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악몽을 떨쳐내는 법
' 얘야, 웃어야지.
또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
.
" 헉...헉... "
호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킨 호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어제의 음주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리하고 묵직한 고통이었다. 한참을 감고 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악몽이었다. 그 속에서 자신은 혼자였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제 손을 바라보던 어린아이.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쳤지만, 저를 봐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끝도없이 공허했다. 결코 저를 담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호석은 그 꿈 속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이 걸었다. 그리고 맞닥뜨린 낭떠러지 앞에서, 그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려왔다. 차갑고, 매정한.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찾아온 지끈함에 호석은 이마를 짚었다. 맺혀있는 땀이 흥건했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도 도저히 열이 가시질 않았다.
이제는 떨쳐냈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악몽 속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이다지도 고통스러웠다. 가슴의 여린 살결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호석은 한참 숨을 고른 후, 느리게 눈을 떴다. 모순적이게도 침대에 안온하게 내려앉은 햇살부터 눈에 들어왔다. 호석이 그 위에 손을 뻗자 딱 창문의 크기만큼 들이친 햇살이 제 손안에 반짝였다. 눈물겹게 따스한 온기에 심장이 일렁였다. 공연히 눈가가 따가워지는 건, 이 따스함은 결국 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치고 말 순간에 불과한 것. 하지만 호석은 그런 순간들이 간절했다. 방심하면 찾아오는 아픈 순간들을 견뎌낼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짧은 순간들에는 크고 작은 희생이 따랐고, 그를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었지만 괜찮았다. 모든 사람들은 제 껍데기를 사랑했고, 필요로 했으니까. 그게 가끔은 마치 스스로 존재가치가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모조리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호석은 거머쥐듯 손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있던 햇살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작게 실소가 터졌다. 뭘 기대한 거야. 작은 혼잣말과 함께.
호석은 가만히 그 햇살을 보다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내 우울함에 빠져있기엔 호석에게 하루는 너무 짧았다. 하루종일 봐도 모자란 사람이 저 문 너머에 있었다.
절박한 제 삶을 무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 언젠가 떠날 거란 걸 예감하면서도, 제 곁에서 있어주길 바라게 되는 사람. 버려진다고 해도 결코 원망할 수 없는 사람.
오늘의 악몽도, 목소리도, 그 얼굴을 마주하면 없던 일처럼 환해질 것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들을 떨칠 수 있었으니까.
문 앞까지 단숨에 걸어간 호석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들이닥쳤다. 그 아이의 얼굴처럼.
# 분기점
style="text-align: center;">
어젯밤 호석을 재우고 결국 네시가 넘어서 잠든 여주는 힘겹게 눈을 떴다.
망연하게 떠있는 창가의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여주는 혼잣말을 흘리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호석에게 해장라면을 끓어주려고 했는데, 시간을 살펴보니 이미 그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여주는 거울을 보고 봐줄만한 얼굴인지 꼼꼼히 살핀 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 악몽을 떨쳐내는 법
' 얘야, 웃어야지.
또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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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 "
호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킨 호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어제의 음주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리하고 묵직한 고통이었다. 한참을 감고 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악몽이었다. 그 속에서 자신은 혼자였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제 손을 바라보던 어린아이.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쳤지만, 저를 봐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끝도없이 공허했다. 결코 저를 담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호석은 그 꿈 속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이 걸었다. 그리고 맞닥뜨린 낭떠러지 앞에서, 그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려왔다. 차갑고, 매정한.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찾아온 지끈함에 호석은 이마를 짚었다. 맺혀있는 땀이 흥건했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도 도저히 열이 가시질 않았다.
이제는 떨쳐냈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악몽 속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이다지도 고통스러웠다. 가슴의 여린 살결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호석은 한참 숨을 고른 후, 느리게 눈을 떴다. 모순적이게도 침대에 안온하게 내려앉은 햇살부터 눈에 들어왔다. 호석이 그 위에 손을 뻗자 딱 창문의 크기만큼 들이친 햇살이 제 손안에 반짝였다. 눈물겹게 따스한 온기에 심장이 일렁였다. 공연히 눈가가 따가워지는 건, 이 따스함은 결국 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치고 말 순간에 불과한 것. 하지만 호석은 그런 순간들이 간절했다. 방심하면 찾아오는 아픈 순간들을 견뎌낼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짧은 순간들에는 크고 작은 희생이 따랐고, 그를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었지만 괜찮았다. 모든 사람들은 제 껍데기를 사랑했고, 필요로 했으니까. 그게 가끔은 마치 스스로 존재가치가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모조리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호석은 거머쥐듯 손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있던 햇살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작게 실소가 터졌다. 뭘 기대한 거야. 작은 혼잣말과 함께.
호석은 가만히 그 햇살을 보다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내 우울함에 빠져있기엔 호석에게 하루는 너무 짧았다. 하루종일 봐도 모자란 사람이 저 문 너머에 있었다.
절박한 제 삶을 무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 언젠가 떠날 거란 걸 예감하면서도, 제 곁에서 있어주길 바라게 되는 사람. 버려진다고 해도 결코 원망할 수 없는 사람.
오늘의 악몽도, 목소리도, 그 얼굴을 마주하면 없던 일처럼 환해질 것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들을 떨칠 수 있었으니까.
문 앞까지 단숨에 걸어간 호석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들이닥쳤다. 그 아이의 얼굴처럼.
# 분기점
style="text-align: center;">
어젯밤 호석을 재우고 결국 네시가 넘어서 잠든 여주는 힘겹게 눈을 떴다.
