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18 (호의를 가장한 관심)
"안녕하세요. 제 33기 학생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배님들 수능이 이제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와 사프로 사각사각 필기를 하는 소리만 가득하던 교실 안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손에 여러 개의 봉투를 들고 하나둘 줄을 지어 들어오는 2학년 학생들 때문이었다. 마치 신인 아이돌 그룹이 인사를 하는 것마냥 저들끼리 하나, 둘, 셋을 세며 꾸벅 인사를 해오는 모습에 모든 아이들의 신경이 집중되었다. 저들을 학생회라 소개하던 아이들이 멘트를 마치곤 손에 들려있던 봉투들을 하나씩 건네오기 시작했다. 옅은 분홍색의 긴 봉투였다.
"선배님들! 수능 대박나세요!"
"그럼 지금까지 제 33기 학생회였습니다!"
건네받은 봉투 속엔 여러 종류의 초콜릿과 사탕, 엿, 그리고 찹쌀떡이 들어있었다. 역시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게 맞구나. 이틀 뒤 이 시간이면 난 1교시 국어영역을 치르고 있겠구나. … 으, 싫다.
봉투 속에서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곤 봉투를 책상 옆 가방걸이에 걸어두었다. 봉투 속에 담긴 간식들의 양은 제법 많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딱 오늘 하루만에라도 다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초콜릿의 껍질을 까 입 속에 초콜릿을 쏘옥 집어넣었다. 굳이 깨물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녹아버리는 초콜릿을 혀로 살살 굴렸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 특유의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달달해서 좋고, 씁쓸해도 좋다. 그냥 초콜릿이 좋다. 참, 김종인도 받았겠네. 과자나 초콜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그정도로 단 음식을 좋아하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쯤 싱글벙글 웃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이 간식 줬다고 신나서 막 먹지는 마라. 모레가 수능인데 배탈이라도 나 봐. 자동 재수 확정이다."
"… 아아! 쌤!"
꽤나 자극적인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긴장과 불안으로 다가왔을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닥 그렇지도 않았다. 역시 수능이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착잡하기만 할 줄 알았던 마음이 나름 편안했다. 그렇다고 수능에 자신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공부를 해왔던 것이 단 하루 동안 치러지는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로 끝을 맺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누구에게나 부담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해탈했다는 건가.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하고, 컨디션 조절이 중요한 거니까 야자는 너희들의 선택에 맡기겠어. 이상, 조례 끝."
간단히 전달사항을 전하고 교실을 나서는 담임선생님께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쭈욱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화요일, 수능 D-2.
*
"이야, 김종인씨. 꿀잠 자셨습니까?"
"… 별로."
"별로는 무슨, 인마. 이마에 자국이 선명하구만."
"넌 쉬는시간마다 왜 내 자리 와서 지랄이야."
"부러워서 그러지, 새끼야."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찾아와 조잘조잘 열심히도 떠들어대는 오세훈 탓에 정신이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반복이 되다 보니, 정말이지 미칠 지경에 다다른 듯했다. 녀석의 면전에 대고 잔뜩 인상을 찌푸려 보이니 금세 당황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그리곤 곧이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입을 열어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근데, 너 설마 오늘도 야자 하냐?"
"어."
"독한 놈."
"뭐가."
"수시 합격했는데도 남아서 야자 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있을 수도 있지."
"도대체 왜? 야자라면 질색을 하던 네가…. 그렇게도 ○○이한테 알리기가 싫어?"
"어. 몇 번을 말해."
"왜 말을 안 해, 바보야. 어차피 나중이면 다 알게 될 텐데."
"지금 말해봤자 걔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공부하는 데 방해 된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인마. 그래서. 어? 수시 합격해서 수능 안 봐도 된다는 그거 안 들키겠다고 야자를 하는 거라고?"
"그것도 그렇고. 걔 혼자 집 가게 만들긴 싫으니까."
"… 아아…, 버스를 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웬 멀미가…. 나 화장실 좀 갔다와도 되냐?"
"병신."
