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루민] 로맨틱 라디오 03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011220/b878f1ef49152bd29d5bede5350dc139.png)
휴대폰을 쥐고 잠들기 직전까지 생각한다. 연락할까? 루한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번호를 준걸까. 1차원 적으로 간단히 생각해, 나와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 라는 쉬운 답이 있긴 하다만 왜 발상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지. 루한은 나를 그저 ―연예인 친구를 두고 싶은― 그런 아이로 볼 텐데.
이런 굴러들어온 기회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까?
김민석,
여기 있네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되려 내가 루한을 귀찮게 군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해보지고 않았지만 지레 겁먹고 도망부터 치는 아이. 그래도 저를 너무 미워하진 마세요. 일괄된 순정 하나는 누가 뭐래도 미련할 만큼 최고니깐 요.
결국 그 '김민석'은 휴대폰을 힘없이 내려놓는다. 어쩌면 겨우 벗어났는데 또 다시 루한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질까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꽤 괴롭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느낄 때면 그만큼 비참한 게 또 없으니깐.
그래서 김민석은 가장 편한 선택을 한다.
널 안보는 게.
가장 편하고도, 가장 어려운 선택.
[루한 X 시우민] 로맨틱 라디오 03
W. 소년
백현을 알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백현은 생각보다 민석과 가까웠다. 지뢰마냥 곳곳 백현이 있었다. 공대 건물과 경영 건물은 달랐지만 같은 교양 수업을 들었고, 백현은 민석의 친구들을 거의 다리너머로 다 알고 있었다. 귀찮아서 거의 빠졌던 개강 총회 때도 이미 과 내부에서 몇 명은 백현을 찾을 정도였다. 그만큼 백현은 친화력이 좋고 발이 넓었다. 오죽 신입생들은 경영건물하면 변백현 먼저 떠올릴 정도로.
백현은 종종 민석이 보이면 먼저 인사를 했다. 민석과 인사를 하며 민석의 친구들까지. 정말 민석은 저 빼고 다 변백현을 알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얘는 어느 과에 구겨 넣어도 잘 적응하고 살아갈 것이라. 굽실거리는 게 아니라 모두 백현에게 맞춰주는데도 백현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몰렸다. 참. 신기하게도 백현에게는 그랬다.
본질은 경제학과라고, 가끔 돈 씀씀이도 화끈했다.
이렇게 백현과 만날 일은 많았는데 대학 4년 동안 루한과의 접전은 하나도 없었을까.
조금 더 일찍 백현을 만났으면 달랐으려나.
*
“김민석.”
언제나 그렇듯, 강약이 없는 굵은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다.
“너 요즘 시험공부 해?”
“…아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경수가 고기를 민석의 앞에 놓아둔다. 궁상은 있는 대로 다 떨어 놓고서 연락 한번 못했다고 종일 우울해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래야. 도경수는 눈치가 빠르다.
“민석아. 나랑 주말마다 종합 도서관가서 공부할래? 나도 요즘 안 해.”
경수가 놓아둔 고기를 제 입으로 냉큼 가져간 찬열이 말했다. <그거 너 준거 아니야.> 경수의 말은 귀동냥으로도 안쳐주는지 찬열은 덜 익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본다.
“그러던가. 이번에 학점 망치면 계절학기 들을지도 몰라.”
“헐 나도.”
덜 익은 고기를 집은 찬열의 젓가락을 제 젓가락으로 내려친 경수가 몇 안 되는 익은 고기를 찬열의 앞에 놓아준다. 원체 도경수는 안 그런 듯 사람 한정 세심하게 챙겨주는지라, 그 대상은 박찬열 아님 김민석 정도려나.
자고로 도경수의 인관관계는 짧고 깊게. 사람에게 정 주는 거 싫어하고 남 챙겨주는 것도 질색하는지라, 먼저 말을 건 것도 찬열과 민석이었다.
2차를 갈까, 적당히 배부른 차에 기분 좋게 해산을 할까 셋이서 고민하고 있던 중 포차에 들어온 사람은 이젠 조금 낯익은 안면이었다.