망연하게 떠있는 창가의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여주는 혼잣말을 흘리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호석에게 해장라면을 끓어주려고 했는데, 시간을 살펴보니 이미 그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여주는 거울을 보고 봐줄만한 얼굴인지 꼼꼼히 살핀 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 악몽을 떨쳐내는 법
' 얘야, 웃어야지.
또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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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헉... "
호석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깼다.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킨 호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어제의 음주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리하고 묵직한 고통이었다. 한참을 감고 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악몽이었다. 그 속에서 자신은 혼자였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제 손을 바라보던 어린아이.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나쳤지만, 저를 봐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끝도없이 공허했다. 결코 저를 담아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호석은 그 꿈 속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이 걸었다. 그리고 맞닥뜨린 낭떠러지 앞에서, 그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려왔다. 차갑고, 매정한.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찾아온 지끈함에 호석은 이마를 짚었다. 맺혀있는 땀이 흥건했다.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도 도저히 열이 가시질 않았다.
이제는 떨쳐냈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악몽 속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이다지도 고통스러웠다. 가슴의 여린 살결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호석은 한참 숨을 고른 후, 느리게 눈을 떴다. 모순적이게도 침대에 안온하게 내려앉은 햇살부터 눈에 들어왔다. 호석이 그 위에 손을 뻗자 딱 창문의 크기만큼 들이친 햇살이 제 손안에 반짝였다. 눈물겹게 따스한 온기에 심장이 일렁였다. 공연히 눈가가 따가워지는 건, 이 따스함은 결국 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치고 말 순간에 불과한 것. 하지만 호석은 그런 순간들이 간절했다. 방심하면 찾아오는 아픈 순간들을 견뎌낼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짧은 순간들에는 크고 작은 희생이 따랐고, 그를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었지만 괜찮았다. 모든 사람들은 제 껍데기를 사랑했고, 필요로 했으니까. 그게 가끔은 마치 스스로 존재가치가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모조리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호석은 거머쥐듯 손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있던 햇살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작게 실소가 터졌다. 뭘 기대한 거야. 작은 혼잣말과 함께.
호석은 가만히 그 햇살을 보다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내 우울함에 빠져있기엔 호석에게 하루는 너무 짧았다. 하루종일 봐도 모자란 사람이 저 문 너머에 있었다.
절박한 제 삶을 무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 언젠가 떠날 거란 걸 예감하면서도, 제 곁에서 있어주길 바라게 되는 사람. 버려진다고 해도 결코 원망할 수 없는 사람.
오늘의 악몽도, 목소리도, 그 얼굴을 마주하면 없던 일처럼 환해질 것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들을 떨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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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연하게 떠있는 창가의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아, 이게 아닌데. 여주는 혼잣말을 흘리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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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거울을 보고 봐줄만한 얼굴인지 꼼꼼히 살핀 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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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일이냐, 네가 이 시간에 다 일어나고. "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얼굴은 윤기였다. 요즘들어 늦게 잠들어서 오후는 되서 깨는 제 패턴을 비꼬듯 윤기가 말했다. 그르게, 엄청 일찍 일어났지. 여주는 가볍게 대꾸했다.
식탁의자에 걸터 앉아있는 윤기는 오늘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예쁘게 단장을 한 모습이었다. 아쿠아향의 향수냄새가 자욱하게 느껴지는 게 아침부터 좀 울렁거리긴 했지만, 견딜만은 했다. 여주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윤기에게 물었다.
" 어디 가? "
" ...데이트. "
컵에 쏟아지는 물이 햇빛에 부딪혀 예쁘게 반짝였다. 그래서 윤기가 망설이는 그 찰나를 여주는 느끼지 못했다.
지독한 향수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답이라서 마음이 덜 쑤시는 것 같았다. 오늘은 뭐하는데, 무심코 나온 여주의 질문에 윤기의 얼굴이 미묘하게 거북해졌다.
" ...영화 봤다가 밥 먹고, 한 잔하고 그러겠지. "
" 으응, 오늘도 외박각이겠네. "
그 말에 윤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하지만 여주는 물컵만을 응시하며 곁을 지나쳐 주방을 벗어났다. 맨날 들어온다고 말만 해놓고선 결국 아침이 되서 돌아오는 윤기의 데이트 일정은 무뎌진 기분이었다. 처음엔 그 상대가 박희주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저 때와는 전혀 다른 연애패턴을 곁에서 지켜보며 윤기가 진심으로 그 애를 사랑하게 되었단 걸 느꼈다. 사랑에 빠진 윤기는 아주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예고없이 걸려오는 전화에도 귀찮은 기색없이 바로 달려나가거나, 용건만 간단히가 삶의 모토인 애가 삼십분이고 한시간이고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것만 봐도.
그 때마다 애꿎게 가슴을 앓는 건 여주의 몫이었다. 공연한 서글픔과 비참함이 저를 덮쳐와서, 결국은 윤기가 들어오는 아침까지 잠에 들지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여주는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데이트를 나갈 때마다 보이는 윤기의 모습이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는데, 이젠 잠시 따끔할 만큼의 아픔만 전해져왔다. 신기했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던데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깨끗하게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말,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 오늘은 바로 나오네요? "
물컵을 든 채 쇼파로 향하자 지민이 여주에게 물어왔다. 여주가 뭔 소리냐는 듯 힐끔 보자 말을 덧붙였다.