꽤나 오글거렸던 건지, 오세훈이 토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그런 녀석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곤 팔로 머리를 괸 채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뒷통수로 녀석의 목소리와 따가운 시선이 꽂혀왔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사실 일주일 전에, 문자 메시지로 수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수시 원서를 접수했었다는 것조차 까먹고 있던 내게 그런 문자가 올 줄이야. 그 문자를 받자마자 풀고있던 문제집을 바로 접었고, 바로 침대 위 이불 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부모님껜 이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알려드려야지. 왜냐하면 서프라이즈니까. 이제 수능 공부는 안 해도 되는 건가. 수능 안 보겠네. 그럼 여태까지 해온 공부는? 물론 그렇게 많이 해왔던 건 아니지만, 좀 아깝긴 하네. … 온갖 생각이 들었다.
수시에 합격했다는 건 물론 기쁜 일이었다. 이런 기쁜 감정을 너와도 나누고 싶은데… 왠지 선뜻 알리기가 꺼려졌다. 축하는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이 사실을 알렸다간 괜히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 것도 같았다. 나 수시 합격했어. 수능 안 봐도 돼. …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언젠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수가 없었다. 수능 끝나고 해도 늦진 않으니, 그럼 그때….
반에서 최초로 수시에 합격한 사람이 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닌데, 의도치 않게 난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게 됐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말씀하시던 담임선생님께는 알았다며 대답을 했다. 그러나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싫지는 않았다. 내가 야자를 하지 않는다는 건, 그 아이가 집에 혼자 가야 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싫어, 수시에 합격했다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에 임했다. 물론 공부는 안 하고 책을 읽었지만, 어쨌든 참석한 건 참석한 것이었다.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 오세훈은 줄곧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묻곤 했다.
너 야자 왜 하냐.
집에 같이 가려고.
왜 걔한테 말 안 해?
방해 될까 봐.
*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바로 내일이 수능이었기에 긴장감으로 가득 찬 두근거림이었겠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우리집 앞으로 와 모두의마블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씨익 올려 보이며 웃어주던 김종인에 대한 설렘도 한 몫 했을 것이었다.
'종이야, 내일이 벌써…'
'수능.'
'으으….'
녀석과 등굣길에 나눴던 소소한 대화를 떠올리며 작게 웃어보였다. 바로 내일이 수능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할까. 진짜 좋은데.
오늘은 수능 전 날이었고, 배정된 학교에 미리 가봐야 하는 날이라 수업은 1교시까지만 진행이 되었다. 다행히 배정된 학교는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학교였고,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아도 될 법한 가까운 거리의 학교였다. 어느새 1교시 수업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꾸만 피어오르는 긴장감과 떨림 탓에 공부엔 집중을 할 수가 없었고, 자꾸만 시계 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었다. 3분 뒤면 학교에서의 오늘 일과는 마무리가 되고, 수능 시험을 치를 학교로 가보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어제가 인생의 마지막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네. 야자 끝나고 김종인이랑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으러 갈 걸. 그게 일상이 되었을 만큼 자주 하던 일 중 하나였는데.
"……."
후회 아닌 후회를 가볍게 하고 있을 찰나,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제 위치를 알리기라도 하듯 짧은 진동을 울려댔다. 수업시간이긴 했지만, 고작 3분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라 그런지 다들 제 짐을 챙기기 바빴다. 그래서, 조심스레 휴대폰을 꺼내 홀드를 열어 보았다.
같은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는 녀석의 메시지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럼 내일 같이 학교에 갈 것이고, 같은 곳에서 시험을 보겠네. 끝나면 만나서 집도 같이 가고…. 벌써부터 좋은 예감이 들었다. 녀석에게 마지막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경쾌하게 교실 안을 울렸고, 아이들의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제 지옥으로 가는 거냐. 심장 떨려."
"쌤! 저 미워하시죠?! 왜 전 제일 먼 학교인 거예요…."
"아싸, 난 걸어서도 갈 수 있지롱."
"존나 얄밉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교실 안 분위기가 조금은 시끄러웠다. 방금까지 공부 하고 있던 문제집을 책가방 속에 집어넣곤 길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금 떨려오는 순간이었다.
"자,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했다. 컨디션 조절 잘 하고, 내일 모레 웃는 얼굴로 보자."
"네에!"
"수능 대박나라는 말은 안 할 거야. 대신 실수만 하지 마라."
마지막까지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리곤 저들도 긴장이 되는지 제 가슴을 두어 번 쓸어내리며 교실을 나서는 아이들을 바라보자 더더욱,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대박나진 않아도 좋으니, 부디 실수만 하지 말았으면.
*
"너 너무 늦어."
"… 아,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나오느라."
