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핸드백을 들고 비싼 술을 시켜대며 몸을 치대오는 여자만 세 명 째. 웃는 얼굴이지만 속은 문드러지기 직전인 찬열이 술잔에 얼음 하나 없이 럼을 꽉 채워 따랐다.
“열, 너무 무리 하는 거 아냐?”
“우리 자기는 술 잘 마시는 사람 좋아한다며. 연습 많이 해 왔어.”
“어머나, 귀엽기도 하지. 한번 보여 줘봐!”
찬열은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왼쪽 눈을 찡긋한 다음 럼을 들이켰다. 연습은 무슨, 주당 같아 보이지만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하는 찬열은 곧장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여자의 까칠한 목소리가 룸 안을 메우고 찬열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실려 나갔다.
고객의 따끔한 컴플레인 이후 분노에 차 떨고 있는 주인 여자의 얼굴 앞에 영수증 한 장이 내밀어졌다.
“왜 열받아있냐.”
“도경수. 너 이상의 미친놈이랑 일한다, 내가.”
“뜬금없이. 나 밥부터 줘. 출근 일수도 늘려주고.”
“존나 무리하지 말라 그랬어, 내가.”
“네 말 듣다가 굶어죽게 생겼어, 내가.”
경수의 까칠한 대꾸에 파르르 떨던 여자는 결국 의자 등받이를 휙 젖히고 누워버렸다.
나지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웃는 얼굴을 한 민석이 들어왔다.
“경수 왔어?”
“형, 밥이야?”
“어. 뭐가 없어서 그냥 고기로. 제육 괜찮지?”
“가릴게 뭐 있어. 삼각 김밥만 아니면 돼.”
너 좀 말랐어, 많이 먹어. 민석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경수는 빠르게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며칠 굶은 것처럼 우적우적 먹는 경수의 모습에 사납던 여자의 눈매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굶었냐? 거지처럼 먹기는.”
“굶었다. 난방도 못 해. 이불이나 하나 사 주고 말해라. 듣는 거지 기분 나쁘다.”
경수의 말에 말문이 턱 틀어 막힌 여자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버렸고 민석은 난처하게 웃으며 경수의 등을 토닥였다.
“들어와서 같이 살자니깐.”
“그것도 한두 달이여야죠. 나 민폐 끼치는 거 싫어하잖아요.”
“글쎄, 나한테는 폐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지만. 네가 싫다니까 뭐.”
허허 웃는 민석을 슬쩍 올려다 본 경수가 입가에 빨간 소스를 묻힌 채 바보처럼 웃어보였다.
웃음이 터진 민석이 경수의 입가를 닦아주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기다란 인영이 들어섰다.
“머리아파.”
나지막한 목소리에 경수와 민석, 여자의 시선이 문으로 몰렸다.
눈 밑으로 시커먼 그늘을 드리운 남자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온통 헝클인 채 성큼성큼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때려, 시발. 치려면 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의 손이 남자의 뺨으로 야무지게 날아들었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경수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고 남자는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진짜 때려, 씨발. 나쁜 년, 얼굴에 상처 나면 어떡할 거야.”
“네가 계집애야? 얼굴에 그깟 상처 좀 난다고 칭얼대기는.”
“아 몰라몰라, 나 쉴래. 쉴거야.”
“웃기지마. 어디서 쉴 생각을 해? 너 때문에 그 미친년이 나한테 얼마나 지랄하고 갔는지 아냐고. 이번 달에 그년이 너한테 얼마를 투자했는데 꼬리를 흔들지는 못할망정 술을 쳐 마시고 뻗어?”
경수는 둘의 설전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접시의 바닥까지 핥아먹었다.
부엌에 남은 제육을 떠올린 민석은 경수에게 더 먹겠냐고 물었고 경수는 당연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무 화내지는 마. 열이도 가끔 쉬어줘야지. 나는 얘 밥 좀 더 먹일게. 적당히 해.”
“형, 아 나는 진짜 형밖에 없는 것 같아. 나 형이 여자였으면 보쌈 해 갔을 거야. 너무 예뻐.”
“미안, 난 여자였으면 너 안 만났을 거야. 그만 가 볼게.”
귀여운 얼굴과 달리 단호한 민석의 대꾸에 남자는 푹 고개를 숙였다. 멍하니 서 있던 경수는 민석의 손에 이끌려 달랑달랑 부엌으로 끌려갔다.
“형, 누구에요?”
“어? 너 몰라? 쟤가 우리 가게 매출 탑이야. 이름은 열이고, 나이는 스물아홉인가 그럴 걸?”
“헐... 형이 벌써 서른 넘은 거예요? 말도 안 돼. 나랑 동갑이래도 믿겠어.”
“스물 셋하고 같냐. 내 나이 소문내지마. 어린 애들 꼬이게.”
민석의 농담에 경수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입술을 예쁜 하트 모양으로 만들며 웃는 경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석은 밥과 함께 매콤한 제육을 잔뜩 담아주었다.
“많이 먹어. 삼각 김밥 먹지 말고 반찬 떨어지면 형한테 말하고.”
“됐다니깐.”
“말 들어, 너 더 마르면 2차도 못 뛰게 할 거야.”
경수는 한 술 가득 뜨려던 숟가락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형이라도 내 밥줄은 못 끊어.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제발 멀리까진 가지 말자 우리. 응?”
생각보다 날 선 대꾸에 민석은 아무 말 없이 찬 물 한 컵을 내밀었다. 경수는 밥을 깨끗이 비워내고 물을 들이 킨 다음 민석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형, 나 너무 좋아 하지 마. 형은 나한테 너무 과분해.”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경수의 뒷모습을 민석은 한참이나 바라보며 서 있었다.
긴 복도를 지나며 여자애들과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마른 어깨를 한 뒷모습은
삼년 전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가게에 들이닥쳤던 그 때의 모습과 달라진 게 없어서. 민석의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들었다.
“내가 널 어떻게 안 좋아하겠니.”
냉장고에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은 민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