"거실에 나오기 전에 방문 슬쩍 열고 호석이형 있나 없나 확인했던 거 다 알아요. "
여주는 태연을 가장한 채 물을 마셨지만, 컵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 정도면 다 잊었을 타이밍 아닌가?
여주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남준을 힐끔 봤지만, 그는 신경쓰지도 않는 듯 책에서 시선을 떼고 있지 않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대답을 미루자 쇼파에 누워있던 태형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누나. 솔직히 그 날 뭔 일 있어서 호석이형 피하는 거 맞죠? "
" ...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피해요. "
" 피, 피하기는. 내가 언제. "
" 흐응, 잡아뗀다? "
" 오늘은 어디 안나가? 좀 나가서 놀아. "
" 진짜 수상한데요, 누나. "
저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꼬리가 다시 짙어졌다. 또다시 집요하게 물어올 것 같은 직감에 여주는 선수치듯 입을 열었다.
" 내가 걜 왜 피하냐. "
" 그거야, "
" 내가 호석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이어 붙어오는 태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결내듯 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호석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여주가 저돌적이네. 일어나자마자 애정고백을 다 하고. "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자동적으로 여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쪄있는 호석이 보였다.
여주는 별 소릴 다해요, 오빠! 훽 남준을 노려보곤 호석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의 호석이 눈만 데구르 내려 여주를 쳐다봤다.
남준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주가 호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얼굴로.
" 괜찮아? "
" ...어? "
" 속 괜찮냐고. 너 어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왔잖아. "
" 으응, 괜찮은 것 같아. "
여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호석을 바라봤다. 지난 새벽 저에게 안겨오며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말하던 호석이었다. 그 절박한 말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는지 여주는 잘 몰랐지만, 한참을 떨다가 제 품에서 잠든 호석을 바라보며 선연해지는 생각이 있었다. 남들 앞에서 세상 누구보다 밝은 호석이 감추고 있는 것들의 무게가 꽤나 무겁다는 것. 호석의 말간 미소 뒤에 있을 상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조차 없다는 것.
그래서 여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난 시간동안 호석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던 시간 속에서, 호석의 진심을 고민했던 적은 과연 있었을까. 셋이 붙어다닐 때도 내내 윤기만 신경썼던 제 자신이 떠올라 끝도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주는 호석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호석이 흠칫 놀랐지만 여주는 그저 눈 앞의 호석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언제는 호석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쿵쾅대더니 이제는 꽉 죄여오는 것 같았다. 이건 아마, 미안한 마음일까. 무슨 형태로든 호석만 보면 가슴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호석의 입꼬리가 편안하게 풀어졌다.
" 나 진짜 괜찮아. 여주야. "
여주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뒤늦게 이해한 호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고가 있던 새벽 이후 무턱대고 피한 게 일주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유 하나 묻지 않고 확인시키듯 힘주어 괜찮다는 말을 건네는 호석이었다.
호석은 항상 상대가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하기도 전에 웃어주며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 건 자신의 편이었는데도 그 상대가 미안함에 망설이는 걸 못참아했다. 진짜, 끝까지 착해빠진 정호석이었다.
여주는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장난스레 호석의 두 볼을 잡고 늘렸다.
강아지마냥 말랑말랑한 호석의 볼이 제 손에 꼬집혀왔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호석에 여주는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 호석아. 나랑 산책갈래? "
여주가 호석에게 물었다. 산책?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보아하니 아직 숙취가 안가신 거 같은데. "
" ...조금? "
" 그럼 술도 깰 겸 한 바퀴 돌자. 살 것도 있고. "
손, 여주가 호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호석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 보더니 예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반짝반짝이는 다정함의 온기가.
항상 제 손을 잡아 이끌던 사람이었다. 난처한 순간에, 위기의 순간에, 항상 나타나 방황하던 제 손을 힘주어 잡던 사람.
그 다정함을 온전히 받았으면서, 되돌려주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는지. 여주는 숨을 작게 내쉬곤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가자. "
여주는 호석의 손을 꽉 잡아 이끌었다.
순순히 따라오는 호석과 현관을 벗어날 때까지 쫓아오는 하메들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채 노려보는 윤기조차도.
*
style="text-align: center;">
" 누가보면 애 있는 집인 줄 알겠네. "
" 응? "
" 누가 간식거리를 삼만원치나 사, 것도 편의점에서! "
여주가 나란히 걷고 있는 호석의 어깨를 아프지않게 쳤다. 그에 호석의 두 손에 들려있는 큰 봉지가 휘청였다.
종량제봉투가 다 떨어졌길래 겸사겸사 사려고 들렸던 편의점에서 호석은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를 말릴 틈도 없이 편의점 사장님은 잽싸게 바코드를 찍어댔고, 호석은 말리려는 여주의 손을 단단히 묶어둔 채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삼만원이 훌쩍 넘는 간식들이 가장 큰 봉투에 꾸역꾸역 담겨져 호석의 손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주 얄밉게도.
" 애 있는 집 맞지 뭐. "
" 박지민 김태형? "
" 응. "
" 그 징그러운 것들이? 개소름이다 진짜. "
여주가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전부터 느꼈지만 호석은 그 둘을 진짜 애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앤가.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쉐어하우스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싫은 티 팍팍 내며 텃세를 부리던 것들이었다. 특히 김태형은 영악하기 그지없는 자식인데. 호석의 돈으로 산 과자가 그 입에 들어간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솟구쳤다.