"웬 마음의 준ㅂ…"
"김종인 이 부러운 새끼야! 너는 오늘이랑 내일 집에서 팽팽 놀겠네?"
김종인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 녀석의 뒷통수를 살짝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녀석의 같은 반 친구로 보이는 어느 남학생이었으며, 옆엔 벙찐 표정의 오세훈도 서있었다. 맞은 뒷통수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던 김종인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오늘이랑 내일 집에서 팽팽 놀겠다니… 그게 무슨….
"좋겠다! 나도 수시 합격! 하고 싶다!"
"미친놈이 존나 민폐네. 야, 미안. 먼저 갈게."
오세훈이 어색하게 웃음을 짓곤, 소리치는 남학생을 데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민폐라 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건 아니지만, 남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 한 마디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잘근잘근 입술만 씹고 있던 김종인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 수시 합격이라니?"
"……."
"김종인."
"… 왜."
"너 수시 합격했어?"
직설적으로 내뱉어진 내 말에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곤란하다는듯 녀석이 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곧이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언제?"
"얼마 안 됐어. 일주일 됐나…."
"나한테 왜 말 안 해줬어?"
"… 그냥."
"… 그냥이라니. 나 지금 기분 진짜 이상해."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이상한 감정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김종인이 수시 합격을 했다는 건 정말이지 축하를 해줄 일이었다. 일주일 전에 통보가 왔다고? 근데 왜 난 그걸 이제서야 알게 된 거지. 그것도 김종인의 입에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아까 보니 오세훈도 이미 알고있는 것 같던데. 왜 나는 몰랐지? 너한테 내가 제일 가까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왜 나한텐 말을 안 해준 거지…. 누군가는 별거 아니라 할지 몰라도, 내겐 너무나도 섭섭하고 서운한 것이었다. 너에 대해 남들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닌데, 어쨌든 기분이 좀 그랬다. 난 내가 제일 먼저 알아도 모자라다 생각하는데, 김종인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건가. 그래놓고 야자는 왜 매일 했던 거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묻고 싶은 의문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너한테 방해 될까 봐 말 안 했던 거야. 수능 끝나면 말해주려 했어."
"… 방해?"
"열심히 수능 공부 하는 애한테 수시 합격했다고 어떻게 말을 해."
"……."
"분명 듣는 순간 집중력 흐트러질 게 뻔하잖아. 그건 우리반 애들만 봐도 그래."
"……."
"그래서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어."
"……."
"미안. 별다른 의도는…"
"……."
"없었어."
말을 마친 듯한 김종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곤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녀석이 뱉은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건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해가 될 것 같았다고? 왜 방해가 되지. 난… 괜찮은데.
"어느 대학교 무슨 학과인지는 안 알려주냐?"
"… 아."
"치사해."
"원서 넣은 학교들 중 가장 별로라 생각했던 학교."
"… 학과는?"
"학과는."
"사과, 수정과, 이런 거 하기만 해 봐."
"내가 넌 줄 아냐."
"……."
"실내디자인과."
"… 와아…."
먼저 걸음을 옮기는 녀석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답을 해준다. 운동과 관련된 학과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지만, 녀석의 선택은 내 예상을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실내디자인과.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멋있었다. 그게 단지 '실내디자인과'라서 그런 것인지, 아님 '김종인'이 선택한 학과가 실내디자인과라서 그런 것인진 모를 것이었다.
*
우리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같은 학교에 배정이라도 된 듯했다. 시험을 치르게 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먼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며 울상을 짓던 한 아이가 바로 우리반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서 뭐 대단한 거라도 할 줄 알고 향한 것이었지만, 하는 거라곤 수험생 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름을 확인하기까지도 10분은 커녕, 고작 5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곧장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5분밖에 있지 않을 거,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이 아까웠다.
"내일 몇 시에 만날래."
"응? 너 수능 안 보잖아."
"너 데려다 주려고."
"……."
"얼른 정해. 몇 시에 만날까."
"음…, 카톡할게."
우물쭈물거리듯 답하는 나를 바라보며 김종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녀석은 수능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거였으니, 오늘 이 장소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같이 와줬다는 것에 내심 고마웠다. 귀차니즘의 대명사… 는 사실 과장이지만, 그정도로 귀찮아하는 일이 많은 녀석이었으니 이건 신기한 일이라 여길 만했다. 근데 내일 수능시험을 보러 갈 때도 같이 가주겠다는 건…
그린라이트란다. (By. 오세훈)
*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뻗어버리듯 누웠다. 내일이 수능이라는 부담감과 압박감은, 집에 도착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직 시험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시험 끝나고 무얼 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럼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말이다. 음, 일단 수능이 끝나면…
"옷도 안 갈아입고 누워서 뭐하니?"
