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찌는듯한 더위가 학생들을 반겼다. 방학식이라 간신히 욕설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의 종인은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경수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참 희고, 작고, 곱다. 자신과 꽤나 다른 모습이 신기한건지 요리조리 경수를 탐구하듯 관찰하는 종인의 두 눈에 들어온 건 창문으로 빼꼼히 교실 내부를 들여다보는 찬열이었다. 저 미친새끼 또 왔어. 만나선 안될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으르렁대는 종인의 손목을 꼭 붙든 종대는 방긋 평온하게 웃으며 다시 교과서에 시선을 쑤셔박았다.
“방학식 날까지 지랄이냐, 너 친구없는 거 자랑 좀 그만하고 니네 반으로 꺼져 박찬열.”
“너 보러 온 게 아니라 경수 보러 온건데? 깨워줘라 데리고 가야되서.”
“우리 반 방송 하는 반인 거 몰라? 방학식 시작이라 앉아있어야 되 수작부리지마.”
종인은 화가 나는지 왁스로 삐죽거리게 세운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끌어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는지 두 어번 입맛을 다시며 잠에서 깨어난 경수는 부산스레 방학식을 준비하는 방송부원들을 보며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두 눈을 이리저리 비비며 고개를 흔들었다. 종인은 방금 전의 격해진 감정이 다시 평화로워진 건지 경수의 아이같은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아예 턱을 괴고 경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수는 아직도 웃음을 머금고 창문에 기대있는 찬열을 발견하자마자 통통 뒷문으로 튀어나갔다.
“찬열이 왔어? 수제비누 아직 못 만들었는데… 어쩌지. 개학날 줄까? 미안해, 대신 두 개 줄게!”
“아니 아니. 방학 때 만나면 되지 뭘. 김종인 때문에 깬거야? 더 자지 그랬어.”
“헤헤, 안 그래도 일어나야 되는건데 뭐. 끝나고 와 같이 가자, 히.”
찬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갈색 뿔테안경을 치켜올리곤 사라졌다. 참을 수 없었다. 혈기왕성한 열 여덟이란 나이에 도경수를 향해 소유욕을 남발하고 있다니, 어처구니없고 본인 조차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남녀공학이건만.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건지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도경수만큼은 박찬열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걸 빼앗겨 버렸으니까. 2년 전, 사랑하는 연인을 박찬열에게 빼앗긴 것만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은… 용서하고 납득할 여지가 없었다. 종인은 신경질적으로 경수를 삐딱히 노려보았다.
“너 박찬열이랑 왜 놀아? 그 미친놈이 그렇게 좋디? 한심하긴.”
“왜 찬열이한테 그래…. 그러고보니까 둘이 사이 안 좋아? 왜 맨날 그래….”
말끝을 흐리는 모양 조차 예뻐보여서 종인은 입을 굳세게 다물었다. 말을 말아야지. 화가 난듯한 종인에 어쩔 줄 몰라하던 경수가 보드라운 손으로 종인의 볼을 쿡쿡 찔렀다. 꽤나 반항적이고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뭐냐는 표정의 종인이 무심히 고개를 돌리자 경수가 애마냥 히히 웃어대며 종인의 손을 꾹 잡았다. 화 내지마 종인아, 오늘 좋은 날이잖아. 경수의 말에 종인의 감정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김종인 병신, 단세포도 이런 단세포가 있을까. 종인은 두 눈을 살짝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박찬열이랑 가지 말고 나랑 가,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도경수.”
“싫어, 안되. 나 찬열이한테 비누도 못 주고…, 오늘 같이 가기로 했단 말야. 너 왜그래…….”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이제 방학이다. 4주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한 치의 가까워짐 없이 경수를 떠나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기에 종인은 인상을 험악히 구기며 경수의 가녀린 손목을 붙들었다. 뒷문에서 경수를 기다리던 찬열의 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찬열이 제지하기도 전에 날쌔게 종인은 경수의 손을 붙들고 교문을 통과해버렸다. 너 뭐하는거야? 제법 앙칼진 외침이었지만 종인은 개의치 않았다. 너무 예뻐서 와그작 와그작 씹어먹고 싶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숨겨놓고 싶었다. 아니, 그런 것따위 사치와 욕심이라 생각하고 다 포기할테니 박찬열 하나한테 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 변백현 하나로 충분해.”
“그게 누군데. 너 나한테 악감정 있어? 왜 이렇게 괴롭히는건데 너!”
“…… 내가 그 개자식한테 빼앗긴 건 변백현 하나로 족해, 내가 너… 뺏길 줄 알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경수를 거칠게 품 안에 끌어안은 종인이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 경수야. 정말이지, 너무 예뻐. 하지만 그 짧고도 황홀했던 순간은 일순간 끝나버렸다. 찬열이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종인과 경수를 떼어놨다. 미친. 종인이 낮게 욕을 중얼거리고, 닭똥같이 흐르던 눈물을 작은 두 손으로 슥슥 닦아낸 경수가 찬열의 뒤로 쪼르르 달려갔다.
“변백현이랑 도경수는 달라. 자꾸 네 멋대로 해석하고 경수 힘들게 하지마.”
“… 엄청난 재주다 박찬열. 변백현에 도경수까지, 너 진짜 징그러운 놈이야 알아?”
“네 능력을 탓해야지, 누가 뺏기랬어? 경수는 처음부터 내 거였어, 너야말로 탐하려들지마.”
그렇게 둘은 사라졌다. 어느덧 보슬보슬 축축한 여름비가 다시 종인의 몸을 감쌌다. 열을 너무 받아서 빵하고 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종인은 허탈히 웃음을 터트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온 몸이 축축히 젖어버렸는데 옷을 갈아입고 씻을 기운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뭐라 잔소리를 내뱉는 준면의 입을 한 손으로 턱하고 막은 종인이 끙끙거리며 방 안에 들어섰다. 짝꿍이 된지는 일주일, 알고 지낸지는 4개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진전된 감정의 크기는 엄청났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울고싶었다. 난 왜 항상 이럴까. 김종인은 왜.
*
꿈을 꿨다.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백현을 아무렇지 않게 미소지으며 데려간 찬열의 역겨운 얼굴이 다시 한 번 얼굴에 그려졌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안 보이니까 편하려나. 찬 물을 꿀꺽꿀꺽 들이킨 종인이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박찬열한테 줄 비누를 만드느라 전화를 받을리가 없겠지. 무엇보다 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걸까. 왜 경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집착과 구속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널 사랑한다는 외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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