" 아니 우리 매달 간식비 있잖아. 근데 굳이 왜 네 사비로 사. "
" 좋아하잖아.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
" 네가 좋아하잖아. "
" ...어? "
훅 치고 들어오는 호석의 대답에 여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춰 자세히 과자봉지를 뜯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취향저격인 간식들만 가득했다. 태형과 지민은 손도 대지 않는 초콜릿들도 종류별로 있었다.
여주에 맞춰서 걸음을 멈춰 선 호석이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도 그러더니 심장이 또 간질거려왔다. 영문 모를 기분에 여주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 ...넌 나 밉지도 않냐. "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은 지나치게 이상했다. 자신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얼굴만 보면 냅다 도망을 간 사람이었고, 영문모를 제 행동에 상처받은 건 호석이었다.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며 힘들어한 것도 호석이었다. 명백히 여주는 가해자였고 호석은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호석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저는 제대로 된 사과도 건네지 못했는데.
여주는 가라앉은 얼굴로 호석을 바라봤다. 장난처럼 넘어가기엔 미안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쑤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고 사과해야할 지 알 수 없어서, 여주는 입을 달싹였다. 사이 호석이 가까이 다가와서 눈을 마주했다.
" 네가 왜 미워. "
" ...내가 잘못했잖아 너한테. "
" 뭘 잘못했어. 네가. "
" ...몰라서 묻냐. "
호석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서 여주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에 호석은 봉지를 바닥에 놓고 여주의 눈가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호석아. 코를 훌쩍거리며 여주가 사과를 건넸다. 틈없이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호석의 손길에 부지런히 지워져갔다.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는 호석의 다정한 얼굴이 애달프게 눈가에 담겼다. 여주는 그게 더 슬퍼서 숨을 헐떡이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 진짜ㅜ내가 다 잘못했는데ㅠ넌 왜케 착해빠져가지구ㅠ나 진짜 나쁜 친군데 너한테ㅠ내가 좋아하는 초콜렛은ㅠ왜케 많이 사고 난리야 진짜ㅠ "
꼴깍꼴깍 넘어오는 숨때문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어서 여주는 서럽게 울었다.
호석은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다가 푸흐, 웃음이 터졌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히끅대며 미안하단 말을 하는 여주가 지나치게 귀여웠다. 저를 피했던 그 시간들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지난 밤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호석이 참지 못하고 웃자 여주가 코를 훌쩍이더니 얕게 노려봤다.
" 왜 웃냐, 나 지금 진심이거든. "
" 알아. "
" 거짓말ㅠ나 밉지 사실은ㅠ "
내가 감히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코를 찡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여주의 눈가를 다시 한 번 쓸어내리며 호석은 목 끝에 걸린 말들을 삼켰다.
여주는 메마른 토양에 뿌리내린 제 삶에 유일한 양분이 되는 햇빛이었다. 그 빛이 오롯이 저만을 비추지 않아도, 잠시 제게 내리는 따스함만으로도 버텨낼 수 있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제 애정을 호석은 꾹꾹 눌렀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호석은 빨개진 여주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
" 네가 그렇게 날 좋아하는데, 내가 널 왜 미워해. "
" ...엉? "
" 아까 고백했잖아. 다 있는데서. "
핫씨,야 그거는, 여주가 발끈하며 눈을 거칠게 닦고 호석을 봤다. 어느덧 호석의 얼굴에는 장난끼만이 가득했다.
" 아니, 그건 김태형이 하도 몰아가니까 말한 거라고! "
" 요즘 고백트렌드야? "
" 야 정호석! "
" 마음 아주 잘 알았어. "
제 딴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호석이었다. 것도 고백이라니. 아까는 별 생각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호석의 입에서 고백이란 말이 나오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주는 친.구.로.서! 앞의 말을 상기시켰지만 개의치 않는 듯한 호석의 시선이 제게 꽂혀왔다. 별안간 부끄러워서 쒸익대며 그 시선을 피했더니 고백엔 대답도 있어야지, 대뜸 호석의 말이 들려왔다. 그에 여주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아까의 장난끼는 온데간데 없이 따뜻한 온기만 가득한 호석의 눈동자가 햇살처럼 밀려들어왔다.
" 오늘은 바로 나오네요? "
물컵을 든 채 쇼파로 향하자 지민이 여주에게 물어왔다. 여주가 뭔 소리냐는 듯 힐끔 보자 말을 덧붙였다.
"거실에 나오기 전에 방문 슬쩍 열고 호석이형 있나 없나 확인했던 거 다 알아요. "
여주는 태연을 가장한 채 물을 마셨지만, 컵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 정도면 다 잊었을 타이밍 아닌가?
여주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남준을 힐끔 봤지만, 그는 신경쓰지도 않는 듯 책에서 시선을 떼고 있지 않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대답을 미루자 쇼파에 누워있던 태형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누나. 솔직히 그 날 뭔 일 있어서 호석이형 피하는 거 맞죠? "
" ...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피해요. "
" 피, 피하기는. 내가 언제. "
" 흐응, 잡아뗀다? "
" 오늘은 어디 안나가? 좀 나가서 놀아. "
" 진짜 수상한데요, 누나. "
저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꼬리가 다시 짙어졌다. 또다시 집요하게 물어올 것 같은 직감에 여주는 선수치듯 입을 열었다.
" 내가 걜 왜 피하냐. "
" 그거야, "
" 내가 호석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이어 붙어오는 태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결내듯 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호석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여주가 저돌적이네. 일어나자마자 애정고백을 다 하고. "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자동적으로 여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쪄있는 호석이 보였다.