"… 아, 이제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수능시험이 끝나고 찾아올 행복한 순간들에 대한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려 할 때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감고있던 눈이 번쩍 뜨였고, 하는 수 없이 뉘이고 있던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얼른 옷 갈아입고, 씻고… 공부를 해야겠지.
침대에 앉아 넥타이를 풀어내며 시계를 확인했다. 내일 이 시간이면 아마 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수능시험에 모든 걸 대입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다.
[초코 딸기 쿠앤크 바닐라]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부르르 떨며 반짝였다. 김종인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초코 딸기 쿠앤크 바닐라…. 이게 무슨 뜻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수수께끼라도 되는 듯한 간결한 문자 메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부터 녀석은 이런식의 의미 모를 문자를 자주 보내오곤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물을 때마다 녀석의 대답은 한결 같기만 했다. 나 뭐 먹을까. 결정장애라 못 고르겠어. 분명 이번에도 그러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얻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답해주자 생각하며 '초코'라는 답장을 보냈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
곧이어 다시 돌아온 녀석의 심플한 답장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꽤나 간결한 문자 메시지 하나로도 녀석의 상태가 짐작이 되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마저 엄청 귀찮구나.
*
수능 전날엔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애매해 간단히 요점만 정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자 생각하며 노트 필기를 폈다. 아마 이 노트 필기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나면 다신 펴볼 일도 없겠지.
"……."
지난 고등학교 생활을 되돌아보면, 난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에 별다른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그렇다 해서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려 다니며 놀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고등학교 생활이 행복했다 할 수 있는 건, 앞에서나 옆에서나, 심지어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는 김종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녀석이 있었어서 그런지, 그동안의 학교 생활이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겉으로 말을 꺼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언젠간 꼭 말을 전해주고 싶다.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내일 몇 시에 만날래.'
'응? 너 수능 안 보잖아.'
'너 데려다 주려고.'
'…….'
'얼른 정해. 몇 시에 만날까.'
'음…, 카톡할게.'
이걸 호의로 받아들여도 될진 모르겠지만, 녀석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툭 내뱉어 괜히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내일 아침 수능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김종인이라…. 안그래도 떨리고 긴장될 내일 아침을 김종인과 함께…. 문제 풀 때 집중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은 되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 아…."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있었다. 어째 수능 전 날인데 공부를 더 안 하는 것 같다.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네.
한숨을 길게 내쉬곤 과외 마지막 날 찬열쌤에게 건네 받았던 프린트물을 펼쳤다. 깨알 같은 작은 글씨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프린트를 살짝 훑으며 형광펜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바로 며칠 전이 마지막 과외수업이었네. … 아, 그럼 김종인은 수시를 합격한 와중에도 그 사실을 아예 꽁꽁 숨긴 채 과외수업을 같이 들었던 거야? 대단한 놈. 제가 그렇게도 질색하는 박찬열을 더이상 보지 않아도 될 기회였는데 왜 굳이 과외수업을 들었을까. 그 정도로 나한테 합격 사실을 숨기고 싶었나. 끔찍이도 싫어하는 야간 자율학습과 과외수업을 참석할 정도로?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건가? 나한테 방해가 될까 봐?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김종인에 대해 마구마구 솟아나는 의문들을 뒤로한 채 형관펜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열린 노란 형광펜에선 달달한 바나나 향이 솔솔 풍겨왔다. 그러다, 그와 동시에 휴대폰 화면이 번쩍- 하며 빛을 밝혔다.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내일이 벌써 디데이네. ○○이는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으니까 분명 좋은 결과 얻을 수 있을 거야.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약간의 긴장은 필요한 거 알지? 수능 그거 지나고나면 별 거 아니야. 컨디션 조절 잘 해서 수능 잘 봐. 쌤이 응원할게.]
"… 와, MMS…."
찬열쌤에게서 온 장문의 응원 메시지였다. 단 몇 문장만으로도 그의 진심이 전해져 오는 것 같으면서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의 메시지를 두세 번 더 읽어보곤 간단히 답장을 입력해나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내일 시험 끝나고 연락 드릴게요!]