<박찬열이네?>라고 말한 변백현은 바로 옆 테이블에 친구들과 앉았다. 자연스럽게 찬열과 말하던 백현이 민석과 눈이 마주쳤고 눈인사를 건넸다. 민석은 젓가락을 들어 답을 대신했다.
“휴대폰은 멀쩡해?”
“아예 바꿔야 만족하니.”
저 말은 여덟 번도 넘게 들었다. 변백현은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안 망가졌어?> <전화는 돼?> <액정 기스 안 났지?> 누가 보면 꼭 내 핸드폰이 망가지길 바라는 아이처럼 보이는 족족 물어본다. 그렇다기엔 핸드폰을 보는 눈이 티 없이 맑아 올라오는 말을 조용히 삼켰다.
변백현은 대책 없이 말을 놨고, 덕분에 말을 트게 됐다.
남자들끼리 있으면 자연스레 대화 주제는 여자로 넘어가게 된다. 같은 과 여신이랑 누가 먼저 잤냐, 누구는 가슴이 작아서 별로였다, 여자 친구 있어서 꿈도 못 꾼다, 등등. 변백현과 비등할 정도로 엄청난 친화력을 가진 찬열덕에 어느새 떨어져있는 테이블을 붙여 술잔을 기울이고 앉아있다. 아래가 멀쩡한지 의심이 될 정도로 도경수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찬열은 많았다. 적당히 취기도 올라 속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주머니에 잡히는 담뱃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포차에는 뿌옇게 연기가 자욱하지만 모르는 애들을 앞에 두고 피고 싶진 않다.
겉옷을 두고 오니 서늘한 한기가 온 몸을 감쌌다. 몸을 부르르 떨며 부리나케 필터에 불을 붙였다. 눈이 그치고 나니 바닥은 온통 빙판길 투성이다. 저번 에였던가, 교수님이 넘어져 수업이 20분 동안 지체되었는데 아이들은 수업이 휴강 된 줄 알고 강의실을 나섰다가 나중에는 모두 결석 처리가 되었다. 그 무리중 하나는 박찬열이었다.
“너 담배 펴?”
뻥 안치고 열중 아홉은 이렇게 물었다. 대체 담배 피우게 생긴 얼굴과 안 필 것 같은 얼굴의 차이는 무엇일까.
변백현의 눈은 밤하늘의 별을 빼다 박은 것처럼 반짝인다.
“가끔.”
“의외다.”
“왜?”
나는 뻔히 알면서 묻는다. 이제 구구절절한 외모평가 타임이 있겠지.
그런데,
“너한테 담배 냄새가 안 나서.”
아니네.
“흡연자들끼리는 담배 냄새 잘 맡는다던데, 난 아닌가봐.”
어느새 변백현은 옆에 다가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빼간다. 한기와 함께 마트에서 파는 섬유 유연제 향이 풍겨온다.
“여자 얘기 별로지?”
“좋아하진 않아.”
“나도.”
작게 웃은 변백현이 생수 한 병을 건넨다. 시골에 가면 마당에 돌아다니는 강아지처럼 순하게 생긴 얼굴, 이라고 매번 생각한다. 생수 뚜껑을 열어 건네주는 센스까지. 원래 배려심이 도경수처럼 넘지는 건지, 남자 사이에 징그러운 것을 좋아하는 건지.
따지고 보면 난 후자지.
생각해보니 또 연락 안 한 게 좆같게 후회되네.
“여자얘기 말고. 루한 얘기면 들어줄 거야?”
백현의 말에 그대로 입안에 있던 물을 내뿜었다. 변백현은 그런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장을 짓다 이내 얼굴을 구기며 인상을 팍팍 쓴 채 제 소매를 당겨 입가 주변을 꾹꾹 눌러준다. <더럽잖아.> <나한테 분수 보여주고 싶냐?> 실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아, 미안.”
“미안하면 세탁 비 내놔. 더럽게. 너 때문에 내 옷에 물 다 스며들었어.”
