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던 겨울 권태의 끝자락을 내몰고 봄의 기운이 만연한 계절이 도래했다. 코끝을 망연히 스치는 듯 맴도는 봄바람과, 봄비와, 겨울잠에서 깨어난 여러 금수들, 본디 생명이라면 마땅히 갖고 태어난 본능으로 힘겹게나마 땅 위로 움트는 새싹들.
여울물 살얼음 녹아내려 도랑을 파고드는 물소리가 산모롱이를 휘돎과 함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든 봄의 발자국을 재촉한다.
구중궁궐의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닌 법.
“마마, 흐드러진 봄을 한 조각 깨물어 귓결에 이고 가는 저 소녀는 어느 대소가의 여식입니까? 앳된 낯을 보아 하니 예닐곱 살의 처자인 듯한데, 공주마마나 옹주마마는 아니실 테고.”
수련이 오도카니 봉오리를 여물고 있는 별당 연못 뜨락 언저리서 뛰노는 세 아이 중, 연지 곤지가 피어난 마냥 시붉은 꽃잎의 꽃 두어 송이를 귓등에 꽂은 아리따운 여자 아이에게로 내리 시선을 거두지 아니하던 중전의 큰 오라버니가 이내 사뿐히 내려앉던 눈길을 거두어 여동생에게 물었다. 그는 신륵사 소속 스님으로, 불교 세력은 한참 기울어 민머리 사내라 함은 곧 정처 없는 나그네라 일컫는 만큼이나 살기 여의치 않은 시대였으나 국모라는 지위를 꿰찬 여동생의 안부를 물을 겸 이따금씩 궁궐을 출입하는 형편이었다.
중전의 눈은 태자로 책봉된 제 아들과, 주상의 서자이자 희빈 유씨의 아들인 권지용이란 이름의 화완대군, 그리고 모연한 동백꽃 한 송이처럼 다홍색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걷은 채 걸음을 내딛으며 둘을 따르는 소녀에게로 머물렀다.
“바로 보셨습니다. 영의정 벼슬자리에 앉은 자의 여식이온데, 공주나 옹주 자리가 빈 터라 주상께 윤허를 받고 이리 궁 생활을 동반하게 된 소녀입니다. 아리따운 미색에 뒤지지 않는 고운 행태와 마음씀씀이에 태자빈 후보로 가장 거론되는 아이이기도 하지요.”
돌아온 대답에, 그는 마음 속 우물로 돌덩이가 묵직한 동심원을 이루어내며 가라앉는 듯 켕겨오는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손바닥 가득 쥐어낸 연수목 지팡이의 까끌한 선단을 엄지로 매만졌다. 물끄러미 던져진 시선은 결국 세 아이의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향해 끊어질 줄을 몰랐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저런 인연을, 악연을 우연으로 덧대셨는고.
각자의 손등을 휘감은 월하노인의 빨간 인연의 실이, 소녀를 기반으로 지독히도 뒤엉켜 있었다. 시작점도, 끝맺음도 분간키 어려울 만큼이나.
“저 꽃은 연산홍이 맞습니까?”
“보통 자들은 철쭉이나 진달래로 흔히 혼동하더니만, 속세를 등지고 살아오신 오라버님이라 산야초에 해박하신 겝니까, 말씀하신 대로 연산홍이 맞습니다. 산수유 열매가 피어난 마냥 자태가 참으로 곱지요.”
능선을 이룬 소녀의 귀 이랑에서 노리개 역할을 하던 연산홍 꽃잎 하나가 나풀대며 아지랑이를 타더니, 이내 그가 짚어낸 지팡이 바로 앞에서 저물어 내려앉았다. 그는 다물린 입술을 열 기미도 없이 함구한 채 그저 본인이 쥔 막대의 끝과 땅 사이 간극을 조금 둔 후 한자를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속세 이야기엔 통달하기로 그리도 다짐했거늘.
花, 禍, 華.
“연산홍 한 무더기가 만개해 낭자할 것입니다…….”
〈DEEP INSIDE> |
ㄱ) 다음 한 편으로 다 적어내릴 계획입니다. ㄴ) 연산홍 = 영산홍. ㄷ) 1차 출처 : 쭉빵카페 나라서 사랑해님. / 2차 출처 : http://instiz.net/pt/2763450 오마주임을 밝힙니다. ㄹ) 연산홍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roxdjw/25 ㅁ) 퇴폐 지디 만세, 물론 태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