*
가만히 앉아 한국지리, 세계지리의 핵심 부분들을 노트에 정리해가며 공부를 하다보니 슬슬 잠이 쏟아져 30분만 자고 일어나자, 했던 게 어느새 한 시간 반이나 지나고나서야 눈이 뜨이고 말았다. 그것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깬 것이었으니, 자칫했다간 다음날까지 계속 잠을 자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깐 날이 밝아 창문을 통해 햇빛이 따스히 들어왔던 탓에 굳이 형광등의 불을 켤 필요가 없었는데, 이젠 불을 켜야 할 듯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문제집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 안도 어두침침해졌으니 말이다.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공부하는 거야?"
"… 잠깐 잠들었어."
"얼굴 보니까 잠깐이 아닌 것 같은데? 많이 졸리지. 오늘만 버티면 되니까 힘내자, 딸."
"… 으으, 그래야지…. 근데 그건 뭐야?"
"아, 이거? 방금 종인이가 너 주라고 갖다준 거야."
"김종인?"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커다란 봉투를 보며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봉투를 건네며 '김종인'이라는 이름을 언급해왔다. 건네받은 봉투 속엔 많은 종류의 간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엔 초코, 딸기, 쿠앤크, 바닐라… 비싸기로 유명한 네 종류의 초콜릿들도 들어있었다. 각각 하나씩, 거기에다 초코맛은 두 개. 불현듯 아까 녀석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네 가지 맛 중에 하나를 고르라던…. 하나 사서 먹기도 부담스러운 가격의 작은 초콜릿인데 이걸 다섯 개나 사다니. 왠지 고마운 감정보단 미안한 감정이 더욱 앞섰다.
"김종인 언제 왔다 갔어?"
"방금. 너 공부한다니까 이것 좀 대신 전해달라 하고 갔어."
방금 왔다 간 거면 지금쯤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많은 걸 챙겨줬는데 간단히 문자 한 통으로 고마움을 표하긴 뭔가 아쉬웠다. 옷장 속에서 두툼한 후드집업을 꺼내 대충 걸치곤 서둘러 방을 나섰다. 컨버스화를 신자니 끈을 묶는 데에 괜한 시간을 빼앗길 것만 같아 대충 슬리퍼를 신은 뒤 현관문을 열었다. 꽤나 쌀쌀해진 날씨에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말이다.
*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은 건지, 아님 그냥 걸음이 빠른 건지, 녀석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다. 전화라도 해서 잠깐 걸음 좀 멈춰 보라고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건 좀 아닌듯 싶어 다시 걸음을 빠르게 놀릴 수밖에 없었다.
"……."
빠르게 걸어 점점 숨이 차오르는 것도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곤 숨을 골랐다. 힘은 들었지만 이미 멀리 와버린 이상 포기를 할 순 없었다. 이렇게 집에서 멀어졌는데 다시 그냥 집으로 돌아가긴 아쉬우니 꼭 김종인을 만나야…
"뭐하냐, 여기서."
"… 뭐야?"
"너야말로 뭐야."
근처 편의점에서 나온 녀석이 귀에 꽂고있던 이어폰 한 쪽을 빼곤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까만 스키니진에 하얀 아디다스 져지를 걸친 녀석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날씨에 왜이리 땀을 흘리냐. 더워?"
"… 너 왜이리 걸음이 빨라."
"나?"
"그래, 너."
"나 따라온 거야?"
"… 손에 그 초코에몽은 뭐야. 네 거?"
"아, 오세훈이 좀 사다달래. 공부하는데 단 게 땡긴다고."
손에 들린 초코에몽을 가볍게 흔들며 녀석이 틱틱대듯 말을 뱉었다. 뒤이어, 먹을래? 라며 꽤나 진지하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어색히 고개를 젓자, 어차피 안 주려고 했어. 라며 얄미운 대답이 따라 붙는다. 하여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놈이다.
"근데 여기까진 왜 왔어."
"아, 그… 고맙다고."
"고마워?"
"응. 맛있는 거 많이 사다줘서 고마워."
"아… 그거 그냥, 집에 굴러다니는 것들 다 담아서 준 거야."
"… 집에 굴러다니는 것을 담아서 준 거든, 밖에 날아다니는 것을 잡아다 준 거든, 어쨌든 고맙다고."
"농담이야."