“그러게 누가 닦아 달래?”
“그러게 누가 물 뱉으래?”
나는 할 말이 없어 다시 입을 다문다. 물에 젖은 소매를 제 바지에 슥슥 문지르던 변백현은 잠시 말이 없다.
“너 루한 좋아하지 않나? 엄청 티 나던데.”
“…….”
“루한한테 말 하진 않을게.”
“고맙다.”
“부정은 안하네.”
“부정하면 부정 타.”
“너 ‘그딴 거’ 좋아하냐?”
변백현은 긴 검지로 내 이마를 꾹 눌렀다. <고등학교 때 엄청 티 났어. 안보일래야 안보일수가 없잖아.> 까만 밤하늘을 보며 변백현은 말을 흘린다. 어둠속에 별 몇 개가 총총 박혀있다. 예쁜 밤하늘이 아니라 그냥 너무 어두운 볼 것 없는 밤하늘. 아주 흐릿한 별. 물감으로 검게 칠해놓은 도화지마냥 어둡기만 하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루한을 생각하는데, 넌 날 잊어가고 있으려나.
“아직도 진행 중?”
“아니. 대학교 들어온 순간부터 잊는 중.”
“오. 깔끔하네.”
난 왜 이렇게 거짓말만 하고 다닐까. 거짓말 탐지기를 달고 다니면 난 이미 감전으로 죽었으려나.
나 잠깐 통화. 양해를 구한 백현이 살짝 몸을 틀어 전화를 받는다. 얼핏 ‘루한’ 이라는 이름이 들리긴 했지만 술기운에 분간이 안 간다.
사실 그 두 글자만 뇌리에 박혔는지도 모른다. 생수 반병을 먹어치운 지금, 취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니깐.
변백현이 루한하고 통화를 한다.
만나려나?
그럼 난 얼른 가야하는데.
다시 보면 정말 더 좋아질 것 같단 말이야.
*
경수는 북적거리는 포차를 등지고 민석이 있는 정문과 반대인 후문으로 나왔다.
술도 깰 겸 잠깐 걸을까, 나왔다. 별 취하지도 않았지만. 누가 죽여주고 누구는 가슴이 몇 컵인지 그런 건 썩 관심이 없었다. 걔네 가슴 크고 그런걸 알아서 뭐하려고. 아예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는 건 아니다. 가끔 혼자 야동을 보며 욕정을 풀기도 한다. 단지 아무런 감정 없이 하나의 감각으로 몸을 섞는 게 싫다는 거지.
쿨하게 한번 자고 끝날 사이라는 건, 있을 수 있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인파가 많아 여섯 걸음 걸면 한번 치이는 꼴이었다. 시험 기간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지. 저도 안하는 꼴이긴 하지만. 대충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핸드폰도 쭉 훑었다. 주머니에 진동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다. 연락은 대게 찬열이었다.
「어디야?」
「집 갔어??」
「도경수 오늘 빼기야 ㅡㅡ」
「다시 와.」
답장은 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손이 많이 가는 애다.
경수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시 공허하게 앉아있다, 금방 다시 가려던 차였다. 이름값 하는 외제차에서 익숙한 얼굴이 내리기 전까진.
학교에서 족족 보이는 백현 만큼이나 많이 본 얼굴이다. 얇은 얼굴선을 가진 눈이 큰 남자. 김민석이 보는 드라마에 조연이기도 했고 김민석이 듣는 라디오 디제이기도 하고 샌님인 김민석이 좋아하는 유일한 연예인이기도 하고, 죄다 김민석이네.
차에서 내린 남자는 경수를 보지 못한 듯 익숙하게 담배를 빼 불고 불을 붙였다.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뿌연 담배연기가 구름마냥 피어오른다. 남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경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보였다.
“너네 학굔데 너 어디야?”
남자는 타들어가는 담배를 떨어뜨려 발로 한번 밟아준 뒤 새로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올 거면 빨리 오던가. 좆까라그래.”
적잖이 짜증이 난 얼굴이다.
“싫어. 기다려 준다니깐.”