여주는 별 소릴 다해요, 오빠! 훽 남준을 노려보곤 호석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의 호석이 눈만 데구르 내려 여주를 쳐다봤다.
남준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주가 호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얼굴로.
" 괜찮아? "
" ...어? "
" 속 괜찮냐고. 너 어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왔잖아. "
" 으응, 괜찮은 것 같아. "
여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호석을 바라봤다. 지난 새벽 저에게 안겨오며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말하던 호석이었다. 그 절박한 말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는지 여주는 잘 몰랐지만, 한참을 떨다가 제 품에서 잠든 호석을 바라보며 선연해지는 생각이 있었다. 남들 앞에서 세상 누구보다 밝은 호석이 감추고 있는 것들의 무게가 꽤나 무겁다는 것. 호석의 말간 미소 뒤에 있을 상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조차 없다는 것.
그래서 여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난 시간동안 호석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던 시간 속에서, 호석의 진심을 고민했던 적은 과연 있었을까. 셋이 붙어다닐 때도 내내 윤기만 신경썼던 제 자신이 떠올라 끝도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주는 호석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호석이 흠칫 놀랐지만 여주는 그저 눈 앞의 호석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언제는 호석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쿵쾅대더니 이제는 꽉 죄여오는 것 같았다. 이건 아마, 미안한 마음일까. 무슨 형태로든 호석만 보면 가슴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호석의 입꼬리가 편안하게 풀어졌다.
" 나 진짜 괜찮아. 여주야. "
여주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뒤늦게 이해한 호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고가 있던 새벽 이후 무턱대고 피한 게 일주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유 하나 묻지 않고 확인시키듯 힘주어 괜찮다는 말을 건네는 호석이었다.
호석은 항상 상대가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하기도 전에 웃어주며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 건 자신의 편이었는데도 그 상대가 미안함에 망설이는 걸 못참아했다. 진짜, 끝까지 착해빠진 정호석이었다.
여주는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장난스레 호석의 두 볼을 잡고 늘렸다.
강아지마냥 말랑말랑한 호석의 볼이 제 손에 꼬집혀왔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호석에 여주는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 호석아. 나랑 산책갈래? "
여주가 호석에게 물었다. 산책?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보아하니 아직 숙취가 안가신 거 같은데. "
" ...조금? "
" 그럼 술도 깰 겸 한 바퀴 돌자. 살 것도 있고. "
손, 여주가 호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호석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 보더니 예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반짝반짝이는 다정함의 온기가.
항상 제 손을 잡아 이끌던 사람이었다. 난처한 순간에, 위기의 순간에, 항상 나타나 방황하던 제 손을 힘주어 잡던 사람.
그 다정함을 온전히 받았으면서, 되돌려주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는지. 여주는 숨을 작게 내쉬곤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가자. "
여주는 호석의 손을 꽉 잡아 이끌었다.
순순히 따라오는 호석과 현관을 벗어날 때까지 쫓아오는 하메들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채 노려보는 윤기조차도.
*
style="text-align: center;">
" 누가보면 애 있는 집인 줄 알겠네. "
" 응? "
" 누가 간식거리를 삼만원치나 사, 것도 편의점에서! "
여주가 나란히 걷고 있는 호석의 어깨를 아프지않게 쳤다. 그에 호석의 두 손에 들려있는 큰 봉지가 휘청였다.
종량제봉투가 다 떨어졌길래 겸사겸사 사려고 들렸던 편의점에서 호석은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를 말릴 틈도 없이 편의점 사장님은 잽싸게 바코드를 찍어댔고, 호석은 말리려는 여주의 손을 단단히 묶어둔 채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삼만원이 훌쩍 넘는 간식들이 가장 큰 봉투에 꾸역꾸역 담겨져 호석의 손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주 얄밉게도.
" 애 있는 집 맞지 뭐. "
" 박지민 김태형? "
" 응. "
" 그 징그러운 것들이? 개소름이다 진짜. "
여주가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전부터 느꼈지만 호석은 그 둘을 진짜 애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앤가.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쉐어하우스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싫은 티 팍팍 내며 텃세를 부리던 것들이었다. 특히 김태형은 영악하기 그지없는 자식인데. 호석의 돈으로 산 과자가 그 입에 들어간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솟구쳤다.
" 아니 우리 매달 간식비 있잖아. 근데 굳이 왜 네 사비로 사. "
" 좋아하잖아.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
" 네가 좋아하잖아. "
" ...어? "
훅 치고 들어오는 호석의 대답에 여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춰 자세히 과자봉지를 뜯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취향저격인 간식들만 가득했다. 태형과 지민은 손도 대지 않는 초콜릿들도 종류별로 있었다.
여주에 맞춰서 걸음을 멈춰 선 호석이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도 그러더니 심장이 또 간질거려왔다. 영문 모를 기분에 여주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 ...넌 나 밉지도 않냐. "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은 지나치게 이상했다. 자신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얼굴만 보면 냅다 도망을 간 사람이었고, 영문모를 제 행동에 상처받은 건 호석이었다.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며 힘들어한 것도 호석이었다. 명백히 여주는 가해자였고 호석은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호석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저는 제대로 된 사과도 건네지 못했는데.
여주는 가라앉은 얼굴로 호석을 바라봤다. 장난처럼 넘어가기엔 미안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쑤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고 사과해야할 지 알 수 없어서, 여주는 입을 달싹였다. 사이 호석이 가까이 다가와서 눈을 마주했다.