녀석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분명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여기까지 빠르게 걸어온 건데, 어째 본래의 목적이 상실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라도 장난을 안 걸고 넘어가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녀석이니 이해는 하겠지만… 어쩜 저리 한결 같을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제법 신기할 만도.
"너 얼마 썼어? 그 뭐냐, 비싼 초콜릿도 샀던데. 심지어 다섯 개나."
"네가 초코맛 골라서 그냥 그거 하나만 사려 했는데, 하나만 사긴 좀 아쉬운 것 같아서."
"… 아."
"가격은 비싼데 그게 또 엄청 맛있대."
"… 그렇구나."
"또, 네가 초코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머지 다른 맛도 다 좋아하잖아."
"……."
"… 아씨, 뭐 그렇다고. 그냥 그런 건 줄 알아."
괜히 멋쩍어진 건지, 녀석이 제 뒷목을 쓸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괜히 나까지 민망해지는 것도 같아 작게 헛기침을 하곤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적당히 먹어. 많이 먹으면 배탈난다."
"에이, 그건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어."
"그래야지. 아, 맞다."
"왜?"
"아까 박찬열한테 수능 잘 보라고 문자 왔었어."
"… 너 선생님한테도 수시 합격했다는 거 감출 거야?"
"뭐, 박찬열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 근데 이제 어차피 안 볼 사람 아니야? 과외도 끝났잖아, 아예."
"… 으음."
"넌 또 볼 건가 보네."
"… 그건 아니고. 어, 그래서 답장은? 했어?"
"씹었지."
"… 너 답네."
"근데 모자는 왜 쓰고 있어. 얼굴 잘 안 보이잖아."
갑작스레 쓰고 있던 후드를 부드럽게 벗겨오는 녀석의 손길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행히 김종인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천천히 녀석과 눈을 마주했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김종인이었으니,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려야 했다.
"내일 시험 잘 봐."
"… 아, 그, 그래."
"떨지 말고. 시험 볼 때 내 생각만 해. 그럼 집중 잘 될 거다."
"… 그건 무슨 논리야."
"편하잖아."
… 오히려 그 반대일 텐데. 시험 내내 네 생각만 했다간 난 아마 재수 확정이겠지. 안그래도 떨릴 시험인데 어떻게 네 생각을 해. 설렘이라는 감정까지 추가돼 그에 몇 배로 더 떨릴 게 뻔한데.
"내일 몇 시에 만날까. 카톡 한다면서 안 하고."
"아, 까먹었다. 음…, 최대한 일찍 만나고 싶은데… 괜찮아?"
"너 괜찮으면."
"… 으음, 7시?"
"그래."
"괜찮겠어? 너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나 일찍 잘 일어나."
"… 신뢰성 제로지만 뭐, 그렇다 해줄게."
"… 어쨌든 내일 7시에 만나."
"… 고마워."
"고마우면 내일 시험 끝나고 영화나 한 편 보여주든가."
"아, 그건 뭐 어렵지 않지."
"내일 가서 말 바꾸기만 해 봐."
"안 바꾸거든."
"알았어. 이제 가 봐. 내가 너 너무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에이, 그건 아니고. 음…, 알았어. 가볼게."
"아, 데려다 줄까. 늦었는데."
"어? 아니야. 별로 멀지도 않은데 뭐. 어차피 너 오세훈 집도 들려야 되잖아."
까먹고 있었다는듯 녀석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곤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알았어. 공부 열심히 하고, 일찍 자."
곧이어 녀석의 큼지막한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두어 번 쓸고 지나갔다. 씨익 웃어 시원하게 올라간 입매, 빤히 바라봐오는 짙은 눈빛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같아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황급히 녀석에게서 벗어났다. 이런 가벼운 스킨쉽에도 쉽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다니… 정말 큰일인 듯했다. 집에 가면 과연 공부가 제대로 될까.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 그냥 내일 아침에 나 혼자 가겠다 할까. 시험 볼 때 집중 안 되면 어쩌지. …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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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뭐지요..? 문득 지금까지 쓴 글 목록들을 확인하는데 조회수가 만이 넘었어요.. 으윽....... 감격..... 크흡..... 너무 고맙습니다.. 엉엉엉... 사실 어제 오려 했는데 또 늦어졌네요.. 전 항상 일요일에만 오는 듯해요..☆ 자주 오려 해도 그게 잘.. 항상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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