남자가 몸을 틀었고,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예쁘장한 얼굴로 걸걸한 말이 줄줄 나온다. 남자는 경수가 있건 말건 유유히 통화를 이어갔다. ―너 같은 남자 한명정도는― 뭐, 이런 건가.
실제로 경수는 사사로운 것에도 떠드는 걸 싫어했다. 내가 루한을 봤는데 담배 피더라. 루한 입이 험하더라. 욕도 장난 아니게 하던데? 루한 별로더라. 이런 걸 말할 종자가 못됐다. 이렇게 카더라 가 도는 건가, 생각만 할 뿐.
그나저나 김민석은 루한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좋아할까. 얼굴하고 매개체로만 보는 루한을 좋아하는 걸까. 나중에서야 루한의 통화 상대가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변백현’ 이라고.
경수는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루한은 인기척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 경수가 있는 줄 몰랐다. 거무칙칙한 곳에 검은 옷으로 위장한 사람이 있으면 누가 알 수 있을까. 가식적인 연기는 방송으로 족했다.
*
경수가 포차로 돌아왔을 때에 민석은 이미 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옆에 있던 백현도 지갑을 챙기기에 같이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어차피 김민석이 가면 여기 그닥 끼고 싶지도 않은 경수였기에 그나마 들고 왔던 가방을 챙겨들었다. 전공 서적이 든 가방은 꽤 묵직했다.
혹여 정문에 있을까 이번에는 후문으로 나왔다. 후문은 사람도 적은데다 조용했다. 후문으로 나오면 자취방을 돌아가긴 하지만 경수는 별 말 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번쯤은 꼭 생각하는 게 있다. 오늘은 꼭 잊어야지.
김민석은 도돌이표 같은 인간입니다. 같은 생각만 반복해서 하는 머저리 같은 인간이죠.
“또 보네. 민석아.”
검정 코트에 흰 얼굴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튀었다. 물론, 얼굴이. 일주일 만이었다. 풀려가는 신발 끈이 신경 쓰여 발코만 보고 걸었더니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 루한은 입 꼬리를 올리며 수려하게 웃었다. 곁눈질로 민석의 옆에 서 있는 경수를 한번 훑어주고.
괴로워. 괴로웠다. 속이 갑갑하고 무언가가 깊이 끓어오른다. 대학가면, 이 감정이 조금 사라 앉을 줄 알았 것만. 이미 같은 대학을 지원한 순간부터 포기하긴 했지만. 나름 잊어가는 중이었다.
근데 왜 넌 다시 나타나서 날 힘들게 해.
“응. 루한.”
“연락 왜 안 해. 나 심심했는데.”
빈말이었다. 심심은 얼어 죽을, 해외에서 행사를 하고 한국에 오면 바로 촬영부터 들어갔다. 쪽잠을 지새고 코가 얼도록 밖에 있어야만 했다. 민석에게 번호를 주고 연락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 오렌지색 머리를 다시 보면 재밌겠네.
루한은 단지 지루한 일상이 재미없다고 느낄 때였다.
“루한아.”
“응.”
민석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지긋지긋한 감정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루한이 공인이 된 순간부터 어쩌면 속으로는 이미 마음을 접었을지도.
아. 진짜. 말 하려니깐 입에 추가 달렸나. 하루만 주인 말 들어봐. 쓸데없이 나불거리지 말고.
“나 너 고등학교 3년 내내 좋아했어. 물론 지금도 좋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보니깐 그러네.”
“응.”
“너 때문에 대학도 여기로 온 거고. 넌 자퇴했지만. 축구도 너가 해서 했고, 급식도 너 때문에 일찍 먹었어. 매일 쉬는 시간마다 너 보려고 매점 갔고 이동 수업이면 일부러 늦게 나갔어. 너 보려고. 말도 못 걸었고 그렇게 3년을 좋아했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줄줄 나온다. 지금 이 순간 루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지나가던 벌레를 밟은 표정이려나.
“연락은 일부러 안했어. 내가 버겁거든. 아무 감정 없는 너랑 연락하는 내가 버거워.”