" 네가 왜 미워. "
" ...내가 잘못했잖아 너한테. "
" 뭘 잘못했어. 네가. "
" ...몰라서 묻냐. "
호석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서 여주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에 호석은 봉지를 바닥에 놓고 여주의 눈가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호석아. 코를 훌쩍거리며 여주가 사과를 건넸다. 틈없이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호석의 손길에 부지런히 지워져갔다.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는 호석의 다정한 얼굴이 애달프게 눈가에 담겼다. 여주는 그게 더 슬퍼서 숨을 헐떡이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 진짜ㅜ내가 다 잘못했는데ㅠ넌 왜케 착해빠져가지구ㅠ나 진짜 나쁜 친군데 너한테ㅠ내가 좋아하는 초콜렛은ㅠ왜케 많이 사고 난리야 진짜ㅠ "
꼴깍꼴깍 넘어오는 숨때문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어서 여주는 서럽게 울었다.
호석은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다가 푸흐, 웃음이 터졌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히끅대며 미안하단 말을 하는 여주가 지나치게 귀여웠다. 저를 피했던 그 시간들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지난 밤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호석이 참지 못하고 웃자 여주가 코를 훌쩍이더니 얕게 노려봤다.
" 왜 웃냐, 나 지금 진심이거든. "
" 알아. "
" 거짓말ㅠ나 밉지 사실은ㅠ "
내가 감히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코를 찡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여주의 눈가를 다시 한 번 쓸어내리며 호석은 목 끝에 걸린 말들을 삼켰다.
여주는 메마른 토양에 뿌리내린 제 삶에 유일한 양분이 되는 햇빛이었다. 그 빛이 오롯이 저만을 비추지 않아도, 잠시 제게 내리는 따스함만으로도 버텨낼 수 있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제 애정을 호석은 꾹꾹 눌렀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호석은 빨개진 여주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
" 네가 그렇게 날 좋아하는데, 내가 널 왜 미워해. "
" ...엉? "
" 아까 고백했잖아. 다 있는데서. "
핫씨,야 그거는, 여주가 발끈하며 눈을 거칠게 닦고 호석을 봤다. 어느덧 호석의 얼굴에는 장난끼만이 가득했다.
" 아니, 그건 김태형이 하도 몰아가니까 말한 거라고! "
" 요즘 고백트렌드야? "
" 야 정호석! "
" 마음 아주 잘 알았어. "
제 딴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호석이었다. 것도 고백이라니. 아까는 별 생각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호석의 입에서 고백이란 말이 나오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주는 친.구.로.서! 앞의 말을 상기시켰지만 개의치 않는 듯한 호석의 시선이 제게 꽂혀왔다. 별안간 부끄러워서 쒸익대며 그 시선을 피했더니 고백엔 대답도 있어야지, 대뜸 호석의 말이 들려왔다. 그에 여주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아까의 장난끼는 온데간데 없이 따뜻한 온기만 가득한 호석의 눈동자가 햇살처럼 밀려들어왔다.
" 오늘은 바로 나오네요? "
물컵을 든 채 쇼파로 향하자 지민이 여주에게 물어왔다. 여주가 뭔 소리냐는 듯 힐끔 보자 말을 덧붙였다.
"거실에 나오기 전에 방문 슬쩍 열고 호석이형 있나 없나 확인했던 거 다 알아요. "
여주는 태연을 가장한 채 물을 마셨지만, 컵을 든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 정도면 다 잊었을 타이밍 아닌가?
여주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남준을 힐끔 봤지만, 그는 신경쓰지도 않는 듯 책에서 시선을 떼고 있지 않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대답을 미루자 쇼파에 누워있던 태형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누나. 솔직히 그 날 뭔 일 있어서 호석이형 피하는 거 맞죠? "
" ... "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피해요. "
" 피, 피하기는. 내가 언제. "
" 흐응, 잡아뗀다? "
" 오늘은 어디 안나가? 좀 나가서 놀아. "
" 진짜 수상한데요, 누나. "
저를 바라보는 태형의 눈꼬리가 다시 짙어졌다. 또다시 집요하게 물어올 것 같은 직감에 여주는 선수치듯 입을 열었다.
" 내가 걜 왜 피하냐. "
" 그거야, "
" 내가 호석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이어 붙어오는 태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결내듯 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호석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여주가 저돌적이네. 일어나자마자 애정고백을 다 하고. "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자동적으로 여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벙쪄있는 호석이 보였다.
여주는 별 소릴 다해요, 오빠! 훽 남준을 노려보곤 호석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의 호석이 눈만 데구르 내려 여주를 쳐다봤다.
남준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주가 호석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얼굴로.
" 괜찮아? "
" ...어? "
" 속 괜찮냐고. 너 어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왔잖아. "
" 으응, 괜찮은 것 같아. "
여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호석을 바라봤다. 지난 새벽 저에게 안겨오며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말하던 호석이었다. 그 절박한 말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는지 여주는 잘 몰랐지만, 한참을 떨다가 제 품에서 잠든 호석을 바라보며 선연해지는 생각이 있었다. 남들 앞에서 세상 누구보다 밝은 호석이 감추고 있는 것들의 무게가 꽤나 무겁다는 것. 호석의 말간 미소 뒤에 있을 상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조차 없다는 것.
