 어떤 비밀을 쥐고 있기에……. 민석이는 비밀이라 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말하는 것들은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안부인사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평소와 다르게 새벽에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약간 취해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울었는지,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있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쏟아내는 말들이 이해가지 않았지만, 대충 동조하며 그를 위로했다. 한참 후에야 어느 정도 진정된 듯 그가 목소리를 정리하며 내게 물었다.
“너는, 장례식 잘 다녀왔어?”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숨을 턱하고 멈췄다. 경수의 비밀이 무엇인지 내가 깨닫고 만 것이었다. 후회가 이렇게 빠를 줄이야…. 공기가 이보다 더 싸늘해 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수가 왜 그렇게 애원했는지 알아챘다. 그것은 엄청난 비밀이었다. 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기도 했다. 힐끔 훔쳐 본 핸드폰 안에서는,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어제……. 나는 몸을 경직 시킬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차가운 냉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뒤 돌아보기가 두려워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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