“…….”
“그러니깐. 그러니깐 그냥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 원래 인사하던 사이도 아니지만.”
말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루한은 말이 없다. 건장한 사내새끼가 몇 년을 좋아했다는데 말이 있는 게 이상하지. 사실 라디오도 듣고 데뷔부터 지켜봤다는 스토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거까지 말하면 루한은 정말 날 인간으로도 안 쳐줄 것 같기에.
이 다음에는 루한이 더러운 눈빛으로 날 보고 경수가 절교를 권하는 상황이 오려나.
“민석아. 난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당연히 몰랐겠지. 근데 변백현은 어찌 알았을까. 사실 너만 몰랐는지도.
“내가 몰라줘서 답답하지 않았어? 나 엄청 눈치가 없어서.”
다가오는 목소리는 쓸데없이 다정하기만하다. 존나 눈물 나오려던 걸 참아냈다. 이 상태로 뭘 잘했다고 루한 앞에서 울면 정말 진상이 따로 없으니깐.
“김민석. 대답 좀 해줘.”
“…듣고 있어.”
루한의 손에 의해 고개가 들렸다. 정말 썩은 표정일 것이라는 내 추측과 다르게 루한은 웃고 있었다. 이제 정말 온 몸이 타들어가서 재가 되는 일만 남았네.
“나 계속 좋아해줘. 나 너 처음 볼 때부터 관심 생겼어.”
“…….”
“나 너무 이기적인가?”
“안 더럽냐.”
“더럽긴 뭐가. 사람한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건 당연한거야. 그게 남자라 해도.”
결국엔 주책맞게 눈물이 터졌다. 7년의 짝사랑을 상대가 알아주는 게 얼마나 벅차고도 좋은 순간인가. 눈가를 닦아주는 손이 다정해서 눈가를 비집고 눈물이 흘렀다. 난 루한의 손이 닿을 때까지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루한의 손은 오늘도 차다.
“전화번호 알려줘. 너가 부담스러우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
루한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혹여 눈물이 묻을까 조심스레 번호를 적었다. <연락 받어.> 루한은 어깨를 두어 번 도닥여준 뒤 겉옷을 여며주었다. 어느새 백현도 와 있었다. 의도치 안았지만 강제로 경수와 백현에게 구구절절한 짝사랑 얘기를 풀어놓은 셈이었다. 나중에 얼굴 어떻게 보냐. 시발. 루한은 백현과 차를 타고 떠났다. 백현이 가기 전에 어깨를 한번 손으로 쓸고 갔는데, 이건 무슨 의미일까.
그것보다 정말 루한은 대체 왜 나한테 이런 걸까.
눈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는데.
집에 가는 동안 경수는 한번 입을 열었다. <너희 집 가서 자고갈래.> 그 말이 얼마나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민석은 알고 있다. 오늘도 꽤나 뒤척이다 질 자신도 알고 있고. 집에 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디어 죽을 만큼 뜨겁게 했지만 살만 붉게 익었다. 씻고 나오니 경수는 기가 찬 표정을 짓는다. 경수가 씻으러 들어가고 머리를 대충 말린 뒤 침대에 누웠다. 게임이나 할까 휴대폰을 켰을 때엔 문자가 와있었다. 우선 카톡 목록을 한번 쭉 훑고 나중에야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의 주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잘 들어갔어?」
루한에게 답장을 보내는 동안 심장이 또 지랄 맞게 나대기 시작한다.
「응. 너도?」
「집이야. 변백현이랑.」
「너무 늦게 자지마. 나 먼저 잘게.」
「잘 자. 내일 눈 붓지 말고.」
짧은 문자가 오고가는 동안 민석은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굼벵이처럼. 속이 다시 갑갑해진다. 샤워를 마친 경수가 물을 마신다. 민석도 냅다 일어나 경수의 손에 들린 컵을 가로챘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경수는 이내 다시 덤덤하게 돌아와 새 컵에 물을 받는다.
아무렴 어떨까. 내가 좋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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