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창밖을 보던 경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우린 어디가는건데요."
"지금쯤이면 난리통이 되있을만한 곳으로 가야겠지."
"아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요. 거기가면 김민석 만날 수는 있는거에요?"
"지금 이 상황에서 장담할 수 있는거 아무것도 없어 도형사."
"...그럼 어디가는지 그거라도 말해줘요. 아니 알아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던가 뭘하던가하지 이거 너무 빡빡하시네."
"김준면이 굳이 메일을 보낸 이유가 있을테니까 그걸 알아내야지."
"나 참,그럼 아직 위치도 모르고 가는거에요?"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해. 안그래도 도형사 부재도 의심할텐데."
"메일이 뭔데요. 줘봐요."
준면이 보낸 메일에 쓰인 글귀만 보고 내렸던 노트북을 경수가 들여다보았다. 굳이 메일을 보낸거라면 뭔가 전하려던게 있었을테지. 잠시간 메일을 보던
경수가 곧 반신반의하며 입을 열었다. 이건가..
"뭐가."
"아무리 뜯어봐도 뭐가 없는데, 그나마 짜맞출 수 있는건 이거뿐이에요. 글자수, 문장수, 메일의 용량."
"순서대로 이어봐. 뭐가나오지?"
"38-5-1.2 요. 1.2는 뭐야. 아니 쓰벌 이새끼 끝까지 사람 골때리게 하네."
"..그거면 됐어."
"어딘지 알았어요?"
"..그래."
곧 급하게 차를 돌린 크리스로 인해 떨어질뻔한 노트북을 간신히 잡은 경수가 의문을 가득 담아 크리스를 바라봤지만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아, 머리 아파. 남자라면 자고로 몸으로 부딫혀야지 이렇게 머리 굴리는건 딱 질색이라 생각하는 경수였다.
"..시내야. 오빠 말 잘들어."
"네."
"그래 시내 말이 맞아. 나랑 아빠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
"근데..지금 아빠가 많이 위험해. 그래서 오빠가 구해주러 가야해."
"오빠가 가면 아빠가 싫어하지 않을까요?위험한 곳이라면."
"...그래 맞아, 그치만 아빠를 도울 사람이 지금 나밖에 없어. 나쁜....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뭘 도와요?"
"밖에 있는 아저씨들이 오빠를 내보내주지 않을거야. 밖으로 나가려면..도망쳐야해."
"......"
"..오빠가...시내를 데리고...저 밖에 있는 아저씨들을 협박할거야..."
"......"
"절대 시내를 다치게 할건 아니지만...지금으로썬 그방법밖엔 없어.."
"......"
"시내가..꼭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아까 들어올 때 봤던 커다란 문까지 시내를 잡고 가는동안 거리를 벌려 놓을거야. 그리고 그 방어대가 열리면 얼마동안 시내를 데리고 뛰다가 놓아줄거야.
그럼, 다시 저 아저씨들한테로 가서 잘 기다리고 있으면 되...할..수..있겠어?"
"..할..수는 있어요. 그냥,"
"....그냥?"
"또 혼자있을 생각하니까 조금 싫어서.."
"시내야..그건,"
"알아요. 아빠를 구하러 가는거잖아요. 그리고 투정같은거 부릴 생각도 없었어요."
어른스럽게 말하는 시내를 보다 아이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빠져나가 다시 크리스에게로 간다면 그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화를 내는것보다 비교도 안되게 더 무서운건,
아저씨가 죽어갈 때 내가 이곳에서 가만히 넋놓고 있었다는거..그런 기억을 안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것이다. 이미 놓지 못하게 잡은손이다.
나를 지옥에서 구해냈으니 이제는 내차례다. 만일 조금은 먼곳으로 떠날지라도 그길이 혼자가 되게하지는 않겠다.
루한이 곧 걸음을 옮겨 민석에게로 다가갔다. 이런식으로 민석을 다룰줄이야. 집에 들어섰을때, 세훈이란걸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모든일에는 예외가 있다.
아무리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다해도 민석을 마음대로 건든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찰나의 부재가 나를 어떤 생각까지 하게 했는지 알지 못할테지. 루한은
그대로 민석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밧줄을 풀어내고는 입속에 가득찬 천조각을 빼냈다.
내가..또다시 너를 상처입혔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님에도 막지 못했다. 아, 너를 갖기 위한 길은 이렇게 험난하다.
하지만, 이제 다왔다. 민석아.
너에게 처음 흘러든 열다섯에 영원히 머물지 않음에 감사한다.
수없는 시간동안 너를 상처입히며 이길을 걸어온 끝에 이제 나는 완전한 지배자가 되었다.
민석아, 나를 지탱하던 어머니..그리고 그로 인해 저주해 마지 않았던 변백현까지..그래, 모두 내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까지 강하게 키워낸
아버지마저도. 나는 이제 거칠것이 없는 남자다. 너 하나를 품안에 넣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끝까지 넌 모를것이다. 아니, 알게하지 않을것이다.