그래서 여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난 시간동안 호석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던 시간 속에서, 호석의 진심을 고민했던 적은 과연 있었을까. 셋이 붙어다닐 때도 내내 윤기만 신경썼던 제 자신이 떠올라 끝도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주는 호석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호석이 흠칫 놀랐지만 여주는 그저 눈 앞의 호석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언제는 호석의 얼굴만 봐도 심장이 쿵쾅대더니 이제는 꽉 죄여오는 것 같았다. 이건 아마, 미안한 마음일까. 무슨 형태로든 호석만 보면 가슴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호석의 입꼬리가 편안하게 풀어졌다.
" 나 진짜 괜찮아. 여주야. "
여주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뒤늦게 이해한 호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고가 있던 새벽 이후 무턱대고 피한 게 일주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유 하나 묻지 않고 확인시키듯 힘주어 괜찮다는 말을 건네는 호석이었다.
호석은 항상 상대가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하기도 전에 웃어주며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하는 건 자신의 편이었는데도 그 상대가 미안함에 망설이는 걸 못참아했다. 진짜, 끝까지 착해빠진 정호석이었다.
여주는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장난스레 호석의 두 볼을 잡고 늘렸다.
강아지마냥 말랑말랑한 호석의 볼이 제 손에 꼬집혀왔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호석에 여주는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 호석아. 나랑 산책갈래? "
여주가 호석에게 물었다. 산책?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보아하니 아직 숙취가 안가신 거 같은데. "
" ...조금? "
" 그럼 술도 깰 겸 한 바퀴 돌자. 살 것도 있고. "
손, 여주가 호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호석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 보더니 예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반짝반짝이는 다정함의 온기가.
항상 제 손을 잡아 이끌던 사람이었다. 난처한 순간에, 위기의 순간에, 항상 나타나 방황하던 제 손을 힘주어 잡던 사람.
그 다정함을 온전히 받았으면서, 되돌려주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는지. 여주는 숨을 작게 내쉬곤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가자. "
여주는 호석의 손을 꽉 잡아 이끌었다.
순순히 따라오는 호석과 현관을 벗어날 때까지 쫓아오는 하메들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이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채 노려보는 윤기조차도.
*
style="text-align: center;">
" 누가보면 애 있는 집인 줄 알겠네. "
" 응? "
" 누가 간식거리를 삼만원치나 사, 것도 편의점에서! "
여주가 나란히 걷고 있는 호석의 어깨를 아프지않게 쳤다. 그에 호석의 두 손에 들려있는 큰 봉지가 휘청였다.
종량제봉투가 다 떨어졌길래 겸사겸사 사려고 들렸던 편의점에서 호석은 양손 가득 간식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를 말릴 틈도 없이 편의점 사장님은 잽싸게 바코드를 찍어댔고, 호석은 말리려는 여주의 손을 단단히 묶어둔 채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삼만원이 훌쩍 넘는 간식들이 가장 큰 봉투에 꾸역꾸역 담겨져 호석의 손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주 얄밉게도.
" 애 있는 집 맞지 뭐. "
" 박지민 김태형? "
" 응. "
" 그 징그러운 것들이? 개소름이다 진짜. "
여주가 질색하며 얼굴을 구겼다. 전부터 느꼈지만 호석은 그 둘을 진짜 애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앤가.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쉐어하우스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싫은 티 팍팍 내며 텃세를 부리던 것들이었다. 특히 김태형은 영악하기 그지없는 자식인데. 호석의 돈으로 산 과자가 그 입에 들어간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솟구쳤다.
" 아니 우리 매달 간식비 있잖아. 근데 굳이 왜 네 사비로 사. "
" 좋아하잖아. "
" 그게 문제가 아니고, "
" 네가 좋아하잖아. "
" ...어? "
훅 치고 들어오는 호석의 대답에 여주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춰 자세히 과자봉지를 뜯어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제 취향저격인 간식들만 가득했다. 태형과 지민은 손도 대지 않는 초콜릿들도 종류별로 있었다.
여주에 맞춰서 걸음을 멈춰 선 호석이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아까도 그러더니 심장이 또 간질거려왔다. 영문 모를 기분에 여주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 ...넌 나 밉지도 않냐. "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은 지나치게 이상했다. 자신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얼굴만 보면 냅다 도망을 간 사람이었고, 영문모를 제 행동에 상처받은 건 호석이었다.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며 힘들어한 것도 호석이었다. 명백히 여주는 가해자였고 호석은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호석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저는 제대로 된 사과도 건네지 못했는데.
여주는 가라앉은 얼굴로 호석을 바라봤다. 장난처럼 넘어가기엔 미안한 감정이 가슴을 쿡쿡 쑤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하고 사과해야할 지 알 수 없어서, 여주는 입을 달싹였다. 사이 호석이 가까이 다가와서 눈을 마주했다.
" 네가 왜 미워. "
" ...내가 잘못했잖아 너한테. "
" 뭘 잘못했어. 네가. "
" ...몰라서 묻냐. "
호석의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서 여주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에 호석은 봉지를 바닥에 놓고 여주의 눈가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호석아. 코를 훌쩍거리며 여주가 사과를 건넸다. 틈없이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호석의 손길에 부지런히 지워져갔다.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는 호석의 다정한 얼굴이 애달프게 눈가에 담겼다. 여주는 그게 더 슬퍼서 숨을 헐떡이며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 진짜ㅜ내가 다 잘못했는데ㅠ넌 왜케 착해빠져가지구ㅠ나 진짜 나쁜 친군데 너한테ㅠ내가 좋아하는 초콜렛은ㅠ왜케 많이 사고 난리야 진짜ㅠ "
꼴깍꼴깍 넘어오는 숨때문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어서 여주는 서럽게 울었다.