너에게 있어 난, 잔인한 지배자가 아닌 그저 사랑에 빠져 정신못차리는 한남자이고 싶다.
민석을 품안에 든채 뒤돌아선 루한이 그대로 세훈의 가슴을 차 넘어뜨린 다음 그 가슴을 구둣발로 짓눌렀다. 숨이 막혀 잠시간 호흡이 멈훠있던 세훈이
곧 짓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은 지우지 않은채였다.
"..하..나참..여기..까지 내가..해온 공이 있는데 너무...크윽..하시네."
".건들지 말라고 했어. 무슨일이 있어도."
"...씨발..큭..그럼..뭐...뽀록나서...다..뒤지게..둬?"
"기어오르는 법도 가르쳤나. 박찬열이."
곧 발을 뗀 루한이 거칠게 세훈의 옆구리를 걷어 차올렸다. 여전히 민석을 안아든 채였지만 조그믜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감기에 걸린채 끌려온지라
이미 민석은 루한을 본 직후부터 기절한듯 움직임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루한이 곧 종인에게 뒤를 맡긴채 뒤돌아 방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자리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타오에게 다가간 종인이 그의 밧줄 또한 풀기 시작했다.
"하, 재밌네. 재밌어."
"좋겠다. 이 긍정적인 새끼야."
찬열의 자조섞인 웃음에 세훈이 곧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피가 잔뜩 섞인 침을 내뱉곤 그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또라이같은 니새끼 뒷구멍 빨아주느라 씨발 내가 아주.."
"언제...언제부터지"
"뭘 언제부터야 새끼야. 처음부터지. 나 열다섯때 여기 대가리 들이밀던 날부터."
"..뭐?"
"뭐, 나도 속은건 똑같지. 루한이 후계자인걸 오늘 알았으니까. 그때 호랑이한테서 좆빠지게 도망치다가 넘어져서 딱 죽겠다 싶었는데 어떤 남자가
씨발 호랑이 뒷대가리 잡고 살고싶으면 무조건 알았다고 하라길래 골빠지게 고개 끄덕였지. 그러고 뭐 별거없어."
"......"
"아무도 모르게 소접과 똑같이 훈련받다가 딱 열다섯때 여기로 들어온거지. 루한이 가라니까. 들키면 다시 호랑이 잡아다 아가리 벌려서 들이민다는데
어쩌겠어. 목숨걸고 스파이짓해야지. 미국에서 건너와서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새끼가 보스아들이라는데."
"....."
"그러고보면 진짜 치밀한 새끼야. 안그래? 지금와서 보니까 그러네. 나도 존나 대단하지만 저새끼는 진짜..와-"
"...하..하하..지금까지.."
"그래도 야, 너 배신못하겠다고 차라리 같이 죽겠다는 새끼들도 몇 있더라. 완전 헛살진 않았어 너."
".......너"
"솔직히 지금까지 월강 이렇게 키워준것도 나 아니냐.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어?"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말을 잇는 세훈의 모습에 찬열은 크게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꿈인가 이게. 어쩐지 너무 쉽게 민석을 데려온 세훈이 이상할 법도
했지만 조직 내에서 누구보다 진중하고 자신을 목숨걸고 보필했던 그였기에 의심 한 점 하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소접에게 당해 조직의 세력이 예전과
같지 못하다고 느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판세를 뒤옆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는데...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인가.
아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순간 품안에 있던 총을 꺼내든 찬열이 총을 난사했다. 놀란 세훈이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런 찬열에게 다가가 그의 뒷목을
내려치곤 총을 든 손을 바닥에 짓눌렀다.
"아무튼 금수저 물고 제 아비 뒤이은 새끼가 좆도 쏠줄도 모르면서 나대지마라. 새끼야 총알 아깝다."
찬열의 위로 올라탄 세훈이 고른 함숨을 쉬었다. 아, 그래도 거의 십년을 이새끼밑에서 보스보스거리면서 따랐는데 기분이 영 묘하네 이거. 발버둥치는 찬열의 위에서 세훈은
얕게 한숨 쉬었다.
거진 십년을 끌어온 임무가 이렇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허무한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스파이였다고는 하나 제가 십년을 따라오던 보스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좀 더
강할 수는 없었나 아쉽기도 하고. 마음이 갈피를 못잡겠다. 젠장. 속은 시원하다만.
이젠 자리에서 일어선 타오와 종인이 곧 세훈과 찬열을 뒤로 한채 방을 나서려는 찰나, 문밖에서 총성이 들렸다.
탕-!
놀란 이유는 총성때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처절한 루한의 비명소리....
그것때문이었다.
황급히 밖으로 향하려는 타오를 막은채 종인이 문틈 새로 밖을 살폈다.
크리스였다. 그리고 그옆엔 민석이 평소 친분을 유지했던 루한의 블랙리스트 도경수. 그리고.
"...첸?"
뒷모습마저도 처절한 루한의 앞에는 첸이 서있었다. 한손엔 총을 든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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