호석은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다가 푸흐, 웃음이 터졌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히끅대며 미안하단 말을 하는 여주가 지나치게 귀여웠다. 저를 피했던 그 시간들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지난 밤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호석이 참지 못하고 웃자 여주가 코를 훌쩍이더니 얕게 노려봤다.
" 왜 웃냐, 나 지금 진심이거든. "
" 알아. "
" 거짓말ㅠ나 밉지 사실은ㅠ "
내가 감히 어떻게 널 미워하겠어. 코를 찡그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여주의 눈가를 다시 한 번 쓸어내리며 호석은 목 끝에 걸린 말들을 삼켰다.
여주는 메마른 토양에 뿌리내린 제 삶에 유일한 양분이 되는 햇빛이었다. 그 빛이 오롯이 저만을 비추지 않아도, 잠시 제게 내리는 따스함만으로도 버텨낼 수 있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제 애정을 호석은 꾹꾹 눌렀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호석은 빨개진 여주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말했다.
" 네가 그렇게 날 좋아하는데, 내가 널 왜 미워해. "
" ...엉? "
" 아까 고백했잖아. 다 있는데서. "
핫씨,야 그거는, 여주가 발끈하며 눈을 거칠게 닦고 호석을 봤다. 어느덧 호석의 얼굴에는 장난끼만이 가득했다.
" 아니, 그건 김태형이 하도 몰아가니까 말한 거라고! "
" 요즘 고백트렌드야? "
" 야 정호석! "
" 마음 아주 잘 알았어. "
제 딴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호석이었다. 것도 고백이라니. 아까는 별 생각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호석의 입에서 고백이란 말이 나오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주는 친.구.로.서! 앞의 말을 상기시켰지만 개의치 않는 듯한 호석의 시선이 제게 꽂혀왔다. 별안간 부끄러워서 쒸익대며 그 시선을 피했더니 고백엔 대답도 있어야지, 대뜸 호석의 말이 들려왔다. 그에 여주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올렸다.
아까의 장난끼는 온데간데 없이 따뜻한 온기만 가득한 호석의 눈동자가 햇살처럼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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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좋아해. 여주야. "
강속구처럼 날아오는 대답에 여주는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친구로서. 이어 덧붙여 말하곤 봉지를 다시 든 채 앞서 걷는 호석의 뒤를 따르면서도, 여주는 한참을 벙쪄있었다.
큰 병이라도 걸렸는지 심장이 주체없이 뛰어왔다. 그 가슴께를 가만히 눌러보았지만, 이 두근거림의 출처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분기점
" 윤기야. 오늘은 대실할까? "
" ... "
" 아냐, 대실은 너무 짧지? 그럼 평소대로, "
제 대답도 듣지 않고 말하는 희주를 보며 윤기는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놀란 희주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윤기는 개의치 않고 건조한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 ...왜 그래? "
" 넌 나 왜 만나. "
" 그야, 좋아하니까, "
" 자려고 만나는 건 아니고. "
마주한 희주의 동공이 빠르게 떨려왔다. 윤기는 뒤틀린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보였다.
안그래도 오늘 낮에 보았던 여주와 호석의 모습이 내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윤기였다. 하메들의 의구심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호석을 걱정하던 여주와, 그런 여주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호석이 뿜고 있던 공기 속에서 윤기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자신이 모르는 역사가 둘 사이에 흐르는 것만 같았다. 불쾌했다. 제가 그어놓은 선이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꾹 눌러뒀던 화가 희주에게로 터져나왔다.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 만난 지 몇 시간 됐다고 모텔얘길 해. "
" 아니... "
" 그 생각밖에 없어 넌? "
" ... "
희주의 입이 다물어졌다. 떨리는 잇새로 울음을 참는 게 보였다. 지긋지긋했다. 또 울려고, 윤기는 참지않고 못된 말을 뱉었다.
그에 기어코 눈물이 터진 희주가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 너야말로, 나 좋아하긴 해? "
" 뭐? "
" 내 얘기가 궁금하긴 해? "
" ... "
"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김여주, 김여주, 김여주. 걔 없이는 내 얘기 들어주지도 않잖아 너. "
다시 커피잔을 들려던 윤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노려보는 희주의 눈에서 분노가 그득그득했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던 날, 같은 학교 출신이라며 친근하게 구는 희주가 윤기도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동갑에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최소한의 유대감은 만들어줬으니까.
게다가 학교얘기를 나누던 중 자퇴했던 고3때 희주가 여주와 같은 반이었다는 이야기는 꽤 윤기의 흥미를 돋웠다. 제가 없던 학교에서 지내던 여주의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로 생경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새롭게 듣는 여주의 이야기는 윤기로 하여금 희주를 만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당시 여주를 챙기지 못했던 그 공백이 신경쓰였기에, 제가 채우지 못했던 시간들을 전부 알고 싶었으니까.
윤기는 가만히 제가 기억하고 있는 희주에 관한 것들을 떠올려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희주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 그 생각밖에 없냐고? 어, 맞아. "
" ... "
" 네가 내 눈을 똑바로 보는 순간이 그 때밖에 없거든. "
" ... "
" 넌 그 때도 나한테 김여주를 찾고있지만. "
희주는 그 말을 끝으로 가방을 챙겨 카페를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시선으로만 쫓는 윤기의 눈이 황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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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생을 살다가 10화를 들고 왔습니다!
앞으로 서서히 호석시점이 많아지기 시작할 것 같아용!
그나저나 언제 개강하니 너네 ^^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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